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시122:1-3, 마23:37-39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 당시에 스탈린 계였던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의 권력 싸움 끝에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개인숭배 배격운동과 함께 그의 묘까지 파헤쳤다고 합니다. 당시의 얘기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시체를 모스크바에 두기 싫어서 외국으로 보내려고 했답니다. 미국 국립묘지에 스탈린의 시체를 묻게 해달라고 미국에 부탁했습니다. 미국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미국 땅에 묻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묻혀 있는 앵발리드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역시 독재자의 시체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당했습니다. 마지막에 이스라엘의 국립묘지에 묻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뜻밖에 이스라엘은 스탈린의 시체를 묻어주겠다는 회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단 한 가지, 예루살렘은 부활의 확률이 가장 높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때 흐루시초프는 “그만 두겠다”고 하였답니다. 스탈린이 다시 살아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부활의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라 불립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삼대 종교의 성지입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이 끊임없고, 여러 번 침범을 당했으며, 탈취당하고 지배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그들의 성지입니다. 그 곳에는 지금 성전이 있고, 알 아크사 모스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서쪽 성벽은 ‘통곡의 벽’이라고 하여 유대인의 가장 성스러운 성지입니다. 비극을 안고 지나온 수천 년의 고도입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인데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평화시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은 시온의 성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는 갈릴리 중심이었습니다. 말기는 예루살렘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재판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 우신 기록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35에는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합니다. 황폐해져가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누가복음 19:41에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시고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7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기도를 올렸고”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하십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말이 예루살렘을 긍휼히 여기시며 통곡하시며 크게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예레미야 애가를 보는 듯합니다. 애가는 눈물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장송시입니다. 망해가는 나라를 보면서 애통하는 예레미야의 시입니다. 성경은 히스기야가 자신의 병을 위하여 통곡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가 자신의 배신을 회개하며 통곡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애곡은 이런 눈물과는 다른 메시야의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종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선지자와 의인의 흘린 피가 지금 이 성에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애절한 눈물, 사랑을 보면서 사순절의 절기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를 안전하게 모으려 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23:37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합니다. 모으려 해도 흩어지는 안타까운 예루살렘을 보시며 한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모으다’란 말은 헬라어로 ‘에피수나가게인’입니다. 이 말은 ‘에피수나고’에서 나온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사입니다. 이 말은 의도적으로 단단히 모으려 하시는 모습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한 자녀도 그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의 주민인 하나님의 사람이 품에서 나가고, 죽고, 쓰러지는 것을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말에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과 같은 뜻을 가진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一視同仁”(일시동인)이란 말은 “부모님이 많은 자식들을 똑같이 다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犢之情’(지독지정)이란 말은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버려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끼를 부르고 모으는 것이 그분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단장의 애환’이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이 말의 고사가 있습니다. 어떤 어부가 양자강 변에 있는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새끼를 배에 태우고 강을 내려가는데 원숭이 어미가 새끼를 돌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강을 따라 내려옵니다. 어부는 이 새끼를 돌려주지 않았는데 한참 동안 어미가 따라오다가 지쳐 죽어버렸습니다. 어부는 어미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장이 끊어져 토막토막이 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물의 어미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장이 끊어질 정도가 아닙니다. 온 몸을 다 주고 피를 다 쏟으시는 것이 그 분의 사랑입니다.
날개 아래서 보호받으면 따뜻한 체온의 보호를 받으며 적의 공격에서 방어됩니다.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있으면 이 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습니다. 최고의 보호이며 최고의 안전함입니다. 이사야 31:5에는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이렇게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입니다.
일본 교토교회를 담임하시다 돌아가신 전영복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은 일본 목사님이지만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고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 목사님이셨습니다. 이 분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중학교 다닐 때에 동네 아이들과 흔히 아이들이 하는 장난을 많이 했답니다. 동네 또래들과 닭서리를 해서 닭을 잡아먹곤 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이 한 마리씩 잡아먹으니 재미가 없으니 아예 닭장에 불을 질러 태워 몽땅 잡아먹자고 하였습니다. 닭장에 불을 질러 까맣게 타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들을 잡아먹는데 목사님이 어느 새까맣게 탄 어미를 먹으려고 날개 죽지를 벌리자 그 안에서 노란 병아리들이 우루루 기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린 마음이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나쁜 일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미 닭의 보호본능입니다.
목자의 심정은 한 마리도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양을 모아 한 우리에 다 들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양들이 골고루 꼴을 풍족하게 먹는 것입니다. 한 마리라도 병들고 약한 양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함께 안전하게 모아놓은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주심같이 안아서 옮겨놓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8:4에는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의 주민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 하십니다. 새들은 모여 잠을 잘 때에 서로 몸을 바짝 밀착시킨 후에 갑작스레 공격하는 적들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머리를 바깥쪽에 두고 잠을 잡니다. 반면, 뜸부기는 여럿이 잠자는 것 같지만 머리를 안쪽으로 두고 잠자는 유일한 새입니다. 오랜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날 수 없는 뜸부기들에게 중앙을 향해 무리지어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날개를 푸드덕거려서 적을 위협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적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늘 깨어서 지켜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40:11은 “그는 목자 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안으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덮어주다’란 동사는 덮거나 가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 단어는 바로 지붕(roof)이나 피난처(shelter)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붕이며 피난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의 가사입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지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적인 보호동작입니다. 이 보호동작이 늘 우리에게 향해 있습니다.
아이에게 벌을 주겠다고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알려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발 우리 아이를 때리지 마세요. 우리 아이는 매우 예민해요. 대신 옆의 아이를 때리면 충분히 알아듣고 겁을 먹을 겁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듯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잠언 4:6에는 말합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늘 품으려 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안히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도성이 황폐하게 될 것을 안타까워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23:38에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얼마 후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차라리 앞일을 모르면 좋은데 알면 괴롭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괴롭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64:10에는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이런 수모와 고통을 회복하게 하셨는데 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슬퍼하시고 계십니다.
시편 122편은 ‘예루살렘 송가’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시편 122:6에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얼마나 사랑받는 도시입니까? 그런데 이 도시가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통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신 것입니다.
서울은 세계 10대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도쿄, 뉴욕, 상파울루, 멕시코시티, 상하이, 뭄바이(인도), 로스앤젤레스, 베이징, 콜카타 그리고 서울이 10대 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울만큼 서비스업이 많은 도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어디든지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서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보세요. 술집 없는 데가 있습니까? 가는 곳마다 러브호텔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은 아주 기분 나쁩니다. ‘러브’,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고상한 말인데 거기에 ‘러브’란 말을 붙입니까? 단란주점도 있습니다. 주점이 무슨 단란합니까? 주점이 단란하면 어떻게 됩니까? 원래 단란이란 가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단란한 가정이지 단란한 주점이 말이 됩니까? 노래방도 많습니다. 노래 부르는 데야 어때요? 그런데 거기에도 도우미가 있다고 하네요. 노래방 도우미는 음악선생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우리 서울의 모습입니다.
서울은 1분25초마다 범죄가 발생합니다. 서울의 강력범죄 발생률은 뉴욕의 1.5배입니다. 서울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하루 평균 1.4명이고, 화재발생건수는 15건이고, 범죄발생건수는 1,049건입니다. 시간당 43.7건의 범죄가 발생합니다. 119출동은 하루에 841건입니다. 사고도 많습니다.
또 최근에는 성범죄도 많습니다. 초등학생 성추행 살인사건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서울의 성추행, 성폭행 발생은 어느 도시 보다 높습니다. 서울에 집창촌을 없앤 후에 성범죄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집창촌을 다시 부활해야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됩니다. 국가가 교회가 잘 되게 도와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행해 보시며 “서울아, 서울아”,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눈물의 부르짖음을 듣습니까? 니느웨 같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성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서울이, 대한민국이 한국의 모든 도시들이 황폐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원로 랍비와 교황이 로마에서 만났습니다. 교황의 책상 위에 전화기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전화입니까?” “주님과의 직통 전화입니다. 한번 해보시지요”. 랍비가 전화를 끝나고 나니 요금이 10만 리라, 우리 돈으로 6만원이 나왔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교황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도 전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직통 전화입니다. 한번 해 보시지요”. 교황이 전화를 끝내고 나서 요금을 보니 1세겔, 우리나라 돈으로 400원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싸죠?” 교황이 물어보았습니다.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시내전화잖아요”. 우리 한국, 서울, 우리 교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이 한탄하시는 도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랑하시고 사랑하시는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도시가 되어, 하나님의 평화의 도시, 기쁨의 도시, 은혜의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귀한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