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기 소개
이창보(李昌保) 동기는 72무역과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강제징용 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동포의 2세로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한국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 대학에서 일 년간 한국어를 익힌 뒤 72학번으로 고대 무역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이며 고려대학교 학생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대학을 다닌 친구였다.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휴학이나 낙오없이 제 때에 졸업장을 받았다. 함께 입학한 여러 명의 재일동포 출신 중에 제 때에 졸업장을 받은 학생이 그를 제외 하고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학과 친구들이 하나 둘 군입대를 할 때 ROTC를 선택한 나는 4년을 줄곧 다니며 그와 자주 대화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해 조금은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76년에 졸업을 하며 그는 현대 양행에 입사를 하여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고 나는 소위 임관과 함께 군 생활을 시작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몇 년간 회사 생활을 하며 익힌 경험으로 동경에 베이스를 두고 한국을 오가며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창보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졸업 후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이미 그는 딸 셋을 둔 가장 이였으며 나 역시 딸 둘을 둔 아빠였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그와 해외 근무를 자주해야 했던 나의 직장 때문에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서로가 바쁘게 살아 가던 시절 이였기에 서울이나 동경에서 어쩌다 만나게 되면 술잔을 나누며 밤 늦도록 회포를 풀곤 하였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기고 소식이 두절된 것이 이 십 년 가까이 된 듯하다.
90년대 초 일본 버블 경제가 붕괴되고 후반기에는 한국도 IMF 경제 위기에 빠지며 개인 사업을 하던 그에게도 사업에 어려움 있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기는 하였으나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다른 친구들도 궁금해 할 뿐이다. 어떠한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저 만나지는 못 하드라도 가족들과 건강 하게나 살고 있기를 소망하며 혹시 일본을 오가는 동기가 있으면 일본에서 이창보 동기의 근황을 알아 봐주길 부탁드리고 싶다.
** 동기 이야기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끝내고 여름방학이 시작 될 때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보가 말한다. “나 이번에 일본에 가면 죽을지도 몰라” 무슨 말이냐 했더니 “이번에 가서 결혼을 할건데 여자 집에서 반대가 심해서 나를 만나면 죽일지도 몰라” “죽지 않고 살아오면 올 때 마누라를 데리고 올거야” 하며 끝에 부탁의 말을 남긴다. 결혼 하는 거 너만 알고 있고 나중에 마누라와 함께 오면 다른 친구들한테는 누나라고 할 테니 그렇게 알라고. 긴가 민가 했는데 여름 방학이 끝나자 정말 창보는 한 여자(부인)를 동반하고 학교로 돌아 왔다. 그가 72 동기 중 결혼 1호가 아닐까 싶다.
오사카 한국인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데 고등학교 학생회장을 지낸 이창보 동기는 학교에서 그곳 유치원 선생님과 연애를 하였다. 이 동기가 대학을 가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 오자 유치원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시집 보내려 하는 자기 집을 나와 이 동기 집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고 한다. 재일 거류민단 사회에서 아무개 하면 다 알만한 집안의 따님 이였던 유치원 선생님은 이 동기보다 나이가 꽤 많이 연상 이였으니 요즈음 연예인 같으면 모를까 1970년대 보수적인 여자 집안에서 결혼은 절대 승낙 불가한 분위기였다.
사랑을 위해선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현해탄을 건넜던 이 동기가 무사히 부인을 동반하고 서울로 돌아 왔을 때 친구들은 모두 누나가 밥 해주려고 함께 온 줄로 알았다. 서교동 이층 방 하숙집에 신접살림을 차린 신혼부부 집에 친구들은 수시로 몰려가 밤 늦도록 술 취해 떠들어 대곤 했다. 창보 누나가 술이고 밥이고 친절하게 챙겨 주니 부담없이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일본말을 모르고 창보 부인은 한국말을 몰랐다. 창보가 일본말로 한 마디 시키면 싫은 기색 한번 없이 정성껏 챙겨 주던 누나였다.
나중에 창보가 “사실은 마누라야” 하고 자수를 하자 친구들은 순간 멘붕에 빠졌고 어떤 친구는 충격으로 입에 있던 음식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몰랐다 해도 어째든 그간 친구 부인에게 알게 모르게 지은 결례나 무례하게 군 죄가 컷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부인한테 두고두고 사과하고 미안해 했다. 허나 그 많은 해프닝도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돌아 보니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결혼 이듬해 첫 딸이 태어나자 가장으로써 가족을 부양 하랴 학생으로써 학업을 좇아 가랴 바쁘게 살아야 했다. 그는 방학이 되면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방학내 일본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여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오사카에서 불고기집 한식당을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으나 학비나 생활비를 대 주진 않는다. 창보 말로는 일본식 교육 방식이라고 했다. 학비와 생활비가 모자를 경우 엄마가 부족분은 빌려 준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채무 채권의 관계로 계산한다.
사무라이 집안 이라는 일본인 엄마한테서 창보는 어릴 때부터 일본 전통적인 맏아들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예로 초등학교 때 엄마가 돈을 얼마 주면서 한 달 동안 집에 오지 말고 밖에서 살다 오라고 하며 쫓아 낸 적이 있다고 했다. 며칠 간은 돈이 있어 버텼으나 돈이 떨어지고 나서는 거지 생활을 했다고 하며 자기 정말 죽을 뻔 했다고 진지하게 얘기 한다. “아 정말 엄마도 보고 싶고 동생도 보고 싶더라..” 한 달을 채운 어린 꼬마는 엄마가 반갑게 맞아 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엄마를 부르며 집에 들어 갔는데 주방에서 일을 하던 엄마는 고개도 안 돌리고 마치 잠깐 나가 놀다 들어온 애한테 얘기하듯 “응 왔어? 식탁에 밥 차려 놨어.” 하는게 전부 였다고 한다. 자기 남동생한테는 안 그랬다고 덧붙여 얘기하며..
언젠가는 엄마가 방 안에 촛불 하나 켜놓고 움직이지 말고 촛불만 처다 보라고 시켜 고생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맏)아들에 대한 한국 엄마의 교육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한국에 (맏)아들 교육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일본식에는 맏아들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과 엄마의 살가운 정이 없다. 아들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국 엄마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도 없다 (속 마음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런 교육 탓인지 창보는 가족과 바다 건너 멀리 외국에 떨어져 있어도 절대 집이나 엄마를 그리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에 집중하며 철저히 독립적인 삶을 산다. 일본 엄마가 바라는 아들의 모습인지 모르겠다.
창보는 딸만 셋을 낳았다. 언젠가 서울에 출장 와서 저녁을 먹던 중 한 마디 던진다. “엄마가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고 야단인데 마누라가 나이가 많아서 말이야…” 사무라이 시대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강했던 일본 엄마의 압력이 거셌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서울에 출장을 자주 가니 집 식구 몰래 서울에서 아들 하나 낳아 오면 책임지고 키워 줄 테니 아들을 꼭 하나 나으라고 압력을 넣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창보 또한 아들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프라이버시 사항 생략) 결국 딸 셋에 만족하고 애들 교육에 전념하였다.
부모 입장에서 행복감을 느낄 때는 자식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자식의 성공을 보는 순간 임은 한국이나 일본이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친구들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그는 큰 애가 대학 입시에서 아카몬(赤門)에 합격 했다고 매우 행복해 하며 자랑을 했다. 아카몬(赤門)은 도쿄대학 정문이 붉은 색으로 되어 있기에 도쿄 대학을 상징적으로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낯설고 힘들었던 자신의 대학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자식이 대학을 간다니.
창보 아버님 고향은 제주도라 했다. 한번은 제주도에 찾아가 문중 사람들도 만나고 조상 묘지 재정비 하는데 성금도 내고 왔다며 제주도 일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아는 이 하나 없는 아버지 고향 사람들에게 그는 성공한 재일동포로 보였을 것이다. 제주도를 다녀온 이야기 끝에 그는 불쑥 말을 던진다. “야 우리 약속하나 하자” “무슨 약속?” “나는 딸만 셋 이구 너는 딸만 둘 이자나” 그래서 하니 “그러니까 나중에 니가 먼저 죽으면 내가 니 묘지 풀을 깍아 주께 내가 먼저 죽으면 니가 내 묘지 풀을 좀 깍아 주라” 어이 없는 제안에 그러마 하긴 했는데 나이 70 넘어 가끔 친구가 생각나면 혼자 묻곤 한다. 그 약속 아직도 유효 한가 하고. 아, 약속이고 뭐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할게 아닌가.. 창보!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이야기를 마치며
72학번이 입학하던 1972년은 시월 유신과 남북 7.4공동성명이 있던 해다. 비상계엄령, 유신헌법, 위수령, 긴급조치 등의 용어가 익숙했던 격변의 시기였다. 국제적으로는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회담을 하는가 하면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서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테러로 민간인이 학살 당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한 격동의 시절이기도 했다. 시절은 수상하고 대학은 잦은 휴강 휴교로 어떻게 대학 시절을 보냈는지 기억도 없다. 세월이 갈수록 대학 시절은 흐릿해지고 친구와의 추억은 또렷해지니 이도 노화 현상이 틀림없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의 지음(知音)까지는 아니지만 어수선 하던 젊은 시절 마음이 통했던 친구 이 창보. 안타깝게 소식이 끊긴지 오래다. 무슨 이유가 있어 본인이 연락을 끊은 것 같다. 20세 봄 향기 따라 떠났던 인생 여정이 50 성상 세월 속에 만산 홍엽 추색의 70대에 이르니 친구 생각이 궁금함을 넘어 걱정이 앞 선다. 아마도 일본에 살면서 우리말 쓸 기회가 줄어들어 대학시절 열심히 배웠던 한국어를 많이 잃어 버렸을 것이다. 한국 생활 초창기에 버스를 타며 차장에게 “이 버스 종로 가십니까?”하고 물었던 수준으로 돌아 갔을지도 모른다.
찾아온 인연 따라 열심히 살다 보니 그의 한국어 수준이 50년 전으로 되돌아 갔거나 아니면 다 잊어 버렸다 해도 그가 고대 72동기회 일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반 세기 넘게 계속된 72동기의 인연은 이제 운명이 아니고 숙명이다. 연이나 그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땅에 살며 모교 고려대학교에서의 많은 추억을 모두 가슴에 묻은채 외로이 칠 십대를 보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면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가 앞으로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힘 빠지기 전에 소식도 주고 받고 가끔 얼굴도 보며 살았으면 좋겠다. 부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 (因地而倒者 因地而起)” 라고 한 대혜종고 선사의 말씀을 화두 삼아 용기와 지혜를 잃지 말고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길 간절히 바라며 횡설수설(橫說竪說) 글을 마친다. (끝)
*
*
저녁 나절 마음이 울적하여 向晩意不適
수레를 몰아 언덕에 올라 보니 驅車登古原
석양은 너무나 아름다운데 夕陽無限好
다만 황혼이 가깝구나 只是近黃昏
(登 樂 遊 原/ 李 商 隱)
첫댓글 대준동기!
오랫만입니다.
위에 적힌 글들이 소설같네요! 창보동기의 이야기가 애잔하기도 하고 재미납니다.
옛날 이야기가 좋은것 보니 나이 먹었나 봅니다. 아니 나이 먹었지요! 그것도 많이 ㅋ
부디 서로 연락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오랫만이군요. 요즘도 바쁘게 살지요?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친구와 연락이 안되드라도 건강 무탈하게나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친구 말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빌어야겠습니다.
소식 감사하고 늘 젊게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람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의 풍속이 우리와 그렇게나 다른가?
정말 놀라운 이야기 들려주어서 고맙네.
20년이라~
세월의 길이는 사안에 따라 느낌도 다르고 짧기도 길기도 하더군.
나는 97년도에 중국에 지역전문가 과정으로
1년을 보냈었는데
귀국후에도
그때 중국어 학습을 도와준 선생님과 자주 통화를 했었다.
물론 그 분은 한국어를
못했고 오직 중국어로만
통화를 했었다.
1년쯤 흘렀을까.
밤에 통화를 하는데
등에서 식은 땀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가
잘 안들리기 시작하고
내가하는 말도 어눌해지면서 더듬거리게 되었다.
IMF 직후라 회사는 비상경영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미 중국어와 동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던게다.
외국어 치매가 갑자기 찾아온 듯 했다.
그 이후로 통화하기가 부담스러워 지면서 겁이났다.
선생님에게 그런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다.
당시 중국과의 국제전화요금은 엄청 비쌌다.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줄 수는 없는 통화요금이었다.
그렇게 멀어졌다.
언어도 골프와 같아서 자주 쓰지 않으면 쪼루가 나고 뒷땅을 치는 것임을 새삼느꼈다.
한국어라도 잊지말아야지. 책도보고 친구들 만나 말도 많이 해야겠다.
일본이 가깝지만 정말 먼 나라이지. 나이 오십 넘어서야 우리는 가깝다는 일본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 학교때 창보가 묻더군 왜 한국에선 미국으로만 유학을 가고 일본으로는 안가느냐고. 그때는 질문이 우숩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들어 일본에 대해 조금 알게 되니 그게 우수운 질문이 아니였다는 생각이 들더구만. 창보를 만나면 다시 얘기 해볼 참일세.
댓글 고맙구, 학교 때부터 전공한 중국 전문가 아니였나? 언제 중국 이야기 좀 해 주시게. 늘 건강하고.
안경 쓴 사각모가 이창보 동기, 오른쪽으로 첫딸과 부인이 보이네요.
김정오 동기가 귀한 사진을 보냈습니다.
경제과에도 재일교포 여학생이 한 분 있었는데 1학년 마치고 귀국해 다시는 볼 수없었습니다 아마 언어 때문에 또는 수상한 시절로 학업을 이어 갈수 없다고 판단해 포기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걸 보면 창보동기는 대단하네요 여기를 통해 대준님 안부를 여쭙니다 편히 잘 계시죠?
경제과에는 여학생이 있었군요. 모르긴 해도 언어도 문제지만 학교생활 자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옆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친구가 필요한데 여학생 경우 쉽지 않았을 것 같내요. 창보 경우 본인도 열심히 했지만 친구들이 도와 주려고 노력들도 많이 했어요. 특히 시험때는 친구들이 창보 하숙집에서 함께 시험준비도 하고 시험장에서는 옆자리에 앉아 도와 주기도 하는등 많이 도와 주었는데 남자니까 가능 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간 여학생 이야기 참 안타깝네요. 입학할 때는 큰 꿈이 있었을텐데..
요즈음도 퉁소, 판소리같은 풍류공부 계속 정진하고 있나요? 언제 공연 계획 있으면 알려 주세요. 시간되면 한량무같은 춤도 추어 보시고. 응원합니다.
상당히 특이한 친구로군요.
일반적인 학교 친구라면 잊혀질 수도 있는데 잊혀지기 힘든 친구같네요.
니이들수록 옛 생각이 나는건 나만 아닌것 같소.
조만간 만나서 창보동기 이야기 2탄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