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보다는 시 詩
가슴은 연꽃이 피듯이 깨어난다. 연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자신을 채우고 정원을 채운다. 하지만 꽃의 성질은 낮에 피고 밤에는 오므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지도에 그리고 묘사할 수 있을까? 물론 싹이 올라오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봉오리가 나오고, 꽃이 핀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말해주는 부분보다 빠뜨리는 부분이 더 많다. 거기에는 진흙 속에서 뿌리가 영양분을 빨아올리고, 잎이 햇살을 마시고, 벌이 와서 꽃가루를 묻히고, 주변에 함께 피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다른 연꽃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거기에는 밤 사이에 일어나는 성장과 아직 햇살을 기억해내지 못한 수면 아래의 봉오리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선형으로 펼쳐지는 이 신비는 너무나도 유기적이므로, 많은 전통들이 그 속내를 묘사하기 위해서 시를 동원한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의미를 품어내는 시의 힘은 신비하다.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산문적으로 묘사하는 법이 거의 없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은 비유와 이미지, 혹은 유명한 심우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눈 위에 서 있는 백학이나 한밤중의 검은 까마귀의 이미지는 듣는 자의 귀가 열려 있기만 하다면 수백 페이지의 추상적인 설명보다도 더 정확하게 꼬집어서 깨달음의 마음을 전달해줄 수 있다.
붓다는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첫마디가 시였다고 한다.
이 슬픔의 집을 지은 자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리라......
인도의 신비주의자인 까비르는 진흙과도 같은 이 몸뚱이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마술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 질그릇 속에 골짜기와 소나무 산들이,
그리고 골짜기와 소나무 산을 지은 이가 있네!
일곱 대양이 모두 그 안에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네.
금을 시험하는 산酸이 있고,
보석을 감정하는 이가 있네.
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현絃에서
울려나오는 음악과,
모든 물의 원천이 있네.
그대 진실을 원한다면 내 알려주지
듣게, 친구여, 내 사랑하는 '거룩한 분'이 이 속에 계시다네.
선가에서는 시적인 공안의 언어로써 깨달음을 일궈낸다.
수행자가 심오한 시구나 공안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것을 참구參究하면 마침내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된다.
ㅡ 잭 콘필드 지음 / 이균형 옮김
'깨달음 이후 빨랫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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