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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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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어느 해거름/ 진이정
은하수 추천 0 조회 10 14.07.26 1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 유고시집『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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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엔 어쩌는지 모르지만 6,70년대식 미팅이나 맞선에서는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냐 식의 유치한 질의와 응답이 대화의 물꼬를 터는 수단으로 자주 오갔다. 그런데 나는 한 여학생으로부터 ‘하루 중에 어떤 시간이 가장 좋으냐?’는 질문을 기습적으로 받은 적이 있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며 맛대가리 없고 건조하기 짝이 없는 식충이 같은 대꾸를 해버리고 말았는데, '아차 이게 아닌데' 퍼뜩 알아챘을 땐 이미 그녀에게 ‘폭탄’이 된 뒤였다. 물론 당시 '멀쩡한' 나의 '용모'덕택으로 만회의 기회를 제공받긴 했으나 무슨 똥배짱이었는지 내가 걷어차 버렸던 것 같다.   

 

 지금 다시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해준다면 영롱한 이슬이 잎사귀에 맺힌 싱그러운 아침,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커피시간이라든가, 뫼르소에게 살인을 충동질했던 그 이글거리는 태양의 한낮 또는 오렌지 빛으로 하늘이 물드는 해거름, KBS1FM '세상의 모든 음악‘의 시그널음악을 들을 때... 식으로 꾸며 답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솔직히 지금도 하루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정색하고 감동할 핑계거리 없이 데면데면하게 하루씩 소각하며 살아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이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이라고 노래했듯 매 순간을 열심히 진하게 살아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이리라. 구상 시인도 ‘신비의 샘인 하루’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을 뜨면서부터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의 매 시간이 신비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고 나와 시간은 늘 무관하게 겉돌기만 했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의 경구를 가슴에 담아두지 못했으며, 매 순간에 감사하지도 않았다.

 

 시간은 신의 다른 얼굴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 체험 하는 시간은 신비 그 자체다. ‘멍한, 저녁 무렵’ 무념의 시간, 시인은 가로 늦게야 극점을 찍은 후 탈탈 털어낸 해탈의 욕망을 드러낸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은’ 순수의 맨 얼굴로 ‘어눌한 해거름’을 멍히 바라본다. 미확인 고통인 죽음을 앞둔 탓이었을까. 무구한 그 시선에는 우울, 상실감, 초연, 환각 따위도 느껴진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시로 감싸 안는 예술행위라니 이 무슨 ‘헤르메스’인가. 시간의 신은 우리에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찌 살아야 온당한지 낯설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매번 던지고 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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