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강동의 역사 인물>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선생에 대한 고찰
2008년 9월 15일 강동문인회에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우봉(牛峯) 이극배(李克培) 묘소를 참배하고 추모하는 시와 수필 시극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이승희(李昇熙) 동고종회 도유사가 감동하여 동고 이준경선생을 강동의 역사 인물로 재조명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009년 봄. 종로구 수송동 19번지에 있는 동고종회 사무실로 필자를 초청하여 사진자료와 『東皐遺稿』 등을 제공하고 원조 청진동 해장국까지 대접하여 주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강동문인회에서 매년 역사 인물 한 분씩 선정하여 특집을 발행하는데 2005년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 2008년 우봉(牛峯) 이극배(李克培)선생, 2013년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선생, 2014년 호간(胡簡) 이손(李蓀)선생은 모두 광주이씨(廣州李氏)들이다. 문인회에서는 다른 성씨(姓氏)도 많은데 형평성 있게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2021년 가을. 강동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좋은동네』에 동고 이준경 선생을 강동의 역사 인물로 재조명하게 되어 약속을 13년 만에 지킬 수 있었다. 9월 9일 지루한 가을장마가 끝났다. 즐거운 마음으로 손수 운전을 하여 양수리 구정승골을 찾아갔다.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35-1노송이 우거진 양지바른 언덕에 이준경 묘소(경기도 문화재 제96호)가 있었다.
구정승골은 아홉 분의 정승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청계산(658m) 줄기가 타원을 그리며 휘어 내려오다가 직진하면 두물머리에 이른다. 포근히 감싸는 안쪽 마을이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와 부용리이다. 양서면사무소 쪽으로 긴 골짜기를 구정곡(九政谷)․구정골․구정벼랑․구정베루(벼루) 등으로도 부르는 구정승골이다.
조선조 5백년 동안에 “정승이 하나 반 있다”는 말이 있다. 황희 정승이 한 사람이오 반 사람은 동고 정승을 칭한다. 이준경 선생은 도학(道學)의 흐름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었다. 선생은 도학의 시대를 담당할 인재를 뽑기 위한 책제(策題)에서 도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경건히 묘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승시절에 구경도 못 하셨을 Blue Label Johnnie
Walker 석 잔을 헌주하고 『좋은동네』 초고(草稿)를 조용히 낭독하였다.
1. 이준경(李浚慶) 1499(연산군 5)~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의 아들로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세좌(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그해 말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 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 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유성룡 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東皐遺稿』『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 정경부인 풍산김씨 지묘(貞敬夫人豐山金氏之墓)
유명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혼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증시충정 이공지묘(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贈諡李公之墓)
묘비명(墓碑銘) 선생도덕공렬소견국승(先生道德功㤠昭見國乘)
선생의 도덕과 공렬은 국승에 밝게 드러나 있다.
3. 신도비(神道碑)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李公神道碑銘 幷序)
『좋은동네』 지면(紙面) 관계로 장문의 본문은 생략하고 말미의 비명(碑銘)만을 발췌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황천이 우리나라 돌보아 주시어 두 봉황이 탄생하였네
금고(金鼓)가 창창 울리니 우의(羽儀)가 넉넉하도다
하늘이 홍수 내려 경계하는데 공은 능히 제세(濟世)하는 배가 되었네
나라 안 정쟁(政爭)에 말려들어서 군소배의 시달림도 많이 받았고
몸조심 잘 하여도 미움 받았고 공격을 받았지만 꿈적 안했지
유막(油幕)에 점잖게 앉아있지만 쇠망치로 턱을 치듯 하였고
두 번씩 축(祝) 풍류가 끊기었나니 위태하여 두렵기 그지없었네
용문(龍文)을 이미 들어 올리었으니 천강(天杠)을 부호(扶護)하였고
알장을 참발(斬拔)하고서 흑백(黑白)을 공변(公辨)하였도다
용방(龍逄)과 비간(比干)을 조상(弔喪)하고 유배된 인사를 불러들이니
의를 즐기기를 탐하듯 하여 덕은 나날이 높아지셨다
덕은 가슴에 가득하여서 탁 트여서 하나도 숨김없으니
저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 나더러 도리어 어둡다 한다
불화(不和)는 점점 더 커져만 가서 모순(矛盾)처럼 서로 대치되었고
솔개가 난새의 고운 자태를 꾸짖어 힘껏 공격을 하였네
이는 단지 항아리로 강해(江海)를 헤아림과 같은 일이라.
중류(中流)에서 배를 잃고 밤중인데 등불마저 꺼지는구나
양산(楊山)은 높다랗고 한수(漢水)는 출렁이네
새 무덤 높다란데 검회(劍會)는 둘이로다
옥(玉)같은 돌에 새겨 우뚝하게 세워두고
남기신 그 자취 밝히어서 뒷날에 어리석은 이 깨우치고자 하노라.
의정부 좌의정 노수신(盧守愼) 찬(撰)
4. 동고 이준경선생의 행적 개요(東皐李浚慶先生行蹟槪要)
이준경 선생의 자(字)는 원길(原吉) 호(號)는 동고(東皐)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관(貫)은 광주(廣州)이다. 선생은 연산(燕山) 5년(1499) 음(陰) 12월 27일 축시(丑時) 한성 연화방(蓮花坊) 연지(당시는 동부리)에서 출생하시고 선조(宣祖) 5년(1572) 음(陰) 7월 7일 서거(逝去)하시니 향년(享年) 74세이시다. 중종신묘(中宗辛卯) 153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두루 거친 다음 명종신해(明宗辛亥) 1551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다음해 함경도 지방(咸鏡道地方)에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咸鏡道巡邊使)가 되시어 그들을 초무(招撫:불러 타이르고 위로 평정)하셨다.
명종 10년(1555)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왜구(倭寇)가 침입(侵入)하매 전라도 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로 출정(出征)하여 이를 격퇴(擊退)하고 돌아오시어 우찬성(右贊成) 겸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제수(提授) 받으시었다. 당시 선생께서는 왜구들이 반드시 재침(再侵)할 것이니 양병(養兵)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한 바 신진사류(新進士流)들은 태평시대에 국고(國庫)를 들여 양병할 필요가 없다는 반박(反駁)을 받았으나 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으니 선생의 예언(豫言)이 들어맞았다. 명종 13년(1558) 우의정(右議政), 명종 15년(1560) 좌의정(左議政), 명종 20년(1565)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시었다.
명종이 승하(昇遐)한 1567년 교지(敎旨)를 받들어 선조(宣祖)를 영입(迎入)하여 원상(院相)으로서 국사(國事)를 총리(總理)하시었다. 이때 선생은 선조대왕(宣祖大王)을 보필(輔弼)하여 피화사류(被禍士流)의 신원(伸冤)과 등용(登用) 및 윤원형(尹元衡)으로 인하여 잘못된 서정(庶政)을 쇄신(刷新)하는데 노력하시었다. 선조대왕 4년(1571)에 영의정을 사임(辭任)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시었으며 임종(臨終)시 조정(朝廷)에 곧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차(遺箚)를 올려 삼사(三司)와 율곡(栗谷) 등의 논란(論難)이 있었으나 뒤에 동서붕당(東西朋黨)이 일어나 선생의 예언이 또한 적중하였다. 선생은 정사(政事)에 임해서는 공사(公私)가 분명하였고 학문을 깊이 하여 퇴폐(頹廢)한 풍속을 순화 시켰으며 문무를 겸비하여 조선조(朝鮮朝) 제일의 명상(名相)으로 꼽힌다. 문집으로는 동고유고(東皐遺稿) 14권이 전한다.
돌아가신 그해 9월 19일에 양근군 용진면 치서 고요동(高要洞)에 안장(安葬)하였다가 선조대왕 13년 경오년(1580) 봄 명점동 건향원(明岾洞乾向原) 현재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정경부인 풍산김씨(貞敬夫人豐山金氏)의 묘소로 천장(遷葬)하였다. 유명(遺命)에 따라 묘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倭賊)이 선생의 묘를 파헤치려고 양수리 방면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신도비를 보자 곧 이를 부수어 버리고 묘소를 찾으려 하였으나 말굽이 떨러지지 않고 말이 뒤돌아섬으로 부득이 후퇴하였다. 그 후 세간에서 그 동네를 말굽띠기 동네라고 일컬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30년 뒤인 선조대왕 35년(1602)에 청백리(淸白吏)에 피선(被選)되시고 충정(忠正)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 받으시었으며 1610년에는 퇴계(退溪)와 함께 선조대왕의 묘정(廟廷)에 종향(從享)되시었다. 인조(仁祖) 25년(1647)에는 사림(士林)들의 영입(營立)으로 충북 괴산군 청안면(현재 청주시 분평동) 구계서원(龜溪書院)이 건립되어 주벽(主壁)으로 모셨다.
5. 어제(御製)
정묘조(正廟朝) 일득록(日得錄): 조선조 정조의 어록
고(考) 충정(忠正) 이동고(李東皐)는 혹 사업(事業)이 문장(文章)보다 낫다고 하나, 문장 또한 사업에 뒤지지 않노라. 혼후(渾厚)하고 소통하여 문구는 다듬어서 쓰는 자들이 미치지 못할 것이오 또 자품(資稟)이 조촐하고 고고하며 마음가짐은 너그럽고 공평하며, 한 몸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었으나 목소리나 얼굴색이 변함이 없이 국세(局勢)를 태산의 반석과 같은 안정된 기반위에 올려놓았도다. 항상 사람을 조화시키는데 힘을 쏟아 이 때문에 비록 비방은 받았으나 그 문장과 사업은 한 시대를 빛내었노라.
6. 친필(親筆)
위 글은 『명가필보』에서 발췌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책에 많이 나오는 동고상공의 유명한 글이다. 출처와 유래에 대하여 전해 오기를 선조(宣祖)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동고상공과의 대화시(對話時)에 비유로 이 글을 지었다고 하며, 나이 어린 선조를 가리켜 생부인 덕흥대원군이 걱정을 하니, 동고상공께서 앞일을 훤히 내다보고 걱정할 것 없다 하여 명구의 글을 내놓았다고 한다. 덕흥대원군은 첨중추공(세걸)의 외손녀 사위이므로 동고상공과는 내외종반 처남매부(內外從班妻男妹夫)간이 되는데, 그 해석에 관하여는 “군자(君子)가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얻었으니 응당 일이 성취하리라.”고 풀이 하고 또 혹자는 “군주가 문무의 신하를 얻었으니 응당 나랏일을 성취하리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 명구대로 임란 때에 선조는 한음 이덕형, 오성 이항복, 오리 이원익, 서애 유성룡, 충무 이순신 등 명신을 얻어서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글자대로 해석해본다면 “오두락을 얻었으니 전원을 둘러보는 아취도 가질 것이다.”라 할 것이다.
7. 早春偶吟(조춘우음)
新候晴和麗日明(신후청화여일명)
小窓閑坐動詩情(소창한좌동시정)
雪消階面萱芽早(설소계면훤아조)
風靜園林鳥哢輕(풍정원림조롱경)
已解寒威驚節換(이해한위경절환)
還欣生意與春萌(환흔생의여춘맹)
吟餘轉覺心神泰(음여전각심신태)
莫把煩機枉自縈(막파번기왕자영)
새봄이 돌아와 날씨 매우 화창도 한데
창가에 한가히 앉았으니 시상이 저절로 나온다
눈 녹은 뜰에는 원추리 싹이 돋아나고
바람 잔 동산 숲에는 새들이 노래한다
이미 추위 풀리면서 경칩 절후가 바뀌고
만물이 소생하니 생명의 뜻 깊어진다
시를 읊은 후에 마음 편안함을 느끼니
번거로운 기틀로 스스로를 얽매이지 말지라.
첫댓글 동고 이준경 선생 연구논문을 읽고 많은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님의 해박한 지식과 수준 높은 글에
감명을 받고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