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것, 그 차이의 미학 / 방승호 ―강인한의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쥐덫」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산민 한승헌(1934~2022) 변호사
소년이 집 떠난 뒤 잘 듣는 귀 한 쌍의 마이산만 남았다.
먼발치에서 내다보는 운일암 반일암 바람 속에 다람쥐 끌어안고, 산은 소년의 등이 안 보일 때까지 그림자로 배웅해 주었다.
숲속 솔잎마다 맺힌 이슬 영롱하고 말간 인간의 사랑이 소년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자랑스럽겐 못 살아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한다.
군홧발로 짓이겨진 모진 30년 캄캄한 진흙 속 하루도 진실의 길을 가르쳐 준 스승 가람과 석정의 절절한 눈빛 잊은 적 없었다.
「분지糞地」필화사건부터 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사건,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사건, 사건, 사건들…… 말도 아닌 우격다짐과 철벽에 맞서 꺾이지 않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 (수임료 대신 국립호텔에 초대되기도 하였네, 두 번이나)
청년과 장년의 파란과 만장을 마주하며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굽이치는 강물처럼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소리치며 북한산까지 찾아오는 푸른 별빛. 《문학청춘》 2023년 여름호
이렇게 가정해보자. 시인은 시를 쓰지만, 그것은 결코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먼저 시는 사회의 부조리를 언어화하지만, 이룰 구현하는 방식은 제도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는 이유로, 언어는 온전하게 상징계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시인이 쓰고 있는 시가 서정이라면 더 그렇다. 서정은 동일성의 원리로 시 텍스트를 다시 권력 안에 포획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시는 동일성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질서에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시를 포기할 셈인가? 아니라면 막연하게 시와 더 가까워지겠다는 생각은 내려놓도록 하자. 오히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시적인 것’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체의 자리에서 내려와 타자의 시각으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는 일을 연습해보자. 이러한 과정에서 당신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그리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고?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하는 시인들의 언어를 함께 따라가는 것도 방법이다. 이들은 분명 ‘시적인 것’에 당신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쥐덫
덫에 걸렸어요. 하늘이 납작 내려앉아서 숨이 막혀요. 이 광명한 대낮에 멀쩡한 소리 말라고, 웃기지 말라고 모두들 깔깔거려요. 정말이어요, 덫에 걸렸어요. 그렇게 엉성한 덫에 누가 속을 거냐며 법도 모르고 밥도 모르는 이들은 까맣게 웃고 있어요. 옛날의 그물이 내려오고 있어요. 더 크고 튼튼한 그물이 빛나는 강철의 눈을 반짝이면서 웃고 있어요. 당신들 머리 위에 당신들 눈 위에 강철그물이 내려요. 멀쩡한 대낮에 헛소리 말라고 깔깔거리는 당신들 코앞에 상한 생선 토막이 걸려 있어요. 당신들은 믿으려 하지 않지만 소리 없이 내려치는 바람 소리, 소리 없이 덜미를 후려치는 강철의 바람소리 들리지 않나요. 들리지 않나요.
《문학청춘》 2023년 여름호
화자에게 보이는 것은 당신 위에 강철 그물이 내리고 있는 현상이다. 당신 앞에 상한 생선 토막이 걸려 있지만 당신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당신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당신들을 속박하려는 “강철의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푸코가 말한 제도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감옥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시인에게는 보이는 것이 당신에게는 감각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뼈아픈 패러독스(paradox)지만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기 전까지 이 패러독스는 세상에 밝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인의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인은 당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 시인은 당신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므로. 그러므로 시인은 사실 말하는 사람이기 전에 먼저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의 암묵적인 질서를 꿰뚫고, 그림자 내부에서 들리는 타자들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눈과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인한 시인은 이러한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그는 살아있는 존재의 죽음을 감지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람과 석정의 절절한 눈빛 잊은 적 없”는 사람이기에. 시인은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어코 기억하는 사람, 그리고 판옵티콘의 비가시성을 가시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다. (《문학청춘》 2023년 가을호)
방승호 (문학평론가) ------------------------- 1986년 대전 출생. 2022년 계간 《시작》(평론) 신인상 등단.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전 중도일보 정치부 기자. 대표 평론으로 「지옥에서 남겨진 시체 —허수경 유고시론」 등.
※필자가 지면 관계상 생략한 시(「너무 늦은 정의는…」)와 부분 인용된 시(「쥐덫」)의 원문을 온전히 이 글에 드러냈습니다. _카페지기 지(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