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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절세기녀(絶世奇女) 1 색마(色魔) 전환의 다음 상대자는 소주(蘇州)의 제일고수인 비룡신검(飛龍神劍) 강일립(姜一立)이었다. 강일립은 신검이라는 별호가 무색하게 십이 초만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전환의 무공이 소문보다 훨씬 고강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전환이 강호의 일류고수 두 사람을 간단하게 격파하자 누구도 감히 그에게 도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둥! 둥! 북이 네 번 울릴 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없자 그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첫 번째로 결선에 진출하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데 막 다섯 번째 북 소리가 울려 퍼지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한 사람의 모습이 불쑥 비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허공에서 뚝 떨어진 듯 너무도 돌연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중인들 중 누구도 그가 무슨 신법(身法)을 써서 비무대 위로 올라왔는지 알지 못했다. 중인들은 모두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장내에 나타난 인영을 바라다보았다. 그는 전신에 짙은 흑의를 걸친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약간 마른 체구에 키가 훌쭉하니 컸는데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과 전신에서 풍기는 인상이 아주 강인해 보였다. 군살 하나 없는 얼굴에는 싸늘하고 냉랭한 기운만이 감돌아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냉혹한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강하게 일게 했다. 특이한 것은 검고 기다란 채찍을 왼쪽 팔에 칭칭 감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은 채찍은 햇빛을 받아 마치 독사의 몸통처럼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 흑의인을 보자 사마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이상한데......?" 조자건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요?" 사마결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저 자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 모르겠군." "그가 누구인데 그러시오?" 사마결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바로 광동 응가의......." 그들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전환과 그 흑의인은 이미 비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전환이었다. 전환은 장검을 양손으로 움켜쥔 특이한 자세로 흑의인의 상체를 거세게 공격해 갔다. 전환의 공세는 빠르고 변화무쌍하기보다는 강맹(强猛)한 맛이 있었다. 특히 거의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맹렬하게 몰아쳐 오기 때문에 정면으로 맞섰다가는 몇 초 되지 않아 그 공세에 담겨진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쏴아아악! 마치 파도가 치는 듯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흑의인의 전후사방이 온통 전환의 검영(劍影)으로 뒤덮여졌다. 흑의인의 비쩍 마른 몸은 금시라도 그 검영에 휩쓸려 갈가리 찢겨질 것만 같았다. 하나 흑의인은 마치 허깨비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그 막강한 검세 속을 헤집고 다녔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물 흐르듯 지나가 버렸다. 그 동안에도 흑의인은 단 한차례도 반격하지 않고 전환의 폭풍노도와 같은 공세를 피해 내고 있었다. 전환의 짙은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그의 개산검법은 뒤로 갈수록 위력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단순히 검풍만으로도 상대를 질식시킬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검법이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의 몸놀림이 느려지기는커녕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개산검법은 그 위력이 강맹한 만큼 공력의 소모 또한 극심한 것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전환은 제풀에 지쳐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수중의 장검을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파파파파......! 사방으로 뿜어 나가는 경기가 갑자기 거세졌다. 그의 공격은 무질서하여 마치 정신병자가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것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개산검법 중에서 가장 무서운 귀양인비(歸陽人飛)라는 초식이었다. 삽시간에 주위는 온통 검풍과 경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버렸다. 누가 보기에도 흑의인의 전신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피하기만 한 채 전혀 반격을 하지 않았던 흑의인이 왼손을 떨쳐 내었다. 쾌액! 찰나, 무언가 시커먼 섬광이 가공할 속도로 검풍의 소용돌이를 뚫고 폭사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크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미친 듯 휘몰아치던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영문을 몰라 앞을 다투어 장내를 바라보았다. "아......!" "음...... 저럴 수가......."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놀랍게도 어느 사이엔지 흑의인의 왼쪽 팔에 감겨 있던 검은 채찍이 일자(一字)로 꼿꼿이 선 채 전환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부드럽고 물렁물렁한 채찍이 한 자루 창(槍)처럼 가슴을 관통한 것도 놀랍지만 대체 무슨 수로 그토록 막강하던 검풍 속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환은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간 검은 채찍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채찍은 마치 독사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 이 초식의 이름이 뭐냐......?" 전환은 이를 악물며 흑의인을 바라보고 물었다. 입을 열 때마다 시커먼 핏물이 흘러내렸으나 전환의 시선은 흑의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흑의인은 여전히 냉혹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그의 비정하리 만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열리며 냉기(冷氣)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묵룡탈심(墨龍奪心)." 전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 묵룡탈심...... 정말 멋진 초식이......." 그는 채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의 몸은 자신이 흘린 피바다 속에 잠긴 채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는 이번 무림대회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하나 중인들은 흑의인의 음성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오히려 커다란 탄성을 질러 냈다. "아! 저 자는 광동 응가의 가주인 구룡편 응천성이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장내는 온통 벼락 같은 환호성으로 뒤덮여 버렸다. "와아...... 과연 우내십대기문병기 중 하나답다!" "와...... 최고다......!" 누구도 전환의 죽음에 개의치 않고 열렬한 환성을 질러 댔다. 패자의 죽음과 승자의 환희가 교차되는 곳, 그곳이 바로 비정(非情)한 무림세계였다. 사마결은 군웅들의 열띤 환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무대의 중앙에 목상(木像)처럼 우뚝 서 있는 응천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대로 독한 솜씨로군. 냉정한 성격에 깨끗한 솜씨. 과연 비범한 인물이로군." 조자건 또한 응천성의 무공에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채찍은 원래 길이가 길고 탄력이 있어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공격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빠르고 강력한 위력은 보여 줄 수가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응천성은 채찍을 마치 쾌검(快劍)과 같이 사용하여 절정고수를 간단하게 격파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그것은 일반 상궤(常軌)에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응천성의 채찍을 휘두르는 솜씨가 일반 범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전혀 차원이 다른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조금 전의 그 빠름에 채찍 특유의 영활하고 민첩한 변화마저 갖추게 된다면 천하의 누구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자건은 이것은 한번 생각해 볼 숙제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응천성의 채찍을 만나게 된다면 그 번개처럼 빠르고 독사처럼 민활한 채찍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채찍은 길이가 길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려면 근접해서 싸우는 게 가장 좋은데 접근하기조차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연구해 볼 가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언제 응천성 같은 채찍의 달인(達人)과 겨루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조자건은 그 예상이 머지않아 자신에게 현실로 닥쳐오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절정의 검객인 전환을 단 일격에 격살한 응천성에게 감히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응천성은 북이 다섯 번 울릴 때까지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아 이번 무림대회에서 최초로 결선에 진출하는 인물이 되었다. * * * 야심한 밤이었다. 하늘에는 월광(月光)이 교교한 달빛을 뿌리고 있었고, 주위는 이따금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 들려 올 뿐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돌연 야공(夜空)을 뚫고 한 마리 비조(飛鳥)처럼 내달리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인영의 신법은 어찌나 빨랐는지 달이 환히 밝은 밤인데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영이 달려가는 곳에서 멀지 않은 나무 위에서 갑자기 낮은 속삭임이 들려 왔다. "화형(花兄)! 여기요, 여기." 섬전처럼 달려가던 인영의 몸이 허공에서 뚝 꺾이며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허깨비처럼 날아갔다. 그야말로 귀신이 무색할 놀라운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눈 깜박할 새 인영은 소리가 들려 온 나무 아래 당도했다. 그와 함께 나무 위에서 대여섯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인영의 앞으로 한 떼의 인물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중앙에는 화려한 청삼을 입고 얼굴이 유달리 하얀 청년이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조금 멍청해 보이는 화의청년과 체구가 건장한 몇몇 인물들이 나란히 있었다. 나무 밑으로 날아온 인영은 중앙에 선 청삼청년을 보자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곽형! 과연 약속대로 시간에 맞춰 왔구려." 청삼청년은 하토궁의 소궁주인 곽표요였다. 그 옆에 있는 인물은 정각과 하토궁의 칠룡(七龍) 중 세 사람이었다. 하토궁에는 칠룡 외에도 삼로(三老)와 사객(四客), 오성(五星), 육웅(六雄) 등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강호에 내노라 하는 절정고수들이었다. 곽표요는 나타난 인물이 소리 높여 웃을 줄은 몰랐는지라 안색이 변해 급히 그를 제지했다. "화형. 소리를 죽이시오. 자칫하다간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르칠 우려가 있소." 나타난 인물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흐흐...... 여긴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시오. 벌써 내가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이오. 이곳에서 일 리 이내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으니 나를 믿으시오." 곽표요는 여전히 조심스런 표정이었다. "화형을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오. 이번 일이 잘되면 다행이지만 만약 실패하게 되면 그 후환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막중하오. 그러니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할 거요." "걱정도 팔자구려. 이 일은 본 공자(公子)가 한 달 동안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절대 실패할 리가 없소."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내뱉는 인물은 전신에 분홍빛 자삼(紫衫)을 걸친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이였다. 그의 얼굴과 허우대는 준수한 미남자라는 표현에 모자람이 없었으나 아쉽게도 눈가에 한 줄기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음악(淫惡)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가 어디에 거처를 정할지 예측한 후 그 부근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조사했소. 신주홍안은 이번에 네 명의 시비와 한 명의 노파를 대동하고 왔는데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신주홍안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호화단의 인물들이오." 자삼청년은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일단 그들만 유인해 내면 곽형과 내 실력으로 그녀의 호위들을 물리치고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소. 그리고 일단 그녀에게 접근한다면...... 흐흐......." 자삼청년의 입가에 자신에 가득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제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지닌 기녀(奇女)라 해도 내 손을 벗어날 수가 없소." 곽표요는 자삼청년이 큰소리를 칠수록 오히려 인상이 냉랭해졌다. 자삼청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자. 그럼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봅시다. 우선 곽형의 세 분 수하들께서는 그 물건을 준비해 오셨소?" 하토칠룡(蝦土七龍)의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걸 꺼내 보시오." 자삼청년이 자신의 수하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자 곽표요의 눈이 다시 살짝 찌푸려졌다. 하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토칠룡에게 그의 말대로 하라는 눈짓을 했다. 하토칠룡 중 우두머리인 노룡(怒龍) 위일해(威逸海)가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곱 매듭으로 된 길쭉한 대나무로 만든 원통이었다. 자삼청년은 그 대나무통을 받아서 만지작거리며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이 칠교화통(七巧火筒)은 구하기 힘들 텐데 용케도 입수했구려." 그는 대나무통을 다시 위일해에게 건네주며 그에게 당부를 했다. "당신은 이걸 가지고 있다가 내가 신호를 하면 사용하시오. 절대 착오가 있어선 안되오." 위일해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당한 하토궁의 고수인 자기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이곳에 오기 전 곽표요의 당부가 있었는지 억지로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삼청년의 시선은 다시 위일해의 옆에 있는 하토칠룡의 다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 두 사람은 각기 환룡(幻龍) 하태청(河太靑)과 살룡(煞龍) 양침(楊沈)이라는 자들이었다. "두 분은 호화단(護花團)의 고수들이 쫓아오면 가급적 그들을 멀리 유인하시오. 절대 그들과 싸워선 안되며 위급한 상황이 닥쳐도 피하기만 해야 하오." 하태청과 양침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했다. 하나 자삼청년은 이를 본 척도 않고 다시 곽표요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곽형은 나하고 같이 가서 나를 조금 도와주기만 하면 되오." 곽표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갑시다." 자삼청년이 중인들을 둘러보며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이제까지 말없이 곽표요의 옆에 서 있던 정각이 쭈뼛하여 앞으로 나섰다. "저...... 나는 뭘 하지요?" 자삼청년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귀하는 누구요?" 정각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정각이란 사람인데......." 자삼청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 당신이 바로 정공자이시군. 귀하는 곽형 옆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되오." "그...... 그럼 나는 특별히 해야 될 일이 없는 거요?" 자삼청년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있소. 귀하가 할 일은 따로 있으니 얌전히 있다가 내가 지시하면 그때 움직이면 되는 거요." 정각은 자기도 할 일이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말만 하시오. 내가 멋지게 해치울 테니." 자삼청년은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물론 네 놈은 꼭 필요하지. 일이 잘 진행된다면 그들이 범인을 찾느라고 난리일 텐데 그때 네 놈처럼 완벽한 희생자가 또 어디 있겠느냐?' 곽표요도 그때 마침 자삼청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합시다." 자삼청년은 먼저 몸을 움직여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곽표요를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도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곧 그들의 모습은 짙은 야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그들이 서 있던 나무 위에서 두 명의 인물이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조자건과 사마결이었다. "정말 못된 놈들이군. 그래도 당당한 오행신궁의 후계자들이 기껏 여자를 납치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사마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조형의 말을 처음 듣고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한심하구려. 더구나 그런 질 나쁜 놈하고 어울려 못된 흉계를 꾸미다니......." 그들은 지금까지 곽표요 일행이 숨어 있던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러 있었다. 곽표요는 설마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자삼청년 또한 주위만 열심히 살펴보았지 곽표요의 머리 위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조자건은 사마결을 돌아보며 물었다. "질 나쁜 놈이라니 누굴 두고 하는 소리요?" 사마결은 쓰게 웃었다. "누군 누구겠소? 그 자색 장삼을 입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 화가(花家) 놈이지." "그가 누구요?" "그 놈은 낙양번공자(洛陽藩公子) 화접의(花蝶意)란 놈인데 천하에 둘도 없는 색마(色魔)요. 그저 얼굴만 좀 반반하고 치마만 둘렀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 욕심을 취하고 마는 아주 악질적인 놈이오." 사마결의 입에서는 온갖 욕이란 욕은 모두 튀어나왔다. "그 놈은 보기엔 저래 뵈도 나이는 거의 사십에 육박한다오. 그런데 사악한 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을 익혀서 여인의 음기(陰氣)를 갈취했기 때문에 저렇게 젊어 보이는 거요. 그것만 해도 죽일 짓인데 게다가 각종 미혼약(迷魂藥)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결혼한 여자건 처녀건 가리지 않고 마구 능욕해서 지금까지 그놈에게 당한 여인만도 수백 명을 헤아릴 거요. 개중에는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여인들도 상당하다고 하오." 사마결은 살심(殺心)이 끓어오르는지 음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 놈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다녔지만 좀처럼 꼬리를 나타내지 않았는데 오늘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저 놈도 운(運)이 다한 모양이오." 그는 조자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갑시다. 그 놈이 더 이상 못된 짓을 못하도록 이번 기회에 아주 요절을 내버리고 말겠소." 그는 반강제적으로 조자건을 데리고 화접의가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2 단주(團主) 금릉의 종산 서쪽 기슭으로 가면 한 채의 작고 아담한 장원(莊園)이 나타난다. 그 장원은 세심장(洗心莊)이라고 했는데 세심장의 주인은 강호에 뜻을 잃고 오래 전에 은거한 인물이라고 했다. 세심장은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주변 경치가 빼어나고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삼경(三更)무렵. 난데없이 예리한 호각 소리가 어둠을 뚫고 천공에 메아리쳤다. 삐익! 삑─! 동시에 어디선가 여러 개의 희끗한 인영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세심장 근처로 다가왔다. "서라!" 하나 그 인영들이 세심장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날카로운 폭갈이 터지며 세심장의 구석구석에서 십여 개의 인영이 그들 앞으로 폭사해 나왔다. 처음에 나타났던 사람들은 움찔 놀라는 것 같더니 그 중 하나가 세심장을 향해 오른손을 불쑥 쳐들었다. 쐐액! 섬광이 번뜩인 순간 무언가 시퍼런 불꽃 같은 것이 그의 소매에서 뻗어 나와 세심장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세심장 한구석이 화염에 휩싸였다. 주위가 환해지며 세심장 안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불이다!" 불이 난 곳에서 우왕좌왕하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묵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불을 끄고 놈들을 쫓아라!" 우왕좌왕하던 그림자들이 그 말에 안정을 찾은 듯 몇몇은 불을 끄러 달려가고 나머지는 처음 나타났던 인영들을 향해 벌떼처럼 몰려갔다. 하나 그때는 이미 처음 나타났던 인영들은 오십여 장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휘휙! 휙! 옷자락 스치는 음향이 연신 터져 나오며 어둠 속에서 십여 개의 그림자가 도망치는 인영들의 뒤를 맹렬한 속도로 추격해 갔다. 그들의 경공술은 실로 놀라워서 강호무림에서도 내노라 하는 고수들임이 분명했다. 하나 도망치는 인영들의 신법도 만만치 않아 좀처럼 그들에게 따라잡힐 것 같지 않았다. 순식간에 쫓고 쫓기는 두 무리의 인영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심장의 뒤쪽 후원. 그곳은 앞에서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불이 난 곳에서 멀리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움직이는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아 밖의 소란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았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돌연 세 개의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각기 자삼과 청삼, 백삼을 입은 세 인영들은 머리에 검은 두건(頭巾)을 뒤집어쓰고 있어 용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중 자삼을 입은 복면인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흐흐...... 과연 호화단의 그 밥통들은 모두 앞에만 신경을 쓰고 있군. 이제 잠시 후면 그 놈들은 까무러치도록 놀랄 거요." 그 음성은 강호무림에서 색마로 악명이 높은 낙양번공자 화접의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옆의 두 인물은 곽표요와 정각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청삼을 입고 복면을 한 곽표요는 마음이 조급한지 화접의를 재촉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갑시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 놈들이 다시 돌아오려면 최소한 일각은 걸릴 거요." 화접의도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신중한 동작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재빠른 몸놀림으로 어둠 속을 전진했다. 스스슥! 한데 그들이 막 후원의 돌담으로 접근하는 순간, 몇 개의 인영이 번개같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네 명의 아리따운 미소녀들과 한 명의 늙은 노파였다. 미소녀들은 등뒤에 장검을 메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미모가 뛰어나고 재지가 번뜩여 보였다. 노파는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눈처럼 흰 백발인데 쭈글쭈글한 손에는 용두괴장(龍頭拐杖)을 들고 있었다. 노파의 주름진 얼굴 한가운데 박힌 두 눈에서는 뼛골이 시릴 듯한 냉랭한 한기(寒氣)가 줄줄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 들어와?" 노파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것이었다. 곽표요는 그들을 둘러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접의에게 소곤거렸다. "저 계집들은 신수궁의 사연(四燕)이고 저 노파는 냉면신모(冷面神姆)요. 특히 저 할망구는 무공이 고강하고 성격이 지랄 같아서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냉면신모의 눈에서 뿜어 나오는 신광(神光)이 더욱 짙어지며 그를 노려보는 눈길이 매서워졌다. "네 놈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노신(老身)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거리는 거냐?" 냉면신모는 신수궁에서도 아주 배분이 높았다. 그녀는 원래 신수궁의 궁주인 신수무영후(神水無影后) 수선랑(水仙娘)의 유모였는데 강호무림에 자주 모습을 나타낸 적은 없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가공할 무공과 인정사정 보지 않는 냉정한 손속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곽표요는 신수궁과 같은 하토궁의 소궁주이므로 냉면신모가 그의 모습을 한두 번쯤은 보았을 텐데 마침 곽표요가 복면을 뒤집어써서 그녀는 미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곽표요는 그래도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여 슬쩍 화접의의 뒤로 몸을 숨겼다. 화접의는 입가에 느물느물한 미소를 떠올리며 냉면신모를 바라보았다. "흐흐...... 할망구. 그런 건 알 거 없고 우리가 보고 싶은 건 할망구의 주름살투성이 얼굴이 아니니 순순히 말할 때 비키시지." 냉면신모가 언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보았겠는가? 그녀는 귀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노했다. "뭐......뭐라고? 이 찢어 죽일 놈이......." 그녀는 너무나 노화가 치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나 화접의는 더욱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했다. "할망구가 입이 거칠군. 그렇다면 본공자가 그 거친 입을 다물게 해주지." 냉면신모는 더 이상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수중에 들고 있던 용두괴장으로 힘껏 땅을 내리 찍었다. "이놈! 그래 어디 노신의 입을 다물게 해봐라!" 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녀의 용두괴장이 거의 반이나 땅 속으로 푹 들어갔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자 화접의는 내심 가슴이 섬뜩해졌다. '정말 내공(內功) 하나는 끝내 주는 할망구로군....... 그러나 강호의 일이 공력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흐흐.......' 화접의는 입가에 음소(陰笑)를 흘리며 오른손의 중지와 검지를 슬쩍 비벼 댔다. 그의 동작은 아주 은밀했고 또 주위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중인들 중 아무도 그의 행동을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화접의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할망구, 본공자가 어떻게 할망구의 입을 다물게 하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잘 보라고!" 냉면신모는 두 눈에 짙은 살광(殺光)을 뿜어내며 말없이 화접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 버르장머리없는 놈을 단번에 박살 내기로 작정한 듯 용두괴장을 움켜쥔 손에 노파답지 않은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일단 손을 쓰기만 하면 살인적인 공세가 펼쳐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데 화접의는 덤빌 생각은커녕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돌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쓰러져라!" 그러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금시라도 화접의를 찢어 죽일 듯 기세 등등하던 냉면신모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앗?" "이...... 이게 어찌된 일이지......?" 한쪽에 서 있던 네 명의 미소녀들은 너무도 돌연한 일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화접의는 그녀들을 돌아보며 빙글거리고 웃고 있다가 다시 소리쳤다. "흐흐...... 너희들도 쓰러져라!" 괴이무쌍하게도 그의 호통이 끝나자 네 명의 미소녀들 또한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네 명의 미소녀들은 물론이고 냉면신모는 강호무림에서 내노라 하는 절정고수였는데 그의 호통 한번에 모두 바닥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정각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나 곽표요는 사정을 짐작한 듯 화접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화형의 하독(下毒)하는 솜씨는 비범하구려. 이건 이름이 뭐요?" 화접의는 득의의 웃음을 날렸다. "흐흐...... 곽형은 역시 눈치가 빠르구려. 이번에 내가 사용한 것은 백화정분(百花精粉)이란 것인데 남자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지만 여인들이 마시게 되면 한 시진 동안은 체내의 음기가 솟구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소." 곽표요는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이놈이 강호제일의 색마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헛소리는 아니었군.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 놈에게 당할지도 모르겠구나.' 화접의는 쓰러진 냉면신모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몸을 발로 툭툭 찼다. "할망구! 큰소리만 뻥뻥 치더니 꼴 좋게 됐군. 본공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이제 알겠지?" 냉면신모는 정신은 멀쩡했으나 움직이기는커녕 입도 열 수가 없어 화접의가 자신을 발로 차며 조롱하는 것을 보고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녀는 너무도 화가 치밀어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화접의는 화가 솟구쳐 돌아 버릴 지경인 그녀의 몸을 넘어서 후원으로 들어갔다. 곽표요와 정각도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세심장의 후원은 아주 정갈하면서도 고아(高雅)한 분위기가 나서 그곳에 사는 사람의 풍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화접의 등 세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후원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때 화접의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빛을 빛내며 짤막하게 소리쳤다. "저곳이다!" 곽표요와 정각은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후원의 우측에 위치한 아담한 누각이었다. 누각은 모두 이층이었는데 일층은 칠흑같이 컴컴한 반면 이층의 한쪽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사이로 단정히 앉아 있는 여인의 그림자가 언뜻 비치고 있었다. "신주홍안이다......." 곽표요 등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드디어 말로만 듣던 천하제일미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흥분에 몸을 떨며 누각으로 다가갔다. 특히 곽표요와 정각은 오궁집회 때 그녀를 언뜻 보기는 했으나 면사에 가려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기대되는 심정이었다. 한데 그들이 누각으로 거의 다가갔을 때였다. 문득 그들은 누각의 컴컴한 일층 입구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흑의를 입고 칠흑같이 어두운 일층의 한쪽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안력이 예리한 화접의와 곽표요도 누각에 가까이 갈 때까지는 그가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는 체구가 우람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었다. 흑의중년인은 두 손을 팔짱낀 채 오연(傲然)히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이 지척으로 다가왔건만 그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아니면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아예 모르는지 그들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허공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은 무척 고독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화접의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이곳에 신주홍안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라 조금 당황했다. 그는 슬쩍 곽표요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자가 누구인지 아시오?" 곽표요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한번 본 일이 있소. 저 자는 호화단주(護花團主)요." "호화단주? 저 자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건 잘 모르오. 아무튼 저 자는 일 년 전에 신주홍안에게 반해서 호화단주가 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이름이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없소." 화접의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눈빛을 빛내며 그 자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독술(毒術)로 충분히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상대의 정체를 모른다 한들 그가 두려워할 리는 없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 자의 태도였다. 분명 화접의 등이 나타난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는 허공을 올려다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화접의는 그 자의 일 장 앞으로 다가간 후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귀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길을 비켜 줄 수 있겠소?" 비록 어조는 공손했으나 그때 화접의는 깍지 낀 양손을 이용해서 미혼산(迷魂散)을 발출해 냈다. 흑의중년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화접의의 눈초리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한데 그때 갑자기 석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흑의중년인이 오른손을 쑥 내밀어 화접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아...... 그 순간의 가공함이란......! 화접의는 아직까지 인간의 손길이 이토록 빠르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린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그의 목은 흑의중년인의 커다란 손아귀에 바짝 쥐어져 있었다. "끄윽!" 화접의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하며 그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흑의중년인은 너무도 간단하게 그의 목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고 싶으면 아무 곳에나 가서 칼을 깨물면 될 텐데 왜 내 손에 죽으려고 하지?" 그의 음성은 아주 나직했으나 화접의의 귀에는 천둥치는 소리처럼 우렁차게 들렸다. 화접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으나 그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하던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케...... 케엑! 과...... 곽형...... 나좀......." 화접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곽표요에게 도움을 청했다. 곽표요는 머뭇거리지 않고 양손을 벼락같이 휘둘러 흑의중년인의 옆구리를 공격해 왔다. 그의 일격은 비단 신속할 뿐 아니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방비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흑의중년인은 여전히 오른손으로 화접의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왼손을 슬쩍 휘둘렀다. 꽝!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곽표요의 몸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크윽!" 곽표요는 자신의 양손이 흑의인의 왼손과 닿는 순간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해 냈다. 그의 양쪽 손목은 아예 탈골(脫骨)됐는지 밑으로 축 처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곽표요는 안색이 핼쑥해져서 감히 더 이상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제서야 흑의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마치 횃불처럼 이글거리는 안광(眼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눈빛과 마주치자 곽표요와 화접의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흑의중년인은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화접의의 복면을 벗겼다. 화접의의 유난히 창백하면서도 간사한 얼굴이 월광 아래 드러났다. "네 놈은 음탕한 짓만 일삼고 다닌다는 화가 놈이로구나." 흑의중년인은 그의 얼굴을 알아본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화접의의 얼굴에는 공포에 가득 찬 표정이 떠올랐다. "대...... 대협......, 하...... 한번만...... 살려......." "그 말은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한테나 해라." 흑의중년인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하며 왼손으로 화접의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가격했다. 쾅! 비명도 없었다. 화접의는 머리통이 산산이 부서진 채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흑의중년인이 손을 놓자 머리통이 박살난 화접의의 시체는 한동안 경련을 일으키며 서 있다가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자 흑의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곽표요와 정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흑의중년인이 둘러보니 그들은 어느새 십여 장 밖을 죽어라 달려가고 있었다. 약삭빠른 곽표요가 흑의중년인이 화접의를 죽이는 순간에 정각을 데리고 냅다 줄행랑을 친 것이다. 흑의중년인의 무표정한 얼굴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등뒤로 가져갔다. 그의 등뒤에는 기이한 모양의 병기가 십자(十字)로 교차되어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극(戟) 같았는데 특이하게도 하나는 빨갛고 하나는 파랬다. 빨갛고 파란 두 개의 극은 여타 극보다 훨씬 짧아서 얼핏 보기에는 마치 작은 손도끼를 연상케 했다. 흑의중년인의 손은 그 중 파란 극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들을 내버려두세요." 이어 그가 그것을 뽑으려는 순간, 갑자기 이층 누각에서 영롱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3 재회(再會) 그 음성은 참으로 특이했다. 그 음성은 꿀처럼 달콤한 것 같기도 했고, 차갑게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또 어찌 들으면 그저 흘러가는 바람처럼 공허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음성을 한번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울렁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 음성을 듣자 흑의중년인은 손을 딱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음성이 들려 온 이층 누각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영롱한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나는 이미 그 자들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굳이 당신이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어요." 흑의중년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시선으로 이층 누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에 담겨 있는 빛은 참으로 복잡했다. 그것에는 뜨거운 갈망과 애원, 고통, 절망, 좌절, 희망, 분노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런 복잡한 시선으로 이층 누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거렸다. 그는 아무 말없이 갑자기 등뒤로 오른손을 가져갔다. 파앗! 그가 손을 휘두르는 동작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돌연 그의 등뒤에서 새파란 섬광이 폭사해 나왔다. 그 섬광은 가공할 속도로 누각에서 십여 장 떨어진 커다란 나무를 향해 쏘아져 갔다. 쾅! 섬광에 부딪치자 나무는 그대로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튀겼다. 놀랍게도 어른 두 사람이 간신히 안을 만큼 굵은 나무가 산산이 부서지고 만 것이다. 순간 나무 위에서 두 개의 희끗한 인영이 허공을 날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인영들이 내려섬과 동시에 나무를 박살 내었던 푸른 섬광이 허공을 회전하며 흑의중년인에게로 날아갔다. 흑의중년인은 오른손을 내밀어 섬광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이제 보니 그것은 섬광이 아니라 푸른 색의 극이었다. 그 극이 너무도 빨리 움직여 마치 섬광처럼 보였던 것이다. 흑의중년인은 그 청극(靑戟)을 움켜쥔 채로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두 인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의를 입은 못생긴 사나이와 나무막대를 들고 있는 훤칠한 키의 백의청년이었다. 못생긴 사나이가 갑자기 그에게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당신은 혹시...... 하후형(何候兄)이 아니오?" 흑의중년인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후태세(何候太歲)요. 당신은 사마결이구려." "그렇소. 이 년 전에 당신과 술을 같이했던 사마결이오." 사마결은 의혹과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몇 년 간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많은 무림인들이 혹시 당신이 죽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소. 또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무림대회에 대비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폐관(廢關)하여 절학을 익히고 있다고도 했소. 그런데 당신은 이곳에 있었구려." 흑의중년인은 말없이 우뚝 서 있었다. 사마결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지난 일 년 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소? 당신은 무림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일생의 목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왜 이번 대회에는 나오지 않았소? 대체 당신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요?" 사마결의 거듭된 질문에도 흑의중년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마결은 안타깝고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사마결이 흑의중년인을 만난 것은 딱 한번, 지금부터 이 년 전이었다. 그때 사마결은 자신의 거처인 장춘곡에 있다가 흑의중년인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가 자신의 암기수법을 너무도 수월히 피해서 깜짝 놀랐었다. 한차례 손속을 겨룬 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밤이 새도록 냉혼빙심옥골일품향을 앞에 놓고 술을 마셨다. 흑의중년인은 당시 강호무림에 떠오르는 해처럼 찬란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일월쌍극(日月雙戟) 하후태세였다. 하후태세의 일월쌍극은 우내십대기문병기 중의 하나였다. 그의 일월쌍극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고수라 해도 방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극(戟)에 관한 한 고금제일(古今第一)의 고수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내십대기문병기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실력자라는 것이 무림인들의 거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게다가 하후태세는 인물됨이 호탕하고 성격이 자유분방해서 강호의 쾌남아(快男兒)로 알려져 있었다. 사마결은 그와 헤어진 후로 쭉 그의 소식이 들려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뒤로 하후태세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결은 몇 번이나 사람을 풀어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찾기도 했으나 그는 마치 땅 속으로 꺼진 듯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낱 여인을 지키는 호화(護花)의 무리에 속해 있을 줄이야....... 신주홍안이 제아무리 천하에서 제일 아름다운 일대기녀(一代奇女)라고는 하나 사마결이 보기엔 한낱 여인에 불과했다. 그런 여인 때문에 하후태세 같은 강호의 쾌남아가 자신의 뜻을 꺾고 그 밑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 사마결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후태세 개인을 위해서도, 또 강호무림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하후태세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해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사마결은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우리는 화접의가 무슨 흉계를 꾸민다는 걸 우연히 알고 그의 뒤를 따라왔었소. 그런데 이곳에서 하후형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아무튼 하후형이 이렇게 건장하게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구려." 하후태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마결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주홍안은 저 위에 있소?" 처음으로 하후태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마결을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렇소." 사마결은 다시 물었다. "그녀를 만나 볼 수 있겠소?" 하후태세의 음성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안 되오." 그의 음성이 너무나 냉랭했기 때문에 사마결은 더 이상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린 이만 가야겠군." 바로 그때였다.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세요." 이층 누각에서 예의 그 영롱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 음성을 듣자 하후태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눈에 잠시 복잡한 빛이 어른거렸다. 하나 그는 아무 말없이 옆으로 몸을 비켰다. 사마결은 막상 그가 이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주자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신주홍안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도대체 하후태세가 무엇 때문에 그녀의 곁에 머물게 되었는지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였다. 하나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무림에 알려진 바로는 그녀는 외인(外人)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아주 친한 사이 외에는 자신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사마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조자건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이거 횡재했군. 오늘 천하제일미녀를 보게 되다니 아무래도 눈복이 터진 모양이오." 그는 조금 흥분된 표정이었다. 아무리 사마결이라 할지라도 강호에 전설처럼 떠돌고 있는 미모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자건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는데 사마결이 어깨를 툭 치자 그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어서 올라갑시다." 이어 그는 사마결이 말할 사이도 없이 먼저 이층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사마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허거리다가 하후태세를 슬쩍 돌아보고는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후태세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의 등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 그의 두 눈만은 어둠 속에서 무섭게 번쩍이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모두 열일곱 계단이었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자 한 줄기 난초향(蘭草香) 같기도 하고 매향(梅香) 같기도 한 그윽한 향기가 흘러 나왔다. 그 향기를 맡자 전신이 상쾌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층은 의외로 단출하고 소박했다. 별다른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고 가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 있는 탁자 위에는 작은 호롱불이 빛나고 있을 뿐 다른 집기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미녀가 기거하는 곳치고는 너무도 조촐해 보여서 오히려 기거하는 사람의 고아한 풍미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중앙에는 두꺼운 휘장이 쳐져 있었는데 휘장 너머로 한 명의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아쉽게도 여인의 모습은 휘장에 가려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사마결은 한동안 안력을 돋우어 휘장 뒤의 여인을 뚫어지게 주시했으나 휘장이 특수한 천잠사(天蠶絲)로 짠 것임을 알고는 안광을 거두었다. "두 분은 자리에 앉으세요." 휘장 안의 여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마결은 그녀의 음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음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한동안 그 음성의 여운을 음미했으나 고개를 돌려보니 조자건은 전혀 아무런 감흥도 없는 듯 벌써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아 있었다. 사마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도 조자건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휘장 안의 여인은 그들이 앉기를 기다려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는 하후대협(何候大俠) 때문입니까?" 사마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솔직히 하후태세는 이대로 묻혀 지내기에는 아까운 인물이오. 그는 무림을 위해서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재목인데 귀하의 밑에 묶여 있다는 건......." 사마결은 말꼬리를 흐렸다. 원래는 너무하지 않느냐고 말하려고 했으나 아직 초면인 상대에게 너무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의 평지풍파객이란 외호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평상시의 그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만큼 신주홍안이라는 외호가 주는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휘장 안의 여인, 신주홍안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건 사마대협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사마결은 움찔했다. "잘못 생각하다니......." "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에게 호화단을 해체하고 무림으로 나가라고 여러 번 권하기까지 했었어요." 사마결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왜 그가......." 신주홍안의 음성은 물 흐르듯 고요하기조차 했다. "그는 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해요. 그에게 호화단을 해체하고 내 곁에서 떠나라고 강요한다면 그는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 거예요."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사마결은 그것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문득 조금 전에 보았던 하후태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비록 하후태세의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상황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울러 한 여자의 힘이 이토록 거대한가 하고 생각했다. 하후태세 같은 절세의 호남아가 여인에 대한 정(情)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천한 신분이 되어서라도 그녀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그 애절한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사람은 의외로 조자건이었다. "나는 이만 가겠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마결이 말릴 사이도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사마결은 깜짝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어느새 조자건의 몸은 아래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마결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는 조자건이 왜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신주홍안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나도 가야 할 것 같소. 오늘 시간을 내 주어서 정말 고마웠소." 사마결이 포권을 하자 신주홍안은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별말씀을...... 그보다 어서 가 보세요. 친구분이 이대로 사라질지 모르니." 사마결은 대충 인사를 하고는 허겁지겁 누각을 내려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신주홍안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을까요?" 그녀의 음성은 허공에 대고 묻는 것 같았다. 하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의 음성이 들려 왔다. "글쎄, 모르겠소. 알아봤을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지." 동시에 휘장 앞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인영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는 누런 황의를 걸친 우람한 체구의 사나이였다. 황의사나이의 체구는 무척 거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그의 굳건한 등만 보아도 이 사나이가 얼마나 패도무쌍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사나이가 나타날 때의 갑작스런 동작은 이미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알려진 불문(佛門)의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임이 분명했다. 신주홍안은 여전히 휘장 뒤에 단정히 앉은 채 황의장한을 주시했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면 왜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까요?" 황의장한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아마 당신과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하고 같은 이유라고요?" 황의장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 전부터 그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으면서도 왜 조금 전에 그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소?" 신주홍안은 황의장한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듯 일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두려웠어요." 황의장한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뭐가 두려웠다는 말이오?" 신주홍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를 만나면 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어요." 황의장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녀는 잠시 침음하다가 말을 계속했다. "그를 보게 되면 나는 도저히 무도(武道)에 집중할 자신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게 두려웠어요." 황의장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마 그게 두려웠을 거요. 그래서 그토록 빨리 이곳을 나갔던 거요." 신주홍안은 한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앉은 채 그의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황의장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당신은 왜 그를 만나지 않았지요? 당신도 그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했잖아요?" 황의장한은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런 자세로 서 있던 황의장한은 나직한 탄식을 토해 냈다. "그렇지. 나도 그를 만나 보고 싶었소. 정말 만나 보고 싶었소 ......." "그런데 왜......?" "나는 조금 전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그를 부둥켜안고 싶었소. 그에게 그 동안 어디 처박혔다 이제야 나타났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소. 하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소." 신주홍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황의장한은 다시 무거운 탄식을 토해 냈다. "그건 그때 문득 나의 뇌리에 노조종(老祖宗)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소. 노조종은 내가 이번 무림대회에서 반드시 우승하길 바라시오. 나는 그분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소. 아울러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신 사문(師門)의 어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수 없소." "......." "조자건이 이곳에 온 것은 무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그와 나는 어쩌면 서로 병기를 맞대고 겨뤄야 할지도 모르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소." 신주홍안은 그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무림대회에 참가했을 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중도에 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격돌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실력으로 보아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를 만나게 되면 나중에 그와 겨룰 때 내 마음이 약해질 것이 걱정되었던 거요. 그와 겨루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노조종과 사문의 어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소. 절대로 없소." 그의 음성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신주홍안은 한동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거로군요.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막상 만날 때가 되니까 두려워서 피해야 하다니 참으로 묘하군요." 황의장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소. 우리뿐만 아니라 모용수도 그렇고 위지혼도 그렇고....... 그 짐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거북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요." "그 짐이 없어지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요." 황의장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바로 화군악을 물리쳐야지. 하지만 그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오." 신주홍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황의장한 또한 그 말을 끝으로 허공을 올려다본 채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나 어둠 속을 응시하는 그의 입에서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직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비단 쉽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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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