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날보다 흐린 날들을 많이 보며 새 달을 맞습니다. 장마철이니 도리없습니다. 아마도 다음 주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하겠지요. 매년 치르는 일입니다. 비도 웬만큼 와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땡볕에서만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번갈아 순환이 잘 되어야 삶이 편안해집니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사고납니다. 홍수로도 혼날 것이고 가뭄으로도 힘들게 됩니다. 음과 양이 균형을 이루어야 편안합니다. 세상만사가 그렇습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삼권분립도 하고 여야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서로 의논하고 타협하고 균형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잘난 사람들만 모였는지 소리만 요란하고 국민은 지쳐갑니다.
당분간 뉴스시간을 휴가 주기로 하였습니다. 희망을 주기는커녕 가지고 있는 희망마저 갉아먹히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쉬어갈 때도 있어야지 싶어서 일찍 여름휴가 주었습니다. ㅋㅋ 지들끼리 싸우다 지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국민’ 팔아 자기네 배불리는 사람들만 있는 듯 하여 국민만 졸이 되는 느낌입니다. 이 말 사용하는 것도 임대료를 받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여름 지나 지쳐 쓰러지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거저먹기로 돈 받는 사람들 같아서 배가 아프기는 합니다. 그러나 돈보다도 비싼 희망마저 빼앗길까 두려워 귀 닫고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싶은 것입니다. 서로 치고받고 상처투성이 되면 지들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기후 변화 불안 속에 이 여름이 기대(?)됩니다.
7월도 벌써 한 주 갑니다. 아프고 슬픈 소식 더는 없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7월을 가렵니다. 건강하세요. ㅎㅎ
2024년 7월 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무엘상 24 : 12 - 13)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소리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소리만 듣고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또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뿐만이 아닙니다. 위험일까, 도움일까 아니면 기다릴까, 그냥 지나갈까 등등. 소리를 들으면 그야말로 오만가지 사물이나 사건들이 머릿속을 헤집습니다. 반면 소리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되면 생각은 매우 한정됩니다. 보인 그것에 생각이 매이게 됩니다. 크게 확장되기 어려워집니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공포는 장면보다 소리로 인하여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영상보다 괴이한 소리가 더 무서움을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음향효과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도 합니다.
무서운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웬만한 공포영화보다도 더 무섭기도 합니다. 일단 시작 순간부터 아주 기묘한 배경음악이 귀를 자극합니다. 그것도 아무런 화면도 보이지 않고 약 1분 정도 영화관을 채웁니다. 상영하는 가운데 몇 번 그렇게 등장합니다. 그다지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그냥 소리일 뿐입니다. 결코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고 아름다운 음악은 더욱 아닙니다. 귀청이 찢어질듯하기도 합니다. 마치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거슬리는 소리입니다. 이게 재미있거나 흥분시키는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극적인 장면은 없습니다.
아주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이 전개됩니다. 하기야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당시로 봐서도 꽤 부유한 집안의 모습이기는 합니다. 말끔한 2층 저택에 큰 정원이 있습니다. 가운데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조그만 수영장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그 주변에 안락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휴식하고 서로 담소합니다. 그야말로 매우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집안은 깨끗하게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인들이 여러 명 있어서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수용소장의 뒤치다꺼리나 안주인의 지시를 따르거나 여러 가지 일을 나누어 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습니다.
벽돌담 하나로 이쪽과 저쪽은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담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쪽의 흔적이 종종 넘어옵니다. 그것은 그쪽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소지품이 모아져서 이쪽으로 건너오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가족과 친지들이 물건들을 뒤적거리며 자기 맘에 드는 것들을 챙깁니다. 그쪽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까지 와서 처리되었는지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다급했고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고 생존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이쪽 사람들에게는 이야깃거리요 조롱거리가 됩니다. 여자들이 물건을 나누며 좋아하고 시시덕거립니다.
눈을 들어보면 담 넘어 집들 굴뚝에서 연기가 끊임없이 오르고 있습니다. 한밤중에는 굴뚝 위로 불꽃까지도 훤하게 보입니다. 그러니 밤낮이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타고 있는 것이지요. 무엇이 타고 있겠습니까? 때로 사람의 비명소리도 들립니다. 아우성이 들립니다. 날카로운 명령이 들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총성도 들려옵니다. 짐작합니다. 즉결처분하였구나. 그 장면은 없어도 눈에 선합니다. 애처롭기도 하고 처참하기도 할 것입니다. 보다 효과적으로, 보다 많은 수를, 보다 빨리 처리하기 위해 시설물을 어떻게 확장하고 보완할지 업체에게 의뢰합니다. 그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소장 직을 유지합니다. 상부로부터 유능하다 인정받은 것이지요.
너 같은 건 남편에게 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재로 만들 수 있어. 하기야 담 저쪽에 있지 않는 것만도 행운이고 복(?)입니다. 그쪽에 있었다면 어느 시간 진작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힌 것입니다. 담당자의 눈에 쓸 만하다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장 사택의 하인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곱상한 여자라면 추가 봉사까지 감당합니다. 사람으로 생각하겠습니까? 그냥 노리개일 뿐입니다. 시답잖으면 다음 날 재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안주인이 알게 되면 곧장 그렇게 되기 십상입니다. 다행(?)히 남자가 그것을 잘 숨기지요. 하기야 자신의 안전을 위한 일일 뿐입니다. 소위 자기 가정의 평화 말입니다.
인간의 세상이 얼마나 요상합니까? 겨우 담, 하나 사이인데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다니 말입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해하여 화장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 그는 유능한 소장이 됩니다. 어찌 보면 그냥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크게 보면 국가의 정책이며 그는 철저히 순복하는 공직자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권한 아래서 목숨을 잃었는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모르겠습니다. 그 덕에 남부럽지 않은 호의호식을 하며 살았습니다. 자기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보았을까요? 나중에 기록을 보니 이 사람도 전범으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죄를 깨달았을까 모르겠습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를 보았습니다.
왜 당신이야?
전에는 관공서를 들어갈 때 무슨 차를 끌고 들어가느냐에 따라 안내하는 경비원의 태도가 달랐습니다. 요즘은 달라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거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우리에게 있음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하얀 ‘모닝’ 차를 몰고 들어가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좋은 자리에 주차하려면 쫓아냅니다. 그런데 까만 ‘그랜저’나 ‘에쿠우스’를 몰고 들어가면 경례까지 붙이면서 안내해줍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관공서에 볼일 보러 갈 때는 반드시 좋은 차를 가지고 가라고 말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관공서에서도 주차대행업소가 관리하고 주차요금을 받기 때문에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외형이 곧 그 사람의 신분을 표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행동을 합니다. 삐까뻔쩍한 차를 몰고 다니면 굉장한 사업가나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경차를 몰고 다니면 그저 그런 봉급생활자나 나 같이 별볼일없는 노인 정도로나 알지요.
세상에서 그러면 세상이니까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까지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경고해줍니다. 약 2 : 1 - 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거 2천 년 전 기록된 말씀인데 예나 지금이나 별 차 없는 듯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이 요즘은 있다 없다? 큰 교회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많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편향적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차려입고 등장하는 사람과 허름하게 차린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죄가 들어오고 죽을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좋으신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소위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구약’이 바로 그 약속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메시야’ 곧 구원자를 보내주마 하는 약속이란 말입니다. 문제는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그 이름이나 오시는 날이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보내주마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언급을 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들을 잘 알고 대비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열두 제자는 예수가 죽을 때까지는 계속 따라다니며 같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거의 모두가 비난하고 배척하고 결국 나사렛 이단이라고까지 정죄했는데 말입니다. 월급도 줄 수 없는 빈털터리인데 뭐 먹고살겠다고 그렇게 따라다녔을까, 의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오시던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 하에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약 4백년을 그 가나안 땅에 이 나라 저 나라 나라가 바뀌면서 이래저래 뜯기며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렇게 당시는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은 희망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구원자 곧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언제나 올까,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꿈꾸는 메시야는 어떤 모양으로 올까요? 하나님의 아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왕의 아들이라 하면 그 부와 귀와 권력이 대단한데 만왕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무리 막강한 로마까지도 능히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 그 옛날 다윗의 왕국을 회복해주실 분입니다. 구원자라면 당연히 그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메시야라고 나타난 사람을 보십시오. 메시야라고 믿어집니까?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언쟁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하였습니까? 자꾸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 봅시다. 요 8 : 56 - 57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시기 약 2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자기를 기다리다 보고 즐거워했답니다.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2천 년 전 사람이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예수를 기다리다 보고 즐거워합니까? 그러니 당장 유대인들이 반박합니다. 뭐라고? 네가 이제 50도 안 돼 보이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일단 생각해봅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의 나이로 보았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마 50은 안 되어 보인다, 그러니 50 가까이 보인다는 말 아닙니까? 당시 예수님은 실제 몇 살이었지요? 이제 겨우 서른하나나 둘입니다. 그런데 50 가까이 보였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생겼길래?
예수님 어디 출신입니까? 나사렛입니다. 갈릴리 지방에 있는 아주 조그만 동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조차 알아주지도 않는 동네입니다. 요 1 :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그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말씀한 그 메시야를 만났다. 바로 나사렛 예수야,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그까짓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합니다. 별볼일없는 동네에서 무슨 메시야야? 웃기고 있네, 하는 말이지요. 게다가 예수님 아버지 직업이 뭡니까? 목수. 당시 사회적으로 천한 직업입니다. 목수의 아들, 게다가 나사렛 출신, 그 사람이 메시야? 지나가던 개들도 웃겠다, 그러니 믿어집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와 실제 하나님이 성경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가 같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말 대단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한번 보겠습니다. 사 53 : 1 - 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 생겼습니까, 아니면 우리들만도 못합니까? 죄송하지만 우리들만도 못할 것 같습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렘 14 : 8 - 9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어떻습니까? 우리 속된 말로 어리버리한 모습 아닙니까?
겉모습 가지고는 도무지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만 할 사람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 거지 나부랭이 같은 젊은이가 다니며 당시 최고 지도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권력자인 제사장들이나 율법사들에게 뭐라 말합니까? 마 23 :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로마 총독이라도 돼서 이런 말을 한다면 참고 들어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웬 거지같은 놈이 함부로 떠드니 용서가 됩니까? 메시야가 오면 이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다, 하는 기대로 가득 차 있는데 정치적 문제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마다 비위를 거스릅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반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메시야라고 믿기도 힘든 마당에 욕까지 퍼부으며 다니고 있으니 가만 놔둬요 말아요? 이런 놈은 도무지 살려둘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죽일 구실만 찾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증표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예수님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귀신의 왕이 들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시나 보겠습니다. 27절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니 너희 아들들, 즉 다른 유대인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 못한다? 합니다. 그러니 기적 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기 힘들다 이겁니다. 세상에서 무당들도 우리가 못하는 기적을 행하잖아요? 그렇다고 무당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대부분의 하나님 백성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당시 지도자들은 거의 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기적으로는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였을까요? 참고 구절을 보겠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기록하였습니다. 고전 15 : 3 -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뭡니까? 예, ‘성경대로’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무엇대로? ‘성경대로’입니다. 나신 것부터 행하신 것, 말씀하신 것 모두가 무엇대로? ‘성경대로’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중거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즉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따른 것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행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잠시 실망하고 돌아서려고 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다시 확실하게 가르쳐주십니다. 그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됩니다. 보겠습니다. 눅 24 : 13 - 16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제자 중에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라 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물론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동행하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경을 풀어줍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보겠습니다. 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나중에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44 - 45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을 본 사람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바로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성경입니다. 그 때는 구약성경이지요. 거기에 메시야에 대해서 약속하고 예언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 성경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증명하지요?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메시야다’라고 주장해도 그 근거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 예언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즉 약속하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것이 이루어질 때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왜 미리 말씀하신다고요? 언제 믿으라고요? 이룰 때 믿으라고. 무엇을 근거로 믿으라고요? 미리 말씀한 그 예언, 약속을 근거로 해서 믿으라고요.
수천 년 동안 기록된 예언이 그대로 빠짐없이 성취되었다면 그게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넘나들면서 말씀하고 이루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예언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룹니까? 자기는 이미 세상에 있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오셨고 그 성경대로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성경대로 돌아가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시고 성경대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때문에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 신약성경도 그대로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설령 그 성경을 읽고 배우고 있다 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이것 또한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없었습니까? 그들만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처럼 개인 소장은 드물었지요. 그래서 듣고 어디에 새깁니까? 예, 머리에. 그들은 태어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성경부터 가르칩니다. 보통 15살이 되면 모세오경은 이미 머릿속에 담겨있었답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예, 외웠습니다. 그런데 안다, 모른다? 외워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외운다 한들 소용없는 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오신 메시야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요? 성경을 모르고 자기 좋을 대로 메시야를 상상해서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시 오신다고 하신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만들어서 기다리면 오셔도 모릅니다. 기독교백화점에 가면 예수님 초상화 있지요? 그런 모습으로 오실까요? 공상에서 깨어납시다. 똑바로 배우고 똑바로 깨달아서 실수 없이 맞이합시다. 왜 당신이야? 하지 말고 성경으로 맞춰봅시다. 요즘은 그리스도인 곧 하나님 백성이라 자처하면 대부분 성경 한두 권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제는 핸드폰에 다 담겨 있기도 합니다. 손쉽게 가지고 다닙니다. 원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백번 읽고 쓰고 외워도 모르면 꽝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 잘 드리고 봉사 잘 해도 말씀을 모르면 미안하지만 하나님 백성도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아버지가 자녀라고 인정해주실까요? 죄 가운데 태어나 하나님께는 외인이었던 사람들,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는다고 자녀 된 권세를 받았습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과연 믿는 것인지 믿는 척하는 것인지 어찌 압니까?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박 씨가 아니라 김 씨가 된 것은 내가 김 씨의 그 씨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확실하다면 아버지 하나님도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맞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매일 성경을 읽고 큐티도 하는데요. 예, 애쓰십니다. 그러나 다시 말합니다. 그 말씀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모른다면 백날 읽어도 외워도 소용없습니다.
언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일이 이룰 때 믿어야 진짜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몰랐습니다. 왜요? 행 13 : 26 - 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다시 말하지만 모르면 꽝입니다. 그런데 ‘몰라도 돼,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이야,’ 라고 우깁니다. 그게 사단의 사주입니다. 정신 차리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해주는 목회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입니다. 십자가 달려있다고 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배웠다고 다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일단 간단하게 분별하십시오. 하늘 이야기를 하는지 땅(세상) 이야기를 하는지 말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왜 당신이야?’ 하지 말고 그 말을 듣고 분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