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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토론 전용 게시판 세상 바꾸고 싶었던 법학도 청년, 그 끝은 '인간어뢰' - 일본의 비극
포퍼엔마스 추천 1 조회 252 22.04.04 17:53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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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2.04.04 17:53

    첫댓글
    <인간어뢰 카이텐(回天)특공대원이었던 와다 미노루(和田稔) 소위가 남긴 수기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국가에 의해 소모품 취급을 받았던 청년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출전 후 인간어뢰에 갇혀 숨지기까지, 자신이 학교와 군대에서 느낀 감상을 무려 36권에 달하는 대학노트에 기록했다.>

    <청년 미노루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사주의로 물든 중고등학교 교육을 비판하고,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지는 천황숭배에 의문을 표한다. 미노루가 품고 있던 사명감은, 그가 고등학교 입학 3일 뒤에 쓴 일기에 드러난다.>

    <"시대의 풍조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현대 전체주의의 강제적 해석에 부화뇌동하는 것, 저급한 군사주의에 가담하는 것은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적으로, 일본민족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에 참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0년 4월 17일)>

  • 작성자 22.04.04 18:07

    해당 기사의 옮겨온 단락에서도 보시다시피 '미노루'라는 이름 '일본민족의 사명'이라는 언급만 제외시켜 놓고 당시 일제 치하 조선의 청년들의 고민과도 어떤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바라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열망이 국적을 떠나서 마음으로 전해 오는 듯만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라도 일제 식민지치하의 우리민족의 고통과 희생에 대해 죄과를 물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들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 것인지 미노루란 이름의 일본 청년의 고뇌가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고뇌와도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일진대 당시의 빛바랜 사진속 여동생과 함께 찍은 앳되고 순수해 보이는 모습을 보아하자니 당시 나라는 달리 할지라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조선의 청년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모습과도 겹쳐 져서는 마음이 아려만 온다 할 것입니다.

  • 작성자 22.04.04 17:54

    <이토는 유럽 현지 조사를 통해서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영국의 입헌군주제나 프랑스의 공화제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천황주권을 강화해야 대국굴기·부국강병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토는 헌법 제정을 위한 준비로써 각종 제도의 개혁부터 단행했다. 먼저 1884년 7월에 화족령을 제정하여 사족 출신의 메이지 공신들을 화족에 포함시켰다. 화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원(貴族院)에서 국민이 선출한 중의원(衆議院)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화족에게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등급의 작위가 세습적으로 수여되었다.>

  • 작성자 22.04.04 17:56

    <이토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 가문에 입양된 사람이었다. 이토는 1603년부터 일본을 다스려온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몰락과 일본 내의 서양 세력의 등장으로 빚어진 혼란스런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메이지 유신(1868)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토는 개화파로서 일왕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대가로 정계에 입문,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거쳤다(→ 메이지 유신). 그는 기도뿐만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초기 정계 거물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파견 사절단(1870)과 이와쿠라(岩倉) 사절단(1871~73)의 일원이 되어 해외에서 과세(課稅)· 예산제도·조약개정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 영향으로 국가 제도 개선에 앞장설 수 있었다.>

  • 작성자 22.04.04 17:58

    @포퍼엔마스
    메이지 유신 지사들 중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경우에는 실인즉 영국의 책임내각제를 주장했었고 그 안건에 대해서도 당시 실력자들끼리 논의도 없지 않았었다고 전해집니다만 오쿠보의 암살과 함께 자연스레 좌절되고 경제 분야는 영국에서 군사제도와 정치제도는 독일 당시 프러시아로 부터 도입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책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프랑스의 민주 공화정은 차제하고서라도 영국식 책임내각제만 도입했을지라도 당시의 파쇼적 군국주의 흐름은 물론하거니와 현재의 일본 정치가 저렇게나 망가졌을 것인지 아울러

    일본의 천황?제가 1300여년 이상 내려 왔다지만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고서는 천황은 허울 뿐 실질적인 힘이 없었던 고로 막부를 실권으로 부터 물러나게 할 당시야 말로 제대로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최적기였다 할 것으로 만일 그러했다면 혹여 일본으로서도 동북아로서도 다른 역사 다른 시간대를 열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 것인지 ... 이미 지난 일이라지만 일본의 현재적 실패까지와도 연결되는 대목인지라 이에 참조를 바라며 옮겨와 보았습니다.

  • 22.04.04 20:38

    @포퍼엔마스

    나옴 김에, 참고로,

    일본의 역사에서도 보듯이,

    일본은, 옛부터, 그리고 현재까지도,

    개혁도,

    정해진 지배 층 안에서의,

    자기 입맛에 맞는,
    드물게, 자기 혁신을 통한,
    또는, 하향식 개혁 ---> 유신일 뿐이며,

    이는,

    일본 및 일본 사회가 지닌, 큰 문제 중의 하나이지요.

    일본은, 한국과는 달라서,

    개혁이라는 것도,

    중앙 권력이든, 지역 권력이든 간에,

    옛 과거에서부터,
    각 지배 권력 계층의 입맛과 통제에 의해서 이뤄져왔었던 역사이기에,

    일본에서, 가령,
    대 규모 민중 봉기 및 시민 혁명이라든지,
    대 규모 촛불 집회 시위 등을 기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 22.04.04 20:38

    @포퍼엔마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왕이 도망갔는 데도, 의병이 일어나 싸우는 것을,

    또, 민란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을,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했다지요.

    이들에겐, 그랬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이런 일본을 두고서,
    진정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라고 봐야 할 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을 가리켜, 소위 유사 민주주의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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