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큰 사람들’의 그 저돌적인 용기와 낭만을 기리며…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언론인으로서 20년, 정치인으로 20년 가까이를 살아온 필자 남재희 전 장관이 털어놓는 ‘걸물 열전(列傳)’이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 수석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 인류학(Political Anthropology)이다.
‘58년 한국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후 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필자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취재하고 교유했다. 폭넓은 독서와 그들과의 친교, 특히 수많은 술자리를 통해 인간과 역사를 아무르는 안목을 얻었다.
이후 4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다. 그 인간애를 바탕으로 필자는 자신이 교유했던 ’한국 현대사의 가장 걸출한 인물‘들의 인간적 풍모, 삶의 뒤안, 고비 때마다의 마음의 풍경, 당시 역사의 흐름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필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역사학자도, 언론인도 또 정치인도 경험할 수 없었던 현대사의 이면을 그려낸 인간 드라마다.
필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용기와 낭만을 기리며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다.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를 대체로 흡족하지 않게 여긴다. 어쩐지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후배 세대를 통이 작다고 여긴다. 너무 가볍게 합리적으로 따진다. 저돌적인 용기가 부족하다. … 신문기자 20년, 정치생활 20년 가까이하며 내가 가깝게 사귀었던 인물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걸물들은 꿈도 있고 술도 잘하고 여성들과 잘 사귀었으며 통도 매우 컸다. 한마디로 간덩이가 컸다고 표현해야 실감이 난다. …
마지막 원고를 넘기고 나니 가까웠던 사람들과 술을 마셔가며 산 세월이 매우 소중했던 것으로 회상되며, 그 서술을 통해 20세기 후반부 우리 정치·사회의 풍속도를 나름대로 그린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를 옆에서 본 것이다.”
그는 역동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 삶의 역경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낭만과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 역사의 고비에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교유했다. 그들이 필자의 표현으로 ‘걸물’들이고 ‘통 큰 사람’들이다. 때로는 같은 신문사에서 동료 기자로 낮에는 사무실과 취재 현장에서 밤에는 선술집에서 그들과 삶을 이야기하고 정치를 논했으며 때로는 취재 대상으로 또 정치 현장에 몸을 던지고 나서는 같은 정치인으로서 그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현대사의 중심에서 그들과 함께 경험한 당시 역사의 미세를 생동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것이다. 그의 놀라운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이 아니고는 담아낼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이면이다.
또한 그의 글은 한 치의 더함이 없는 진실이기에 힘이 있고 또 역사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이야기들 또 역사적, 정치적 의미로 새로이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 이 책이 지닌 역사적 가치이다.
‘인물로 본 한국 정치의 이면사’ 또는 ‘남재희의 체험적 정치론’ 책의 첫 장은 이승만에서 노무현까지 역대 대통령 8인을, 마지막 13장에는 유진산에서 이회창까지 대권에 근접했거나 2인자의 역할을 했던 인물들을, 그리고 그 중간에 자신이 직접 교유했던 인물 11명에 대한 작은 평전을 배치했다. 민기식·김상현·윤길중 등의 정치인, 선우휘·천관우·이영근 등 언론인이 있는가 하면 종교계의 강원룡, 소설가 이병주, 출판계의 박맹호, 그리고 여류 인사 전옥숙·김정례 등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 중 박맹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 간접적으로 한국 정치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인물로 본 한국 정치의 이면사’ 또는 ‘남재희의 체험적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傳記) 문학이 취약한 우리 문단 현실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 대한 체험적 기록이 더없이 소중한 자료로 남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재일 <통일일보> 발행인 이영근 씨와 한국 사교계의 ‘뮤즈’ 전옥숙 여사‘에 대한 부분은 이 책 외에서는 그 행적을 찾기 어려운 사적(史的) 기록이다.
창정 이영근(1919∼1990년)은 1958년 진보당사건 때 일본으로 망명, 일본어 일간지 <통일일보>를 발간한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진보계 인사 중 한 사람이다.
정치에 대한 그의 실사구시적, 현실주의적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조봉암이 굳이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할 필요가 없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다.
“진보를 한다는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 운운하는데, 그거 서양 이야기가 아니오. 사회민주주의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립경제를 이루고, 남북이 통일하고, 오순도순 균등사회를 이루어 나가야지요. 죽산(조봉암)이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 들 하는데 그 노선은 두산(斗山·이동화) 같은 동경제대 출신 학자가 만든 정책이지 죽산은 달라요. 그는 민족자립경제와 수탈 없는 경제, 평화통일을 주장한 민족주의자였어요.”
자립경제, 평화통일, 균등사회라는 실질적 목표를 지향하면 됐지, 굳이 사회민주주의라는 레테르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레테르를 표방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에 의한 사법살인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나아가 1972년 남북간에 합의된 7·4성명 통일 3원칙에 자주·평화·민족단결만 있고 민주통일의 원칙이 빠졌음을 지적하고 비판한 것 역시 탁견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그에 따르면 민주원칙을 뺀 3원칙만으로 하면, 북의 남조선혁명도 가능하고, 남북 당국 간 야합에 의한 통합도 가능하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통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서울까지 흘러들어온 에피소드에 따르면, 평양을 찾아간 이후락 밀사가 통일 3원칙을 수락했다는 보고를 들은 김일성이 “그 사람 술에 취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영근의 우국충정에 끌려 점차 그를 자신의 정치적 멘토로 삼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는 정책은 허황될 수가 있다. 또 잘된다 하더라도 현실에 바탕을 두고 출발한 정책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에 따른 좌우익 간의, 서로가 서로를 부인하는 싸움은 무익하고 무모하다. 서로가 민족의 바탕에서 실사구시로 우리 민족이 잘살아나갈 길을 모색하면 된다.”
전옥숙 여사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공식적으로는 영화사와 TV프로그램 제작회사를 운영하고 간혹 회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방송 기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허나 이는 전 여사의 일면일 뿐, 그의 전모는 한국 현대사 사교계에서의 활약상으로 드러난다. 필자 스스로 한국 사교계의 ‘여왕봉’이라 명명한 전옥숙 여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남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여성을 희랍 신화에서 용어를 빌려와 ‘뮤즈(詩神)’라 한다. 마침 <20세기 뮤즈>라는 영역된 프랑스 책이 있어 살펴보니 루이스 살로메(루 살로메)가 첫 번에 나온다. 러시아 태생으로 나치시대 독일에서 사망한 루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정신분석학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과 사귀며 그들에게 ‘섬광처럼 자극을 주는 뮤즈’가 되었다 한다. 요즘 같으면 존 레논의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가 떠오르는데, 굳이 한국에서 찾는다면, 내가 아는 한정된 범위에서는, 전옥숙 여사가 그럴듯하게 부각된다. 그 주변에는 김지하 시인, 이병주 소설가, 조용필 가수, 장일순 민주화 운동 대부 등이 맴돈다. 열거하자면 각계각층 부지기수다. 전 여사는 그들의 ‘뮤즈’가 아닐까.”
전옥숙 여사는 한국 정치·문화계, 재계 인사들과 깊숙이 교유하며 일본통으로서 일본 문화 정치계 인사들과의 다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남 전 장관은 “전 여사는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다. 그리고 문화현상 전반에 관한 관찰도 정확한 것 같다. 그러니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다. 미인이기에 상류층의 교제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치인, 언론인, 작가, 사업가… 모든 분야의 일급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교류가 또한 사람의 수준을 높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일본통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비교적 상류사회와 교류했다. 일본말도 아주 썩 잘한다. 일본에 오래 머물기도 하였다.”라고 전옥숙 여사를 회고한다. 이 책을 통해 한국 사교계의 ‘뮤즈’였던 전옥숙 여사가 처음으로 소개되고 부활하는 셈이다.
후농 김상현의 ‘최규하 정권 강화론’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김상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단계에서는 최 정권의 힘을 강화시켜줘야 됩니다. 최 정권을 강화해서 최 정권 스스로 민주헌법으로 개정하도록 시간을 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민주세력이 뒷받침해줘야 합니다(…). 강경하게만 나가면 결과적으로 군부에게 명분을 줍니다.”
필자는 “참, 무릎을 탁 치고 싶은 탁견”이라면서 5.18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민정당 간부 몇 사람을 청와대 상춘재에 부른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한다.
“그때 김종필 씨의 공화당과 또 유정회가 최규하 씨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밀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혼란기일수록 민주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로 파악한다.
가방 끈이 짧다고 알려진 김상현은 “…밥그릇 싸움을 조정하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정치인의 구실이다. 각자 능력에 따라서 일한 만큼 밥을 먹자는 것이 민주주의다.”라고도 말했다. 어떤 유능한 정치학자보다도 정치의 요체를 간명하게 요약한 것 같다.
이번 책이 다루는 시기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전반에 이른다. 현재로부터 한두 세대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과제들은 아직도 태반이 미완이다. 예컨대 이영근이 말한 자립경제, 남북통일, 균등사회 중 후자의 둘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후배 세대들의 과제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014년 이후의 정치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들을 던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이 책 ‘소개의 글’에서)
추천사 “정치 인류학(Political Anthropology)이다. 걸물들의 미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욕심 같아서는 확대하여 한국 정치의 ‘수호지’나 ‘삼국지’로 썼으면 좋겠다.”
김종인(전 청와대 경제수석)
“놀라운 기억력으로 정치 이면사를 재미있게 썼다. 한국 정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 손으로 냈으면 싶었다.”
박맹호(민음사 회장)
“이번 책이 다루는 시기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전반에 이른다. 현재로부터 한두 세대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과제들은 아직도 태반이 미완이다. 예컨대 이영근이 말한 자립경제, 남북통일, 균등사회 중 후자의 둘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후배 세대들의 과제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014년 이후의 정치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들을 던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