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번에 8년간 산 집을 처분할 때 참으로 힘들었다. 매물로 내 놓은 지 1년 반 만에 겨우 팔린 집이다. 그 집을 처음 살 때 사실 꿈이 컸다. 유명 건설사 작품으로 유명 여배우가 선전을 할 정도였으니 대전에서는 그래도 찰진 몇 안 되는 고급형 아파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아파트는 당시로는 최고가인 평당 천 만 원에 분양을 한 것인데 시기를 잘못 만나서인지 미분양이 되고 말았다.
생각다 못한 분양사는 당초 분양가보다 1억 이상을 싸게 내놓았고 나는 그 틈새를 노려 입주를 한 것이었다. 내가 입주를 할 때 아파트 입구는 농성천막이 진을 치고 있었다.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입주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분양가를 다 준 선 입주자들이었다. 대전에서 그 정도 큰 평수(48평 56평 61평)에 살 정도면 기업체 사장이나 의사나 변호사 같은 돈께나 있는 사람 층이다.
나는 그 점을 노렸다. 언젠가는 분양가 가격으로 최소한 회복 될 것이고 큰 평형이 대전에는 흔하지 않으므로 값은 금세 치솟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겨우 분양가 수준으로 가격은 회복되었지만 큰 평수를 찾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귀했다. 매물로 내놓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보러 오기도 하지만 호기심 삼아 보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저물고 또 그냥 한 해가 또 저무는가 싶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퇴직을 앞두고 관리비 하며 모든 것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에 어디로 향할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우선 팔고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올해 여름 반석이라는 곳을 점찍어 두어서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웬 젊은 부부가 휑하니 다녀갔다. 그들은 48평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역시 호기심 삼아 56평의 7층 꼭대기 층의 다락방과 딸린 테라스 구조는 어떻게 생겨 먹은 지 탐문하는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석을 쇠고 까맣게 잊고 있는데 집을 다시 한 번 더 보겠다는 전갈이 왔다. 그 부부를 다시 보자 나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임자가 드디어 강림한 것을.
내 마누라를 처음 봤을 때 이 여자다 하였듯이 집에 이끌리면 보는 눈빛도 확연히 다르다.
그러던 젊은 부부는 이후 꿩 구어 먹은 소식이었다. 애가 탄 것은 나였다. 알고 보니 그들이 팔 집 가계약이 무효화 되어 다시 집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갈 집을 봐두었는데 그로 나도 허사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갈 반석동 동네의 부동산 여자가 내게 물었다. 혹시 용산동 아파트 아니세요? 알고 보니 내 집을 보러 온 젊은 친구가 사는 곳이 바로 반석동 아파트로 부동산이 나와 그를 같이 취급 하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그 부동산은 그 젊은 친구 집이 팔리면 용산동 내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는 그 후속타로 또 반석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1타 3피의 효과가 이루어지는 그런 형태.
10월쯤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 그들 계약이 제대로 성사됐으니 잘 해보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동네 부동산에 내놓은 가격에서 5백을 더 빼줄 수 있느라고 선수를 쳤다. 6층과 내 아파트가 경합이 붙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소리였다. 물론 고급정보는 내가 이사 갈 동네의 부동산으로부터다. 그렇게 겨우 성사된 아파트 거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그런 계약형태로 이를 수용할지 며칠을 고민 했었다. 계약금 5천만 걸고 나머지는 잔금 때 주겠다는 것인데 그것도 대출을 해서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대출금이 60%가 넘는다. 이게 가능한 것일까. 나로선 충격적이었다. 서울에 하도 집값이 승승장구를 하다 보니 갭 투자가 흥행한다고 하지만 자기 살 집에 절반도 넘는 돈이 대출이라니. 정부가 규제 강화로 1차 금융권 단속이 심해 이를 피해 모 생명보험에서 대출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불안해 계약 특약에 만약에 잘못되면 이라는 조건을 하나 달아 붙였다. 그리고 12월 28일 예정대로 무난히 잔금을 받았다. 집도 일찌감치 비워주고 돈도 잔금에서 몰려 받는 악조건이었지만 나로서는 팔자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그들 사는 방식이다. 아무리 맞벌이부부라지만 70%가 넘는 외상으로 집을 장만하다니. 전세 없는 미국이 그렇다더니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추세인 것도 같다. 내 살았던 그 아파트에는 차도 거반 외제차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데 다들 그렇게 큰 융자를 끼고 보란 듯이 큰 평수에서 즐기며 산다. 분명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인생은 단 한번뿐이니 후회 없이 즐기며 사랑하며 살자는 율로 방식이라고 할까.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 분명 그들은 현재를 즐기고 현재에 충실하며 산다 싶다.
그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삶의 패턴이 바뀌는 것뿐이다. 그 어느 때 한국인에게 밥은 생명이고 사랑이었다. 누구는 한(恨)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쌀밥을 배불리 먹었던 시절은 없었으며 그런 상황은 196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급증하는데 쌀 생산량은 도리어 줄었다. 이에 정부는 혼·분식을 유도하거나 강제했다. 경찰을 동원, 혼식 비율을 지키지 않는 업소들을 단속해 행정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1963년 1월부터는 각의의 의결로 쌀을 팔 때 잡곡을 2할 이상 섞어서 팔고 음식점도 2할 이상의 잡곡을 섞고 가정에서는 2일 1식은 분식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절미운동은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고 공공단체, 학교, 관공서 등이 총동원되었다. 쌀 증산이 뜻대로 되지 않자 정부의 혼·분식 정책은 더 강력해졌다. 1968년 1월 혼·분식이 법제화됐다. 모든 음식점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쌀이 들어간 밥을 팔지 못했다, 그 밖의 시간에도 잡곡을 25% 이상 섞어야 한다는 행정명령이 발동되었다. 가정과 학교에서도 혼·분식을 여러 방법으로 장려했다. 먹는 것까지 강제를 동원하나 싶지만 보릿고개 넘던 시절 쑥은 고급이었고 풀잎가루로 죽 끓여서 먹고 소나무 껍질을 끓여 먹기도 하였으니 정부의 비호는 이해가 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 무렵 우리는 반공통일이라는 구호만큼이나 국산품애용이란 표어를 강조했으며 저축 장려에 혼식에 몽당연필은 거의 의무적이었다. 벌을 받으며 그렇게 산사람들인지라 국산품을 안 쓰면 지금도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외제차를 사려다가 그 의식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국산차를 타고 다닌다. 이자가 3부가 넘던 시절을 겪어서인지 남의 돈을 빌려 장만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꾼 것인데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있다. 저금리로 빌려준다는데 은행 돈을 못 빌려 써도 어리석게만 보인다. 아무나 그렇게 빌려주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실제 저금리 시대에는 이를 최대한 이용할 줄 아는 게 한 시대를 제대로 풍미하며 멋지게 사는 풍속도 되는 것이다. 요즘 근검절약을 말하는 사람이 어디 시중에 있는가. 그것이 또 한 시대의 행복추구방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우리가 애써 일하는 것도 그리고 추구하는 모든 학문도 행복을 찾고자 함이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기쁨만도 쾌락만도 아니고 만족해서도 아닐 것 같은 행복이라는 상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행복에 대한 정의는 막연하게 느껴진다.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일 수 있으며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행복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행복이라는 대상은 모두가 인정할만한 하나의 성질일까?
행복은 모두에게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행복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냐 이고 무엇을 생각하던지 그 이유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떠오르는 행복의 실루엣이다. 그렇다고 만족하기가 쉬운가. 그럼 무엇이 행복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것? 혹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만족된 삶을 살아가는 것? 아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추세로서도 행복의 체감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 현실감각적 행복 추구 시대이다. 변한 시대만큼이나 사는 현실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노력했던 결과를 얻게 되는 순간 혹은 인정받는 순간 그리고 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에 행복하다는 그런 현실감각적 행복으로 변모했다. 멀지 않으며 손에 잡힐 듯한 따스한 그런 감각적 기류. 멀리 내다보며 행복은 과연 있는 것인가? 행복을 우리는 얻을 수 있을까?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이 충족되면 우리는 행복할까? 이런 의식은 고리타분한 이상론에 불과한 요즘 세상이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행복의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인식하기 때문 현실만족을 그렇게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싫든 좋든 고생을 모르는 그들에게 세상을 맡겨야 하고 미래를 책임져주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트랜드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교감이 필요한 시대, 굳이 지금에 와서 평생 장에 넥타이를 목숨처럼 걸고 걸어온 인생이라든지 탄광촌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가 과연 그들만큼 한탕주의로 돈을 벌어볼 꿈을 꾸지 않았는지, 키가 넘는 깊은 뻘 밭에서 널빤지 하나로 의지하며 바지락을 캔 어머니가 새벽이면 불 밝은 외지로 나가고 싶은 생각을 왜 접었는지, 이제와서 굳이 꺼내서 뭐 하겠는가. 인생은 그렇게 품위 있고 고상하게만 살 수 있는 마당이 아니며 은행을 털 듯 한탕주의로 살다가는 꿈의 터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하여 그들의 행복론이 뒤바뀌기라도 할 것으로 보는가.
나는 이제 꿈을 접었고 가만 그들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요즘은 정치에 대해서도 웬만하면 젊은이들 편에서 응원을 한다. 굳이 따져 뭘 할까. 그들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개성도 필요하고 그때그때 즐거움도 만끽하고 여행도 충족되어야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다. 분명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결국 변해야 할 것은 기성세대인 우리다. 그래야 같이 더불어 즐겁게 잘 살 수 있다. 내 소확행에서는 그것도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첫댓글 분명 달라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가끔 잔소리를 해서 꼰대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살아온 세대가 다른 걸 어쩌겠습니까. 우리 세대는 꿈을 위해서 미래를 저당잡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현 세대는 현재에 더 투자하는 것 같더군요. 그만큼 당차고 능력이 있는 세대인지도 모르지요...
공감합니다.ㅋ 조카들을 봐도 없다 없다 하면서 넓은 아파트에 살며 해외여행 가고 겨울엔 스키 타러 가고. 어떤 조카는 결혼할 생각도 없나 파리에서 묵고 있고. 그들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합니다. 어이 없기도 걱정스럽기도 하면서 사는 것 같이 사는구나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