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다를 떠난 우리는 멕시코 남서부의 고원도시 와하카(Oaxaca)로 향한다. 와하카 주는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가 멕시코에서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잘 알려진 사포텍과 믹스텍 원주민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16개의 부족이 살고 있다. 주민의 3분의 1 이상이 원주민 언어를 쓰고, 그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스페인어를 아예 하지 못한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시에라 마드레 산맥이 가로막고 태평양을 마주하는 지리적 고립성 때문에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다.
‘멕시코적인 삶’을 엿보다
식민지 시대의 석조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된 와하카는 세계문화유산 도시다
멕시코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사라진 ‘멕시코적인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와하카. 그 와하카 주의 주도인 와하카는 인구 3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로 해발 1,545m의 분지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 도시다. 도시의 중심지인 소칼로 근처의 노천 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소칼로(Zócalo)는 배꼽이란 의미로 보통 중앙광장을 말한다. 멕시코 어느 도시에나 있는 소칼로는 시민들의 쉼터이자 도시의 중심지다. 와하카의 소칼로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거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들은 대부분 원주민의 얼굴을 하고 있다. 거리에는 알록달록한 망토를 두르거나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남자들, 앞치마를 두른 것 같은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지나간다. 식민지 풍의 건물과 함께 어우러진 원주민들의 모습이 이 도시에 독특한 색깔과 향기를 드리운다.
와하카 원주민 부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소녀들
소칼로에서 이어지는 알칼라 거리를 따라 산토도밍고 성당으로 향한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이 거리의 주변은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석조건물이 늘어섰다. 끝없이 이어진 바와 카페, 작은 갤러리와 기념품 가게들이 관광객의 지갑을 노린다. 산토도밍고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목에는 사람 형상의 조각 수백여 개가 도열하듯 서 있다. 마치 이 도시의 예술적 감수성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와하카는 멕시코 현대 미술의 중심지라더니 도시 전체에 예술적 향기가 배어있다. 골목마다 가득한 갤러리와 수준 높은 공예품과 그림을 파는 가게들, 화사한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건물들... 와하카는 한 두 곳의 명소를 지닌 그저 그런 도시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완벽한 작품 같다. 어떤 골목을 걸어도 멋스럽다. 나는 ‘남미 최고의 도시’ 목록에 이 도시를 올려놓는다.
산토도밍고 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조각 작품
산토도밍고 성당은 와하카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멕시코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1608년에 완공된 성당 내부는 화려하기가 비할 데가 없다. 거대한 제단이 전부 금으로 발라져 있고, 삼면의 벽이 입체적인 부조로 틈도 없이 채워졌다. 와하카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건물 벽이 두꺼운데 이 성당 역시 벽 두께가 2미터에 달한다. 성당에 딸린 와하카 문화 박물관으로 향한다.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멕시코에서 손꼽히는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몬테 알반 유적지에서 발굴된 도자기들, 미스텍이나 사포텍 문명의 유물을 시대별로 전시해 와하카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11월20일 시장 안의 고깃집들
성당을 나와 11월 20일 시장으로 향하는 길, 거리의 노점상이 메뚜기볶음을 산처럼 쌓아놓고 판다. 그것도 매운 맛에 따라 6단계로 나뉘어진 메뚜기볶음이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친구가 메뚜기볶음을 중간 매운 맛으로 한 봉지 산다. 오늘 저녁, 그는 메뚜기볶음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겠구나. 시장으로 들어서니 신세계가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양 옆으로 고깃집이 늘어선 시장 골목에는 고기 굽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자욱하다. 최고단계의 육식주의자인 그는 벌써 흥분한 상태다. 가게에서 고기를 고르면 바로 숯불에 구워주는데 옆 가게에서 파나 고추 같은 야채를 사서 같이 건넨다. 종이에 이름을 적어준 후 먹는 장소로 이동한다. 이번에는 야채와 소스, 또띠야를 파는 가게에서 원하는 것들을 주문하고 기다린다. 어쩐지 동해 바닷가의 회센터에 온 것 같다. 드디어 구운 고기가 나왔다. 또띠야에 고기와 구운 파, 소스를 얹어 허겁지겁 입에 넣은 그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나는 또띠야에 야채만 싸서 먹지만 왁자지껄한 시장의 분위기가 좋아 덩달아 즐겁다.
또띠야를 구워 파는 가게
2천년을 살아 온 삼나무
다음날은 투어를 신청해 와하카 주변을 둘러본다.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은 엘툴레. 2천 년을 살아 온 삼나무다. 몸통의 직경이 14미터나 되는 거대한 나무. 높이 42미터, 둘레 58미터. 서른 명의 사람들이 손을 잡아야 이 나무의 둘레를 감쌀 수 있다고 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성함이 전해지는 나무다. 기대치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다. 안타까운 건 단체 투어라 이 나무와 함께 할 시간이 15분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는 2천년을 건너온 나무 한 그루가 전해주는 푸르고 성성한 기운을 탐욕스레 빨아들인다.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수령 2천 년의 나무
두 번째 찾아가는 곳은 천연염색으로 카펫을 짜는 곳. 이 더운 나라에서 웬 카펫이냐 싶지만 카펫은 와하카의 특산품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메스칼 공장. 메스칼은 선인장의 한 종류인 용설란 아가베로 만든 술이다. 그 유명한 데킬라는 이 증류주를 처음 만든 지역의 이름이라고 한다. 데킬라 브랜드로 나오는 메스칼은 이제 너무 유명해져서 현대식 공장에서 만들어지는데, 와하카의 메스칼은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제조된다. 데킬라는 전기로 아가베를 익히고 발효도 기계를 써서 단시간에 끝낸다. 반면에 와하카의 메스칼은 아가베를 4등분 해 장작불에 잘 구운 후에 잘라서 6일간 발효시킨 후에 자연 증류하는 옛 방식을 지키고 있다나.
메스칼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난 후는 시음과 쇼핑 시간. 순수한 메스칼부터 온갖 맛을 가미한 혼합주까지 다양한 메스칼이 눈앞에 놓여있다. 전갈이나 애벌레가 들어있는 병도 보인다. 술을 좋아하는 그는 신이 났다. 건네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시며 맛에 대한 품평도 잊지 않는다. 술에 약한 나는 열대과일을 섞어 달콤한 맛이 나는 메스칼이 입에 맞다. 선물용으로 작은 메스칼 두어 병을 구입하고 나오는 길. 이곳을 나서는 관광객 대부분이 몇 병씩 메스칼을 들고 있다.
죽은 자의 장소
그 다음은 미틀라의 사포텍 문명 유적지를 둘러보는 순서가 기다린다. 미틀라는 9-12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곳으로 종교 행사를 이끄는 제사장들이 살았던 유적이다. '미틀라'의 어원은 고대 멕시코어의 ‘죽은 자의 장소’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스페인이 침략한 후에도 멕시코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종교적인 집회 장소로 사용된 곳이다. 유적을 둘러보니 신전의 외벽의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새겨진 부조가 인상적이다. 이 지역에서는 이 문양을 이용해 카펫을 짠다고 한다.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가톨릭 교회를 세운 침략자의 오만함이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이에르베엘아구아에 발을 담근 여행자들
점심을 먹고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은 이에르베엘아구아. 급경사의 좁은 비포장 산길을 돌고 돌아 달려간 차가 멈춘 곳은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한 산정. 이곳에는 ‘큰 폭포’와 ‘작은 폭포’라 불리는 두 개의 폭포 모양의 바위 절벽이 있다. 탄산칼슘과 미네랄이 과하게 포함된 용천수가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과정에서 침전을 이루면서 형성된 바위다. 동굴의 중유석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고 한다. 산정에는 땅 속에서 솟아난 온천수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웅덩이를 이룬다. 사포텍 부족은 이 자연적인 급수 시스템을 신성시 여겼다고 한다. 이곳의 풍경은 터키의 파묵칼레와 비슷하다. 규모가 작은 멕시코 판 파묵칼레라고나 할까. 우리는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산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가 또 이렇게 저물고 있다. 와하카로 돌아온 우리는 카미노레알호텔의 디녀쇼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멕시코 음식의 진수, 와하카
미식의 고장 와하카에 왔으니 요리를 배우는 것도 빠질 수 없다. 남미에서 음식이 가장 맛있는 멕시코, 그 멕시코에서도 음식하면 와하카라고 하니 요리학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그런데 가이드북에 나온 요리학교들은 다 예약이 찼거나 수업이 없다고 한다. 결국 숙소에서 추천해주는 작은 요리학교를 찾아간다.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또띠야 만드는 곳에 가서 직접 또띠야를 만들어본다. 그 후 4가지 대표적인 와하카 요리를 만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미식의 고장 와하카의 시장에서는 호박과 더불어 요리용 호박꽃도 함께 한다
와하카 요리의 기본은 ‘몰레’다. 소스를 뜻하는 몰레는 고추나 양파, 각종 허브와 야채를 돌확에 갈아서 만드는데 그 색에 따라 노란 몰레, 붉은 몰레, 검은 몰레 등 7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우리가 오늘 만드는 몰레는 붉은 색을 띤 몰레 콜로라도와 초록색의 몰레 베르데. 그리고 그 유명한 아보카도를 이용한 와카몰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몰레다. 잘 익은 아보카도를 으깬 후에 다진 고추, 양파와 토마토를 넣고 라임즙과 소금, 후추를 섞으면 끝. 요리 선생님은 아보카도의 맛이 모든 것을 결정하니 잘 익은 아보카도를 고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아보카도와 튀긴 또띠야를 넣은 아즈텍 수프, 레드 몰레를 끼얹은 새우 요리 등을 차례로 만들어낸다. 레시피가 훌륭해서 요리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다 만든 네 가지 요리를 차려놓고 부겐빌레아가 활짝 핀 정원에서 점심 식사를 즐긴다. 이럴 때 메스칼 한 잔이 빠질 수는 없다.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한 와하카의 요리학교에서 만들어본 와하카 음식
와하카에서 보내는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몇 개의 박물관과 갤러리를 드나들며 보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좋아하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오후를 다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소칼로의 광장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소일하기도 한다. 그리고 매일 저렴하고 맛있는 와하카 음식의 향연을 즐긴다. 와하카에서 우리가 가장 사랑한 식당은 11월 20일 시장의 고깃집과 산토도밍고 성당 근처의 작은 카페다. 그곳의 메스칼을 넣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으니.
매운 맛의 정도에 따라 6단계로 나뉜 메뚜기볶음
와하카에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사포텍 문화의 가장 중요한 유적지인 몬테 알반조차 가지 못했다. 와하카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보내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내일, 내일 하며 미루다 보니 어느새 떠날 날이 다가와 있었다. 여행지에서 예정했던 것들을 다 하지 못해도 괜찮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이유 하나를 남겨놓고 떠나는 셈이 되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의 두 번째 와하카 여행은 몬테알반의 피라미드를 찾아가는 일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