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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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38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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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화성시 남서쪽에 자리한 평택시는 고구려의 영토로 하팔현(河八縣)으로 불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호수가 197호이고, 인구가 704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8명, 진군이 3명, 선군이 78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1914년 양성현과 직산현의 일부를 떼어내 진위군(振威郡)이 되었다가 1924년에 평택이 되었다.
평택의 풍속은 대체로 부드럽고 순하니 유달리 굳세고 과감하여 떨쳐 일어나는 기운이 없다. 이는 또한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글공부나 무예에 힘쓸 겨를이 없어 일찍이 마음에 두지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에 실린 평택의 풍속을 논한 글이다.
재능과 기예가 있으나 무인이 선비보다 많다. 백성들이 근본인 농업에 힘쓰고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아서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드물다.
같은 책에서 진위의 풍속을 논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박서생의 시에 “물 천천히 흐르고 산 낮으며, 옥야는 평평한데 주민들은 골골마다 밭갈이를 일삼는다”라고 하였고, 노숙동이 “기름진 들 멀리 손 모양 평평한데 농부들 도롱이삿갓 쓴 채 구름 헤치며 밭을 간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평택은 들이 넓어서 쌀의 본고장, 즉 경기미의 본고장이다. 조선 초기의 학자 하륜은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 하였고, 서거정 또한 “삼도의 요충이 되는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처럼 평택은 서울에서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했다. 그뿐 아니라, 『평택군지』에 따르면 청북면 고잔리의 고잔포는 한강 하류를 거쳐서 마포나 인천으로 가는 뱃길 중에서도 중요한 포구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큰길이므로 사신과 빈객의 행차가 잇달아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공제하느라 넉넉하지 못함이 염려된다”라고 하여 이곳 평택의 어려움을 토로하였으며, 서거정 또한 “이 가난한 백성과 궁폐한 아전이 번거로운 영접과 전송에 곤란을 당하고 또 무슨 무슨 다른 일을 거론할 것이 있으랴” 하며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벼슬아치들이 묵어가던 객사마저 “터가 낮고 습하여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위태한 곳이 거의 반이나 된다”라고 하였을 만큼 가난했던 곳이 바로 평택이었다.
그러나 평택 일대에 철로와 길이 뚫리고 한국전쟁 전까지 숯을 구워 팔던 송탄시 신장동 일대에 미군 기지와 비행장, 기지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로 변모하였다. 1995년 1월 송탄시와 통합된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와 평택항이 건설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이 지역을 흐르는 안성천을 중심으로 평택평야가 드넓게 펼쳐지는데, 그런 연유로 평택을 두고 ‘돌이 없고 칡이 없고 산다운 산이 없고 물고기가 없다’는 뜻의 ‘평택 팔무(八無)’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한편 당시 진위군 관할이었던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는 수도사라는 절이 있다. 창건 연대가 분명하지 않은 이 절이 바로, 원효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는 유명한 전설이 서린 곳이다.
수도사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에 위치한 수도사는 창건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는 유명한 전설이 서린 곳이다.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의 광덕산에는 심복사(深福寺)가 있다. 명종 4년(1549)에 파주 문산포에 사는 어부 천의문이 배를 타고 아산만까지 와서 고기를 잡고 있는데 큰 돌이 자꾸 그물에 걸리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였다. 그 부처를 공손히 모셨더니 그날 밤 꿈에 돌부처가 나타나 현몽하기를 “내가 있을 곳은 심복사니라. 파손된 배의 조각을 거두어 절을 지을 때 임자 없는 검은 소 세 마리를 끌어다가 부리도록 하여라” 하기에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뒤 그 부처가 아주 영험하여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아랫도리에서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하며, 보물 제565호로 지정되었다.
청일전쟁 때 청군과 일본군이 아산만과 평택에서 격전을 벌였을 때 나온 말로,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우겠다는 뜻의 ‘아산이 깨어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이 유래된 곳이 평택시 소사동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번 국도를 따라간 곳에 오산시가 있다. 조선 말까지 수원 관할이었던 오산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60년의 일이다. 1970년 화성군 청사를 수원시에서 오산읍으로 옮기고 1989년 1월 오산시로 승격하였다.
오산시 안삼미에서 세교리로 넘어가는 중밋고개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 만에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곳에 현재 유엔군 전투비가 세워져 있다. 오산이라는 지명 외에 오미장 등으로 불리는데,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다. 한편 오산시 궐동에는 궐리사(闕里祠)가 있다. 이 사당은 공자의 64세손 공서린이 이곳에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으므로 정조 16년에 임금의 명으로 공자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궐리사
오산시 궐동에는 궐리사가 있다. 이 사당은 공자의 64세손 공서린이 이곳에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으므로 정조 16년에 임금의 명으로 공자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은 낮고 옥야는 평평한 평택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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