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청령포,자귀루 답사 [ 한국의산천 ]
청령포 귀향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조선왕조 여섯 번째 임금자리에 오른 단종. 그는 수양으로 상징되는 왕족과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대신들 사이의 권력암투 희생양이다. 임금자리에 오른 세 해 뒤인 1457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한 여름으로 접어드는 음력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단종이 피눈물을 흘리며 거쳐 온 유배 길 700리 한양~하남시 배알미리를 거쳐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을 거쳐 그리곤 초현리의 원통고개와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와 귀래면 운남리 뱃재를 넘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제천시 박달재와 원주시 신림면의 황둔고개를 또 넘었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어음정을 지나 서면 광전리의 군등치와 신천리의 배일치를 힘겹게 넘었고, 영월읍 나들목 소나기재를 지나 청령포까지 7일만에 도착했다. 신림과 황둔을 잇는 황둔고개는 가파르고 험준해 겨울철엔 눈이 조금만 와도 차량통행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터널이 뚫려 수월하게 오갈 수 있다. 황둔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가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군등치. 영월군 주천면 거안리와 서면 신천리 사이에 있다. 군등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휘어서 올라간다. 고개를 오르면서 단종이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 데 이다지도 험한가"라고 물으니 수행하던 왕방연이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군등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군등치를 지나면 서면 면사무소가 있는 신천리가 나온다. 단종이 이곳을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와 단종의 행렬을 향해 통곡했다. 그래서 옛 지명은 울 명(鳴)자 벌일 라(羅)자를 써서 명라곡이라 불렀다. 명라곡 마을은 서면 면소재지로 변했다. 배일치(拜日峙)는 신천면사무소와 남면 북쌍리 사이에 있다. 유배지가 가까워지자 단종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서산에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규섭 칼럼 참고)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 청령포 단종은 청령포(서강 청룡포의 물줄기는 동ㆍ남ㆍ북 삼면으로 둘러 흐르고, 서쪽은 험한 산이 절벽을 이루어 배가 아니면 건너갈 수가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에서 2달 정도 머물다 서강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영월 동헌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세조 3년(1457년), 순흥으로 귀향을 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다시 발각이 되어 금성대군은 죽음을 맞게 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고, 영월로 유배된 지 1년 5개월만이었다.
단종(端宗) 1441. 7. 23생 조선 제 6대 왕(재위 1452~1455) 제 5대왕 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고 비는 정순왕후 송씨이다. 1448년(세종30) 왕세손, 1450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하였으나, 연소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455년 상왕,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가 다시 서인에 떨어졌다가 1457년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 배에서 내리면 울창한 송림이 반가이 맞아준다,
▲ 숲 입구에 서있는 금표비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인 것이다.
▲ 관음송 단종 遺址碑閣(유지비각)서편에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 물수재비를 뜨는 어린아이들. 세월은 흘러 슬픔은 가슴에 남고 단종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종의 나이였을 때의 천진 난만한 어린아이들은 청령포 강가에서 돌을 던지며 물수재비를 뜨고있다.
여기 청령포에 갇힌 어린 임금 단종은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기곤 했다. 실제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홍수로 물이 차는 바람에 곧 영월 읍내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져 여기서 사약을 받게 된다.
▲ 관풍헌 자규루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관풍헌은 본래 고을의 객사로 쓰던 건물로 영월읍의 중심에 있다. 고색창연한 큰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잇닿아 있는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썼고,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 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종 복위 후 단종의 원찰(願刹) 이었던 보덕사(保德寺)의 포교당으로 쓰고 있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血漏春谷落化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 장릉 가끔 들르는 곳이지만 이번만큼 이렇게 차가 많고 관람객이 많기는 처음이다.
▲ 호젓한 산길을 10분정도 올라가면 그리 규모가 크지않은 작은 왕릉이 나타난다.
▲ 조선 6대 왕 단종릉 장릉.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지고와서 산길을 오르다 보니 노루가 한마리 튀어 도망가기에 그곳을 보니 눈이 녹아있어 이곳에 암매장하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역대의 왕릉을보라 그들의 묘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단종의 묘는 좁은 산릉의 그 끝에 오롯이 비좁게 서 있음을...
▲ 배식단
▲ 배식단사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폐(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 영월의 호장 엄흥도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엄흥도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로 유명하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지금의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 역사 자료실로 유물과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 창절사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사림(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사육신과 생육신 생육신
▲ 장릉 바로 옆에 위치한 보덕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발봉산(鉢峰山)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86년(신문왕 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지덕사(旨德寺)라 하였다. 1132년(인종 11)에는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4성전(四聖殿)·염불암·고법당(古法堂)·침운루(沈雲樓) 등을 증축하였다.
장릉가는 길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만종분기점에 이르러 중앙고속도로를 탄다. 이 고속도로를 따르다가 신림인터체인지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는 88번 지방도로를 탄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여량부원군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년) 정월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에 봉해지자 의덕왕대비(懿德大王妃)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린 것이다. ▶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를 동정하여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가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1401년 (태종 1)년 7월 신문고(申聞鼓)설치 5월 단종(端宗) 즉위. 다음 답사지 클릭 ■☞ 요선정,요선암,주천강의 아침 |
출처: 굽이치는 산맥넘어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