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동 교차로를 지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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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8.
[내 마음 속의 이곳] <13> 안락동 교차로를 지날 때 / 소설가 이복구
젊음 바친 야학, 아린 옛사랑 같은…
어쩌다 차를 타고 무심코 동래구 충렬사 앞 안락동 로터리를 지날 때면 뒤통수가 팽팽히 당기면서 머리가 저절로 돌아가 멀어져 가는 교차로를 오래 바라보곤 한다. 우연히 만난 옛 사랑을 보는 것 같은 설렘과 애틋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다.
네 방향에서 쏟아지는 차들로 인해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교차로. 그 수선스럽고 무질서하고 견고한 길바닥 저 밑 아득한 깊이 어디쯤에 화석이 된 내 젊은 시간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1972년 신춘문예에 당선한 직후 나는 아무 대책 없이 산으로 올라갔다. 반송 본동 언덕에 있는 한 농가였다. 월남전에서 돌아 온 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쟁 꿈을 꾸었다. 적을 만나 맹렬하게 총을 쏘는데 내 총구에서는 한 방의 총알도 나가지 않아 적으로부터 무참히 사살당하는 꿈이었다. 낮이면 매일 산속을 헤매며 빈둥거렸다.
그 산 언덕에 놀러오는 후배들이 몇몇 있었다. 어느 날 한 후배가 내게 아주 작은 야학 얘기를 했다. 대학생 몇 명이 모여 시작했지만 남학생들이 군대를 가고 여학생들이 졸업하면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문을 닫았는데 밤이면 몇몇 아이들이 그냥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배는 내가 좀 맡아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게 남다른 사회 의식이 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후배가 순진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후배가 말했던 그 장소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실 일이 있었다. 술집에서 그 폐섬유공장이 빤히 보였다. 한눈에도 아이들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공장이었다. 호기심에 밀려 친구들과 헤어져 안으로 들어가 가보았다. 잡초가 자란 마당에는 더러운 물이 여기저기 고여 있었고 쇠로 된 창고 문은 시뻘겋게 녹이 슬어 있었다. 베어링이 고장 나 찌걱거리는 무거운 문을 간신히 밀고 들어가자 낡은 형광등 몇 개가 켜진 어둑한 실내에 소년들 다섯 명이 찌그러진 난로 주변에 둘러 앉아 있었다. 지붕이 새는지 바닥은 질척거렸고 양쪽에 배수로가 파여 있었다. 난로는 불기 하나 없었다.
왜 선생도 없는데 이렇게 모여 있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선생님들이 올 때도 있다고 한 아이가 말했다. 옆에 있는 또 한 아이는 선생님이 오지 않아도 친구들을 만나서 좋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우선 연탄 집에 가서 연탄을 스무 장 가량 사고 번개탄도 샀다. 난로에 불을 피우고 칠판을 등지고 앉아 얘기를 했다. 아마도 무슨 역사 얘기거나 소설 얘기였을지 모른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헤어질 때 아이들은 뭔가 잔뜩 배워 가는 것처럼 씩씩하게 인사했다.
어쩔 수 없이 이튿날에도 나가봤다. 전날보다 세 명이 더 많이 나왔다. 이날도 또 얘기를 했다. 사흘째는 또 아이들이 늘어났다. 동상동, 금사동, 명장동, 반송동의 아이들로 낮에는 과자 공장이나 각종 부품 공장에 나가지만 밤이면 취한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는 좁은 방 말고는 따로 갈 만한 데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며칠만 하던 것이 한 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각 대학 서클을 통해 강사 요원들을 구하고 경찰서의 힘을 빌려 후원회를 결성하면서는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혔고 교과서도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과 강사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교장 선생이라 불렀다. 어느 날 나는 허물어진 대문 앞에 대성학교라는 간판을 걸었다.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운영하던 학교였다.
1976년쯤에 그 섬유 공장이 도시 계획에 의해 교차로에 들어가게 돼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부터 학교 현판과 한 떼의 아이들을 이끌고 도시를 떠도는 대장정이 시작됐다. 안락동에서 동상동으로, 동상동에서 금사동으로, 금사동에서 명장동으로, 명장동에서 양정동으로. 동상동 시절은 마땅한 장소를 얻지 못해 주택을 전세 내 학원으로 썼다. 방은 교무실이 되고 홀은 교실, 옥상은 강당이 되었다. 큰 도로변에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들어와 강사를 지원하거나 후원 회원이 되기도 했지만 취객들이 뛰어들어 수업이 중단되는 사례도 많았다.
금사동 시절에는 현대 자동차 운전학원의 창고 건물을 빌렸다.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 다니다 책상 위로 떨어져 여학생들이 기겁을 했다. 학급 규모가 3학급이 되자 또 쫓겨났다. 이사 다니기도 만만치 않았는데 딱하게 본 경비원 아저씨가 나이 열 다섯에 일본으로 들어가 자수성가한 노인이 온천장에 사는데 도움을 청해 보라고 했다. 나는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매일 그 노인을 찾아가 궁지에 빠진 내 야학을 구출해 달라고 읍소했다. 마침내 노인이 마음을 움직여 명장동에 교실 6칸과 교무실, 숙직실까지 있는 2층 건물을 지어 비로소 학교다운 면모를 갖췄다. 만국기를 달고 구청장과 경찰서장이 오고 지역 유지들과 동네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성대한 준공식을 가졌다.
숙직실에서 깨어난 10월 어느 아침에 학원 담장과 나란한 이웃집 아낙이 박정희 피살 소식을 들려 주었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강사들을 체포하러 형사들이 들락거렸고, 잡혀간 강사들을 구출하러 다니는 게 교장의 중요한 임무가 됐다.
내가 야학생활을 접기 시작한 동기의 하나는 1983년 소설문학이란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 오면서였다. 등단 후 연락이 두절된 작가를 찾아 새 작품을 쓰게 하는 특집판이었다. 한 달 안에 단편 두 편을 써 오라고 했다. '사슬'과 '왼쪽에 앉아서'라는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대대적인 지면 할애를 통해 데뷔작과 신작을 분석한 작가론을 실었는데 과분한 호평이었다. 나로서는 제2의 등단을 의미했고 '아, 내가 소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이 생활을 붙들고 있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은 때마침 산업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산업체 부설 학교가 생기기 시작하자 노동 야학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교실에 못을 친다는 원칙을 정해 두고 있었으므로 강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폐쇄를 결행했다. 건물에 대한 미련이 적지 않았지만 어렵게 돈을 내놓은 노인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깨끗이 반납했다.
대신 때마침 생기기 시작한 방송통신고등학생들이 현장 수업이 적어 학업 부진에 시달린다는 문제점을 전해 듣고 새로운 형태의 야학을 구상했다. 양정시대는 그런 변화의 산물이었다. 청소년 단체인 비비에스 부산시 연맹과 협의하여 시설과 운영비 일체는 단체가 지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배관 시설이 어지러운 빌딩의 지하를 빌려 교실 3개를 만든 다음 각 고등학교 방통고를 방문하여 홍보하자 교실이 비좁을 정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1986년까지 학원을 관리한 후 손을 뗐다. 야학 생활 13년 만이었다.
가끔 아주 먼 곳에서 옛 제자들의 전화가 온다. "선생님 저 아시겠어요"하고. 그러면 나는 "안락동 시절이냐, 명장동 시절이냐, 양정동 시절이냐"고 묻는다. 스승의 날이면 초청도 온다.
강릉에서 자신이 그린 커다란 그림을 안고 오는 중년 부인도 있고 동기들끼리 결혼한 커플은 졸음에 겨운 아이들을 깨워 큰절을 하게 한다. 그런 자리에서 중년의 제자들과 강사들은 나도 모르는 내 지난날을 들려준다.
"그때 선생님은 참 멋있었어요"하고 취한 제자가 말한다. "아!" 하고 나는 놀라 제자를 쳐다본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졸업식 때면 매번 미안하다는 말로 그들을 떠나 보냈다.
오늘날 같으면 그 정도의 야학도 대안학교 취급을 받아 학제를 인정받지만 당시로서는 검정시험을 통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진학한 학생들은 스승의 날 선생님에게 술이라도 사지만 그렇지 못한 졸업생들은 어디서 여전히 힘든 세상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안락동 교차로를 지날 때 내 속에 파고드는 그 복잡한 감정의 가장 중심에는 옛사랑을 만났을 때의 설렘 못지 않게 그 옛사랑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었다는 부끄러움이 가장 클지 모른다.
# 필자 약력
1946년 경북 영일 출생. 1972년 서울신문 신춘 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불구경'. 장편 '그들의 에덴' 부산 매일신문 연재. 국제신문 논설위원·부산소설가협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