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현상이 벌써 보름을 넘어섰다. 핏기가 몸 속에 엉켜있는 기분이다. 올핸 여느 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맹위를 떨치는 무더위다. 지구 온난화라 하더니 지구 전체가 이상기후 농도가 짙다. 이제는 특이한 징후를 넘어서 본격적인 범주 내 들어선 것만 같다. 그런 어제는 한 밤중 얼마의 비가 쏟아 내리더니 그나마 조금은 숨이 덜 차다.
그렇다고 좀 낫다는 것이지 살만한 정도라 할 것은 아닌데 어쨌거나 바람 한줌 덕분으로 모처럼 단 잠을 챙겼다. 아침 출근 길 아스팔트는 벌써 고드러져있다. 신호등에 멈춰 섰다. 차 창문을 꼭 닫고 에어컨은 킨 상태이다. 신호등에 얹혀 늘어선 차의 행렬을 향해 누군가 다가선다. 이 더운 아침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젊은 친구이다. 앞에 선 차량 둘, 어느 누구도 창을 열지 않는 것이 다들 탐탁하지 않다는 기색이다.
그가 내 쪽을 향한다. 손에 든 빳빳한 팜플랫. 신형 차 카탈로그가 아닐까 싶었다. 역시 생각한대로다. 나 역시도 창을 열지 않고 고개만 내저었다. 백미러에 그가 보인다. 한 손에 거머쥔 카탈로그, 그 자세가 변함없는 것이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인도로 올라섰다. 이 염복에 정장을 하고 거리에 선 사람, 그의 모습이 감복을 넘어 삶의 모진 고난을 연상시킨다.
요즘 새 차를 사라는 선전물이 많다. 차 바뀐 지가 꽤 되었다는 것을 주인보다 그들이 먼저 안다. 엇비슷한 월급쟁이들이 엇비슷한 모델을 끌고 다니는 동네 전체 풍경을 제대로 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차 산 년 수는 그렇지만 질긴 꾀죄죄한 연구쟁이 스타일로 순순하지 않다. 전단지가 실효를 거두려면 최소 이삼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로서는 이 무더운 아침 아무리 고객이 왕이라는 세상이지만 맥이 탁 풀리고 말 노릇일 것이다. 카탈로그 하나 관심 있게 보아달라는 것인데 창도 안 열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니 박사마을이라더니 뭐 이렇게 도도한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오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이 아파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들이라 그러한지 직접적인 성향자들로 분명한 선택을 한다. 꽤 솔직하고 실용적인 사람들이다.
초상집에 가도 작업복 차림이고 청바지 출근복 차림도 종종 있다. 나도 그렇지만 아직 새 차를 살 생각이 없으니 아깝게 카탈로그를 낭비 할 필요 없다는 것을 솔직히 나타낸 것이다. 주는 사람 성의를 보아서 그냥 어물쩍 받아 챙겨두면 그만일것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 허술하고 꾀죄죄하지만 꼼꼼하고 치밀한 자존심 덩어리. 딴엔 시간 덜 소비하고 미련두지 말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자연스러운 기질은 아니다. 한 번쯤 더 생각해 볼 너그러운 마음은 더욱 아닌 것이다. ‘요점만 간단히’ 그리 듣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살 의향이 없음을 밝힌 것이지만 투박하고 무뚝뚝한 그야말로 멋 없는 스타일이다. 이처럼 소심한 실용주의자들은 본의 아니게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에고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보는 시야가 극히 관찰 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 얻는 오해이고 해프닝이다. 평범하게 공짜 물건 하나 챙기듯 가볍게 처신하면 될 것인데 그러하지 못하다. 비단 그들만이 아닌 요즘 도시인들은 모두가 철저히 자기중심이고 실용주의자들이다. 도심에서 자주 보는 전단지. 전단지 한 장 받는 아량조차 없는 퍽퍽한 세상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필요 없어서라지만 너무 삭막하다. 무관심은 무관심을 낳고 유발한다.어느 새 그가 원위치로 돌아와 서있다. 인도 편에 수북하게 쌓은 카탈로그가 보인다. 나는 창을 열었다. 그가 웃으며 달려오다시피 한다. 좋은 아침 되세요.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명쾌하다. 마치 차 주문이라도 받은 것 인양 한다. 살다보면 형식에 얶매여 고달프기도 하지만 형식적이라도 참여하고 관심 있는 편이 유리하고 좋은 때가 더 많다.
알고보면 세상의 질서는 형식에서 비롯한다. 질서는 외적 규범이 전부인 것 처럼 느끼지만 무형의 의식의 형태로 지배한다. 외국에서 자주 접하는 이질적인 특질은 그들만의 문화이며 질서이다. 의식이 조금만 바뀌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렇게 의식하며 차츰 바꿔온 우리의 질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싶고 이제는 선진국수준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범주는 대개 외적규범에 치우쳐 있다. 또 달라질 우리의 질서를 나는 기대 한다. 이 무료한 건널목에서 그의 싱긋 웃는 모습이 바로 내가 바라던 바이고 그가 이 무더운 아침 힘이 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나로선 카탈로그 하나 받아드는 것이지만 그에게는 큰 역할분담이고 값진 보람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하여도 어제 밤 짧은 단비에 촉촉한 느낌으로 잠을 제대로 청하였던 것처럼 그에게 삶의 여음 같은 짧은 산뜻함을 단지 선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쿨한 기분에서 벗어난 달콤함의 향유가 비단 나만 찾는 단꿈이 아니라 믿어지기에 앞으로는 생각을 고쳐 먹기로 했다. 나의 배려는 결국 내 참한 성심을 위한 길이기도 하니.
(조성원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