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이휘소박사님,안녕하십니까? 지난 번 편지를 받으셨을 것 입니다
무례한 것 여러가지 용서하십시요
제가 박사님께 편지를 띄운 후 이십 여일 동안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지상군 17000여명을 철수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이라도 귀국하여 주십시오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합니다
박사님의 귀국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절박하고 상황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다시는 미국측에 비굴할 수도 없고, 비굴하지도 않겠습니다
박사님,다시 청하오니,귀국하여 주십시요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스케줄을 더듬어 보았다
4월 8일 하바드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학술회의 참가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내로 마쳐야 한다
이휘소는 광적으로 논문에 매달렸다
이 논문은 특히 Dimu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Quigg Thacker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논문이다
4월 25일 탈고를 끝낸 이휘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버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그럴 경우 무기가 없거나 상대에 못 미치는 무기를 가지고 덤빈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74년에 귀국했다가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당시 미국내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센티 세로 4센티 정도로 밀봉이 되어 있는 문서였다
그것은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정밀하고 치밀한 계산서였다
"이것을 다리의 뼈 속에 넣어 주십시오."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
"얼마 동안은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김박사가 만류한다고 이휘소가 자기의 결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것도 평소부터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휘소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항상 교포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부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소독이 된 서류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살람교수(78년 노벨상수상)는 물리학에 새로운 경지의 논문리라고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곁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고맙소...이박사"
박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또 지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강의를 했다.
(3)
다음에 계속
1977년 5월 27일,미국에 돌아온 이휘소는 매사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연구소에서의 역할도 더욱 활발했고,대학에서의 강의도 가장 충실한 교수로서,
그는 미국과학계에서 가장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아내 마르안느(중국계 말레이지아 태생인 미국인),
아들 천,딸 안에게 정성을 다 했다
1977년 6월16일 콜로라도주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소에서 초청강의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아들,딸을 뒤에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페르미연구소에는 이휘소에 딸린 전문기사가 있지만
휀만한 일에는 이휘소가 직접 차를 몰았다
시카고교외를 지나 일이노이주에 진입하였을때,
앞에서 오는 트럭이 별안간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의 차 정면으로 돌진하였다
운전대에는 어떤 흑인이 타고 있었고,
이휘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휘소의 차는 주행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어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트럭은 100m나 되는데서부터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차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이휘소는 쓰러지고...
마르안느,천이 안이는 삽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정신을 잃었다
마리안느는 직갑적으로 아~소리를 지르며 상대방 흑인의 운전솜씨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휘소의 차를 받은 차는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었다
차가 정지하고 경찰이 오고...이휘소를 차에서 끌어내고...
페르미연구소에 비상벨이 을리었다
이휘소의 차에 설치된 긴급벨이었다
FBI,CIA에서 페르미연구소장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이휘소 교통사고로 사망...상대는 50대 후반의 흑인...도주했음"
미국무장관실에도 비상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FBI,CIA 요원이 삽시간에 주위 400km의 도로를 감쌌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범인에 대한 소식은 전연 발표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부딪쳤으며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어 죽었는지 조차 발표하여
주지 않았다
"이휘소 사망..."UPI,AP,로이터 통
신으로 세계 언론계와 각국
대사관으로 속속 전달되었다
밤 11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긴급 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박대통령은 전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통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박대통령은 지난 번 밤 1시에 청와대에서 잠시 이휘소를 만났을 때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그의 눈빛을 읽었었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말없이 다리 속에 숨겨온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넘겨
주던 이휘소...
박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당장에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해,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국놈들을 전원 �아 버려..."
무슨 일이거나 그렇게 해...개새끼들...
"이휘소가 죽었습니까? 각하...
"죽은게 아냐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
"미국이 그랬지,그 새끼들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지를 않나?"
"이휘소는 미국 CIA에서만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으로 이휘소를 24시간 감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도 이휘소 때문에 신경을 쓴다는 정보도 있고..."
"어쨋거나...이휘소는 미국에서 죽였어...아니,설령 미국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도
보호를 해야지,개새끼들...도덕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범인도 안 잡았다는 거야..."
"미국대사께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쫓아버려...쌍놈의 새끼들...그리고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이튼날 박대통령은 직접 나타나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내외기자를 불러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마치 한국을 식민지시하고 있다
주권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의 발언은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미사일부대 완전 철수,
지상군 2만여명 철수...연말까지 전 미국 철수 예정...
이렇게 하는 국가를 믿고 국방을 의논할 수는 없다
미군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를 우리도 가지면 된다."라고
청와대국무회의에서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이휘소의 장례식이 끝나고,
물리학자들은 일 년만 더 있다 죽었어도 노벨상을 타고 죽는건데...
이휘소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두 달 후에 박대통령은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상식에는 이휘소를 대신하여 이휘소의 어머니가 받았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훌륭한 분이었는데...너무 아까운 분이었는데..."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휘소가 박대통령에기 유도탄 및 핵제조개발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를 전후하여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했다
핵관리의 엄격한 체제구축,우방국에 대하여 한국과의 핵협정 파기 등을
강력히 요구했을 뿐 아니라 카-터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은 인권탄압을 중지하고,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추진을 바로 중지하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에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데려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카-터는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응수했다
한국과 미국은 상호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거기다가 박대통령은 감정적인 발언마저 서슴없이 해 버렸다
"국가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도 자기들은 다 만들어 놓고 남의 나라 보고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패권주의 사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박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카-터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카-터는 그런 박대통령에게
"박대통령은 반체제 인사를 즉각 석방하라,그리고 핵무기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2억9천2백만달러의 미수출입은행 차관약정을 파기하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한미간의 대립은 박대통령에게 유도탄개발과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박대통령이 하도 야단이니까 한 측근이 핵공장을 비밀리에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어,관여하지 말게,곧 돼,그것만 되면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영남대학에나 내려가 있겠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한국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합동으로 제작하는 유도탄개발과 핵개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직접 전화로 확인하고,일주일에 한두 번은 예고없이 들리어
연구원들과 종사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의 집념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한가할 때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휘소으 영상을 더듬었다
다리를 베고,뼈 속에서 메모지를 내 주던 모습...그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감격하였던 대통령 자신의 모습...이휘소가 차에 깔려 죽는 영상...
지금까지도 의문의 죽음에 한 마디 변명도 없는 미국...
박대통은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휘소가 내어 준 메모지대로는
다 실험을 거쳐야 할 책임을 느끼었다
유도탄개발과 핵무기개발은 외국의 지원없이 독자적인 기술과 자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지만,박대통령의 열성에 감격한 과학자들과 600여명 직원의 협조에
의하여 해결되곤 하였다
어려움이 산재하여 있었지만...
핵분열물질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개발 등이 문제였다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한국과 핵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았고
맺었던 핵원료협정도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막막한 며칠이 지나면서,다시 이휘소의 메모를 펼쳐 보았다
<실험용> 원자로를 대체해도 좋다는 메모를 보는 순간,
연구실의 분위기는 벼란간 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몇 번씩 반복되었지만 그 때마다 이휘소의 치밀성에 감탄했다
이휘소는 천만 분의 일도 실수할 수 없도록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법과,
만약의 경우를 우려한 모든 준비물을 메모지에 준비하여 놓고 있었다
1978년 8월 26일 @@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공동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있었다
과거에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박대통령의 심정이나 과기처장관,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초조와 기대섞인 착잡한 심정이었다
첫 번째 대전차로켓 (3.3인치 로켓을 다시 개발) 실험은 성공이었다
두 번째 다연발로켓 (28연발 사정거리 20km) 실험도 성공이었다
세 번째 중거리로켓 (사정거리 50km) 실험발사도 성공이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소련제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같은 수준이었다
이것을 우리의 기술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마지막 관심의 촛점이었던 장거리유도탄발사실험도 성공이었다
사정거리 150km,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공의
일부지역까지 영향권이 미치는 것이었다
이 성능은 미국이 개발한 최신 장거리유도탄 나이키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유도탄 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장거리유도탄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박대통령은 마지막 장거리유도탄발사 실험마저 성공하자
너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감격하고 있는 박대통령을 바라보던 과기처장관,국방장관,관계 과학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대통령은 임원들의 노고를 일일히 치하하고 차에 올라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박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다시 이휘소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의 영상과 어울려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이휘소의 희생과 박대통령의 눈물겨운 나라사랑을 새삼 알게 되면서,
그 두분이 살아있다면...경제나 모든 것에 미국에 이끌려다니지 않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대한민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4)
다음에 계속...
다음날 미국을 제외한 소련,중국,일본,프랑스,영국,서독은 물론
홍,상가포르등 전세계 신문의 일면 톱기사는 하나같이
<한국 정거리미사일 발사 성공-한국에서 핵무기개발은 시간문제>라고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의 <적성>지에서는 전면 톱기사로 다루고 사설까지 동원해
염려스런 사태라고 논평하였다
중구,일본,홍콩,프랑스에서도 해설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세계가 경악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다만 미국만이 침묵했다
침묵한 것이 아니다.미국정부의 훈령을 받은 미국대사'스나이더'는
과기처장관을 자주 방문했고,박대통령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아예 미국대사와의 면담마저 저절했다
분위기는 냉냉함을 넘어 험악해 지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몇 번이고 독백을 다짐했다
"이제,이휘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도 중단할 수 없다.
지금 의존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면,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휘소도 남에게 의존만 하면 눈치만 보는 조국을 볼 수 없어 죽을으로써
자립의 기틀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결의를 다짐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영상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카-터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에 강렬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1970년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있었던 선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온 것이다
2박3일의 예정으로 방문한 카-터는 의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도착성명도 없이
밤8시 56분에 트랙에서 내리자 헬기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사단병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날 그는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는 걸맞지 않게 팬티바람으로 미군사병들과
조깅을 했다
이것은 박대통령이나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다
6월 30일 청와대를 방문한 카-터는 인권탄압완화,긴급조치해제,
한국의 핵개발 추진 중단을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를 즉각 거절,일축해 버리었다
양국관계는 파국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개발은 세계 핵확산금지법에도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국가,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리 한국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못 만들게 하는 것은 패권주의 발상이 아닌가?"
박대통령과 회담을 끝내고 미대사관에 도착한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15분 이상이나 차 속에서 보좌관들과 회담을 했다
극비의 긴박한 지시를 내리는 분위기다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주한미국철수도 일시 중단되었다
표적인 이유는 북한의 전쟁도발억제,소련의 태평양군사력증강 등을 들었으나,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추진을 포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해,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청와대별실 궁정동
지하에서 죽었다
김재규는 정말 미국 CIA요원이였을까?
한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김재규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일까?
당시 건설부장관은 ...
"박대통령이 핵개발에 대한 집념은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념 때문에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휘소의 죽음과 박대통령의 죽음이 다 미궁 속에 빠진 채,
누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역사의 격류 속에 묻혀져 갔다
1980년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원자력연구소와 핵개발공단은 <에너지 연구소>로
과학원과 과학기술연구소는 <과학기술연구원>으로 통합되었다
새로 부임한 전두환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에 새로 당선된 레이건을 찾아가
한국핵무기개발중단을 약속하고 댓가로 주한미군의 계속적 주둔을 약속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핵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은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이휘소의 이름도 역사의 무덤 속에 파묻혀 버리었다
글을 마치면서...
제가 이휘소박사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는 별 관계가 없는 분(전공이 다른 면에서_이라고 생각하였다가
한두 사람에게서 반복하여 듣는 동안 점점 흥미를 느끼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 미국을 방문하고,이휘소박사의 어머님을 10여차례 방문하고,
국립도서실로,서울대학교도서실로 자료를 찾아 쏘다니며 일년여를 지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었습니다
누구라도 이휘소박사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 놓아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최소한의 의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휘소박사에 대하여 쓴다고 생각하니,
우선 물리나 핵,원자력 등에 대하여 완전한 문외한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꼇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다가 몇 번 중단했었습니다
어떤 월간지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이유도 그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전공적인 것은 핵을 전공한 분들이 어느 때인가 정리한다 할지라도
이박사의 생활에 주로 착안한 글은 일단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필생활을 30여년이나 하면서 이처럼 책임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비한 능력이나마 정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휘소박사는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의심스로울 만큼 철저한 애국자요.
그러기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분입니다
지금까지 왜 이휘소박사가 죽었는가?
누가 죽이었는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이휘소박사는 말로 애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이휘소박사는 이론만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험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는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었고,
성공하지 않은 실험도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되새겨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몇 번이나 흥분도 했었고,
몇 번은 비애도 느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더 치밀한 조사로 보충할 것을 약속 드리며,
내용이 미비한 것이나 미숙한 점은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덧붙여 이 책의 인세 전액은 이휘소박사추모기념장학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쓸 것임을 약속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 호응을 부탁합니다
1989년 11월 편저자 공 석 하 드림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박대통령 욕을 했으면 하는 마음과 오직 사명감으로 사심없이 오직 가난한 나라와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하기 위한 일념으로...
경제대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불협화음도 있을 수 밖에 없어,
박대통령이 일군 많은 업적과 육여사의 나라사랑과 국민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서독에 방문했을때,
고생하는 우리나라 간호사와 광부들을 붙잡고 박대통령과 육여사가 조금만 더 고생하라면서
같이 울었던 글들을 읽다보면 같이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근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음이라...
1년만 더 살았어도 우리나라도 핵 보유국으로 ...
박대통령의 일화 한가지...
때는 한국군 육군 맹호부대의 파병으로
월남전의 열기가 한참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때 였다.
월남전 참전 당시에 전세계가 한국을 비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였지만
그들은 그런 한국을 보고 비난만 해대었을 뿐이었지,
누구도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원조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우리에게 그나마 조금의 원조라도 해준 국가가 있었으니
그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의 과거 남로당의 행적이 미국수뇌부의 의심을 받아,
미정부에서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복조치로 당시 대한민국 1년 예산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미국이 제공해주는 원조를 중단당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전 국민이 그야말로 아사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음을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서 한국과 미국이 다시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정희대통령의 월남전 참전결의였다.
당시 우리에게는 주어진 선택의 길이라는 것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해서 미국이 원조를 재개해준다면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입장임을 옳게 알아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생각해두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난한 대한민국,
굶어죽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쌀한톨, 기름 한방울 제공해주지 않았음을..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이 하는 일에 대하여 내정간섭을 시도할려고 했다는 것을.
나라가 가난하면 전세계가 그 국가를
자신의 노예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그 당시의 미국의 유명한 군사무기제조업체인
맥도널드 더글라스사(한국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의 발사때
많은 기술자문과 발사를 도와주었음-돈주고 샀다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됨.)의
중역인사가 한국을 방문해서 박정희대통령과 나누었던 실화를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자동소총이었다.
이전의 한국에서 사용하던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사였다.
미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 사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맥도날드 더글라스사의 중역)는 대통령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대통령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진 서류더미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배는 더 커보이는 책상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그의 先痔?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 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리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런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사에서 오신 데이빗 심프슨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게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바람 하나면 바랄 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이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동안 에어컨을 트는게 어떻겠나?"
나는 그제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의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정희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 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
"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것이오?"
"네. 물론입니다. 각하."
"대신 조건이 있소. 들어주겠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돈이오.
내 돈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나는 방금전과는 사뭇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