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추씨(秋氏)의 시조(始祖)와 각 파(派)에 대하여
1. 추씨의 시조에 대하여
우리 추씨의 시조에 관하여는 함경도 함흥연화도(蓮花島)의 적부라(籍符羅) 추엽, 송(宋)나라 중서령(中書令) 추부(秋富), 신라(新羅) 대사도(大司徒) 추자평(秋子平), 노(魯)나라 대부(大夫) 추호(秋胡)등의 원조(元祖) 내지 시조론(始祖論) 등이 있습니다.
먼저 추엽(가을추, 점심엽)이라는 분이 각 추문의 족보에 시조로 나타나게 됩니다. 기사(1869), 경술(1910), 계유대동보(1933)를 비롯하여 전주보인 임술보(1862) 및 각 파보에 기록을 보면 추엽조께서는 중국 남송에서 적부라라는 벼슬을 하셨고 치사하셔서 동해의 서기를 발견하시고 가솔을 데리고 우리나라 해동 고려국으로 오셔서 함경도 함흥 연화도라는 섬에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송나라가 기울어져가고 몽고족이 발호를 하여 신흥 원나라가 태동의 기미를 보이고 있던 시기였음을 볼 때 아마도 송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신 추엽조께서 송나라의 패망의 앞날을 내다보시고 고려로 귀화 정착하셨다는 설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하겠습니다. 이때의 정확한 연대의 기록은 알 수 없지만, 송나라에서 1141년에 문과에 급제하셨다하였으니 귀화연대는 그 이후로 추정할 수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이 분은 지금의 이북 땅인 함흥 연화도에서 고종하셨고 무덤이 연화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화도의 도민들이 신격화하여 제사로써 모시고 있다 하였습니다.
또 다른 주장으로 1960년에 발간한 족보인 경자보에 의하면 우리추씨의 시조를 신라 박혁거세왕 당시 대사도 즉 지금의 교육부장관 쯤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신 추자평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이는 밀양박씨의 족보에 그 사실이 나타나는데 추씨를 당시 신라 20개 문중의 하나라고 하였고 개국공신이라 하였습니다. 신라 때에는 군부인으로 추씨가 있었고 대군들 중에 추씨의 외손이 있었다고 합니다. 추자평에 대한 처음의 기록을 서기력으로 환산을 하면 서기 기원전 5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후 1000여년 이상 이 땅에 추씨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박씨들의 족보를 얼마나 믿어야 하는가하고 문중내에서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는 시각도 많이 있습니다. 또 경자보에서는 추자평공을 시조로 보고 추엽공을 1세로하여 족보를 만들었는데 시조와 1세를 구분하여 좀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추씨의 시조를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신 적부라공 추엽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고, 또다른 시각은 밀양박씨 족보에 그 기록이 있는 신라 박혁거세왕 당시 추자평이라는 분을 시조로 보고 종전의 시조로 보았던 추엽공은 1세조로 말하는 분들도 다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소흥지역에 중국에 가을 추자를 쓰는 성씨인 추씨들이 6,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근대 중국 여성혁명운동가로 유명한 추근여사의 일족들이라 하였고, 이분들의 선대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추엽의 형님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추엽조가 동방 고려로 가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전하여 들은 바가 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좀 더 조사하고 규명하여야 하겠으나 이분들이 중국으로 건너가신 추씨5세조의 운심재의 후손들인지, 아니면 추엽조의 형님되시는 분들의 후손으로 그 상대(上代)가 노나라 대부 추호공이나 송나라 중서령 벼슬을 하신 추부공으로 연결되어 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관련된 사적은 우리 추씨문중의 역사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 추씨의 각 파조(派祖)에 대하여
성씨(姓氏)에서의 파(派)라는 명칭은 시조로 부터의 갈래, 갈라진 계통을 말합니다. 흔히 파조(派祖)의 관작명(官爵名)이나 시호(諡號), 아호(雅號) 등을 따서 붙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족보를 보려면 "나 자신"이 어느파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하는데, 파를 찾으려면 족보 계보도(系譜圖) 위에 세계도(世系圖)를 보아야 합니다. 세계에는 대략 분파(分派) 계도를 그려놓고 무슨 파는 몇 권 몇 면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파의 분류는 족보에 따라 다소 그 분류를 달리 하기도 하는데, 현재 우리 추성(秋姓의각 파는 거의 선조님들의 아호(雅號)로서 분류하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먼저 1869년 기사, 1910년 경술, 1933년 계유보 족보상의 파분류로 세심당 추수경장군(명나라 무강자사, 조선의 상호군,정 1품 보국숭록대부 완산부원군 추증, 충장공 시호)의 다섯 아들 오곤계 또는 5곤제, 5형제공이라 하기도하며 휘 노(명나라 안찰사, 조선의 통정대부 사인), 적(명나라 진사, 총병참장), 국(명나라 영안수, 총병유격장), 지(명나라 진사, 총병운동장), 란(명나라 진사, 중협장)조을 파조로 분류하여 돈암공(蘆)파, 우암공(荻)파, 한헌공(菊)파, 영향당공(芝)파, 응향당(蘭)파로 구분 각 파조로 모셨습니다.
1960년 경자보 족보의 기록을 보면 3세조 문헌공 노당 추적 선조의 아드님이신 4세 충효공 휘 진(震: 고려 병부상서)에게는 세 아드님이 있었는데 그 첫째 아드님이 호 명와 휘 형(瀅:고려 사헌부장령)이시고, 둘째 아드님이 호 운심재(雲心齋) 휘 유(濡:명나라 호부상서)이시며, 셋째 아드님이 휘 협(浹)이라 하였습니다. 운심재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창업공신이 되셨으며, 조선에 2차(태조, 태종때)에 걸쳐 사신(위유사)로 오셨는데, 부인 광산김씨와 아우 협(명 개국공신)과 더불어 중국으로 건너 가시기전에 조선에 한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득념(得稔)공으로 이분의 직손들이 운심재공을 파조로 모셨다 하였습니다. 경자보에서는 이의 근거를 순조 경인보 족보라 하였으며, 운심재공께서는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한 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이 분의 휘는 6세조 휘 귤(橘:명나라 좌복야)이시고, 7세조 휘 섭(燮:명나라 안찰사), 8세조 휘 서(墅:명나라 병부상서), 9세조 휘 천일(天日:명나라 이부좌시랑)을 거쳐 10세 휘 수경(水鏡: 명나라 무강자사로 선조(先祖)의 나라인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 적. 국. 지 .란 다섯 아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정묘재란에 참전하고 조선에서 순국하였으며 묘소는 전북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추동마을에 있다 )조에 이르게 되는데, 휘 수경(水鏡)조의 호인 세심당을 파로 하여 세심당파라 하여 철종 임술보 족보에 근거한다 하였습니다.
한편 운심재의 형님으로 조선에 남아 계셨던 5세 휘 형(瀅)께서는 6세 휘 인기(仁夔:고려 순무사), 7세 휘 선(宣:봉정대부 예빈시정) 8세 휘 한염(漢琰:사예) 9세 순(淳), 10세 휘 영훈(英勳:이조참판)으로 이어져 11세에 휘 홍하(弘夏:학포공), 홍상(弘商:성포공), 홍주(弘周:만포공)에 이르러, 이 분들이 이른바 3포(學圃,省圃,晩圃)공파의 파조가 되시는데 경자보에서는 삼포공파의 근거가 정덕을해보 족보라 하였습니다. 또 8세 휘 한염(漢琰)의 아우되시는 한복(漢復:한성부윤)께서는 호가 우천(愚川)이며, 사휘(仕諱: 벼슬에 나가 사용한 이름)는 익한(益漢)이신데 단종께서 영월 유배시에 극진히 모신 추충신으로 영월지역에 널리 알려진 분이십니다. 이분을 역시 우천공파라 하여 파조로 모시면서 그 근거로 영월가승(家乘)을 들었습니다.
이상 우리 추문(秋門)의 각 파(派)를 정리하면 5세 운심재(雲心齋)공파, 8세 우천공(愚川公)파, 10세 세심당(洗心堂)공파, 11세 학포(學圃)공파, 11세 성포(省圃)공파, 11세 만포(晩圃)공파, 11세 돈암공(遯庵)파, 11세 우암(寓庵)공파, 11세 한헌(寒軒)공파, 11세 영향(詠香)당(공)파, 11세 응향(凝香)당(공)파, 즉 11개파로 각 보책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나다. 그러나 이 파의 분류가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종문 내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