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정치의 부패에 겹쳐 군사비 등의 증가에 따른 가혹한 수탈로 중국 백성들은 시달림을 받아왔는데, 1628년 산시[陝西] 지방에 대기근(大飢饉)이 일어나자 굶주린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명나라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에 있던 역참(驛站)을 폐지하였는데, 갑자기 생계를 잃은 역졸(驛卒)들과 군량미를 지급받지 못한 군인들도 반란에 가담하게 되어 규모는 급속히 확대되었다. 초기의 반란지도자는 왕가윤(王嘉胤)·고영상(高迎祥) 등으로, 그 무리는 3∼4만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산시[山西]·허난성[河南省]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자성은 산시성 옌안[延安]에서 태어난 중농(中農)의 아들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목동·역졸·군인으로 전전하다가 굶주린 무리를 이끌고 반란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내어 1631년 대장(隊長)이 되었고, 1636년 고영상이 전사한 뒤에는 수령이 되어 스스로 틈왕(闖王)이라 하였다. 그는 다른 반란군 수령들이 투항한 후에도 계속 항쟁을 벌여 세력을 떨쳤으며 허난[河南]에 이어 1641년 뤄양[洛陽]을 점령해서 복왕(福王)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이들의 집단은 군기가 엄한 것으로 이름이 났고 균전제(均田制)의 실시와 조세(租稅)의 철폐 등을 반란 명분으로 내걸어 호응을 얻었다. 1643년 시안[西安]을 점령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였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화폐를 발행하였다. 이어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공격하였다. [출처] [펌] 이자성의 난|작성자 jigu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