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김유적지(안동지역) 답사기
오곡이 익어가며 황금물결 치는 좋은 계절인 10월 10-11일 양간공 후 판교공파 후손 34명이 안동지역으로 광김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금번 답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사는 곳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85세의 어르신부터 40대의 젊은이까지, 현(鉉)자 항렬에서 선(善)자 항렬까지 등 차이가 많았지만 광김 판교공파 후손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에 모였다. 서울 서초구민회관에서 출발한 관광버스는 수원 화서역, 화성 발안농협 앞, 천안IC 입구, 청원IC 출구에서 정차하여 참가자가 모두 탑승하였다. 다시 청원IC로 진입하여 북상주IC로 진출하여 문경을 거쳐 하회마을을 방문하고, 다음 날 오천 군자리와 도산서원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청원IC에 진입한 후 참가자의 소개가 있었다. 준비한 명찰을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나니 우리 일행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었고, 판교공의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금번 답사를 위하여 “光山金氏 判校公派 遺跡地 踏査 案內”란 소책자를 만들었다. 책자에는 행사일정, 양간공 이후 분파도, 판교공 이후 22-28세손의 묘소와 소종중, 정경부인 허씨 묘소 산도, 우리 조상의 역사, 광김의 훌륭한 인물, 오천군자리, 도산서원, 촌수 보는 법 등 예절, 참가자 명단 등이 들어 있다.
참가자에게 이 책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나니 버스는 북상주IC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버스는 정오에 문경시청 옆에는 한 식당에 도착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구경보다 먹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경상도 음식은 맵고 짜서 맛이 없다고 알려졌지만 오늘의 점심 동태찌게는 맛있었다.
우리 일행의 첫 방문지는 안동하회마을이다. 대종회 부회장인 양중씨의 소개를 받아 柳永一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았다. 우리 일행은 하회마을 강 건너편 산 부용대 아래의 옥연정사를 먼저 방문했다. 부용대(64m)에 오르니 강물이 끼고 돌아가는 하회마을 전경이 환하게 보였다. 탄홍스님께서 시주를 받아 지은 옥연정사에서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국보 132호)을 썼다고 한다. 성균관의 전학으로 활동하시는 유영일 해설사의 한문으로 된 “玉淵書堂記”해설이 놀랍다. 우리가 타고 하회마을로 갈 나룻배가 보였다. 사공이 끄는 나룻배를 타는 기분 또한 별미였다. 나룻배에서 내려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장으로 행했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 그리 많은지 관객이 500명이라고 한다. 관객 중에는 외국인도 흔하게 눈에 띄었다. 이런 연극이 800년 전부터 있었다니 놀랍다. 이 공연의 주인공은 양반가의 노비들이었다. 이들은 공연하는 날 만은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그네들의 고단한 삶의 애환을 발산 수 있게 하였다고 하니 조상의 슬기라고 할 수 있다.
하회탈춤 공연 후 마을 구경을 했다. 류성룡의 종가인 양진당 안채에서 대문을 통해 보이는 3 봉우리를 보라고 한다. 3봉우리는 이 마을에서 3정승이 나올 것을 뜻한다고 한다. 양진당에서 문필봉을 보면서 자란 류성룡에게 부모는 “앞으로 나타날 정승은 바로 너”라고 했다는 해설사의 일화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류성룡은 정승이 된다는 꿈을 품고 자랐던 것이다. 그는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500년 전 실천했다.
안동농촌테마콘도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숙박을 하였다. 예상치 못하게 잠자리가 불편하여 일행에 송구한 마음 금치 못하였다. 잠자리의 불편함이 내 책임이 크지만 콘도 관리인의 잘못이라고 이해해 주는 종인들의 마음에 감사할 뿐이다.
다음 행선지는 이번 답사의 주 방문지라고 할 수 있는 와룡면 오천 군자리이다. 이곳도 역시 양중 대종회 부회장님의 소개로 영창 예안파 도유사님을 만나 군자리를 방문하였다. 오천군자리 문화단지에 도착하자 예안파의 종손인 준식씨가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셨고, 얼마 전 방송에 출연하였던 준식님의 동생 방식씨께서 설명하여 주셨다. 여기 광김 후손은 17세 천리의 4대손인 효로가 입향조(入鄕祖)며, 21세 효로의 손자인 부인, 부필, 부신, 부의, 부륜 등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도의와 덕행으로 알려져 정한강이 이르기를 외내 한 마을은 모두 군자라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군자마을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은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라 수몰지역에 살았던 외내 마을의 고 건물을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 놓은 곳이다. 고 가옥을 이전할 때 대들보 위에 있는 함에서 수많은 고문서가 나와 이 마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문집, 교지, 호적,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13종 61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전적류 61점이 또한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외 문중은 크지는 않지만 옛 문서와 유물을 잘 보존하여 국가 보물로의 지정은 우리 판교공의 후손은 17세 영리의 후손이지만 같은 광김의 후손으로 자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5군자 이후에도 수많은 인재가 왜 나왔음은 뼈대 있는 가문으로 훌륭한 조상의 얼을 이어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해 본다. 이곳이 전통음식으로 유명한 줄 미리 알았으면 이곳에서 숙식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안 내외에서 군자로서 자랑스럽게 전통을 지키며 살아온 영창도유사, 준식 종손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금번 답사의 마지막 방문지인 도산서원으로 갔다.
도산서원에서 전문해설사는 우리 일행의 명찰을 보고, 광산김씨는 삼한갑족의 명문가라며 반갑게 맞이하여줬다. 퇴계의 제자 중에서 첫 번째가 후조당 김부필이라고 한다. 퇴계의 시호가 文純公이며, 그 제자인 후조당의 시호 또한 文純公이라고 하여 어떻게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호를 쓸 수 있느냐며, 타 문중에서 100년간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이 사실만으로 후조당이 퇴계에 버금가는 분으로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해설가는 우물을 보며, 지식으로 비유하였고, 연꽃, 정원을 퇴계와 연관하여 설명했다. 퇴계를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의 태두로 높이 평가했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중심에 있으며 영남학파의 본산이다. 지금까지도 영남학파의 명맥은 화려하게 이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도산서원을 나서며 기호학파의 본산인 돈암서원이 떠올랐다. 기호학파에는 율곡과 사계도 있으며, 8년간 4단7정론으로 퇴계와 논쟁을 했던 기대승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안동간고등어로 점심 식사를 한 후 김용림의 노래를 들으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이틀간의 답사여행은 조상을 생각하고, 친목을 다지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판교공파종회장 金容憲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김용헌회장님의 보학에 걸맞는 해설. 멋지십니다.
이 글은 광산뉴스에 투고하였고, 요약하여 대종회보 원고로도 송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답사 사진 중에서 하회마을에서 단체사진, 도산서원에서 단체사진 한장씩 그리고 내 얼굴이 나온 사진도 화일로 송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관련사진 회장님 메일로 방금 송부했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