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담배의 문화사를 처음으로 정리한 사학자는 문일평(文一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인의 애연벽(愛煙癖)이 중국인의 애차벽(愛茶癖) 이상의 민중적 습성이 되었다고 보고 「담배考」를 지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담배考」의 기본적인 뼈대는 장지연(張志淵)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는 1915년 『매일신보(每日新報)』의 연재물 「여시관(如是觀)」에 특유의 박학다식을 십분 발휘하여 담배의 문화사에 관한 흥미로운 소품을 발표하였다. 이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담배 무역이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담배 맛을 알게 되어 거금을 주고 조선에서 담배를 구입하였다는 이야기인데, 병자호란 이후에는 아예 담배 종자를 사들여 가는 바람에 예전과 같은 담배 특수(!)는 사라졌지만 이 당시 청역(淸譯)들은 한몫 단단히 챙겼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과 교역했던 왜역(倭譯)들 중에도 어마어마한 부자가 많이 나왔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통상 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17세기 조선은 양국 사이의 중개무역으로 많은 소득을 올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담긴 허생 이야기에 장안의 부자로 왜역(倭譯) 변승업(卞承業)이 나오는 데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허생의 시대에 민중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이완 장군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또 다른 왜역(倭譯) 박씨가 있다. 역관 박씨 이야기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똑같은 이야기가 18세기 경화 사족과 19세기 영남 사족의 개인 문집에 모두 실려 전해 오고 있어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옛날 사법(史法)에는 기록할만한 사적이 있으면 기록하였고 사람의 귀천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공경대부(公卿大夫)에게는 상세히 기록하고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는 소략하게 기록하기 마련이었다. 여항(閭巷)의 필부에게 비록 기록할만한 선행이 있어도 누가 전해 주고 누가 들려주어 표장할 것인가. 이리하여 한유(韓愈)가 흙손질하는 사람을 기록하고1) 유종원(柳宗元)이 목수와 나무 심는 사람을 기록한 것2)이 모두 감춘 것을 드러내고 비천한 것을 드날려 전해짐이 있기를 원한 것이다. 이것이 외사(外史)가 일어난 까닭이다. 내가 듣기로 역관 박씨는 사람은 한미하지만 사적은 충분히 일컬을 게 있다. 역관 박씨는 밀양 사람이다. 이름은 기재하지 않는다. 일본어를 배워 설관(舌官 : 역관)이 되어 다른 나라에 물화를 유통해 많은 이문을 취하는 게 일이었다. 아주 걸출하고 커다란 모습이었고 베풀기를 잘하고 약속이 무거웠다. 일찍이 관은(官銀)을 수송해 호조(戶曹)에 왔는데 마침 여자가 호조 문 밖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남편이 호조에 은 천여 냥 빚이 있어서 결국 자살했고 지금 뒤따라 자신도 여기서 죽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역관은 이를 듣고 불쌍히 여겨 마침내 호조 안에 들어가 소지한 은을 도로 내주었다. 곧 그 남편의 이름은 채안(債案)에서 삭제되었고, 이윽고 여자는 석방되었다. 역관은 본래 산업이 웅장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데 전념하다 보니 이 때문에 재물이 거듭 바닥났다. 사람들은 역관의 의로움이 쇠하지 않음을 더욱 칭송하였다. 역관이 한번은 군문(軍門)에 은 10만 냥을 빌리고 갚지 못했다.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이 대장이었는데 장부를 조사하고 이를 발견해 궁궐에 가서 임금께 아뢰었다. “박 아무개는 작은 역관으로 감히 나라 재물을 훔쳤으니 청컨대 기한을 두어 은을 납부하지 못하면 그 머리를 베도록 하소서.” 임금이 이를 재가하자 이완은 군문에 출좌(出坐)해서 박 아무개를 체포해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 앉혔다. “네게 열흘의 말미를 주겠다. 은을 마련하지 못하면 참형에 처하겠다. 문서에 서명하라.” 역관은 즉시 서명하고 총총걸음으로 나왔지만, 사실 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관이 일찍이 친하게 지낸 벗이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 지나가던 참이었다. 역관은 벗에게 말했다. “술을 많이 사오게. 내가 오늘 머리를 벤다는 문서에 서명하였으니 우선 여기서 함께 이별을 고하네.” 그리고, 벗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했다. 벗이 말했다. “은 때문에 어찌 자네가 죽어서야 되겠는가? 우선 술을 들게.” 술자리가 파한 뒤 벗은 역관의 팔을 잡았다. “약속한 날 아침 일찍 오게.” 약속한 날이 되어 역관이 벗에게 갔다. 벗이 말했다. “내게 자네를 살릴 수 있는 은이 있네. 내가 예전에 아들과 손자가 내 일을 흔들까 염려해서 시골집에 셈해서 보낸 것이 있었지.” 이어서 속히 은을 출납해 역관에게 주었다. 은을 바친 역관은 죽음을 면했다. 이 일로 인해 이공은 역관을 훌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시 들어가 임금께 아뢰었다. “박 아무개가 열흘을 기한으로 은 십만 냥을 납부했습니다. 남들보다 재의(才義)가 출중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청컨대 왜역(倭譯) 훈도(訓導)를 오래 맡겨 장려하소서.” 임금이 이 말을 따랐다. 몇 년 지나 역관은 은 이십만 냥을 가져와 벗에게 보냈다. 벗은 화가 나서 꾸짖었다. “너는 내가 이자 때문에 도왔다고 보느냐?” 그 절반을 돌려주고는 관계를 끊고 통교하지 않았다. 역관은 훈도가 된 뒤 재물이 다시 넉넉해지자 남들에게 더욱 잘 베풀었다. 천성이 그랬던 것이다. 지금 그 후손이 번창해 사적(仕籍)에 올라 군현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도 몇 사람이나 된다.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아아! 역관도 훌륭하지만 벗의 성명이 전해지지 않음이 애석하다. 역관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사람과 벗이 될 수 있었겠는가? 세상의 사대부들 중에 자기는 기장밥에 비단옷이 넉넉하면서 손톱만한 재물도 아끼는 사람, 아침에는 간담을 토해냈다가도 저녁에는 배신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부끄러워 죽지 않는가?
1) 韓愈의 「圬者王承福傳」을 가리킨다. (『唐宋八大家古文』 권5, 中華書局, 1987년) 2) 柳宗元의 「梓人傳」과 「種樹郭槖駝傳」을 가리킨다. (『唐宋八大家古文』 권9, 中華書局, 1987년)
- 유주목(柳疇睦 1813~1872)
「역관 박씨의 사적을 기록한다(記朴譯事)」, 『계당집(溪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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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원문텍스트는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313집《계당집(溪堂集)》권11, 잡저(雜著),〈기박역사(記朴譯事)〉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