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아버지를 위해 딸이 고친 집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딸은 지은 지 오래되어 공간 효율이 떨어지는 아파트를 부모님을 위해 직접 고치기로 했다. 건축가의 딸로 자란 그녀가 누구보다 말이 잘 통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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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주방으로 통하는 중문을 없애 공간을 넓힌 주방. 대신 천장까지 높인 수납장에 갖가지 물건들을 모두 숨겼다. 식탁과 의자는 카시나에서 구입했고, 벽에 걸린 모래 그림은 김강용 선생의 작품.
그 아버지의 그 딸이 완성한 집
건축가 이창근 선생 집안에는 피를 속이지 못하는 세 딸이 있다. 첫째 딸은 동양화를 전공했고, 둘째 딸은 푸드 스타일링, 셋째 딸은 이 집의 개조 공사를 맡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이소란 씨다. 집안 식구들이 하나같이 모두 그림을 그리고 손으로 뭔가 만드는 일을 한다.
세 딸 중 막내 이소란 씨는 이탈리아에서 크루즈 인테리어를 디자인하다 한국에 돌아와 지금은 아버지가 하던 일과 가장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딸 셋 중에 제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어요. 언제나 즐겁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아버지와 똑같거든요.
물론 디자이너로서도 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죠.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당시 아버지의 작품이나 스케치를 보면 포스트모던적인 성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앞서 나가는 분이셨어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을 해오던 건축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은 부모님이 여생을 보낼 보금자리 레노베이션을 직접 하기로 했다.
언젠가 부모님이 집을 고친다면 그건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드디어 그때가 온 것이다. "가족들이 예술적인 면에선 모두 전문가예요. 처음 이 집 공사를 맡게 되었을 때 완성된 집을 본 가족들이 뭐라고 말할지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죠. 잘했다, 못했다,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두었어요.(웃음)"
다들 '한 안목' 한다는 가족을 상대로 일하다 보니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마음을 읽은 건지, 부부는 '쿨하게' 딸이 내놓은 디자인을 믿고 따라주었다. 요구사항이라고 해봐야 어머니는 '쓰기 편하고 따뜻한 집'이었으면 한다는 것, 아버지는 독립된 개인 공간을 갖고 싶다는 것 정도.
건축과 인테리어를 잘 이해하는 가족이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두 분은 깨끗하고 심플한 공간을 좋아하세요. 그렇다고 블랙과 화이트를 주된 컬러로 하기엔 너무 차가워 보일 것 같아 나무의 따뜻함을 살리면서 절제된 라인과 여백으로 갤러리 같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부모님이 여생을 살게 될 공간을 딸이 직접 고치고 다듬는 걸 보면서 이창근 선생 부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버지의 서재에 놓인 십수 년 전 가족사진과 어머니의 화장대에 나란히 놓인 세 자매의 결혼사진을 보면서도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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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서재에는 그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스케치한 그림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두었다. 작년 12월 칠순을 맞으신 아버지는 잔치 대신 이 드로잉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전시한 액자를 장식으로 활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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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반듯하게 놓여 있던 책상을 아버지가 사선으로 틀어서 배치했다고. 서재의 책상과 낮은 책장은 모두 일룸에서 구입한 것으로, 가격 대비 디자인이 고급스러워 이소란 씨사 적극 추천했다.
옛날식 아파트, 공간을 다시 짜다
세 딸은 어려서부터 건축가 아버지가 직접 개조한 집에서 살았다. 이 가족에게는 사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에 맞게 집을 고치고 디자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속에서 자연스레 감각과 안목을 키웠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건축가의 아내로 살아온 어머니 역시 디자이너의 과감한 시도도 유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인 분이다. "바닥 마루를 사선으로 깔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바로 엄마예요. 공사 비용이 더 나오더라도 이렇게 했으면 하셨죠. 방마다 문을 없애고 슬라이딩 도어로 공간을 분리하자고 했을 때도 대찬성하셨어요."
옛날식 아파트의 뻔하고 불편한 구조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이소란 씨는 181m²(55평) 면적에 비해 좁은 주방과 안방 파우더 룸, 화장실을 어떻게 넓힐지 고심했다. 그 첫 번째 해결책은 슬라이딩 도어. 거실과 주방, 또 거실과 안방을 오가는 곳에 호두나무로 짠 슬라이딩 도어를 달아 공간을 새롭게 구획했다.
덕분에 거실은 때론 아늑한 AV 룸으로, 때론 탁 트인 로비 라운지가 된다. "슬라이딩 도어를 모두 닫으면 편안하고 조용한 공간이 돼요. 이 집에 오는 손님들은 문 건너편에 어떤 공간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하죠. 대신 프라이버시가 필요한 서재와 게스트 룸은 문을 그대로 두었어요."
도어 부분을 제외한 거실의 나머지 벽에는 모래 알갱이를 발라 특유의 손맛이 느껴지는 스타코로 도장했다. 페인트로 칠한 말끔한 벽보다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어 벽에 걸린 김강용 선생의 모래 그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러고 보니 거실과 부엌, 침실 할 것 없이 그의 작품이 걸려 있어 마치 이 집에서 김강용 선생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 저와 언니가 다니던 화실 선생님이셨어요. 지금은 벽돌 그림으로 굉장히 유명하시지만, 이 그림들은 벽돌 그림 이전 작품들이죠.
작품 가격이 많이 오른 걸 보면 부모님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나 봐요.(웃음)" 주방은 중문을 없애고 다용도실 맞은편에 천장 끝까지 닿는 수납장을 설치했다. 그리고 옛날 아파트 싱크대에서 자주 보던 작은 창은 과감히 벽으로 막아 뒤편에 독립된 세탁실을 만들었다. 적재적소를 분리하고 연결한 덕분에 유연성 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라 더욱 흥미로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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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통하는 방마다 문을 없애고 슬라이딩 도어로 공간을 분리했다. 우물 천장에 등 박스를 다는 대신 상업 공간에서 주로 쓰는 저렴한 조명 기구 여러 개를 주방까지 나열한 재미있는 배치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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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딩 도어를 모두 닫으면 아늑하고 독립된 공간이 된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 감상을 할 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3 평상형의 낮은 침대를 제작한 침실. 헤드 뒤편에는 김강용 선생의 벽돌 그림을 걸었고, 사이드 조명으로 민트색 펜던트를 걸어 포인트를 주었다. 침실 옆 파우더 룸 입구에는 유색 글라스 도어를 달아 적당히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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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과 드레싱 룸을 오가는 슬라이딩 도어를 열면 김강용 선생의 그림이 걸려 있다. '갤러리 같은 집' 콘셉트를 충실하게 지킨 데커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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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 모서리 공간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는 힐 하우스 사다리 의자를 놓기 위한 곳.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의자와 조화를 이루는 플렌스티드 모빌 역시 아버지의 소장품으로, 할로겐 등을 달아 인상적인 한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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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한층 넓어 보이게 하는 현관의 거울. 아버지 이창근 선생은 손자들이 놀러 오면 거울 옆에 앉혀두고 쌍둥이처럼 비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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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나의 가죽 소파와 원형 테이블. 테이블은 높이별 4개가 한 세트로, 거실과 서재 곳곳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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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란 씨가 개조를 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침실의 파우더 룸과 화장실. 화장실 타일을 파우더 룸까지 확장 시공했더니 공간이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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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모은 두상 조각을 현관 앞 선반에 진열해 취향이 담긴 공간을 만들었다.
기획_이지현 | 사진_문덕관(Lamp Studio)
레몬트리 2014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