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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팔이야기 이야기
지금은 컴퓨터니 핸펀이니 그것도 모자라 스마트폰이니 무슨탭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많은 통신 수단과 Social Network 수단이 발달돼 있지만 우리 시대 때야 겨우 해봐야 ‘XXX전상서’로 시작하는 편지와 아니면 면 소재지 정도에 살면 전화혜택을 좀 보았을 수도 있었을 정도였다. 정옥이 바로 위에 언니가 큰언니 시집가던 날 야반도주를 해서 도회지 어디론가 가 버렸어도 본인이 주소 적힌 편지를 보내 오거나 제발로 걸어 들어 오지 않는다면 찾을 길도 연락할 방법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만큼 편지는 부모 자식간, 형제 친척간에도 거의 다라 할 만큼 중요한 Net work의 수단이었다.
내 얘기 속의 펜팔이야기 하면 이미 일부 아는 친구들도 있을 줄 안다.
우리가 6학년이 막 되자 말자(5학년때인가?) 학교에서 시작했던 프로젝트 중의 하나가 ‘펜팔’이라는 조금은 생소하기도 하고 또 ‘선데이서울’과 같은 주간지를 일찌감치부터 섭렵하기 시작했던 좀 조숙한 친구들에게는 반드시 한 면을 장식하곤 했던 ‘펜팔코너’ 같은게 있어 조금은 알고는 있었을테고 또 매학년 겨울 방학 시작 할 무렵 이맘때쯤으로 년말, 크리스마스 등을 맞아 ‘일선장병 아저씨께”라고 시작해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 위문편지 몇 장쯤은 써 봤지만 그래도 펜팔이라는 프로젝트는 누구에게나 생소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담임샘이 어느 날 느닷없이 칠판에다 “충북 중원군 소태면 오량동 1구 소태국민학교 6학년 1반’이라고 보통 때 보다 좀 큰 글씨로 생뚱맞은 주소를 적어 놓고는 한 사람씩 편지할 사람이라며 그 학교 6학년 1반 학생들 이름을 불러 주었다. 즉, 이름이 불려진 사람은 상대 쪽 학생 이름을 불러 주고 칠판에 적힌 주소와 불러준 이름으로 펜팔편지를 쓰라는 것이었다. 번호 순이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아주 지극히 단순한 방법으로 ‘짝’을 지어 주었다. 내가 받은 이름은 “권오임”이었다. 나는 그래도 그 때는 그리기, 쓰기, 음악… 체육말고는 남한테 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때였지만 막상 이름 석자 받아 놓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게 여간 멋적은 일이 아니는데 하물며 주변에 친구들을 둘러 봐도 누구 하나 자신 있게 써내려 가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주어진 편지지를 책상 위에 깔아 놓고 한 쪽 팔로는 무슨 비닐이라도 있는 양 가리고 연필에 침을 발랐지만(나는 바르지 않았다. 만년필을 썼으니까.) 서로 얼굴을 쳐다 보며 멋적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써 내려 가지는 못했다. 어쨌든 주어진 편지지를 채우고 봉투에 넣어 풀로 붙인 다음 개인 주소를 적고 제출했고 처음에는 이를 모아 개별로 보내지 않고 단체로 보냈고 얼마 후 일부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다는 오지 않았겠고 그래도 상당 수는 몇 번 편지가 오간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걸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아니 우리의 편지는 6학년 내내 주고 받고 하며 이어져 갔고 어느 새부터는 편지를 보내고 다음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일상처럼 되어갔다. 편지는 직접 우체국까지 가지 않아도 지금은 없어졌지만 단촌지서와 대진교 앞 만복상회 사이에 건영정기화물 창고 건너편, 농협 창고 쪽 점숙이네 집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오래된 점방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서 우표 한장 사서 침발라 붙이고 바로 옆에 있는 빨간색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신기하게 얼마 후에 내가 보낸 내용에 연결되는 답장이 오곤 했다. 그 때 불러 준 이름에 의해 지어진 짝들은 전부 남대남, 여대여였고 나도 ‘권오임’이라는 이름을 받고도 우리 동창 중에도 ‘권오중’이라고 있듯이 남자 이름에 ‘권오X’라는 이름이 많아 아무 의심 없이 당연히 남자인 걸로 생각하고 그렇게 1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가장 기억 나는 대목은 백설공주 시작되는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 패러디 비슷한건데… 왕비가 백설공주를 임신하고 바느질하다 실수로 바늘로 손가락을 찔렀고 빨간 피가 흰 눈에 떨어졌을 때 그 선명한 핏빛을 보고 너무 순수한 생각이 들어 새로 낳은 공주의 이름을 ‘백설(白雪)공주’라고 지었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우리는 우리의 우정을 그처럼 맑고 순수하게 영원히 간직하자고 서로 남자로서(?) 맹세까지 했던 것이다. 이름은 그렇다 치고 편지 속의 말투나 글씨체나 내용 들이 내가 착각해서가 아니라 전혀 여자라고는 느낄 수 없을 만큼 내가 보기에는 완전 남자였다.
그런데 졸업과 중학교 들어가기 까지 긴 방학 중에 느닷없이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던 것이다. 뭔고 하니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던 지 편지 속에 “실은 나 “女” 이런 사람이야”하는 짧은 한 마디와 졸업식 때 이야기… 좀 유명세를 탔던 지 충주 MBC에서 취재까지 나와서 졸업생 대표로 상을 받고 답사하는 장면이 TV에 나왔다는 얘기하며.. 그리고 증명사진 한 장을 진짜 여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같이 넣어서 보냈다. 그런데 나를 더 당황하게 했던 것은 이 편지가 분명 우리 집으로 배달 되었는데 그 때 먼 친척뻘되는 건넛집에 사는 어떤 누나가 (병락이 누나 절친) 이 편지를 먼저 뜯어 보고 내게 전해 주었던 것이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여” 고백을 받은 것도 황당했지만 그 고백을 나만 아는게 아니라 그 누나가 다 알아 버렸고 또 울어무이한테 다 일러 바쳤을게 뻔했기 때문에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다면 “‘남’과 ‘여’ 사이에 백설과 같은 순수한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자”고 한 맹세는 어떻게 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며 어찌해야 할 줄 모르면서 한참 인터벌이 생기고 말았다. 그렇게 중학교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 나도 찌찌에 멍울이 생기는 등 2차 성징이 오며 사춘기가 시작 될 무렵, 지난 편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 보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이름이나 말투가 다 남자같고 다른 친구들도 남자는 남자 짝을 맺어 주길래 당연히 나도 남자겠거니 착각하고 그렇게 편지를 주고 받고 해 왔던 순수한 친구 사인에 ‘여’면 어때. ‘여’는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없나 뭐. 이런 나름의 논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급기야 다시 용기를 내서 그런 내용과 함께 “다시 우정을 이어가자. 6.35때 파괴되었던 한강철교도 우리 손으로 복구했듯이 우리 우정이 잠시 중단되었더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이으면 돼지 뭐…. “이런 지금 생각해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을 곁들여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단, 주소는 다시는 미리 남의 손에 개봉되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우리의 비밀이 지켜 질 수 있는 학교 주소로 해서 보냈다. 아, 그런데 이게 또 패착이었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어느 날 담임샘이 종례시간 때 편지를 한 통 들고 와서는 고개를 꺄우뚱 앞뒤를 살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니 그토록 기다렸던 편지였기에 누구한테 온 건지 바로 짐작을 했는데 아, 이걸 본 친구들이 그냥 둘 일이 만무였다. 나는 이걸 어디 감출까 고민을 해야 했는데 가장 평범하게 가방 어느 구석에 숨겨봐야 못 찾을 리 없고 결국 바지가랑이에 숨겼는데 이내 발각되고 말았고 나의 고귀한 편지 봉투는 여지없이 친구들 무식한 손아귀에서 뜯겨져 모든 친구들이 듣는 가운에 무자비하게 읽혀져 내려 갔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잡고 있는 친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때 이미 성장이 한참 멈춰 있던 나로서는 그 억센 힘을 당하지 못하고 결국 강간당하는 기분으로 모든 것을 다 뺏기고(?) 말았다. 다 읽혀진 편지는 결국 내 손에 다시 돌아왔고 그제서야 결박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된 나는 재미있다고 낄낄대고 있는 친구들에게 “야이, X끼들아~” 소리만 한마디 지르고 나는 완전 무장해제 당한채 처참이 구겨진 편지를 받아 들어야만 했다. 이렇게 다시 이어진 편지 교환은 2학년 때 수학여행 다녀 온 이야기, 친구와 찍은 사진… 나도 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교복 깨끗이 다려 입고 큰 맘 먹고 읍내 ‘명성사진관’에 가서 ‘명함판’ 사진 한판 박아서 보내 주었다. ( 그 사진 내가 봐도 정말 ‘엄친아’ ㅋ)
그렇게 이어진 편지는 다시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왠지도 모르게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나름 고입 시험 준비 때문에 바쁘다 보니 주고 받는 리듬이 깨졌고 그러다 보니 뻘쭘해지며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편지가 끊기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입학하고 3학년 올라갈 무렵에 다시 용기를 내서 편지를 했더니 서로 많이 바쁠테고 오히려 방해가 될 터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 가서 다시 연락하자하고 다소 냉랭한 듯한 편지를 받고는 더 이상 편지를 쓸 수 없어 또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원했던 대학은 아니었지만 대학 생활을 할 무렵 내가 먼저 편지를 했는지 이 부분은 기억이 확실치가 않은데 어떻게 편지를 다시 받았다. 내용에는 언급이 없지만 서울교대 편지지에다 써서 어느 대학에 다니는 지 넌지시 알려 주었다. 나도 답장은 했는데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또 편지는 끊기고 말았다.
이렇게 학교 생활에 빠져 있는 사이 세월은 순식간에 흘렀고 어느새 나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고 병역의무까지 마친 상태에서 남은 복사(복학4학년)생활의 희망과 취직준비를 걱정하며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을 무렵에 느닷없이 이 친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마침 친하던 친구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계획하던 중 그러면 갈 때는 같이 가지 말고 나는 하루 먼저 따로 출발해 이 친구를 만나보고 서울에서 합류하자하고 약속을 했다. 그 때는 연락이 않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사전 약속도 할 수 없이 그야말로 무대포로 맘을 먹었다. 새벽 일찍 대구북부 주차장에 가서 충주 가는 시외버스 첫차를 타고 일단 출발했는데 충주시내 도착하니 오후 한시경이 되었다. 다시 중원 소태로 가는 차가 오후 3시경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다렸다가 시간 맞춰 충주에서 시작해서 구불구불 엄청 산길로 해서 낯선 길을 들어갔는데 소태면 소재지에 도착했을 무렵은 이미 산골짝이라서 그런지 날이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얼마를 기다렸다가 지나 가는 동네 사람에게 물었더니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 동네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을 안다고 집을 가르쳐 주어 다시 1km 정도를 걸어 그 집을 찾아 갔다.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며 아버지가 택시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여 그 이전에는 소태면에서 제일 좋은 기와집에 살았는데 지금은 어떻다는 이야기며 그 동안 편지에서 들려 주었던 자기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현장과 겹쳐지며 오늘 새벽 출발부터의 과정도 필름의 영상처럼 머리 속을 지나 가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덧 그 집에 도착했다. 길가의 담도 없는 평범한 시골 농가였는데 아버지인 듯한 아저씨(그 때 모습은 노인처럼 보였음)가 쇠죽을 쑤고 계셨는데 이름을 대며 누구를 찾아 왔다고 하니 맞다고 하시며 일단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집은 우리 일반 옛날 시골토담집과 같은 평범한 농가주택이었고 방안에 쌀가마 몇 개와 다른 곡식 부대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아버지는 밖에서 분주히 나머지 소설거지며 뭔가를 하고 계셨고 여동생인 듯한 여식이 저녁이 되어선지 마실 갔다가 돌아왔다. 하나는 고등학생쯤 되었고 또 하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 했는데 완전 생긴 모습이나 하는 행동이 머슴아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동네에서 하고한 날 또래 남자애들을 줘 패서 부모에게 사과하고 학교에도 불려 가곤 한다고 했다. 이내 아버지는 새로 지은 밥에 작은 저녁상을 차려 와서는 먹으라고 권하시며 어머니가 마침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져 팔을 다쳐 시내 병원에 입원해 있고 주인공 친구는 시내 모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마침 그날이 방학하는 날이라 올 줄 알았는데 막차로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늦어져서 다음 날 오려나 보다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타고 갔던 버스가 약 2시간 후면 다시 충주시내로 돌아가니 동생과 그 차 타고 같이 가서 언니를 만나 보라고 하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손님이 되어 촌로가 차려 준 밥상을 받아 시장기를 달래고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차를 타고 다시 충주로 향했다. 그 친구가 몸담고 있었던 곳은 지금은 충주시로 편입되었지만 그 때는 ‘중원군 주덕면’이라고 했는데 그 때 얼핏 기억하기로 군대 첫 휴가 나왔던 병락이가 대한민국 뺑이 혼자서 다친다고 대구역전에서부터 술이 고주망태 되어가지고 마지막으로 성호 자취방에서 만나서는 나, 성호, 병락이 세 명 다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그 때 들려 준 군대생활 무용담 중 전두환이 소위 버마를 방문 중 터졌던 아웅산사태에 복수하기 위해 북한 특수군에 대적할 특공부대를 대대적으로 양산한다고 할 때인데 입대하자마자 신설되는 특공부대에 차출되어 하고한날 ‘송풍훈련’(낙하산 타고 땅에 내렸을 때 낙하산 접기 전에 바람에 사람이 끌려 갈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한 훈련-한마디로 차량 같은데 인간을 산채로 끌고 다닌다고 하면 좀 과장되었나?) 같은 걸 받는다고 하며 그 때 임시로 주둔하던 부대가 ‘중원군 주덕면’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얼핏 기억이 났다. 충주 시내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한참을 간 다음 철길(충북선?)가 논길을 건너 어떤 주택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 때가 이미 시간이 밤 11시를 넘기는 때였고 길을 안내해 준 동생은 언니집에 자야 했을 것이고 언니를 만나면 나는 다시 시내로 들어가 잠 잘 곳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통박이 잡혔으므로 나는 택시를 바깥에 잠시 대기토록 하고 동생을 먼저 들여 보냈다. 우리의 극적인 첫 만남은 이렇게 밤 늦게 어두운 곳에서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이내 그 친구는 집에서 흔히 입는 복장으로 나와서는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다시 들어가서는 추위에 대비한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다시 나왔다. 우리는 그 택시에 올라서는 충주시내를 향했고 다시 터미널 근처의 모텔을 찾아 방을 예약하고는 근처의 다방을 찾아 처음으로 밝은 불빛에 마주 앉게 되었다. 이미 시간에 자정을 넘겼기 때문에 긴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고 다음날 아침에 만날 약속을 하고는 지나는 택시를 잡아 태워 주고 나는 다시 모텔로 돌아 와서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을 청하긴 했지만 그 날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대구에서 출발할 때부터 마지막 택시를 태워 보내기까지의 과정과 그간 처음 이름을 소개 받고 편지가 시작되며 주고 받았던 편지 내용들이 모두 영화의 연속필름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뒤척이는 사이 어김없이 새벽은 다시 찾아왔다. 그런데 이게 왠 일? 밤새 소리도 없이 바깥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고 아침이 되자 잦아들긴 했지만 이미 약 15cm의 눈이 쌓였었다. 마치 우리가 약속했던 ‘백설처럼 희고 순수한 우정’을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역시 좀 유치하다.) 그래도 그녀는 어김없이 약속된 시간에 찾아 왔었고 우리는 근처의 요행이 문을 연 식당을 찾아 아침 식사를 마쳤다. 눈은 이미 완전히 그쳤고 햇살히 환하게 비치는 포근한 날씨로 변했었는데 충주라고는 처음 가 보는 도시였으므로 달리 아는 곳도 없었던 나였지만 그래도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 탄금대라든가 충주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물었더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교통편이 문제 있을거라며 가까운 충주 MBC 방송국 앞에 유원지가 있다고 거기 가서 걷자고 했다. 전날 본가에 갔었던 얘기며 있었던 얘기를 했더니 그녀는 자기 식구 내력을 이야기 해 주었다. 자기 밑으로 여동생이 다섯,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있고 그 밑에 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남동생이 14대 독자라고 했다. 그래서 손이 귀한 집일수록 양식을 떨어지면 않된다고 방안에 쌀부대를 쌓아 두고 있는 거라고.. 동생들은 대부분 충주 시내로 나와서 학교를 다니고 있고 몇째 동생은 엄마 간호, 몇째 동생은 어떻고 하는데 그 다음 부터는 나도 헷갈려 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나를 언니집에 안내해 주었던 동생이 아마 다섯번째 여동생이었고 그 밑에 유일한 남동생은 중1, 그리고 한참 터울이 나는 머슴애 같다는 막내 여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소개를 해 주었을 때 나는 피식 웃었고 웃는 나를 본 그녀도 따라 웃어 주었다. 내가 웃었던 의미는 14대에서 대가 끊기지 않도록 아들 낳을 때까지 낳은 딸이 여섯이었고 그리고 마침 아들 하나 얻고 6년 후에 또 혹시나 하고 건진 것이 역시나 딸이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고 그러다 보니 당시 우리 흔히들 그랬듯이 자신의 탄생의 비밀을 짐작하고 있었던 막내 여동생은 생존본능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면 안되었기에 여자임에도 완전 남자 모습에 동네 머슴애들이 맨날 얻어 맞을 정도로 거의 조폭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주기 전까지는 나는 완전 남자로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학교를 한해 늦게 들어가서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그 많은 동생들을 거느린 맏언니, 누나로서 형편이 넉넉지 못하다 보니 당시 2년제였던 교대를 졸업하고 이미 초등하교 교편을 잡은 지 3년째가 지나고 있었을 즈음이니 아직 뽀송뽀송 학생티가 났던 내게는 마치 누님처럼 느껴지며 무척 어른스러워 보였다. 얼음이 얼어 있는 유원지에서 놀고 있던 학생을 보고는 위험하니 나오라고 말했는데도 잘 말을 듣지 않자 ‘너 어느 학교 누구니?’ 하고 목소리 깔고 물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시간은 흘러 서울 갈 차 시간이 다가 왔고 다시 충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와서는 서둘러 차에 오르면서 우리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왜 그 때는 다음 만날 약속이라든가 전화 번호 같은거는 교환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핸펀 같은 거는 아직 없던 시절이었으나 자취집 전화번호라든가 정 아니면 몸담고 있는 학교 전화번호라도 물어 볼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고모님이 안동에 계시다고 했고 우리 집이 안동에서 가까우므로 들를 때 꼭 연락하라는 말만 남기고 나는 서둘러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도 나는 그것이 우리들 만남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에게서 받았던 편지들을 그때까지 나는 모두 모아 두었었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나는 직장 잡아 상경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동생도 서울로 따라 오며 대구에서 쓰던 책상을 시골집으로 옮겨 두었는데 가끔 시골 들를 때는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던 빛바랜 편지들을 가끔은 뒤적여 보곤 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는데 99년도엔가 시골집을 새로 지으며 옛날 가구며 짐을 정리할 때 구석에 쳐박혀 있던 책상을 폐기하며 그 편지뭉치의 행방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신경 써서 따로 치워 둘 수도 있었겠지만 나도 살기 바쁘다보니 미처 신경쓰지 못해 이제는 그 편지마져도 40녕 이상된 역사가 되었고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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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지만 그 때를 함께했던 우리들의 이야기기도 해서 1차 반쯤 작성한 1부 글을 올렸다가 이내 삭제했었는데 요즘 올라 오는 글이 너무 없어 다시 마무리 한 글 올린다. 거의 단편 소설 수준으로 분량이 길어졌지만 결론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고(통속적인 결론) 우정의 이름으로 이루저지지 못한 사랑이야기 쯤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경우야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찿을수있다. 컴에 들어가서 이름만 치면 어느학교에 근무하는지 다나온다.바보................나도 고등학교때 의무행사 있잖아 국군장병 아저씨께 헐 이게무슨일이라 수학샘이 수업시간에 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자꾸보더니 종땡하니 금아니 내따라 교무실로 가자. 그러는기라 샘예 저 잘못한거 없느데요. 하니까 내가 니한테 줄 선물이 있다. 빨리따라온나카이잉알겠제 라도 전라도 사람이였거던 아니 에게왠 날벼락 니 광주수피아여고에 친구있나 이학교 억수로 좋은학교인디 친하게 지내봐라 하고 주는디 아이고편지 생각지도 않았던 편지 수피아여고박연숙(군바리 박연섭)고향은 강원도 삼척 머리가좋은 군바리
내발등에 불떨어진 고딩이가 군바리하고 놀수있나요.했더니 지는 교회를 다니고 착한 군바리라 안심하고 좋은글 주고받자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통씩 갔다왔다 하다가 아무런 이유없이 끝 지금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못나게 굴었나 싶네.아 그군바리 문구집아들이라 휴가나오면 학용품 엄청많이 택배로 부처주곤 했는디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수없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내아이들과 한번 찿아가 볼려고 잘살고 계시겠죠 참말로 궁금혀요.나이는 나보다 네살위였고 잘생기고 착한 군바리 사진만 주고받고 그때의 사진으로 지금 만나면 알아볼수있을까.잊지못할 꿈속의 여인 ㅋㅋㅋ아도이런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여자랍니다.그땐 나도 글좀 섰는데
이젠 그냥 마음 속의 옛날 친구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들더라. 만나서 세상 사는 팍팍한 이야기 나누는 것도 거시기 하잖나.
맞어 니 말이맞는것 같아 궁금하기는한데 막상 만난다면 상상했던거랑 너무 다르면 평생후회 하느니 평생 굼꾸고 사는게 낮겠다.아름다운 꿈.....................
주덕면은 장호원에서 진천거처 수안보 가는길에 있는 충주 외곽지역이다. 옛날 중앙고속도로 없을때 시골갈때 그리갔다. 내가 있던곳은 동량면이라고 충주 목행교 옆인데 지금은 부대가 없어졌더라. 전번에 올렸다가 삭제한 글의 업그레이드된 글인거 같네.. 재밌게 봤다. 지나간 여자는 찾지 않는게 좋다. 여자들은 옛날사람을 남자보다 냉정하게 잊고 살더라. 군대가기전 많이 따라다니던 애가 있었는데 지금도 대구어느 학교에서 근무하는줄 아는데.....
충주에서 만났을때 술한잔 먹고 술김에 모텔에가서 거시기를 했뿌러야 일이 계속 연결이 되는데.... 그게 아쉽다
지랄.....................ㅎㅎㅎㅎ
도량면이었나? 철길 건너 동네가 주뎍면으로 알고 있었는데... 동량면, 엄정면..등이 다 귀에 익은 지명이다. 고등, 중학교가 위치한 이름일거다. 아마..
아름다운 추억이네...추억은 추억으로 끝나야 더욱 아름답지....나도 그때 편지 몇번주고받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렸지만...참으로 아련한 추억이네...소태면...
그거말고 숨겨 둔 사랑 없나?
경우는 궁금한게 우찌그리많노..................
예전에 첫사랑에 대한 편지를 올려서 채택된걸 책으로 발간해서 나온게 있었는데 지금 그 책을 읽고있는 기분이든다..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는것도 좋지만 연락처정도는 알고있는것도 괜찮을듯한데.. 뭘 어쩌자는건 아니고 정말로 삶이 힘들때 도피처용으로 써먹을수도 있고... 헐~ 이건 아닌가??? 어쨌건 재밋기도 하고 아쉽기도한 첫사랑이야기 잘봤수..
남녀는 냉정하게 끊고 살아야지 실낱같은 연결만 되면 나중에 큰밧줄로 연결되어 큰일난다
가끔은 일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로맨스를 꿈꾸다가 노망스 되기 쉬우니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대로 그냥 간직하는 것이 확률적으로도 더 낫겠지?
내가하면 로맨스고 넘이하면 불륜이다.추억은 추억일뿐 추억은 아름다운것 무엇이든지 꿈을 꾸게하니까 혼자만의 꿈 무한한 상상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