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용한(시인) 사진/심 병우(사진가)
구불구불 똬리처럼 산을
휘휘, 감아놓은 험한 소백산 죽령길을
넘어서자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영주 들녘이 한눈에 펼쳐진다. 과수원에는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인삼밭에는
굵직한 인삼을 캐내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고, 세상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골골이 가을빛이 물드는 영주 땅. 영주는 우리에게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품은 땅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아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문화재와 볼거리를 품은 문화관광의
고을로 알려져 있다.
영주시 전체를 통틀어 국보만도 일곱 점, 보물이 열아홉 점. 그 밖에
사적과 문화재, 민속자료까지 합치면 모두 여든한 점에 이르는 지정문화재가 영주에 자리해 있다. 소백산을 끼고 있어 경치 또한 빼어나
볼거리와 쉴 곳이 널려 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영주를 여행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당장 생각을 바꿔 구석구석을 차근차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영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역시 부석사가 첫손에 꼽힌다. 부석사를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주는 참으로 복 받은 땅이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영주 땅 맨 위쪽, 소백산자락에 깃든 부석사에 대해 유 홍준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며, "위대한 건축"으로 손꼽았다.
이런 생각은 다른 전문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모두들 옛 절집 가운데
으뜸의 건축으로 부석사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토록 부석사가
잘 지은 절집으로 꼽히는 데에는 무량수전이라는 빼어난 건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솔천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품계마다 들어선 듯한 절묘한 가람의 배치와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다보는 첩첩이 쌓인 장쾌한 산자락 풍경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아홉 단계의 돌계단을 거쳐야 하는 것을 두고 유교수는 "극락세계의 9품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가장 위쪽에
자리한 무량수전이 극락세계인 도솔천을 뜻하는 것이라면 무량수전 앞
안양문은 극락세계로 오르는 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 산
아랫자락의 일주문을 지나 차츰차츰
경사진 길을 따라 천왕문, 범종각을
거쳐 드디어 산 중턱의 안양루와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은 고해의 세계에서 극락의 세계로 한 발 한 발 다가섬에 다름 아니다. 부석면 북지리에 자리한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6년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배워온 화엄사상을 이 땅에 널리 펴기 위해 세운
가람으로, 무량수전 서쪽에 아랫바위와 윗바위가 떠 있다는 "뜬돌"이 있다는 것에서 부석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름다운 부석사 풍경의 절정은 역시
무량수전(국보 18호). 고려 중기 때의 건축물로 보이는 무량수전은 활주(추녀 밑을 받치는 기둥)와 배흘림기둥으로 떠받친 팔작지붕(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모두 갖춰진 지붕)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기품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전하는 목조건물 가운데는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이나 크기에 있어서는 단연 무량수전이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절집 안에 아미타여래상(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을 서쪽에 모시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생명을 지닌 무량수불로 불리며, 무량수전이라는 이름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무량수전 앞에는 신라 때 세운 약 3미터 높이의 석등(국보 17호)이 자리하고 있으며, 무량수전 동쪽에는 선묘각과 삼층석탑(보물 249호)이, 삼층석탑을 돌아 산 윗자락으로 더 올라가면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국보 19호)을 만날 수 있다.
영주에는 부석사말고도 이름난 절집을 여러 채 거느리고 있는데, 희방폭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면 만나는 희방사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초암사, 국보인 흑석사 복장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흑석사,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비로사, 꽃살문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성혈사가 모두 오래된 옛 가람들이다.
부석사와
더불어 영주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손꼽히는
소수서원(사적
55호)은 조선 중종 때인
1542년 풍기군수 주
세붕이 세운 우리나라의 첫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라는 것은 땅과 책과 노비를 내려받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국립서원을 말하는 것으로
처음 서원이 세워졌을 때는 "백운동서원"이라 불리던 것을 퇴계 이 황이 풍기군수로 온 뒤에 무너져 가는 교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뜻에서 소수서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서원 들머리에는 죽계수(죽계천)가 에돌아 흐르고, 용틀임하듯 틀어 올라간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면 일대는 소수서원뿐만 아니라 보물로 지정된 영주석교리 석불입상과 성혈사 나한전, 사적으로 지정된 순흥어숙묘, 읍내리 벽화고분, 도지정문화재인 영주읍내리 석불입상, 배순정려비, 사현정, 금성단, 영주청구리 입석, 순흥척화비와 같은 여러 문화재가 몰려 있어 영주에서는 "문화마을"로 불리고 있다. 절집이 많은 만큼 영주에는 석불 또한 많은 편이어서 앞서 말한 석교리 석불과, 읍내리 석불말고도 신암리 마애삼존석불, 영주리
석불입상, 가흥리 마애삼존불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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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풍요를 가져온 소백산
경북 북쪽 맨 끝자락에 자리한 영주 땅은 북쪽으로 강원도 영월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봉화,
서쪽으로는 충북 단양, 남쪽으로는 안동, 예천과 잇닿아 있다. 서북쪽에는 백두대간의 한 자락인
소백산 줄기가 길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의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내성천은 봉화 땅을 거쳐 문수면
수도리를 돌아 흐르고, 연화봉과
죽령계곡에서 흘러온 남원천과 국망봉에서 흘러내린 죽계천은 고현동에서 만나 서천을 이루어 영주
시내를 지나 내성천으로 이어진다. 땅은 거개가 사질 양토로 물빠짐이 좋아 인삼과 사과를 비롯한
농산물 재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풍기 인삼은 유기물이 풍부한 소백산자락의 모래흙에서 재배하여 다른 지역의 것보다 육질이
탄탄하고, 인삼향이 강하며, 사포닌(인삼의 주된 약리성분으로 "진세노사이드"라 부르며, 다른 식물의
그것과 효능이 매우 다르다) 함량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삼이란 본래 산삼을 옮겨와 그 씨를 받아 사람의 손으로 재배한 것으로, 소백산은 예부터 산삼이 많기로 알아주는 곳이었다.
이 소백산 산삼은 조선시대 들어 주 세붕 선생이 삼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과 기후를 갖춘
곳을 찾다가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가 삼을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고 소백산 산삼
씨를 받아다 처음 인삼
재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의 풍기
인삼이 유명해진 것은
과거 개성에서 질 좋은
인삼씨를 가지고 피난을 내려온 피난민이 풍기에 정착하면서 인삼을 재배해 온 덕택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뿌리깊은 풍기 인삼의 전통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영주의 풍요는 두말할 것 없이 소백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7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소백산은 1,439미터의 비로봉을 비롯해 국망봉,
연화봉과 같은 커다란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봄이면 산기슭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철쭉꽃이, 가을이면 골골이 현란한 단풍이 아름다운 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백산은 못 가 봤고, 죽령은 가 봤다고
하는데, 죽령이 바로 소백산 허리께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흔아홉 굽이로 통하는 죽령고개는 문경새재, 추풍령과 더불어 영남의 3대 관문 가운데 하나로, 그 옛날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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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마을 금계리와 송이마을 달밭골
소백산자락의 아랫목에서는 죽계구곡과 금선계곡, 정감록마을인 금계리와 같은 숨겨진 비경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죽계구곡은 고려
후기의 문장가인 안 축과 이 퇴계, 주 세붕과 같은 대학자들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계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근재 안 축은 이곳을 배경으로 「죽계별곡」을 지었는데, 제1곡은 초암사에서 시작하여 삼괴정까지 오리에 걸쳐 제9곡이 펼쳐져 있다. 금선계곡은 비로봉 남쪽 계곡을 따라
흐르는 계곡으로 정감록마을이 이 계곡에 숨어 있다. 정감록마을은
이른바 「정감록」의 비결을 믿고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들이
마을을 이뤄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 곳으로, 금계리가 바로 그 곳이다.
「정감록」에 보면 금계리를 십승지지의 명당이라 했으며, 다른 문헌에서도 이곳을 피난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한국전쟁 당시 금계리에는 「정감록」을 믿는 이북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금계리에서도 소백산자락의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용천동은
더없이 좋은 지형지세를 이루고 있어, 그이들의 주요 피난처가 되었다. 실제로 용천동은 당시 아무런 전쟁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여러 채의 흙집을 만날 수 있는데, 류 재국 노인댁도 바로 그런 흙집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집이 들어서 있다. 정원치고는 더없이 훌륭한 자연정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시사철 도랑물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더욱이 목이 마르면 마당을 가로질러 도랑물을 그냥 떠 마시면 된다. "60년 동안 여서
살았어. 콩농사 지면 저 탈괵기에 털어 먹고, 곡식덜은 저 절구에 찌먹고, 그래 사는기 만날 이래 사는 기야. 영감한테 나가 살자니까 안 나간다 하잖니껴. 죽어도 여 앉아 죽겠다카며, 그래 자연 저래 고생을 하는 기지 뭐. 원래 맨 산이던 거 헐애가지고 흙으로 집을 진기, 그래두
여 물이 좋으니까 살지. 그래그래 사는기 참!" 황 매화 할머니가 들려준 집안 내력이다. 하지만 노인 내외는 아들 류 이종씨가 고향을 등지지 않고 곁에 있어 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같은 금계리이긴 하지만,
비로봉 아랫 자락에 자리한 달밭골은 용천동보다
훨씬 더 궁벽한 마을이다.
현재 이곳에는 여남은 집이 살고 있으며, 거개가 민박을 치거나 음식을 팔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을이면 대부분 송이 캐기에 매달려 산다. 마을에서 만난
올해 여든세 살인 김 인권
노인도 나이를 잊은 채 여름까지는 약초꾼으로, 가을에는 송이꾼으로 살아간다. 여기서는 반별로 송이를 따는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으며, 만일 남의 구역을 침범하게 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단다.
송이꾼의 하루는 새벽 5시면 시작된다. 송이철이면 그이들은 날마다
비로봉을 오르내리는데, 비로봉 곳곳이 바로 송이밭이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송이꾼 김 인권 노인과 김 순종 씨와 함께 비로봉을 오르는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에서 두 송이꾼은 귀하디귀한 송이를
척척 잘도 찾아냈다. 그이들 머릿속에는 이미 송이 나는 장소가 지도처럼 다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등산로를 훤히 아는 등산객이 쉽게 길을 찾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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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돌이 전통마을, 무섬마을의 옛집들
영주 땅 북서쪽 소백산자락에 정감록 마을이 있다면, 동남쪽 내성천
굽이에는 옛 기와집이 즐비한 전통마을 수도리 무섬마을이 있다. 무섬마을은 강물이 마을을 한바퀴 휘돌아 마치 섬처럼 떠 있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풍수지리상 가지에 매화가 핀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런 물돌이는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와 비슷한 모양을
띠고 있는데, 이로 인해 '작은 하회"로도 불린다.
마을 앞강의 물깊이는 그리 깊지 않아서 장마철을
빼고는 그냥 철벅철벅 강을 건너다닐 수 있다. 또한 하회마을이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면, 무섬마을은 아직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
마을과 강변을 거닐며 고즈넉한 운치를 즐길 수 있다. 강 건너편에는 솔숲이
우거진 나지막한 산자락이 마을을 에워싸듯 둥그렇게 펼쳐져 있는데, 산
중턱 숲속에는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가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있다.
무섬마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 반남 박씨가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반남 박씨에 이어 무섬마을로 들어온 성씨는 예안
김씨로, 반남 박씨 집안에 시집을 오면서 차츰 무섬마을은 박씨와 김씨, 두 성씨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섬마을의 자랑은 역시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옛 집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40여 채의 집 가운데 30여 채 정도가 옛집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가옥만도 해우당과 만죽재를 비롯해 아홉 채나 된다. 특히 다리를 건너 맨 먼저 만나는 해우당은 무섬마을에서 가장 크고 잘 지어진 집으로, 해우당 김 낙풍이 1879년에 지었다고 한다. ㅁ자로 지어진 이 집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큰사랑채만 빼고는 모두 맞배지붕(책을 엎어놓은 것처럼 건물의 앞뒷면에만 기와를
얹은 지붕)을 따르고 있다.
해우당이 김씨 문중의 대표격인 집이라면 만죽재는 박씨 문중의 대표격인 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은 반남 박씨 판관공파 종가로서 입향시조인 박 수 선생이 마을에
들어와 지은 집이라고 한다.
무섬마을의 첫 기와집인 셈인데, 그 때문인지 마을의 한가운데 집이 들어서 있다. 만죽재 또한 ㅁ자 집으로, 지붕은 안사랑채만 팔작지붕이고, 나머지 건물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사실 무섬마을의 자랑은 옛집에만 있지 않다. 민속학적으로 소중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 또한 무섬마을의 자랑이다. 무섬마을에서
유일하게 민박집을 운영하는
김 진희 씨네 집 앞마당에서는 연자방아를 볼 수가 있는데, 사용을 하지 않은 지는
꽤 오래 되었다고 한다. 무섬마을에서는 집집이 입춘방(입춘날 대문이나 문지방에 써 붙이는 글귀)을 대문과 방문에 내걸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어떤 집(김 덕진 가옥)은 외양간에조차 "우천마백"이라 하여 풍요를 기원하는 글귀를 써
붙여 놓았다. 우천마백이 있는 이 김 덕진 가옥에서는 도깨비도 쫓고
액을 물리치기 위해 대문에 가시가 숭숭한 엄나무를 걸어놓은 모습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툇마루 한구석에는 아직도 성주 단지를 모시고 있으며, 연기에 시커멓게 그을린 대들보에는 창호지와 명주실로
신체를 꾸민 성주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밖에 김
두한
씨네
집을
비롯한
다른
집에서도 성주단지를 만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심심치 않게 민속과 건축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선생들이 찾아와 집구경을 청한다는데, 무섬마을 거개의
집들은 그이들을 위해 대문을 활짝 열어 주고 있다. "우리 집이 이게
한 200년은 넘었는데,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손도 못 대고 있어요. 성주는 옛날부터 있던 기래서 그대로 그냥 모시요. 사람 집에 사람 오면
좋지요. 사람 집에 사람 안 오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집입니껴." 김 덕진 가옥에 사는 이 정호 할머니의 인심 좋은 말씀이다. 올해 여든다섯인 그이에 따르면 마을에 아흔살 이상된 어르신들도 꽤 많다고 한다.
아무튼 인심 좋고, 풍수 좋고, 땅이 좋으니 모두들 장수를 하는 것이리라. 영주를 여행하고자 했다면, 이 인심 좋고 볼 것 많은 무섬마을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샘이깊은물> 2001. 10
여행정보/ 영주에 가려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남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탄 뒤, 서제천 인터체인지로 나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가면 된다. 서울에서 3시간 30분 거리. 기차는 서울 청량리에서 풍기까지 하루 10회 운행하며, 대구나 부산에서도 영주까지 기차가 운행한다. 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하루에 20회 이상 다닌다.
부석사에 가려면 풍기에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올라가거나 영주에서
봉화로 이어진 37번 국도에서 935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931번 지방도로 바꿔 타면 된다. 소수서원은 부석사 가는 길인 931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 모두 영주와 풍기에서 시내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정감록마을 금계리 용천동은 풍기에서 소백산국립공원 쪽으로 올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되고,
달밭골은 비로사 방면으로 계속 따라올라가면 나온다. 무섬마을에 가려면 영주에서 안동 방면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문수역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영주시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무섬마을까지 하루 네 번 시내버스(25분)도 운행한다. 잠잘 곳은 부석사 주변과
풍기, 영주에 많다. 달밭골에도 민박집이 여러 채 있으며, 무섬마을에도 민박집(054-637-5606)이 한 채 있다. 문의/영주시 문화관광과:
054-639-6062, 소수서원: 054-634-3310, 부석사: 054-633-3464, 풍기인삼협동조합: 054-636-2714, 보승인삼사: 054-636-3030
첫댓글 22일날 소백산행때 잠시내려오는 도중에 영주 부석사에 들려사옵니다,,사찰 <절>이라면 어디든지 배낭지고 청처없이 떠나고픈 로즈입니다,,좋은 사찰 소개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