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세계를 이 땅에 실현하는 그날까지
이홍규•김현숙 가정
1. 내 고향 율대리 2. 출생 및 가족 배경 3. 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및 입교 4. 공기총 판매 5. 봉사 활동 6. 기동대 활동 및 교회 개척 7. 군대 생활 8. 축복의 은사와 동원 9. 7년간 특별정성 10. 천마산 산상기도회 11. 원전참배 12. 사업실패와 가정의 수난 13. 80일 수련 14. 아내 김현숙의 통일교회 입교 15. 천보 가정 입적 완료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이홍규, 고성의 역사와 지리 특성, 불심이 깊은 부모님, 남편 뜻에 따랐던 어머니, 어린 시절 불교 환경에서 성장, 중학교 시절 감리교회 추억, 참아버님 처음 뵙기, 산탄총 판매, 교사로부터 박해를 받음, 기동대 활동, 연탄가스 중독, 고성교회 개척, 협박을 당함, 군대 핍박 및 모범, 영호남 부부, 부모님이 축복받게 인도, 7년간 철야기도 및 초능력 체험, 원전참배 및 사고 위험, 사업 실패 고통, 화재 사건, 아내의 입교 상황, 천보가정 활동 계획
1. 내 고향 율대리
지금은 열차 교통편이 참 빠르고 편리해졌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서울에서 통일호 열차를 11시간 타야 밀양 삼랑진에 도착하고, 다시 일반 열차를 갈아타고 30분을 가야 마산에 도착하였다. 마산 월남동에서 남쪽으로 긴 굴을 통과하면 배둔이 나오고, 10km를 남쪽으로 달려가면 고성읍이 눈앞에 보인다. 경남 고성군(固城郡)은 우리나라에서 공룡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공룡은 지금으로부터 2억 3천 만년 전 중생대 초기에 지구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가, 그로부터 1억 6,500만년간 지구를 지배하다가 백악기가 끝남과 동시에 멸종하였다. 지구에서 흔적을 완전히 감춘 공룡이지만 고성에는 장구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경남 고성군 전역에 약 5천 여점의 다양한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가득한 이곳 고성에는 해안가에 위치한 거류산과 벽방산이 우뚝 서 있어서 누구나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한려수도의 쪽빛 바다에 떠있는 170여개의 올망졸망한 섬과 인간의 분주한 삶의 내음이 가득한 도심지가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고 있다. 수억년 전에는 공룡의 천국이었을 산 아래로 펼쳐진 저 넓은 벌판과 해안이 묵묵히 세월의 자취를 안고 자리하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하면, 마치 공룡의 울음소리를 들려오는 듯하다.
거류산(巨流山, 571.7m)은 한국의 마터호른(알프스 산맥, 4,478m)으로 불리기도 한다. 옛날 어떤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다가 밖에 나와 보니 산이 하나 걸어가고 있어서 “게 섰거라.”하고 소리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췄다는 산이라고 한다. 이름이 거창한 만큼 1년 4계절을 따라서 볼 게 많다. 산 중턱에 세워져 있는 거류산 안내판에는 소가야(小伽倻)의 산성(山城)이라 하여 태조산(太祖山)이라고 불렀고, 세종 때의 지리지에는 가라산(加羅山)으로 적혀 있다. 읍에서 통영방향으로 말티고개를 넘어서면 우리 동네 율대리가 보인다.
고성교회는 1960년 초에 개척교회가 생긴 후 많은 지도자들이 거쳐 가셨고, 특히 조우억만(오야마상)전 일본협회 제2사업부장 사업가가 일본에서 전도되어 고성복귀에 많은 협조를 해주었다. 그는 늘 고성을 아끼면서 후원을 많이 해 주었다. 내가 상리교회 개척을 할 때에는 일본에서 목수까지 동원하시어 고성에 땅을 매입하고 건축을 해주었다.
2. 출생 및 가족 배경
나는 1954년에 율대리 5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3녀 중 누나 둘을 두고서 장남으로 탄생했다. 아버지께서는 건축 일을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건강을 위해 ‘대한고성천리교’를 나가시며 정성을 많이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신앙심이 깊어서 무보수로 천리교 신축을 위해 2년 가까이 다른 일꾼과 함께 노동 봉사를 하셨다. 큰 대목으로서 주요한 목수 일을 담당하셨다. 그리고 인근에 사찰 건립의 일이 있는 경우에도 2~3년, 혹은 그 이상을 무보수로 일해 주셨다. 집에 오실 때는 나무 한 꾸러미 정도 얻어 오시면 끝이었다. 더 많은 수고비를 청구하셔도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절에서 인건비를 대신하여 나무를 주는 대로 묵묵히 받아오셨다. 그만큼 불심이 깊은 아버지이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말씀이면 절대로 따르셨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절간에 가서 놀기도 좋아 하였으며, 방학이 되면 사찰 근방에서 도라지를 비롯하여 각종 약초를 캤다. 산 짐승도 쫓아다니고 굉장히 활동력이 많은 소년이었다. 자연인 청소년이었다. 등교 때 태풍이 불고 소나기가 몰아치면, 들판 길을 지나가야 하는 등교 길은 물이 넘쳐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는 학교까지 오셔서 허리춤까지 물이 차 올라온 길을 나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을 몇 명씩 안고 물을 건너게 해 주셨다.
초등학교는 부모님의 보호아래 잘 졸업하게 되었고, 중학교도 시골길을 2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등교했다. 중학시절 친구 권유에 따라 대한예수교감리교회에 출석했다. 부활절 날에는 달걀에 그림도 그려 넣고 햇님 얼굴도 그려 넣으면서 재미있게 즐겼다. 친구들과 함께 희희낙락하면서도 가슴에는 십자가의 의미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 피의 상흔이 내게도 스며들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식과 정보를 왕성하게 흡수하는 청소년기에는 특별한 경험 그 자체가 교육효과를 거두게 된다.
중 2학년 때인 1968년도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고성읍 남산 도서관 바로 밑에 시집을 갔다. 그곳은 넓은 텃밭이 있는 공간인데, 바로 대문 맞은편에 양옥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이 고성통일교회 건물이었다. 누나는 시집가서 1주일에 만에 전도가 되었고(당시 지역장 윤덕명777가정) 나에게도 통일교회 입교를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절에 나가시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거부했다. 나 때문에 누나는 정성을 많이 드려야했고, 얼마나 속상하였을까? 철이 들고 난 뒤에야 누나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3. 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및 입교
그 다음해 1969년, 여름방학 때 누나가 나에게 “꼭 한번만 수련에 참석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그 권유를 받고 마산 지구수련회에 참석하였다. 가서 보니까, 고성 성화학생 5명이 참석했다. 그 당시 마산지구장은 임규문 지구장이었고, 첫날 강의는 권우삼 강사의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였다. 나는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눈물이 한두 방울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한 맺힌 사연들은 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기독교회에서 친구들과 즐기면서 부활절 계란을 준비하던 나는 이 강의를 듣고서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십자가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피 흘리신 이유와 원한을 찾는 영적 통찰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겨울방학 때 다시 마산 지구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다. 마산시 월남동 지구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불며 약간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개회 준비를 하는 중에 갑자기 “모두 밖으로 나오세요.”라는 지시가 있었다. 급히 밖에 나갔다. 그 순간 참아버님께서 순회 길에 오르시어 마산 지구를 찾아오셨다. 식구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구석진 곳을 참부모님께서 찾아오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반가웠고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식구들은 도로를 양쪽으로 갈라서서 50m쯤 줄을 지어서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면서 참아버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나는 처음으로 뵙는 순간이라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 이후로 나는 신명나게 원리를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고, 새 진리의 빛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실감하였다. 마침내 1969년 11월 13일에 정식으로 입회원서를 내고 협회원이 되었다.
4. 공기총 판매
낮에는 틈나는 대로 총포사(예화 산탄공기총)에 들러 총도 판매하게 되었다. 어느 토요일, 도산면 갈망개에서 “총이 고장났어요.”라는 연락이 왔다. 고성읍에서 통영군 도산면까지는 12km이고 도산면에서 산길로 두 시간을 더 걸어가야 갈망개인데, 그 길을 혼자 나섰다. 도산면까지는 버스로, 나머지는 걸어서 산길을 두 시간 정도 걸려서 고장 난 총을 받아들고 다시 걸어서 도산면까지 돌아오니 막차는 이미 떠났고 주위는 깜깜해졌다. 그러나 나는 고성 집을 향해 걸었다. 집까지 찻길이 있지만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했고 곳곳에 무덤도 보이는 곳이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도산면에서 고성 방향으로 4km쯤 오면 솔고개가 있는데 한 맺힌 귀신이 나타나서 “내 말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경우가 있다는 곳이다.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동산의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정신없이 걸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걷는 느낌이었다. 새벽 4시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채로 그냥 잠에 빠져들었다. 오로지 “참부모님께서 전개하시는 사업의 일환인 총을 팔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그 순간에 초인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하였다.
5. 봉사 활동
입교 후부터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몰래 담을 넘어 교회를 찾아가는 모험으로써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몰래 교회에 나갔다. 공부보다 교회에 머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진화론과 대학입시를 목표로 학생을 몰아세우는 학교 교육 현장에 비하여 교회는 진정한 참사랑의 공동체였기에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감을 느꼈다. 학교가 나를 이끄는 힘보다도 교회가 나를 끌어당기는 구심력이 훨씬 강했다.
방학 때가 되면 사업활동을 해서 학생 전도용으로 탁구다이도 구입했다. 한명이라도 더 많이 전도를 하고 싶어서 전도 매개체로서 탁구를 치면서 친구로 만들어 갔다. 나의 열정이 인정을 받아서 나는 성화학생회장이 되었다. 나는 더 큰 책임감을 인식하면서 통일교회에 반대하는 학생이나 부모와 가족들을 위한 대응 방안을 세우게 되었다.
먼저 성화학생 부모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신윤숙 여학생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나는 윤숙 학생과 같이 교회 뒷문으로 나가서 도망쳤다. 교회 땅이 이전의 골프연습장을 구입하여서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우리 둘은 언덕 위에서 5m아래로 뛰어내렸다. 윤숙 학생은 어딜 다쳤는지 몰라도 나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걷기도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방학 때가 되면 성미사업을 해서 전투경찰부대에 위문을 갔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표창장도 받았다. 봉사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학교 수업시간 중 윤리선생이 나를 일어서게 한 후 “이홍규 학생이 요즘 이단이라고 소문이 난 통일교회에 나간다.”고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모독을 했다. 그 후 교무실에 나를 불러 “통일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막대기로 머리를 뚝뚝 치면서 몇 번이고 죄인을 다루는 식으로 호통을 쳤다. 나는 어린마음에 꾹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 한없이 울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참아버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아픔을 생각하면서 나를 위로하였다. 언젠가 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나를 따르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게 되었고, 고3 학기 후반기 때는 친구들이 협조해서 내가 학급 실장까지 맡게 되었다. 교사가 행하는 고난을 이겨낸 내가 친구들에게 늠름하게 보인 것 같았다. 비가 온 후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고난 이후에는 하늘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셨다. 교사의 비난과 반대가 있을수록 나는 더욱 견고한 신앙심을 가졌다. 40년 지난 지금, 그 윤리 선생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 선생은 “보청기를 끼어서 잘 안들린다.”고 변명만 털어 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미안해서 전화를 끊은 것 같았다.
6. 기동대 활동 및 교회 개척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73년 9월에 학업도 중단하고 기동대에 합류했다. 학교생활은 숨 막힐 듯했다. 자유와 꿈이 있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경남 2차 기동대에 합류했다. 경남 기동대장은 김관해 대장님이었다. 경남 촌촌 마을을 누비면서 침낭 하나만 메고 영하 9도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리를 다 누비고 다녔다. 낮에는 이동해서 면장을 만나 마을 회관 등 장소를 만들어 놓고 저녁에는 계속적으로 안보강의 및 계몽활동으로 이어 갔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잠자리는 마루바닥에 침낭을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누우면 그만이었다. 낮에 쌓였던 피로가 누적되어서 우리는 금방 잠에 골아 떨어졌다. 우리들은 자주 불렀던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의 기상으로 충만해 있었다. 내면에는 활화산과 같은 뜨거운 뜻길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출애굽을 인도한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는 용기와 힘을 가진 것처럼, 우리들은 용기와 영적 힘을 배양할 수 있었다.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도착하니 그 동안의 고생과 감격과 보람이 한데 어울려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리는 승리자의 기상으로 참부모님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김관해 기동대장께서는 강한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우리들의 힘을 하나로 묶어서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드는 증인으로서 남길 사료를 함께 만드는 심정의 용사들이 되자.”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수료하기 전 보름동안 군청을 비롯하여 여러 기관을 방문하여 성금을 모았다. 그 돈으로 40개 창문이 있는 성전을 신축해서 하늘 앞에 봉헌하기도 했다. 실로 보람이 있는 경사였다. 사탄이 주관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부모님의 집을 지어서 봉헌하는 것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서양의 바로크 양식처럼 웅장한 성전은 아니고 아담한 한국형 성전이지만 하늘부모님께서 두 다리를 쭉 뻗으시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대원들이 합심하여 성전을 봉헌한 날, 우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만큼 우리들의 영인체도 감동이 되어서 쑥 자랐을 것이다. 성전 건축에 헌금, 헌물, 정성으로 동참할 때에 함께 영인체가 성장하는 모습이 실감되었다.
기동대를 수료하고 밀양군 단장면의 개척 교회로 향했다. 가는 곳곳마다 기도정성은 이어졌다. 단칸방 하나를 구해 동리 가가호호를 방문하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믿음의 자녀인 딸(조영순)을 찾았다. 6500쌍 한일가정으로 일본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김해교회에서 사무국장을 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 당시 방에 연탄을 피웠다. 밤에 머리가 아파 일어나니 연탄가스 냄새가 지독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차, 큰일 났구나.” 생각을 하고는 바로 옆방 목사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이정섭 목사께서 쓰러져 계셨다. 바로 등에 업고 밖에 나가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옮겼다. 내 몸도 어지럽고 머리가 아파서 가누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의 대신자인 목회자를 먼저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초긴장을 하였다. 응급실로 가서 처치를 받았다. 다행히 살아나셨다. 나도 회복이 되었다.
경남 고성 상리교회로 이동하여 작은 단칸방을 빌려 개척에 나섰다.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어서 주산을 가르치며 초등 중등학생을 모았다. 그 당시에는 주산시대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은행에 근무하는 것은 이상적인 직장이었다. 나도 중학교 때에 주산6급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 경험을 살려서 주산을 가르쳤다. 인기가 좋았고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자 6개월 지난 후 동네의 감리교회 신도 20여명이 밤에 쳐들어왔다. 문을 박차고 쳐들어와서 “이단교회는 이 마을에서 정착할 수 없다.”고 하며 나를 협박했다. 나는 혼자였다. 홀로 코너에 몰렸고 어찌할 도리가 없이 온갖 비난을 다 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밤을 보내고, 3일 동안 입맛이 없어 밥도 못 먹고 지냈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고구마와 먹을 것을 부모님 모르게 훔쳐 와서 “선생님, 드세요.”라고 했다. “부모님께 이야기하고 가져와야지, 훔쳐서 갖고 오면 안 되지 않니?”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알게 되면 절대로 허락을 안 할 것이라서 내가 아껴 먹던 음식을 따로 떼어 놓았다가 갖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고구마를 입에 넣었으나 넘어가지 않았다. “선생님, 울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라며 나를 위로하였다. 나는 지도자가 울면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눈물과 고구마를 함께 삼켰다. 선배들이 개척하면서 개밥을 먹었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양반인 셈이고,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던 중 재일교포 오야마(조우억만) 일본 제2사업부장께서 고성 고향에 찾아오셨다. “교회가 없어 어려움이 많습니다.”고 하였더니 땅을 300평 매입하게 하시고, 일본에서 목수 두 명을 데리고 와서 신축해 주셨다. 한국 통일교회의 성장에는 일본 식구의 도움이 그때부터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이후 마산교회 사무국장, 진주교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리고 1976년 육군에 입대했다. 교회 개척을 통한 복귀섭리 진전에 청춘을 바쳐서 기여를 해야 하는데, 국가의 부름에 안 갈수 없었다.
7. 군대 생활
1976년 2월 10일 군에 입대하면서 병영생활이 시작되었다. 3개월이 지난 후부터 협회에서 우편으로 《통일세계》를 보냈는데, 그것을 보고 이단교회에 나간다고 고참병들의 핍박이 심해졌다. 밤에 조용히 불러내어 나에게 몽둥이 찜질을 하기도 했다. 고난과 핍박이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체험했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의 서러움과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어떤 때는 남몰래 화장실 건너편 공터에 가서 홀로 조용히 기도하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는 계속 이어졌고 5개월이 넘어서 고참병도 마음이 변했는지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았다. 일등병 진급 후부터는 군종(軍宗)과 몇 번 만나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 1달에 한 번씩 우리교회에 나가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군대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사격은 늘 90점 이상을 받았고, 구보 때도 항상 자신이 있었다. 10km구보를 할 때면 동료들의 배낭 2개 정도는 거뜬히 받아서 등에 메고 뛰는데 문제는 없었다. 전우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모범군인이 되다보니까 통일교회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나를 무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구보와 사격을 잘 하다 보니 대대 수색대에 선발되었고, 1977년 팀스프리트훈련에 참가하였다. 내 역할은 산업 공장들을 밤에 몰래 침투하여 경계 근무자나 예비군들을 따돌리고 여기저기에 폭파 닦지를 붙이는 것이었다. 이미 그 곳은 초소를 뚫고 들어 온 적군에 의해 폭파를 당했다는 선언 고지서였다. 뚫린 그곳의 근무자들은 태만으로 비상소집 등 불편함을 당했다. 안양 수리산에서부터 저녁에 독도법으로 이동하여 여러 군데를 다니다가 아침이 되면 상황 종료가 되었다. 오전에는 취침, 오후에는 태권도 및 10km구보를 하고, 밤에는 독도법으로 침투 및 군사 훈련에 전념했다.
1년에 한번씩 사단에 가서 고된 유격 훈련도 잘 소화해 내었다. 매년 훈련사고로 1~2명씩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군대생활을 통하여 배운 것은 “죽을 각오로 모든 것을 집중해서 해 나간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경험을 살려서 우리 교회에서도 못한다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8. 축복의 은사와 동원
1982년 10월 14일, 드디어 6000쌍 축복을 받았다. 이전에 군에 있을 때 약혼을 하였으나 잘 이뤄지지 않았다. 구리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서 오전 내내 기다리며 나의 대상자를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서 있는데, 어느 여성이 화장실에 갔다가 바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참아버님께서는 그 여성을 가리키며 “너 나와!” 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하시면서 “같이 나가서 만나보라.”고 하셨다. 나가서 집사람을 만나고 보니 어젯밤 꿈에서 본 얼굴과 똑 같았다.
축복가정을 맺어주시는 기준으로 보면,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로써 참부모님께서 의도적으로 영남 호남 지역 출신을 부부로 맺어주신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 가정도 그것에 포함되었다. 또 한국과 일본 사이의 원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두 나라 식구를 국제축복가정으로 맺어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만남은 영•호남 만남이었다. 앞으로 2세 3세에 가서는 영•호남도 하나가 되어서 남북통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하늘이 원하시고 이상하셨던 평화이상세계를 지상, 천상 모두가 하나로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육친의 부모님께도 열심히 효도하여서 6500쌍 기성축복을 받게 했다. 처음에는 세상의 소문에 영향을 받아서 축복에 대해 동의하지 않던 부모님께서도 우리 부부가 사는 모습을 보시고 감동을 받으셔서 축복가정이 되는 것에 적극적이셨다. 우리가 전도활동을 하면서 일반인을 전도대상으로 전제하지만, 사실은 가족친지들이 우선적인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복을 가족친지들에게 먼저 베풀고, 차츰 이웃과 사회로 향해야 한다. 그것이 복귀섭리의 원칙이다.
참부모님께서 축복가정들이 종족적 메시아가 되라고 지시하신 것도 당신이 사탄과 싸워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루신 복을 축복가정과 친인척들에게 먼저 연결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나라, 천일국은 축복가정의 확대로써 실현된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축복가정 및 그들의 친인척이 축복가정이 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참부모님을 따라서 고통과 고난을 동행한 축복가정들은 그들이 가족이나 인척들에게 복을 베풀어주는 자격이 있고 또 사명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갖고 오신 복을 제자들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파되기를 바라셨다. 이방 여인이 자기 자식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당신의 복을 이방인이 먼저 받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4천년 동안 하늘부모님께서 준비해 오신 선민 이스라엘이 우선적으로 복을 받는 민족이 되어야 하였다.
나는 부모님을 축복가정으로 세움으로써 하늘 앞에 일차적인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는 안도감을 가졌다.
종족적 메시아의 입장은 제2의 참부모의 입장으로 예수의 입장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부여받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과도 이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왜 종족적 메시아로서 책임분담을 다해야 하는가? 첫째 이유는, 여러분의 부모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제1의 아담의 입장이고, 여러분은 제2의 아담의 입장에 있습니다. 부모를 복귀하여, 재창조하여 아담의 사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강제로라도 형제들을 축복해 줘야 돼요. 가정을 해결하면 다 나라도 되는 거예요. 우리만의 특권이에요.(《말씀선집》 제506권, 67~69쪽)
축복이후 동원 명령이 내려졌을 때 아내는 부안 친정으로 향했다. 논두렁에는 벼가 익어서 고개를 숙일 때쯤이었다. 애기 세 명을 친정에 보내 놓고 혼자 서울로 이동을 하려니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생이별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이산가족의 심정이 어떤지를 우리는 체험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부안에 두고서 서외리 들판을 지나오면서 몇 번이고 뒤로 돌아보며 서울로 향했다. 큰 아들과 두 딸은 부안 외가에서 종족 복귀에 함께 동참한 것이 되었다.
나는 중간 중간에 자주 처가를 찾았다. 김제 검문소를 통과할 때면 나의 경상도 억양을 듣고서 “경상도 남자가 몇 번이나 부안을 왜 오느냐?”고 물었다. “처가에 갑니다.”고 하였더니 “부안아가씨는 착한 데가 많아요. 당신은 여자 복도 많네요.”라고 했다. 3년이 지나서 아내는 자랑스럽게 동원 수료를 했고 서울에 복귀했다.
9. 7년간 특별정성
축복식에 참여하기 3년 전, 1979년 초부터 청파동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김재산 권사께서 기도 중에 “식구들이 철야정성의 탑을 쌓아야한다.”는 계시를 받았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식구들에게 권하셨고, 나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청하셨다. 나는 며칠을 고민한 끝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처음부터 기간은 정하지 않았는데 차츰 정성의 기대가 조성되면서 김권사께서 “7년은 정성을 드려야 된다.”고 하셨다. 그 뒤로 7년간 매일 철야 기도회에 동참하게 되었다.
권사님은 “0시부터 04시까지는 하늘과 사탄의 싸움이 있는 시간이다. 잡담도 금하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만으로 정성을 드려야 된다.”고 지시하셨다. 나는 그대로 정성의 탑을 쌓아 갔다. 7년 동안 김재산 권사님, 홍학실 권사님과 나, 셋이 함께 기도의 정성을 시작했다. 옥세현 권사, 신옥순 순회사 등 본부교회 권사들께서도 중간 중간에 참여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기도하는 깊은 뜻은 두 가지였다. “하루속히 하늘이 원하시는 이상세계를 꼭 만들어 들이겠다는 것과 참부모님 신변을 지켜 드리자.”는 심정으로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마음과 각오를 새로이 하며 기도에 임했다. “'신앙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기복신앙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늘 뜻에 대한 간절한 심정으로 철야기도에 참석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뜻을 받들어 나가시는 지도자 모두를 위해 기도의 정성을 이어갔다.
매일같이 철야를 할 때면 속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몸은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성령의 불길과 은혜가 넘쳐 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에 집중하였다. 때로는 새벽 4시가 훨씬 지나는 줄도 모르기가 일쑤였다. 틈나는 대로 어르신들의 간증으로 교회 초창기의 심정을 느껴 보기도 했었다.
1980년 초에는 김재산 권사님과 전세금을 합해 교회주변 2층 단독집을 임대하여 제단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낮에는 그곳에서 정성을 드렸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로 정성을 모았다. 김재산 권사님과 기도할 때면 예수님도 가끔 찾아오셨고, 참아버님께서는 늘 영적으로 찾아오시어 앞자리 오른쪽 의자에 앉아 계셨다. 영계에 계신 유효원 전 협회장님도 수시로 찾아 오셨고, 통성기도를 할 때는 나의 몸 전체가 불덩어리로 뜨거워졌다.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씩 문이 열리게 되면서 옆사람의 마음 생각도 보여 주셨다. 흔히 말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 어렴풋이 체험되었다. 밤에 잠을 안자고, 정성을 지극히 드리면 독심술 터득이 가능한 것을 인지하였다. 참부모님께서는 밤잠을 안 주무시고 인류 구원을 위해 정성을 드리셨다. 그런 심정적 기준에 계시기에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서도 척 보시면 그가 선한 편인지 악한 편인지를 아셨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날마다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 점이 참부모님과 우리들의 큰 차이점이다.
그렇게 정성을 드리다보면, 어렵고 힘드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면, 어려운 문제가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려 가는 현상을 환상으로 보기도 했다. 신기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7년간의 철야정성 기도 시간을 가졌다. 6000가정 남자 동원 기간에도 계속 이어졌다. 낮에는 사업팀에 가서 일을 했고 밤에는 교회에서 철야정성으로 이어갔다. 초인적인 자세가 요구되었다. 밤잠을 설쳤기에 낮에 중식 후에 몰아치는 졸리는 문제와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였다.
기도를 이어 나가던 중 용산구 한강로의 세계일보 사옥에 있었던 국제연수원 매점에서 제일거류민단의 사무총장을 만나는 인연을 가졌다. 일본에서 1,000여 명의 조총련지도자를 초대하여 교육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 순간 내 머리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누군가 이들을 위해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모로부터 1,000여 명의 명단을 받아 매일 밤 기도 하면서 그들이 하늘 앞에 협조하고 모두 뜻앞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했다.
한때는 기도를 통해 안수의 능력을 받게 되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식구들이나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는 식구들에게 손을 대면 회복되는 은사의 힘도 가졌다. 또 어느 때는 기도 중 몸이 하늘로 치솟는 체험도 하게 하는 등 영계에서도 큰 힘을 주시는 것을 체휼했다.
10. 천마산 산상기도회
성전중심 기도는 천마산으로 이동하여 이어졌다. 천마산 기도회는 말 그대로 하늘과 악마가 싸우는 곳이기도 했다. 7일간의 특별정성은 악마들과 치열한 싸움의 한판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무서운 추위에다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였다. 추위로 더 이상 기도를 이어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철야를 할 때는 너무 추워서 뱃가죽의 감각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냉수욕은 포기하지 않고 실시했다. 추운 겨울, 차가운 냉수로 목욕을 하고 정성을 드리는 것은 사생결단의 자세였다. 힘이 다해 쓰러질 것만 같아도 우리의 중심을 하늘에 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로 이어갔다.
1990년 초에 참아버님께서 모스크바 대회를 예정하시고 승리를 위해 몸소 심혈을 기울일 때에도 기도와 정성을 이어 갔다. 김재산 권사님과 나는 정성이 그래도 부족함을 느껴서 망우리 동민의원에서 피를 뽑아 통일동산에 뿌리기도 했다. 모스크바 대회를 승리로 끝내시고 참부모님께서 귀국 하시고 나서 김영휘 회장님을 통하여 거금을 철야기도팀에게 주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우리는 그 하사금으로 옷과 신발을 샀다. 그리고 더욱 철야기도에 정진하였다.
복귀섭리는 누군가가 드리는 정성이나 봉헌하는 제물이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사탄은 그냥 항복하지 않는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또 실제로 인명(人命)에 손상이 되는 사건이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북한의 남침야욕이 절정에 달하던 1983년 12월에 참부모님께서 전국을 순회하시면서 승공안보단합대회를 추진하실 적에 미국에 계신 흥진님 성화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참부모님께서 추진해 오신 각종 주요한 프로젝트들에서는 식구들이 모르는 가운데 지극한 정성을 드리는 분들이 있었다. 운이 좋게 나도 그런 분들과 잠시나마 함께 했다. 지금도 그 기간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다.
11. 원전참배
흥진님 성화사건 이후, 매년 양력 1월 1일이면 우리가족은 함께 흥진님의 충효열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심정으로 파주 원전을 찾는다. 어느 때는 길을 잘못 찾아서 뱀사골 주변을 한참동안 헤매기도 했었다. 추위는 매섭게 불어오고 자동차의 온풍장치는 고장이 나서 작동이 잘 안 되었다. 차 안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말할 때에는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우리가족은 포기하지 않고, “세계를 넘어 천주를 향해 몸소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심정으로 7년을 꾸준히 원전참배를 다녔다.
진눈깨비가 휘날리고 날씨가 유난히 흐리던 어느 날에는 다리 위 언덕을 지나가다가 미끄러져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순간 5인 가족을 태운 자동차 두 바퀴가 빙빙 회전하다가 가까스로 풀뿌리에 걸려 멈추어 섰다. 자칫 30m나 되는 다리 아래로 추락할 뻔한 위기 상황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마침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던 군인이 우리 상황을 목격하고 급히 부대로 가서 대형차를 몰고 와서 우리 차를 견인해 주려고 도착하였다.
그런데 또 지나가는 어떤 행인이 신고를 하였는지 영업용 견인차가 바로 도착하였다. 군인들은 영업하는 견인차에게 양보하고 빨리 부대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으나 선임하사격인 상사군인은 견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가정 사정을 눈치 채고는 한참동안 기다리시다가 상업용 견인차가 떠난 후에야 우리차를 견인해 올려주셨다. 그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였다.
견인해 준 부대원들이 떠난 한참 후에야 너무나도 감사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하늘부모님께도 감사 감사를 드렸다. 30m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면 우리가족 모두는 큰 변을 당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하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실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늘 앞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12. 사업실패와 가정의 수난
교회가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또는 교회의 경사를 앞두고 한 단계씩 정성을 모아 영적인 힘을 보태는 것으로 보람을 찾았다. 그런데 가정 돌보기를 소홀히 하다 보니 나중에는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보자인 나는 실패를 거듭했다. 청파동에서 알고 지내는 식구의 집에 전세로 살았는데, 그 집도 일본식 건물이고, 오래된 집이라 재건축 한다면서 비워 달라고 해서 그 집을 비워주었다.
그리고 개포동 가건물에 잠시 살기로 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강남에 건물을 지어 자금이 부족해서 내부 인테리어를 못했다며 돈을 빌어주면 완공 후 임대라도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약속을 믿고서 전세금을 몽땅 빌어 주었다. 그러나 하필 IMF가 터지면서 임대도 잘 안되었고, 친구는 사채까지 끌어당겨 노력해 봤지만 결국 그 건물이 부채를 감당치 못해 경매로 넘어 갔다. 나는 빌어준 돈을 찾지도 못하고 가건물에서 계속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6년 정도 거주 했을 때, 옆집에 불이 나서 타들어 가는 것을 보고 급히 동네상황실로 달려가 신고를 하고 돌아오니 놀랍게도 불이 우리 집까지 옮겨 붙기 시작했다. 불길은 더 크게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해 우리 집까지 삼켜 버렸다. 애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펄펄 뛰었다. 내가 모아오던 고서적, 참부모님 존영을 비롯하여 작품으로 만들어 오던 우표앨범 등 하나도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참혹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4남매 생명을 지켜주신 하늘 앞에 감사를 드리며 한없이 울었다. 우리 가족이 헤쳐 나갈 앞길이 막막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심기일전하였다. 악착같이 일어서서 축복가정으로서 승리한 모습을 하늘 앞에 드리자고 약속했다.
13. 80일 수련
화재 사건 이후로 나는 가장(家長)으로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가지 일을 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심 끝에 “내 마음의 병부터 치료하자.”고 판단하고 청평수련소를 찾아가서 40일 수련(9차 12차)에 이어서 40일을 더 연장하여 수련을 받았다. 수료 후에 마음의 안정을 찾고서 새롭게 출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귀가해서 처음부터 하나씩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로 하고 최선을 다하며 나날을 보냈다.
어느 여름날 저녁, 밤하늘을 올려다 보니 유난히 빛나는 별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 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느냐? 돈은 때가 되면 주머니를 채우는 법, 돈을 찾아가지 말고 쉼 없이 기도하라. 그러면 하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하는 암시를 주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입교 초기에는 선친의 남다른 깊은 불심이 나에게는 불편할 수 있었지만, 그 정성의 토대 위에서 나도 모르게 은연 중에 나에게 전수되어 나의 신앙생활에 스며있었다. 또 나의 조상 중에 이갑룡 선사가 있다. 그는 필생의 피나는 정성으로 오늘의 진안 마이산탑사(鎭安 馬耳山塔寺)를 있게 하였다. 나도 그의 혈통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하는 때가 많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내가 겪어나가는 모든 일에 있어서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격려로써 하늘이 함께 하심을 실감하게 되었다. 즉 내 삶의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셨고 참부모님이 계셨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나는 뜻에 대한 불변의 심정으로 오늘도 앞만 보고 전진 또 전진하고 있다.
14. 아내 김현숙의 통일교회 입교
아내(김현숙)는 1976년 3월 25일 전북 부안교회에서 강기범목사의 권유로 입교했다. 처음에는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상담과 대화 속에서 입교하게 되었다. 신앙을 시작하면서부터 부모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셔서 감나무를 잡고 담을 넘어서 교회로 다녔다. 그 당시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주 일식석재에 다녔다. 친구도 많아지고 차차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7년이란 세월 동안 열심히 일했더니 우수사원으로 선발되어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 일본교회에서는 화병에 큰 변화가 몰려왔다. 조상이 꿈에 나타나 화병을 사 달라는 분도 계셨고, 화병을 사서 동리 가운데 두라는 분도 계셨다. 화병 판매에 큰 붐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귀국하여서 나도 전도 활동에 열심을 내었다.
우리 부부는 1982년도 6000쌍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오빠 김성렬을 전도해서 6000쌍 축복을 받게 했다. 그리고 남동생 김성균을 전도해서 3만쌍 축복가정에 동참시켰다. 가정복귀를 하나씩 해 나가면서 나의 신앙도 키워 나갔다. 축복이후 부인 동원임지는 부산으로 정해져서 처음으로 부산으로 가게되었다. 임지생활 중 기동대로 편성되어 사업과 전도를 겸하며 부산 토성을 누비고 다녔다. 가는 곳곳마다 쉬운 일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특히 범내골 눈물의 바위를 잊을 수 없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니 나의 두 눈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참아버님께서 부산부터 찾아오시어 세계를 향해 출발 하셨던 고난의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온 몸이 뜨거워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15. 천보 가정 입적 완료
우리 가정을 비롯하여 5가정이 축복가정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기성 6500가정 축복을 받으셨다. 축복가정으로서 사시다가 성화하셨다. 큰 누나 이영성은 자형 정옥진과 기성 1800가정 축복을 받았다. 작은 누나 이선숙은 자형 이순형과 777가정 축복을 받았다. 여동생 이두혜는 니시무라와 일한가정으로서 6500가정 축복을 받았다. 아들 이복우는 김향지 며느리와 2세 축복을 받았다. 딸 이가진은 사위 우만호(코스타리카협회장)와 2세 축복가정을 이루었다. 딸 이가화는 사위 이권기와 2세축복을 받았다. 딸 이가원은 사위 토미다요시타카와 2세 축복을 받아서 일한 가정을 이루었다.
천보가정에도 4가정이 입적 완료하였다. 큰 누나 이영성 가정, 작은 누나 이선숙 가정, 여동생 이두혜 가정, 딸 이가진 가정이 천보입적을 완료했다. 우리 가정은 천력2년에 <천일국 주인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 모두는 천일국 안착에 앞서기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다.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 앞에 칭찬받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소망으로 하고 전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