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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의 산중산담 山中山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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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 산행기 스크랩 북한산 형재봉 비봉 연계산행 - 천천히 걷는 즐거움
최병의 5기 추천 0 조회 77 12.12.24 17: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북한산 형제봉 비봉능선 연계 산행

                          (도덕산 개인산행기)

 

언제 : 임진년 미틈달 아흐래 쇠날

누구랑 : 우리부부

어딜 :   국민대 - 형제봉 - 대성문 - 문수봉 - 승가봉 - 비봉 - 승가사 - 구기탐방지원센터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미틈달, 11월 

녹색연합에서 11월을 '미틈달'로 하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미틀다'라는 말은 사투리이고, 표준어는 '밀트리다, 밀뜨리다'인데, 짧은 가을을 얘기 할려나 보다

다가기전 가을의 끝자락, 마침 평일인데도 집사람도 쉰다하고, 나도...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 임란과 화란등 두 전란 속에서도 어렵게 지켜낸 북한산의 숨은 사연들을 찾아 떠나본다

 

북한산 등로

 

북한산은 최고봉인 해발 836m의 허연 병풍같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백운대를 비롯하여

가운데 인수봉, 한참 낮지만 백운대와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는 만경대 등 세 개의 걸출한 암봉을 중심으로 험준한 산세를 이뤄 예로부터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렸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러한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한양에 도읍을 정했고, 지금의 서울에 이른다

 

 

인터넷이나 길음역 지하철역 내의 3번 출구안내판에도 3번 출구로 나가면 1112번 버스가 국민대 종점이라 했는데

정류소에는 1112번 버스 안내하는 곳이 없다. 이런 난감할 때가 있나...

물어보니 1213번 버스가 국민대 앞이 종점이란다.

 

그렇게 도착한 국민대 정문 앞  11시가 넘었네...

 

국민대 앞 버스정류소

 

 

여기에도 1112번 버스는 없다. 도대채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북한산 둘래길을 따라 도로를 따르다 보면

 

덕수궁 돌담길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가을을 머금고 있는 가을의 도로

 

북악터널 지하차도 시작 지점에서 우틀하면

 

북악공원 지킴터가 나오고

 

이제 북악 탐방로인 대성문 이정표를 따르게 되는데

 

조금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이정표로는 어디로 올라야 형제봉인지 알 수가 없다.

북한산 정도면 이정표가 잘 돼 있을 것으로 생각해 지도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난감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평창동 방향으로 좌틀해야 물 흐르 듯 능선산행을 할 수 있다.

 

여기에도 형제봉은 없고

 

여기에도 없고

 

북한산 둘레길인 수유동 방향인 심곡사 영불사 방향으로

굿당인 삼곡사와 혼동하여 이 곳 심곡사로 들러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삼곡사는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오면 삼곡사,약수암 이정표를 따라야 한다.

 

서광사 갈림길에서 계속 심곡사 염불사 방향으로

 

잠시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서광사 입구에서 마지막 가을 기분에 젖어 보고

 

 

영불사 방향으로 계속 오르면

 

영불사 입구가 나오는데

 

자연그대로의 바위를 이용해 만든 산신각과 탑이 있는 기도터와 종각이 아름답게 보인다

 

바위 동굴안에 부처님도 모시고 있다

바위에 선각이나 양각으로 새겨진 마애산신도가 있다는데 확인하지 못했고

규모가 큰 절인데, 물론 서울 근교 절이라 그런지 이 사찰도 규묘의 경제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통 작은 암자로 시작하여 일주문을 만들고 종각을 세우고... 여기까지는 불심이니 마음으로 세우지만...

다음엔 이 곳처럼 크나큰 입석 석불을 더 크게,  더 크게.......

 

산신각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서는 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전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토착신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삼성각'을 두기도 한다.

삼국시대부터 불교에 수용되었지만 조선중기 이후에 산신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형제봉 아우인 바위봉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대웅전 - 북악의 수호신 같은 위치에 있다

 

영불사입구의 등산로를 따르면 대성문 2.5km지점을 지나고

 

북악과 정릉 지킴터 갈림길을 지나고

 

대성문 2.3km 지점부터 형제봉 탐방로로 바뀐다

 

나무가지 사이로 보현봉의 위용이 서서히 앞을 안내하고

 

드디어 형제봉 갈림길인 안부가 나오는데

여기서 알았네..   길을 잘 못 찾아 든 것을....

어쩌겠는가?  멀더라고 들렸다 다시 이 길로 돌아 와야지...  ㅉㅉ

 

아우봉을 지나

 

아우봉과 형님봉 사이의 안부

 

형제봉과 안산이 나란히 줄지어 고개를 내민다

 

바위봉으로 전망이 좋은 형제봉, 막바지 열심히 오르고 있는 나의 옆지기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대성능선이 조망되고

 

앞쪽의 사자능선과 뒤에 쪽두리봉이 얼굴만 내밀고 있다

 

평창동 방향 - 북악스카이 웨이 능선도 육안으로는 보이나 사진으로는?

 

우리 부부 추억도 담아보고

망한 고려를 등지고 이성계를 찾아 나선 두 형제가 북한산 호랑이와 맞서 싸우다 죽었는데, 형이 높은 봉우리, 아우가 작은 봉우리가 되었단다.

서로 마주보고 있어 형 봉우리를 넘을 때는 형이 아우를 도와주고, 아우 봉우리를 넘을 때는 아우가 형을 도와주고....

유래야 어떻든 혼자보단 둘이어서 행복하지 않은지? 지금 우리부부처럼

 

다시 안부로 돌아와 점심까지 해결하고 보현봉을 조망하며

이 보현봉은 갈 수가 없는데 보현봉을 꼭지점으로 국민대와 평창동의 삼각형지형이 일찍 등산금지 구역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산세로 보아 위험하기도 했겠지만 바위가 있는 봉은 어디나 신앙인들이 기도처로 삼는 바람에 몸살을 치르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하지만 이 봉우리가 북악산 넘어 서울 4대문을 제일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응 정말? 거기가 무섭긴 무섭다

 

대성문 1.0km지점

 

계속되는 가을 오솔길

 

일선사 갈림길을 지나

 

정릉탐방지원센터 갈림길을 지나면

 

대성문이 보인다

 

대성문

대성문(해발 620m)

임금께서 여차하면 경북궁에서 북악산을 거쳐 형제봉능선을 넘어와 북한산 행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산성 12성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단다

특히 전란시에는 임금님만 빠져 나갈 수 있었다하는 얘기도 전하는 것을 보면 매우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으리라

 

이제 비봉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대남문으로 갈 것이고, 반대편으로 가면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위문을 거쳐 백운대로 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인조가 겪은 '삼전도의 굴욕'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조선 숙종 때 급하게 만들었다는 북한산성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얘기하려 하고 있다, 적어도 이 산성을 걷고 있는 동안에는...

 

산성길을 따라간다

복원한 산성이기는 하지만 이 거대한 산성안에 군사들이 성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이야 이런 성 ?는거야 많은 사람이 필요없겠지만, 옛날에는 가장 큰, 이른바 국책사업급 공사였을 것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 따랐을 것인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

 

대남문을 향해 오르다 지금도 다정히 마주하고 있는 형제봉을 조망하고

 

대남문 직전 봉에서 사모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을 담아본다

 

대남문을 지나면

 

대남문

 

백제시대부터 산성을 쌓았다는 북한산성의 지금 모습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에 완성됐다.

숙종·영조 때 인물로 북한산성을 쌓는 데 기여한 승려인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성문은 14개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중 유실된 수문지(文殊門)를 제외하고 현재 13개가 남아 있다고 하니

한번쯤 성곽 순례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여래가 되기 바로 전 경지에 오른 성자라는 아라한의 준말인 나한봉을 조망하고

 

가야할 비봉능선

 

문수봉 정상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위치한 봉으로 아래의 문수사란 절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봉우리 위의 두꺼비 모양의 바위 등에 걸터 않아, 아들갖기를 빌면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문수사

1109년(고려 예종 4) 묵암(默庵) 탄연(坦然)이 창건하였다는 이 절은,

이 곳 암굴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목격하고 문수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문수보살 3대성지중 하나이다

文殊菩薩은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역활을 했다는 지혜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능선따라 가다보면

 

기암바위군을 만나고(승가봉)

 

사모바위와 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어디에 내 놓아도 손가락안에 꼽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오늘 비록 운무에 ?여 있어 조망은 좋지 않지만, 육안으로는 충분이 조망할 수 있는 날씨에

옆지기도 처음?보는 북한산의 아름다움에 행복해하고

대간에 정맥에 등한시 했던 우리 주위의 이렇게 아름다운 산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이제 안전시설이 설치된 하산  길 직전 승가봉

 

 

 

통천문 직전 문수봉 삼거리 이정표

 

통천문으로 오르는 길

양쪽 바위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돌계단처럼 형성된 모습이 범상치 않은 오름길이다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스스로 길을 연 듯한 바위에 감사하고...

이 통천문을 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원을 했을까?

 

통천문

 

 

 

이정표 - 대남문 1.5km지점

 

사모바위와 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삼천사 계곡 안부도 만나고

 

사모바위

조선시대 관리들이 쓰던 사모紗帽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뭔가 사연이 기구하게 보이는 모습을 내려오는 내내 궁금하기만 하였다

멀리서 보면 뭔가 찾고 있는 듯 약간 기울어져 있었는데....

 

병자호란때 전쟁터로 나가게 된 청년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왔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소식에

매일매일 이곳 북한산에 올라 북을 바라보다가 결국 바위로 변했다고 한다

 

실제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의 여인들을 환향녀라하여 갖은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조정에서 나름대로 홍제천에 뭄을 씻으면 그 죄를 면해준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것인지?

어찌됐든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산자락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하니.  참으로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그래도 인조는 마음에 걸렸던지 이혼까진 허락하지 않았다지만, 양반이란 허울에 ?겨나 이곳 홍제동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사연?

 

진관사계곡과 삼천사계곡을 가르는 응봉능선 갈림봉이기도 하다

 

이제 저 비봉까지 가면 오늘의 마지막

 

사모바위 바로 아래에 무장공비 은신장소가 있다

 

 

V자형 동굴 내부

여기서 시작하는 북쪽 능선이 응봉(매봉)능선인데 그 끝에 진관사가 있다. 진관사에서 사모바위에 이르는 길이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지나온 이른 바 '김신조 루트’다. 세간에 우이령을 김신조 루트라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임진강을 건넌 김신조 일당은 파평의 파평산을 지나 법원리 삼봉산, 비학산에서 일박하고 광탄의 앵무봉, 고령산을 지나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노고산 줄기를 넘어 진관사 근처에서 일박한 후 사모바위에 도달했다.
허기지고 추위에 떨던 이들은 방향감각이 무뎌져 제 자리를 맴돌다가 어두워지면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구기동을 지나 상명대 삼거리에서 창의문으로 넘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내려가야할 승가사 갈림길

 

 

비봉碑峰 은 들려야지.... 

碑峰 은 진흥왕 순수비가 있던 봉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이 비석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이중환(숙종~영조)선생의 택리지이다. 팔도총론 경기도편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서남으로 비봉에 이르렀다. '무학오심차지(無學誤尋此地: 무학이 이곳에 잘못 찾아온다)’라고 도선이 세운 비를 보고 북악으로 가서 결국 도읍을 정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비를 '무학대사오심비’ 또는 글자가 없어졌다고 '몰자비(沒字碑)’라고 불렀다 한다

 

진흥왕 순수비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이 비는 신라 진흥왕(540~576)이 새로이 확보한 영토의 국경을 직접 둘러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것으로.... 이러한 비를 순수비(巡狩碑)라 부르는데,

진흥황 순수비가 세워진 곳은 현재 경상남도 창녕, 함경남도 이원(利原)의 마운령(磨蕓嶺)과 길주(吉州)의 황초령(黃草嶺) 그리고 경기도 북한산 비봉(碑峯) 등 4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이 비를 직접 찾아보고 비문을 탁본하여 연구한 결과 모두 68자를 읽어 냈고 바로 이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이듬해 김정희는 다시 이 비를 찾아와 비석 옆면에 자신이 이 비를 찾은 날짜와 이 비가 바로 신라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새겨 놓았다.    자료 : http://uquehan.blogspot.kr/2012/09/20120909_11.html

가파른 비봉을 오르고 있는 나의 옆지기

지금부터 2050년 전, 고구려 주몽의 왕비 소서노는 온조, 비류 두 아들을 데리고 믿을 수 없는 남자 주몽을 떠나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으랴? 이곳은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의 맹주 마한의 땅이었다. 온조는 마한왕에게 허락을 받아 이 곳 서울에 삶의 터전을 구한다. 그러다가 힘을 키운 온조는 마한이 어지러운 틈을 타서 마한을 점령해 버렸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배신이 서울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위를 배경으로 한장 - 거북이 같기도 하고....

그 후 600년이 지났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하정책으로 백제를 쳐서 서울 땅(한수 이북)에 도읍한 개로왕을 사로잡아 처형했다. 이에 그 아들 문주왕은 도읍을 공주(웅진)로 옮긴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힘을 합쳐 고구려를 쳐 551년 백제의 한강 이북(지금의 서울)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553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의 뒤통수를 쳐 이 곳 서울 땅을 빼앗아 버린다. 또 배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후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바로 비봉에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의 이름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로서, 비봉이란 이름도 이 비석에서 비롯되었다. 동물의 수컷들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한 비석이다. 그 후 백제는 배신자를 응징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비봉정상

정상에 복재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데...  ㅋㅋ  정상모습만 보고 다시 내려온다.

비석은 풍화가 심하여 1972년 이곳으로 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2006년 10월에는 원래의 자리에 현재의 복제비석을 세워 역사적 현장을 보존해 오고 있다.

 

다시 승가사 갈림길로 돌아와 계곡으로 하산 시작

 

바위가 있는 넓어지는 지점도 지나고

 

승가사 갈림길인 네거리

 

삼성산 승가사 일주문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절.  - 자료 : 산
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에 속한 사찰로, 북한산 비봉 동쪽에 있다. 756(경덕왕 15)에 낭적사의 승려 수태(秀台)가 창건하고 당나라 고종 때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가르쳤던 승가(僧伽)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산신각·향로각·동정각(動靜閣범종각·대방(大房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절 뒤편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보물 215)이 전하고, 석굴 안에는 고려 현종 때 조성된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이 남아 있다
.

 

어느 절에나 있는 계단

 

 9층호국보탑이라 한다

 

승가사 궁전

서울 근교여서인지 몰라도 절이라기 보다 궁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까?

고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너무 다듬어진 현대식? 정말 전혀 올라가보고 싶지 않은 절이다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을 보고 싶지만 옆지기도 지치고, 시간도... 

우리 마애석불도 현대화된 환경에 마냥 즐거워하고 계실까?  길상사에서 본 자연스러움이 그리워 진다

 

해우소에서 본 승가사

승가사는 신라 경덕왕 15년(서기 756년)에 창건한 절이다. 승가굴이라는 자연석굴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인도의 승려 승가대사의 상은 고려 현종 때 제작한 것으로 보물 1000호이며, 굴 앞 약수에 있는 영천(靈泉)이란 글씨는 추사의 글씨라고도 한다.
탑을 뒤로 하고 잠시 오르면 절마당에 닿는다. 비구니 스님 절답게 단아하다. 어떤 호사가들 의견으로는 이곳에서 보이는 사자능선이 좌청룡(左靑龍)인데 그 형세가 나부반와상(裸婦半臥像: 옷 벗은 여인네가 비스듬히 누운 모습)이라서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도 한다.
승가사의 압권은 역시 마애불이다. 승가봉의 기를 받아 내려온 절 뒤편 자연 암벽에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절 뒤편 산 쪽으로 108계단이 있는데 108번뇌를 안고 그 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마애불이 내려다본다.
“수고하시었네. 이제 내게 와서 속세에서 묻은 번뇌 다 내려놓고 가시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보물 215호로 지정된 10세기 고려 초기 마애불이다. 석가여래상이라 하는데 미륵불 느낌도 난다.
승가사 마애불은 '힘든 짐 내려놓으라’는 듯 미소 짓지만, 사실 이 거대한 불상은 중앙정권에 맞서는 지방세력의 힘 과시 위해 세운 것.
고려는 각 지방 토호(土豪: 지방 토착세력)들의 연합체 국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태봉국의 궁예는 나라를 세우자 각 지방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걱정한 각 지방의 토호들이 연합해 개성 지역의 토호 왕건을 앞세우고 궁예에게 반기를 들어 건설한 국가가 고려였다. 그런 고려였기에 왕권 못지않게 토착세력의 힘은 막강했다. 세력의 힘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각 지방에 세워진 거대한 석불이다.
파주 용미리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부여 태조사 석불, 하늘재 미륵사 석불(마의태자 석불) 등이 모두 이러한 경향을 띠고 있다. 이 곳 승가사 마애불도 고려의 남경(서울) 지방을 대표하는 막강한 힘을 지닌 토호의 지원 없이는 조성하기 힘든 석불이었다.

 

몇 번의 계곡을 건너야 한다

 

 

대남문에서 문수사로 바로 내려오는 갈림길인 구기 삼거리

 

이젠 단풍도 빛바레가는 아쉬움을 담아보고

 

구기 탐방지원센터를 지나고

 

이 곳은 단풍이 막바지 힘을 내고 있다

 

 

삼거리에서 도로를 건너면 구기동 현대빌라 앞 정류소에서 7212번 버스가 있는데....

 

조금 더 큰길로 나오면 구기터널이 보이는 삼거리가 나온다

 

길을 건너면 서울역으로 가는 7022번 버스를 구기터널앞 정류소에서 타고 서울역으로...

 

 

서울에 있는 산이면서도 그간 들르지 못했는데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옆지기와 함께 할 수 있는 산행지로 형제봉을 다녀 와서 더욱 즐거운 산행이 되었다.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북한산이지만

이왕에 가는 길에 의미라도 알고 갔으면 하는 마음에 산행기로 옮겨 본다.

 

북한산을 삼각산으로 불려야 한다는 말에 동의 하지만...

아직은 모든 지도에 북한산으로 되어 있어,  이 산행기에도 북한산으로 표기했습니다

 

북한산, 전혀 다른 산으로 내게 다가 온 것 같아 즐거운 마음입니다.

쪽두리봉에서 사패산까지 홀로 달려갈 때는 이런 절경이 있었나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옆지기와 최대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볼려 노력했더니 많은 것이 보였습니다

짧은 길이라도 여유있게 걷는 즐거움을 위해...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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