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작하는 말
기독교는 '책의 종교'를 표방한다. 그 예전(禮典)과 가르침과 삶의 실천을 '성서'에 두고 있음으로 해서이다. 따라서 모든 분야 기독교 교의의 최종적 권위는 성서에 있다. 기독교 내 모든 교단은 다 자신들의 공동체가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방과는 달리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항상 성서가 신앙 공동체의 교의를 산출하는 진정한 원천(源泉)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특정 시대의 특정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의를 주장하는데 있어 이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proof-text)으로 기능한 바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필립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는 교의학(敎義學)에서 독립한 별개의 학문으로 성서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1) 성서가 말하는 바를 현재의 교의적 편견에 좌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찰과 해석을 특성으로 하는 성서 연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신약성서 연구도 그러한 독립성을 확보해 나가는데 있어 적당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본 논문은 해방 이후 현금에 이르기까지 신약성서 연구가 국내 신학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해 나가는 과정의 궤적을 확인하면서 그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신약성서 연구의 흐름과 경향을 구획하는 시대적 구분을 짓고 각 시대별 특성을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신약 연구의 각 분야로 범위를 좁혀 개별적으로 어떠한 연구 결과와 쟁점들이 지난 반세기에 표면에 드러났는지를 개괄하는 시도를 할 것이다. 분야별로 전문화된 주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이 80년대에서부터인 것을 감안하여, 70년대까지는 시대별 구분으로 개략하고 80년 이후부터는 쟁점과 분야별로 정리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의 특성과 지면의 한계를 감안할 때 그간 이루어진 모든 연구 결과를 빠짐없이 나열하는 작업이 될 수는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연구사의 획을 긋는 주요 결과들과 쟁점들을 위해서 취사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2)
II. 국내 신약 연구사의 시대 구분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신약학은 다른 신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서구에서 시작되어 국내에 들어온 학문 분과이다. 그러면서도, 연구 현지(現地)의 신앙 공동체의 특수한 문화와 역사에 크게 영향을 받는 다른 신학 분야와는 달리, 공통의 자료이며 지표인 '텍스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문화적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신약학이다. 그래서 국내의 신약연구가 세계의 신약연구 추세의 전개 과정과 같은 방향을 타고 자기 발전을 이루어왔다는 것이 흠이 될 이유는 없다.
1. 역사비평 이전의 시대(∼1945년)
가블러 이전에 별도의 성서학을 말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국내의 신약연구도 별도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던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신학교가 세워졌지만 신학 교육은 주로 서구의 보수적 경건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여 숙지하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신약학은 '학'이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정도의 무비평(pre-critical)의 시대였다."3) 비평적 학문의 모양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전도와 목회의 실용적 차원에서의 글들이 간헐적으로 출판되었다. 저자는 대부분 선교사역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을 통해 소개, 번역된 문서들이 주종을 이루었다.4) 서구에서 19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되던 역사 비평의 방법이 20세기 전반기의 한국 기독교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한글로 번역된 신약성서 개론서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방법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또한 '고등비평'이라는 표현으로 역사 비평적 성서연구에 대한 경계의 언급들이 전혀 없지 않았다.5) 하지만 방법론적 엄격함이 국내 기독교 신앙의 기조인 "경건주의, 복음주의, 구속사학파"6)의 한계에 묶여있어 성격상 역사적 연구의 과학성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아빙돈 주석이 번역되었지만 장로교회 총회에서 문제의 책으로 지적되어 구독이 금지되고 관련된 목회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해프닝도 있었다.7)
2. 비평적 성서연구의 발아(發芽)와 한국교회의 논쟁(1945-1960)
해방된 교회의 역사는 분열로 시작되었고 이 분열의 한 가운데 신학교의 신학방법론의 차이가 놓여있었다. 여기서 이슈가 된 신학방법론의 핵심이 바로 성경의 고등 비평 문제였다. 조선신학교 재건 과정에서 김재준 교수의 입장이 학생들에 의해 '고등비판'이라 명명, 거부되었다. 이어서 박형룡 박사가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고등 비판"으로는 성서의 권위를 보전할 수 없다고 해석하면서 분리의 길을 열었다.8) 이른바 교회의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성서관과 '고등비평'이라 이름한 역사 비평의 허용 여부에 있었던 것이다.
신약연구에 역사 비평이 적용되면서 마틴 디벨리우스(M. Dibelius)의 『바울』(1956, 전경연 역), 『예수』(1957) 등이 번역, 소개되었고, 김정준 교수는 『예수전』(1951-1955)을 저술했다. 장로회신학대학의 권세열 교수가 펴낸 『요한복음주석』(1958)도 상당한 정도의 역사비평적 안목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9) 전경연, 지동식, 김철손, 김용옥의 공저로 1958년에 출간된 『신약성서 개론』은 최초의 한국인 학자들에 의한 개론서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약성서 연구에 있어 이러한 역사비평의 적용은 예외적이고 부분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학문으로서의 본격적인 신약연구는 신약학회의 조직을 기다린다.
3. 신약학회의 출범과 발전(1960년대)
한 때 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왔던 진보적인 신학방법론이 보편적으로 수용이 되기 시작하면서 신학 전 분야에 '학문성'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학문적 발전은 각 교단과 신학교마다 전통적으로 보수하던 교의 및 성서관과의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10)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구미 각국에서 비평적 방법론을 익히고 돌아온 여러 학자들이 국내에서 저술과 번역에 그러한 연구들을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학문적 발전에 동력을 제공한 것은 1961년 5월 29일에 창립된 한국신약학회였다. 첫 총회에는, 전경연(한신대), 지동식(연세대), 박창환(장신대), 유동식(연세대), 유시욱, 구두인(성 미가엘 신학교), 김용옥(감신대), 문상희(연세대), 이여진(한신대), 이상호(연세대), 김철손(감신대) 등 11명이 참석을 했고 전경연 박사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11) 한국신약학회는 "한국에 있어서 신약성서학의 모든 분야에 철저한 연구를 조장하여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것"12)을 목적으로 창립되어 매년 3-4회 모임을 가지면서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이어갔다. 또한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에드워드 슈바이처(Edward Schweitzer), 헤이(Hay) 등의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학문적 교류를 갖기도 했다. 이 시기 신약학회의 학문적 연구와 토론은, 아직은 신약학의 불모지였던 한국 교회에 서구의 연구 방법론을 이식시키는 산파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약학회가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몇 권의 저서들이 있다. 전경연(바울), 문상희(복음서), 이상호(원시 기독교), 박창환(요한), 김철손(일반서신과 계시록)이 함께 저술한 『신약성서신학』(대한기독교서회)은 1963년에 발행되어 그 초판이 약 40회 가량 중쇄되었고 개정 신판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원어 연구에 있어 중요한 도구도 이때 만들어진다. 메이첸(J. G. Machen)의 New Testament Greek for Beginners에 기초하여 편저(編著)한 박창환의 『신약성서 희랍어 교본』이 1962년에 출간되어 90년대까지 많은 신학교에서 헬라어 교재로 사용되었다. 『성서 희랍어 사전』도 1965년에 발행되어 한국 신약학도 원어 연구의 기초 도구가 된다.
4. 한국 교회의 급성장과 신약학자들의 고민(1970년대)
창립 이후 활발하던 신약학회의 활동은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약 10년 가까이 정체(停滯)의 시기를 갖는다. 신약학회는 이 시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신약학회 기록을 보면, 1976, 1980, 1981, 1984년의 학회 기록이 없다. 뿐만 아니라, 국내 학자들의 연구 발표는 별로 없었고, 주로 외국인 학자가 방문했을 때 함께 모이는 정도에 그쳤다. 이 시기에 신약학회와 만남을 가졌던 외국의 신학자들은 Otto W. Betz, William R. Farmer, Ernest Best, G. Strecker, Bruce Metzger, James Charlesworth 등이다. 신약학회 회원들은 이들이 한국을 방문해 있는 동안에 연락하여 급히 공개 강좌를 하고 모임을 가지곤 했다.13)
사실 이 시기는 신약학회 차원에서 정의하는 것처럼 그저 '침체'의 시간은 아니었다.14) 학회 활동 차원에서는 침체였겠지만 신약연구사 측면에서 보면 도약을 위한 내적 에너지의 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7-80년대는 한국 교회 전체가 양적으로 급팽창을 이루던 기간이었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신학에 입문하는 신학생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신약학회 회원들이 각자가 속한 신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신약 학도들이 배출되어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런 역량의 축적은 80년대 이후 이루어질 도약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상황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학회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이 시기 내에서 의미 있게 활동할 수 있던 신진학자의 배출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15) 하지만 이런 현실과 별도로 학회에 속한 기성 학자들이 개별적 연구물을 양산해내는데는 소홀하지 않았다. 신학도의 증가에 따라 적지 않은 신약학 교재들이 저술 내지 번역되어 출간되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16)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신약학자는 전경연, 가장 많은 글을 쓴 신약학자는 안병무로 기억되고 있다.17)
신약학 연구의 경향성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던 시기가 1970년대였다.18) 당시의 지식인들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맞물린 유신체제의 개발독재와 이러한 체제가 만들어내는 각종 사회문제들로부터 사유(思惟)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되었고 신약학 또한 신약성서의 텍스트와 신약을 탄생시킨 고대세계에 대한 지적 탐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을 환경으로 갖지 못했음은 자명했다. 당시의 신약학자들은 텍스트 자체보다 해석자의 콘텍스트인 한국 사회에 현실적합성을 갖는 연구를 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신약성서의 입장에서 조명하는 논문이 여럿 쏟아져 나왔다.19) 당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기초한 억압의 국가 권력에 무작정 굴종할 수 없는 교회의 고민이 담겨있는 글들이었다.20) 신약성서에서는 전혀 중심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약학자들의 논문의 상당수가 국가와 권력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 한국 사회의 정황을 반영한 특수한 현상이었다.
또한 70년대는 한국적 신학을 하려는 신학계의 고민에 신약학자들도 동참한 시기이기도 했다. 60년대 학회가 조직되고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면서 한국 신약학계의 아카데미아는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이론적 점검의 작업에 들어가는 듯한 모양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학문으로서의 신약학의 조류를 점검하여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논문이 다수 등장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안병무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 현대 성서학의 동향」(1971년), 황성규의 「신약학의 최근 연구 동향」(1975년), 김용옥의 「신약학의 최근 동향」(1976년), 이상호의 「요한 신학 연구의 최근 동향」(1976), 박형용의 「바울 연구의 역사적 고찰」(1980) 등이 이 시기에 연이어 발표되었다. 신약학회의 활동이 다소 위축되고 신진 연구자들의 활동이 부각되지 않아 염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상당수의 기존 학자들이 '최근의 신약학 동향'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는 것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확보의 부담은 한국적 신학을 향한 토착화의 시도를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했다. 특히 이런 주제에 관심을 보인 신약학자는 김용옥과 안병무, 문상희였다. 김용옥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1971년)를 통해 세계 교회의 이슈들을 한국적 상황에서 재해석, 재평가하여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고 세계 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같이 고민해야 할 것을 권했다.21) 동일한 관심의 차원에서 「아시아 신학 속의 한국 신학」(1971년), 「신학 교육의 한국적 문제 상황」(1773년), 「기독교와 민족주의 - 예수와 바울을 중심으로」(1976년), 「한국교회의 설교유형에 대한 성서해석학적 고찰」(1977년) 등이 발표되었다. 김용옥은 이러한 한국적 신학의 형성을 위해 불트만의 '전이해'(前理解)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제의하기도 했다.22)
안병무는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1977년)에서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극단적 성서주의를 비판하며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다양한 예수 이해를 분석 평가했다.23) 안병무에 따르면 그때까지 한국 교회는 '이상적 인간 예수'(박형룡, 이용도의 비역사적 예수 이해), '혁명가 예수'(유경상), '역사의 예수'(김재준), '세속인 예수'(유동식, 홍현설), '해방자 예수'(문동환, 박형규), '민중의 친구 예수'(서남동) 등 다양한 예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안병무의 분류는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역사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이해'에 대한 혼동을 풀려는 신약학적 노력이었다. 문상희의 경우 주로 한국의 전래 신앙과 신흥종교의 연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한국 민간 신앙의 자연관」(1972년), 「신흥 종교의 묵시 사상」(1973년), 「샤마니즘과 기독교」(1974년) 등, 그의 논문들은 꼭 신약학적 정의에 부합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약연구자의 시각으로 한국의 종교 현상을 관찰했다는데서 이 시대 신약학 연구의 자세를 가늠하는 한 지표가 되어준다.
이 시대의 독특성과 상관없이 신약학 본래의 주제에 대한 연구들도 계속 진행되었다. 김철손은 묵시 문학과 계시록에 대한 연구물을, 전경연은 성서의 언어와 해석학에 대한 논문과 저서들을, 그리고 이상훈은 예수, 장상은 바울, 김득중은 마가복음과 관련된 다양한 글들을 써냈다. 허혁은 불트만의 저서를 충실하게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다음 세대의 연구를 위한 기초를 든든하게 세워주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약학자들의 국내 교계와 학계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순수하게' 학문적인 신약연구의 결과물들을 직접 생산해내는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득중이 잘 지적해주었듯이, 그나마 연구 분야가 복음서에 너무 치중해 있었고 방법론에 대한 주체적 토론이 빈약하여 서구의 것을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24) 그리고 신약학자들이 직접 저술한 주석이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1970년대 연구사의 아쉬움이었다.25)
5. 세계의 신약학사 속으로(1980∼현재)
1) 전문화된 신약 연구의 시대
역량 축적을 위한 한시적 정체의 시기를 벗어난 신약연구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독자적 학문으로서의 성숙기를 맞이한다.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과 더불어 산출된 다수의 신학도들이 신약학계에 문을 두드리면서 그들 중 상당수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반에 걸쳐 서구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대거 귀국했을 뿐 아니라, 90년대에 들어가면서 국내 주요 신학계 대학원들이 자체 박사 학위 소지자들을 배출할 수 있게 되면서 신약연구의 지식인층이 무척이나 두터워졌다. 신약학회의 학술대회에 150명 이상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을 만큼 오늘날 신약학계는 인적 자원이 넉넉해졌다.
70년대에 기독교학회가 발족하면서 신약학회만의 별도 모임이 한동안 뜸했으나 1995년부터 매년 "춘계 학술 발표회"가 마련되고 가을에 기독교 공동학회가 열리는 때에 맞추어 신약 분과 모임 외에 "신진학자 논문발표회"를 별도로 가짐으로서 토론의 장이 확대되었다. 1998년부터 춘계 발표회는 그해의 대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각 분야의 발표 논문을 모집하여 발표케 하고 이를 출판해 왔다.26) 이어 2001년부터는 월례 학술 발표회를 통해 논문 발표의 기회를 더 늘려가고 있다.
신약학 전문 학술지로서 『신약논단』이 1995년부터 매년 발행된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러나 회원들이 발표하고자 하는 논문을 다 수용하지 못하자 2000년부터는 연 2회로, 다시 2001년부터는 연 4회로 발행을 늘리고 있다. 아울러 1999년 총회 이후 특정 방법론이나 주제를 같이 하는 회원들이 팀을 이루어 공동의 연구와 토론을 거친 뒤 신약학회의 이름으로 연구서를 출판하는 "신약연구시리즈"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 과거의 신약학자들이 자신의 전공성을 넘어 교계와 신학계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며 폭넓은 저술과 집필 활동을 하던 시대는 마감을 고하게 된다. 따라서 연구의 주제도 신약학 분야의 세계적 추세에 병행해 나가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개별 학자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 있어 뚜렷한 소신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 성숙의 잠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 신약학계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주요 이슈들의 논의에 거의 빠짐없이 동참할 만한 역량을 국내 학계가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박수암은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만은 세계 신학계와 어깨를 겨눌 수 있을 만한 경지에 도달한 시기"라고 표현했다.27)
2) 방법론적 다양성이 확보된 시기
해방 이후 한 때 한국 교회는 성서 연구에 있어 역사비평의 수용과 적용 여부를 놓고 교회의 분열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역사 비평은 성서 연구의 당연한 전제가 되어 버렸다. 물론 그 적용의 범위와 결과 수용의 정도에는 진영마다 차이를 보였다. 역사비평의 결과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책으로서의 성서의 권위에 미치는 영향을 놓고 고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불트만의 해석학적 방법과 연구의 기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가가 보수와 진보의 입장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지난 시대를 통해 번역 소개되면서 쏟아져 나온 불트만의 저서와 그에 대한 해설과 비평의 글들은 신약학계를 열병처럼 휩쓸었고 불트만주의의 수용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교단과 신학의 노선이 갈라졌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때 한국 학계에서도 불트만은 금기(禁忌)와 이상(理想) 사이를 오가는 시금석으로 인식되었다.28)
그러나 80년대 이후 세계 신약학계는 불트만에 매인 채 그 역사를 종료시키지 않았다. 본문비평, 자료비평, 전승사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이 전통적인 역사비평의 방법으로 골간을 유지하면서도 전통적 역사비평을 확장시킨 사회과학적 연구방법, 수사학적 비평, 정경비평 등이 새롭게 등장하는가 하면 역사주의에 회의를 품은 구조주의, 문학비평, 독자반응비평, 해체주의, 여성해방신학비평 등이 등장하면서 역사비평의 전통을 아예 전복(顚覆)시키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29) 아직까지 국내 신약 연구의 다수는 전통적인 방법론으로서 역사비평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소수를 구성하지만 전통적 방법을 확대하거나 극복하려는 시도가 움트고 있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증폭된 사회적 이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그 호칭이 가져다주는 매력과 호기심에 자극되어 사회학적 연구방법을 신약학계에 끌어들였다.30)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의 사회학적 연구의 결과물을 담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김명수 역, 1986년)가 번역 소개되었다. 사회학적 모델을 원용하는 타이쎈과는 달리 다소 고전적인 사회사(社會史)에 가깝기는 하지만 바울 공동체와 그 환경의 사회적 배경을 탐구한 웨인 믹스(Wayne A Meeks)의 『바울의 목회와 도시 사회: 1세기의 기독교인들』(1992)도 번역 출판되었다. 또한 타이쎈이 기초한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대립각을 세우는 '갈등이론'(conflict theory)에 바탕한 리처드 홀슬리(Richard Horsley)의 『예수 운동의 사회학의 사회학적 접근』(이준모 역, 1986년)도 국내에 선을 보였다.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던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사회학적 연구를 소개, 실험하기 위해 『사회학적 성서해석』을 펴냈다. 이런 가운데 사회학적 해석을 나름대로 하나의 학파적 전통으로 정립한 경우가 연세대학교의 서중석이다. 서중석은 보스톤 대학교의 하워드 클락 키(Howard Clark Kee)의 문하생으로 사회학적 방법을 다양한 신약 문헌에 적용하면서 국내에서 일맥(一脈)의 제자군을 형성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역사비평의 한계에 회의를 품으면서 넓은 의미의 현대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이 우리 학자들의 손에 의해 실험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다니엘 페티(Daniel Patte)의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란 무엇인가?』(이승신 역, 1987)가 번역 소개되었고 서인석은 『성서의 언어과학: 구조분석의 이론과 실천』(1984년)과 기타 관련 논문들을 발표하였다.31) 김덕기도 연구논문「후기 구조주의의 지적 도전과 21세기의 신학을 위한 성서해석: 상징적 질서의 생성과정과 기원을 중심으로」(『신학논총』3, 1997년)를 통해 그 의미를 상술해주었다.
복음서를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story)로 보아 문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서사비평'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다. 파웰(A. Powell)의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이종록 역, 1993년)가 번역되었고 심상법은 '내러티브 비평'(=서사비평)에 입각하여 다양한 석의상의 실험을 하고 있다.32) 미국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킹스베리(Jack Dean Kingsbury)의 문하에서 수업한 오덕호는 서사비평이 안고있는 몰역사성의 위험을 극복하면서 '문학-역사비평'이란 명제로 나름대로 변형된 독자반응비평의 장을 실험하며 호응을 얻고 있다.33)
역사적 체험과 현실이 해석의 주체가 되는 '해방신학적 해석학'이 서구에서는 쉬슬러 피오렌자의(Schüssler Fiorenza)의 '여성해방 비평 해석학'(feminist critical hermeneutics)으로 그 특성화의 결실을 맺었다면 국내에서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이 그 과제를 떠맡았다. 민중신학의 해석학이 전복적(顚覆的, subversive)인 것은 성경의 텍스트 보다 민중의 경험에 입각한 '민중의 눈'이 해석의 전면에 배치되기 때문이다.34) 이러한 관점은 다분히 불트만 해석학의 '선이해'(Vorverstandnis)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상당한 시간을 불트만에 몰두하는데 투자했다. 그러나 불트만의 비역사적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는 안병무에 의해 역사적 '민중 경험'으로 대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해방의 비평적 해석학이 성서에 내재한 가부장적 권위질서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민중신학의 해석학은 경전으로서의 성경에 내재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겨내는 일을 해석의 과제로 삼는다. 그래서 안병무는 성서의 경전성을 비판하고 서남동은 성서를 '전거'(point of reference), 또는 '참고서'라 부르기를 주저 않았다.35) 성서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기독교의 경전에 담긴 것이라 하더라도 거부된다. 그리고 민중신학적 해석학의 과제는 성서에서 추적하는 기독교의 민중 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을 겹치게 하는 "두 이야기의 합류"에 있다.36) 이러한 "민중 당파적 해석"은 우리의 신약학이 해방신학적 해석학을 한국적 특수 상황에 접맥해 꽃 피운 특성화였다. 김명수는 그의 「민중신학의 해석학」(1992년)에서 이러한 입장의 등장과 전개를 잘 정리해 놓았다.37)
3) 신약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
초기의 국내 신약학이 사회적 관심과 사상의 논의에 기울었기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치밀한 분석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신약 연구가 학문적 본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과학적 분석을 위한 관찰 차원의 기초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했다. 앞의 6-70년대에도 이를 위한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아직 미흡하기는 하지만 신약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서 이러한 도구들이 본격적으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성경을 정확하면서도 시의에 적절하게 번역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입각한『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1952년에 나와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언어와 개념을 지배했다. 이후 좀더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를 사용한 『신약전서 새번역』이 1966년 12월에 발행이 되었고 개신교와 카톨릭이 연합하여 번역한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1971년에, 그리고 다시 1977년 부활절에 『공동번역 성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와 시대가 바뀌면서 개역 성경의 표현들이 시대에 너무 뒤떨어졌다는 분위기가 젊은 세대에서 확산되어 가면서 좀더 현대인들에게 친근한 성경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이에 부응하여 원어의 뜻에 충실하면서도 새 시대의 국어를 사용하는, 그러나 개역 성경의 보수적 정신과 한국 교회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1993년 1월 『성경전서 표준새번역』이 나오게 되었고 이후 지적된 문제점들과 여러 방면의 의견을 반영하여 2001년 11월에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만들어졌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의 성경으로 대표되던 개역성경도 오랜 독회와 논의를 거쳐 1995년에 『신약전서 개역 개정판』, 2000년에는 『성경전서 개역개정판』으로 각각 개정되었다.
원어 연구를 위한 사전류는 아직도 외국 서적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고영민의 『신약성서 헬라어 사전』과 『성서원어대사전』(1973년)은 국내에서 헬라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오랫동안 유익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월터 바우어(Walter Bauer)의 신약 헬라어 사전과 리델·스컷(Liddell & Scott)의 방대한 헬라어 사전, 그리고 총 10권으로 된 키텔의 신약성서 신학 사전은 여전히 영어나 독일어판으로만 활용이 가능한 상태이다. 성경의 대조연구를 위한 시놉시스(synopsis)는 일부 마련되어 있다. 성종현의 『공관복음서 대조연구』(1991년)와 정양모, 배은주, 노혜정의 『네 복음서 공관』(1993년)은 공관복음 연구자를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되어주고 있다. 바울 연구자들을 위한 프란시스와 샘플리(Fred O. Francis and J. Paul Sampley)의 『바울서신 대조연구』(1998년)도 번역 출판되었다.
신약성서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1차 사료(史料) 중 요세푸스의 전집이 김지찬(1987년)과 서영철(1991년)에 의해 번역되어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필로의 전집에 대한 번역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2차 문헌인 사무엘 샌드멜(Samuel Sandmel)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유대의 종교철학자』(1989년)가 번역되었을 뿐이다. 사해문서에 대해서는 오병세의 『사해문서연구』(1989년)가 개론적 소개를 해주고 있다. 그러나 미드라쉼과 미쉬나, 탈무드 등의 방대한 유대 문헌들은 국내에 제대로 소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약시대의 배경을 정리한 개설 차원의 2차 문헌들은 비교적 넉넉하게 번역 소개되어 있어 신학도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개론서들이 번역되고 저술되어 오던 중, 최근 여러 신학적 전통과 전문분야를 대표, 포괄하는 13인의 신약학자가 모여 방대한 분량의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2002년)를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펴냈다. 이 책은 각 분야마다 최근의 세계 신약계의 연구와 국내 연구까지 반영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신약개론서라는데 의미가 크다.38)
III. 분야별 쟁점과 논쟁사39)
1. 공관복음서40)
국내 신약학의 연구 결과물은 다분히 공관복음서에 대한 것이 압도적이다. 금세기까지 이어진 연구 결과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다. 하지만 70년대의 신약학 연구논문 중 바울의 주요 서신에 대한 것이 8 퍼센트일 때 40 퍼센트가 공관복음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선호도의 편향성은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41)
1) 마가복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언급된 것이 마가복음이라는 점은 19세기 말 이후 서구 신약학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마가복음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안병무의 민중신학적 접근에 의해 크게 촉발되었다. 안병무는 민중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를 마가에서 찾으려 했고 마가복음의 예수를 따르는 무리인 '오클로스'에서 억압받고 소외된 민중의 실체를 확인하려 했다.42) 이러한 마가복음 이해가 독특한 민중신학적 해석학으로는 의미가 있었지만 마가복음 본문(text)의 역사적 의미를 중시하는 주류 신약학계에서 객관적 설득력을 갖는 연구가 되지는 못했다.
전통적인 역사비평을 방법으로 하는 마가복음 연구는 70년대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온 김득중과 박수암이 떠맡았다. 두 사람은 모두 편집비평과 구성비평에 입각한 마가복음 읽기를 주도했다. 김득중은 『복음서 신학』(1985년)과 『마가복음 연구』(1989년)에서 편집비평적인 입장에서 마가복음에 대한 해석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의 치밀함과 독자성을 잘 부각시킨 책은 본래 그의 박사학위논문이었던 『마가복음의 부활신학』(1993년)이었다. 그는 마가복음의 말미를 구성하는 부활 이야기인 16:1-8에서 여러 편집의 흔적을 추적하여 마가의 부활신학을 추출한 뒤 그것으로 마가복음 전체를 해석해 냈다. 마가복음의 중심을 '수난 설화'로 보는 마틴 캘러(Martin Kähler)의 주장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박수암도 김득중과 같은 전략으로 마가복음을 읽었다. 그러나 박수암에게 있어 핵심 장은 16장이 아니라, 소묵시록이라 불리는 13장이었다. 그는 『마가복음 13장과 마가복음』(1993년)에서 13장을 편집비평의 방법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마가의 공동체가 성전 멸망 이후 맞닥뜨린 경고의 상황을 읽어낸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확인된 언어, 구조, 주제를 마가복음 전체와 연결시켰다.43)
서중석은 마가복음의 뒤에 놓인 공동체의 성격을 지식사회학적 분석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그의 『복음서 해석』(1991년)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그 열둘'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대안적인 제자 그룹으로 암시되어 있는 마가의 공동체를 읽어내고자 했다. 대안 제자들을 암시하는 등장인물들은 소경 바디매오(10:46-52), 어린이(9:33-37; 10:13-16), 여인(7:24; 16:1-8 등) 들이다. 이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사도계 공동체와 부분적 대립을 이루면서 초기 교회의 일부를 구성하는 갈릴리 공동체로 읽힌다. 안병무의 사회학적 접근이 현재의 민중 상황에 중심을 두고 있어 좀더 '신학적'이라면 서중석의 방법은 마가 본문이 기초한 역사적 공동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진정으로 '성서학적'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문학비평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관복음 연구에서 상당한 세를 형성해가고 있다. 민중신학의 후예인 강요섭은 『복음의 시작 - 길의 건설: 마르코복음서에 대한 문학적, 사회학적 해석』(1991년)에서 본질적으로 복음서의 문학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 텍스트 내의 문학적 구성 요소들을 연관시키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읽어내려 했다. 송순열은 내포저자(implied author)와 내포독자(implied author)의 설정으로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설화비평44)의 기법을 적용하여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막 7:24-30)를 해석하는 시도를 했다.45)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심상법은 『그말씀』에서 설교자를 위해 마가의 이야기를 서사비평에 입각하여 읽어주었다. 권종선도 같은 방법으로 마가복음의 기독론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다.46)
조태연의 도발적인 마가복음 해석인 『태의 소생: 여성지도자들을 위한 마가 읽기』(1998년)도 문학비평에 근거한다. 이 책은 여성해방신학의 비평적 안목을 지닌 남성 저자의 산물이다. 그러나 조태연은 피오렌자의 여성해방비평 해석학에서와 같이 가부장적 질서와 충돌하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가를 여성을 위한 글로 읽으려는 신학·문학적 주관이 텍스트의 객관적 단서들을 취합하여 연결, 정리하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분히 독자반응 비평쪽으로 경사된 마가복음 읽기라 평가해도 크게 무리가 아닌 듯 싶다. 저자가 마가 자신의 플롯이라고 정의하는 여성과 빵 모티브의 흐름은 사실 독자가 마가복음 속에 들어가 개입시킨 자신의 플롯일 수 있기 때문이다.47)
2) 마태복음
마태복음 연구에서는, 두 자료설에 입각할 때 마가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편집비평의 역할이 더 분명하게 부각된다. 김득중의 『복음서신학』(1985년), 정양모의 『마태오 복음서』(1990년), 조경철의 『성서주석 마태복음 I』(1999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 편집비평에 입각하여 마태의 독특한 구성적 특징을 서술한다. 대체적으로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의 소멸 이후 등장하는 랍비 유대교와의 갈등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독특한 기독론과 공동체론, 그리고 이방인 선교의 상황 등이 부각되어 있다.
서중석은 마태복음 연구에도 역시 사회학적 방법의 전략을 취한다. 그는 「마태 공동체의 내부 대립과 공존」(『복음서 해석』, 1991년)를 통해 마태 공동체 내부에 상호간에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두 개의 집단을 재구성해낸다. 이들은 선교의 범위, 율법의 해석, 종교적 기적에 있어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주제에 따라 다르게 이 양자 사이의 적절한 공존과 대립을 배치시키고 있다.48) 서중석의 제자인 구제홍도 같은 방법론에 입각하여 마태 공동체의 리더십에 주목하는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49)
마태복음을 좀더 신학적 차원에서 읽어내는 작업도 있다. 김영봉은 『성서주석 마태복음 II』(1999년)에서 문학적 분석에 치중하면서 마태의 메시지를 추출해내는데 충실했고 양용의는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마태복음을 중심으로』(2000년)에서 예수가 안식일의 종말론적, 영적 의미의 성취로 제시되는 마태복음서를 그려냈다. 이러한 신학적 마태 읽기는 나요섭의 『천국의 서기관 마태』(2001년)에서도 독특한 연구 결과를 냈다. 나요섭은 '아담 그리스도론', '에덴동산 천국론', '아담 제자론' 등의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창세기의 여러 이미지와 마태의 주요 신학적 주제와의 연관성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조태연의 표현을 빌자면, "기존의 연구가 편집사 및 전승사에 입각한 연구였거나 사회학적 해석이었다면, 그는 '글사이끼침'(intertextuality)에 입각한 유형론적 연상법에 편집적 및 서사적 접근법을 활용하되 신학적 설명을 사회적 및 사회학적 지평 위에서 시도한 것이다."50)
나요섭은 그의 산상설교 연구인 『산, 예수, 그리고 하늘나라』(2000년)에서도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미지를 많이 활용하여 본문을 분석하는 '본문연관성'의 독창성을 과시했다. 산상수훈에 대한 집중적 연구에는 박수암(『산상보훈』, 1990년), 김희성(「산상보훈의 Imitatio Dei: 기독교 신앙과 삶의 전형에 대한 고찰」, 1994년),51) 오덕호(『산상설교를 읽읍시다: 산상설교의 문학 - 역사비평적 연구』, 1999) 등이 기여한 바 크다.
3) 누가복음
국내의 누가복음서 연구는 '소외된 자',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키는데 집중되었다. 김득중의 『누가의 신학』(1991년)은 세리와 죄인, 사마리아인, 여성, 가난한 자들에 대한 누가의 관심을 잘 설명해주었다. 그의 『성서주석 누가복음』(1993년)은 총 1,100여 쪽에 이르는데, "누가복음에 관하여 한국인이 저술한 가장 방대한 주석서라 할 수 있다."52) 민중신학적 접근을 하는 안병무가, 누가복음의 청중이 가진 자들이지만 그들에게 제시되는 구원의 길로서 주체가 되는 가난한 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자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가난한 자, 루가의 민중 이해」,『민중과 성서』, 1993년). 김경진도 『누가 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도』(1996년)에서 누가복음의 제자도와 청지기도가 기본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가운데서 이슈가 되는 소유와 소유권의 문제임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오덕호는 '문학·역사비평'을 활용하여 『하나님이냐 돈이냐? 누가복음 16장의 문학·역사 비평적 연구』(1998년)를 썼다. 학위논문에 기초한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역시 '소유'와 가난한 자들의 문제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의 척도를 삼는 누가의 신학을 깊이 있게 천착했다.53)
국내의 누가복음 연구에 있어 이루어진 최근의 의미 있는 업적은 신약학회 연구 시리즈 1호로 탄생한 『누가복음 새로 읽기: 문학적 읽기의 이론과 실제』(한들, 2001)이다. 이 책은 심상법, 김영봉, 이달, 오덕호, 정종성, 윤철원, 양재훈, 허주가 한 팀이 되어 '문학비평'의 방법으로 누가복음의 여러 본문 해석을 실험한 결과물이다. 문학비평 방법에 대한 심상법의 심도 있는 설명과 더불어, 바흐친(M. Bakhtin)의 이론인 '영역 확장성'(liminality)을 활용하여 독자반응비평으로 본문을 해독한 정종성의 「예수님의 비유(눅 15-16장)와 바흐친 독자」는 주목할만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4) Q 연구
이른바 Q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복음서 연구자들의 특성으로 부각되었다. 이전까지 Q는 공관복음서의 문헌관계를 설명하는 자료 비평 차원에서 '두 문서 가설'(Two-Document Theory)을 설명하기 위한 일부분으로만 다루어져왔다. 하지만 90년대의 일부 국내학자들은 구미,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차원의 관심을 반영하여 '복음서로서의 Q 이론'과 그에 따른 'Q 공동체'에 대한 토론에 불을 당겼다.54)
유럽에서 시작된 Q 연구의 역사에 대해서는 성종현이 「예수 어록(Q자료)의 연구 동향」(1992년)에서 자세하게 정리했고 조태연도 1995년 『기독교사상』에서 연재한 "예수운동의 거룩한 탐구"에서 부분적으로 최신의 경향을 소개해 주었다. 본격적으로 Q에 집중된 연구는 김형동이 2000년을 전후하여 『신약논단』을 비롯하여 여러 지면에 발표하는 논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김형동의 주된 연구 방향은 Q의 독특한 관심과 동기로서 묵시적 종말사상에 기초한 Q 자체의 신학을 규명하는데 있다. 반면 클로펜보그의 이론에 기초한 소기천의 『예수말씀의 전승궤도』(2000년)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마태 공동체까지의 변천 과정에 어떻게 Q 공동체가 여과 기능을 하는지를 연구하여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를 재구성하는 시도였다. 이어서 나요섭은 『예수에 관한 첫 글 Q』(2002년)에서 Q를 네 개의 편집층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 그 공동체의 신학과 사회상의 변화를 정밀하게 추적했다.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90년대 초부터 Q를 연구해온 김명수는 『그리스도교와 탈현대성』(2000년)에서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가장 잘 보전한 전승을 Q로 정의하며 거기서 민중의 신학과의 접점을 찾았다.
2. 역사적 예수
신약 연구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주제는 역시 예수이다. 그러면서도 신약학자들이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가장 꺼리는 부분 또한 예수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 교의의 중추를 구성하는 '기독론'에 손상을 가져온다 하여 필화(筆禍)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교회의 주(主)인 '신앙의 그리스도'(Christ of Faith)에 의
해 채색된 복음서의 예수와 구분하여 학자들이 그려내는 역사 속의 실제 예수의 그림이다.
1) 국내 학자들의 예수
이 역사적 예수는 학자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지만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예수 세미나' 멤버들이 그리고 있는 현자(賢者) 예수가 그 첫째이다. 지혜 전승에 입각한 방랑 철학자의 모습이다. 둘째는 슈바이처 이후 많은 신약학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종말론적 소망의 예수이다. 유대의 묵시사상에 기초한 새 세계를 기대했던 바 현대인이 보기에 '낯 설은 예수'의 그림이다. 셋째로 사회개혁가 내지는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그리는 리처드 호슬리, 또는 도미닉 크로싼 등의 시도가 있다. 이들에게 예수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운동가였다.55)
국내 학자들 중에서 일찍부터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 혼신을 다했던 안병무를 굳이 이 중의 하나에 맞추자면 말할 것도 없이 세 번째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의 저서 제목이 증거하듯이 안병무는 '해방자 예수'를 재구성하는 학자군에 포함된다. 안병무는, 『역사의 증언』(1972년), 『해방자 예수』(1975년), 『역사의 예수』(1983년), 『갈릴래아의 예수』(1990년)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저술을 통해,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권 확립의 정치적 개념인 현실의 사회 실재로 민중에게 베풀고자 했던 예수를 구성해냈다. 김명수의 Q 연구에 입각한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도 민중신학의 기본구도에 따른다. "예수의 죽음은 이스라엘 주변부 민중을 위한 당파적 실천과 그로 인한 이스라엘 지배계층과의 충돌 결과이다."56) 김명수에 따르면, 예수는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가 해석하듯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사건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는 신명기적 예언자 전통에 입각하여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던 운동의 주인공이었다.
같은 민중신학의 권역 내에 있으면서도 김창락은 안병무와 차별성을 유지하면서, 슈바이처의 경계(警戒)를 받아들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묵시사상적 종말론의 급진적 성격을 놓치지 않고 있다.57) 반면에 차정식은 『묵시의 하늘과 지혜의 땅: 예수 신학 비평』(2001년)에서 복음서의 텍스트를 주요 양식별로 구분하여 '주관적 독법'으로 읽으면서 사실상 예수의 묵시주의적 특성에 소원(疏遠)하게 거리를 두어, '지혜의 땅'에 굳게 선 현자 예수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결과적으로 예수세미나의 예수에 다가간 셈이다. 복음서의 예수를 역사의 예수로 수용하기를 꺼려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최갑종은 『나사렛 예수』(1996년)에서 방대한 연구자료를 제공하면서 역사의 예수를 재구성했는데 그 예수는 교회의 전통적 예수와 다르지 않아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긴장과 괴리감을 해소시켰다. 물론 최갑종은 복음서 예수의 사건과 선포를 신학적일 뿐 아니라 객관적 역사로 간주했다.
2) 예수운동의 개념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 축으로 국내에서 부각된 독특한 분야는 이른바 '예수 운동'에 대한 관심이다. '예수 운동'이란 개념은 신약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케리그마적인 그리스도교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적 예수 직후 그의 추종자들이 갈릴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했던 공동체적 신념과 움직임에 대한 가설적 구성이다. 즉, 신앙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헬라적 그리스도교와 대별되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더 친밀함을 보전한 공동체의 사상과 삶에 대한 탐구의 한 방향이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을 이어받은 황성규의 『예수운동과 갈릴리』(1995년)는 갈릴리 민중에게 있어서 예수운동이 갖는 의미를 조명하면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일찍이 헬무트 쾨스트(Helmut Köster)는 예수 이후의 원시 그리스도교가 단일 공동체가 아닌 다양한 궤적(軌跡, trajectories)의 여러 다른 공동체로 발전해 나갔다고 보았다.58) 이에 기초하여 예수운동의 개념을 국내에서 정교화한 조태연은 『기독교사상』에 연재했던 논문들을 모아 『예수운동: 그리스도교 기원의 탐구』(1996)를 펴냈다. 이 책에서 조태연은, "예수 사후(기원후 30) 마가복음(기원후 70)이 등장하기까지 '잊혀진 40년'동안 팔레스틴과 시리아에 존재하던 예수의 계승자들로서"의 예수운동을 상정하였다.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그 전형은 바울이다)가 케리그마 신앙으로써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예배하였다면,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예수전승)에 호소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였다."59) 물론 이러한 예수운동이 역사적 예수 자신의 활동과 가르침에 가장 가까웠을 것으로 가정했다.
3) 예수의 사역과 메시지, 비유 연구
예수의 활동과 선포, 그리고 가르침 중 한 부분을 조명함으로써 예수를 이해하려는 연구들도 있었다. 김지철은 「예수의 치유」(『교회와신학』28, 1996)를 통해 예수의 치유 활동을 전인격적 인간회복의 하나님 나라 성취로 보았다. 김광수는 예수의 축귀(逐鬼)와 치유를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해석했다. 그에 따르자면 예수의 축귀 사역은, 비인간화를 유발시키고 불의로 억압하는 사회·정치적 체제의 고발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의미를 갖는다.60) 그는 축귀뿐 아니라 병자 치유에 대해서도 비슷한 사회·문화적 이해를 펼쳤다.61)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 중 그 독특함 때문에 그가 베푼 가르침의 실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그의 비유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서 비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가볍지 않다. 역사적 예수의 비유 연구는 알레고리의 요소가 전혀 없는 단일 포인트의 간단한 이야기였을 것이라는 아돌프 율리허(Adolf Jülicher)의 고전적 이론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찍이 전경연이 낸 『예수의 비유』(1962년)는 율리허의 이러한 단일성의 원칙에 충실한 비유 해석이었다. 그러고 나서 허혁이 번역한 예레미야스의 『예수의 비유』(1974년)는 국내 역사적 비유 해석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후 비유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가르침을 재구성하려는 역사적·객관적 탐구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독자의 반응이 역사적 재구성에 동참하게 하는 다분히 주관적 독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비유의 목적과 메시지의 파악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초석이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들이 줄을 이었다. 김득중은 『복음서의 비유들』(1988년)을 통해, 예수의 비유가 적대자들과의 갈등관계, 그리고 그들과의 논쟁 중에 도입되어 종말론적 희망을 견고하게 붙잡는 수사학적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이와 같이 갈등 구조와 종말론적 낙관을 비유의 목적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같은 구도를 취한 것이 몇 년 뒤에 나온 최갑종의 『예수님의 비유 연구』(1993년)였다. 하지만 최갑종은 예수의 비유의 주인공이 예수 자신이었다는 기독론적 입장에 충실하고자 했다. 가톨릭의 정태현도 『놀라운 발견』(1996년)에서 이와 같은 기본 시각에 동조하면서, 비유가 청중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독특한 설득의 기법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김창락의 『귀로 듣는 비유의 세계』(1999년)도 마찬가지로 청자와의 관계를 주목했다. 하지만 김창락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맥락에서 비유를 조명하여 현대 독자와의 접촉점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했다.
비유 해석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을 도외시하려는 경향도 있다. '문학-역사비평'을 복음서 연구의 도구로 사용하여 독자성을 확보한 오덕호는 역사적 예수 차원의 비유보다는 성서의 최종 본문이 의도했던 독자(authorial reader)의 입장을 위한 비유의 해석에 초점을 두었다. 이 경우 율리허의 경우와는 반대로 복음서의 비유에 첨가된 알레고리적 해설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조태연의 비유해석은 역사적 예수의 환경인 갈리리 농촌 마을의 사회-경제적 구조 속으로 들어가되, "시간의 경과를 볼 때 비유(재건된 원형)가 제시하는 장면의 이전과 이후로 확장함으로써 개별적 비유보다는 온전한 '서사성'을 확보"하려 한다. 즉 역사적 예수의 시점으로 진입해 들어가는가 하면 동시에 해석자의 사유의 틀에서 재건된 비유들이 상호연관 속에서 하나의 구조로 종합되기도 한다. 조태연은 스스로 이에 대해 '동양적 사유의 틀 안에서 발전시키는 해석학적 대화'라 명명했다.62) 비유 해석과 관련해 김덕기는, 『예수 비유의 새로운 지평: 프랑스 구조주의와 문학사회학 방법에 근거한 예수 비유의 정치적·윤리적 해석』(2001년)을 통해 20세기말의 다양한 첨단 비유 해석 이론들을 자세히 소개, 비판하기도 했다.
3. 바울
개신교에 있어 핵심적 교리를 제공하여 정경 내의 정경이 되고 있는 것이 바울이다.63) 그래서 교의적 목적으로 바울을 해설한 국내 저서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는 쟁점이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국내의 연구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바울 사상의 기원과 배경
바울 사상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논의는 서구에서 꽤나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때 라이첸슈타인(R. Reitzenstein), 부세트(W. Bousset), 불트만으로 이어지는 종교사학파의 영향으로 바울의 배경은 철저하게 헬레니즘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케제만(E. Käsemann), 베커(Christiaan Beker), 데이비스(D. Davies), 샌더스(E. P. Sanders)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바울은 초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국내의 장상은 베커의 제자로서 『바울의 역사의식과 복음』에서 바울이 유대 묵시사상의 특성 아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에 들어간다. 이 점은 『바울해석』(1994)을 펴낸 김연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바울에 대해 글을 쓰는 대부분의 국내 신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바울의 유대적 배경을 당연시여기고 있다. 하지만 조태연은 종교사학파의 전통을 이어 일관성 있게 바울을 헬레니즘의 산물로 본다. 조태연은 바울의 종교를,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게 개념의 변용과 내용의 변환을 꾀한 전략적 혼합주의(syncretism)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64)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의 종교가 밀의종교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정의한다.65)
서구에서는 바울의 신학을 주관적 체험의 결과로 돌리기를 꺼려하는 경향을 갖는다. 하지만 국내에는 바울 사상의 기원을 그의 체험에 돌리는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있다. 우선 오우성은 로마서 7:14-25의 해석사와 자신의 견해를 담은 『바울의 갈등과 회심』(1992년)에서, 로마서 7장의 서술을 "성령의 강한 영향력 아래 열린 그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바울] 자신의 실존"의 반영으로 보았다.
바울 사상의 기원을 체험에 두는 주장으로서 가장 체계가 잡혀있고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김세윤이다. 맨체스터 대학에서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The Origin of Paul's Gospel(1977년)은 홍성희에 의해 『바울 복음의 기원』(1994년)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김세윤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았다는 바울 자신의 체험 증언(갈 1:12)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 증거들을 바울의 편지들 속에서 확인하고 이 회심·소명의 체험이 어떻게 바울의 중요한 신학적 주장으로 형성되어 갔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김세윤의 연구는 전 세계 바울 학자들에게 인용되면서 회심의 경험 하나에 바울의 모든 신학을 환원시킨다는 지적을 적지 않게 받았다. 그러나 김세윤은 그 모든 비평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고, 최근에 그간의 비평에 대한 답변과 샌더스(E. P. Sanders) 이후 형성된 바울 연구의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에 대한 반론을 모아 Paul and the New Perspective: Second Thoughts on the Origin of Paul's Gospel(바울과 새로운 관점: 바울 복음의 기원에 대한 재고, 2002년)을 펴냈다.
바울 사상의 기원과 관련해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 하나는 예수와 바울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이다. 불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바울이 제창하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역사의 예수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국내의 조태연도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점에 있어 분명하게 불연속성을 천명했다. 하지만 바울의 그리스도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한 그가 바울의 퀴리오스라는 점을 감안할 때 양자 사이에는 어떤 모양으로라도 연속성이 있게 마련이다.
안병무는 바울의 주가 역사의 예수 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였다는 불트만의 기본 구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바울의 회심을 '전향'(轉向)의 개념으로 봄으로써 그와 예수의 연속성을 이어준다. 신분상으로 월등하게 상류 계층에 속하는 한 엘리트가 갈릴리 천민의 생각과 실천에 자신을 굴복시킨 '민중으로의 전향'을 바울의 회심으로 이해한 것이다.66)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억압적 요소에 대한 부정,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의지 등에서 예수와의 연속성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안병무가 독특하게 한국적 신학으로 바울과 예수의 연속성을 설명했다면, 김세윤과 장종현, 최갑종 등은 바울 서신에 나타난 예수전승을 확인하거나 기독론적 선포 내용의 기원 추적을 통해 양자의 연속성을 확인하는 서구 학계의 시도에 궤적을 같이했다.67)
2) 율법주의와 칭의론의 이슈
바울 논의의 핵심은 역시 그의 칭의론과 그 배경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율법주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세기 바울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E. P. 샌더스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1977년)이었다. 그는 현존의 당대 유대 문헌을 샅샅이 뒤져 탐구한 뒤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이른바 '공로주의'(legalism), 즉 행위의 업적으로 구원을 따낼 수 있다는 주장의 율법주의가 전혀 아니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이후 신약학자들은 바울의 칭의론과 그 배경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만 되었다.68) 국내의 바울 학자들도 샌더스 이후의 부담을 안고 논의에 뛰어들었다.
가. 바울의 논적
우선은 바울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그의 논적(論敵)이 누구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홍인규와 이한수는 기본적으로 샌더스의 연구 결과를 수용하면서 답을 찾았다. 홍인규는, 바울과 그의 논적이 둘 다 함께 샌더스가 말하는 '언약의 신율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바울의 논적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추가적 가입 조건으로 제시하는 시대착오적 자세를 보여서 문제가 되었다는 주장이다.69) 이한수에 따르면 바울이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언약의 신율주의에 기초한 유대의 선민적 배타주의였다. 이한수는, 이른바 '안디옥 사건'(갈 2:11-21)에서 그리스도인을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는 주장이 있었다고 추리함으로써 이와 같은 주장을 폈다.70)
한편 서중석과 최갑종은, 당시의 유대교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다양한 종파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뉴스너(Jacob Neusner)의 이론에 기초하여 샌더스의 연구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바울의 칭의론 배경인 공로주의적 율법주의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려는 주장을 폈다. 서중석은 바울이 싫어했던 '율법 행위 구원파'가 있었고 이런 사조에 동조하던 예루살렘 사도들 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보았다. 물론 서중석은 사회학적 관심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율법행위 구원파의 주장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장벽 설치의 방편"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비판의 메스를 가했다고 보았다.71) 최갑종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의 판단에 신뢰를 부여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다. 그는, "우리 중에 그 누가 감히 바울보다 주후 1세기의 유대교와 율법을 더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반문하며 바울의 일차적 경험에 입각한 당대의 판단을 존중하여 당시에 공로주의적 율법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72)
나. 칭의론의 상황성
이러한 논의는 자연히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펴고 있는 이신칭의 주장이 지닌 상황성의 문제로 넘어갔다. 루터는 이신칭의를 바울 사상의 핵심일 뿐 아니라 성서 전체의 중심으로 보았지만, 지난 세기 초(1907)에 브레데(William Wrede)는 그것을 돌출 상황에서 발생한 투쟁 교의(polemical doctrine)라 주장했다. 그리고 1961년에 스텐달(Krister Stendahl)이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를 써서 어떻게 바울에 대한 이해가 서구인들의 양심의 고통과 죄책감의 시각으로 왜곡되었는지를 밝히면서 학계는 이신칭의를 상황적 교의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메이첸(J. G. Machen), 바레트(C. K. Barrett), 로버트 펑(Robert Y. K. Fung) 등의 학자들은 선교 초기부터 바울 사상의 중심이 이신칭의라는 전통적인 주장을 계속했고 한국 내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는 심각한 도전이 없었다. 이러한 국내 전통에 입각하여 최갑종은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선교를 낳았다"고 역설했다.73) 반면 김창락은 민중신학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이신칭의 교의의 상황성을 지적해냈다. 김창락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강자의 억압 속에 놓인 약자의 한을 푸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행위라는 차원의 사회적 해석에 입각하여74) 이신칭의가 약자 위치에 놓인 이방인을 구출하려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라고 주장했다.75)
유승원은 이신칭의 교의의 상황성을 받아들이되 초대교회의 교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지적한다. 그는 이 교의가 바울의 선교 활동 초기에는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 15장에 반영된 이방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와 유대 율법의 의무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 이신칭의 교의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사도행전의 스토리 전개가 보여주듯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운동은 오히려 비유대권에서 더 성공적이었다. 따라서 유승원의 지적에 따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복음의 진원지인 유대의 할례와 율법 문제에 대해 한번은 이념적 논쟁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이신칭의 주장이 꼭 믿음에 반대된다 하여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도 가능해진다.76)
3) 바울과 여성
바울은 여성 문제에 있어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고린도전서 14:34-36과 디모데전서 2:11-15 같은 내용이 치명적일 정도로 반(反)여성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이 여성의 사역을 당연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을 금지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몇몇 바울서신의 문구들은 항상 바울 연구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서중석은 바울이 의도했던 바에 대한 오해를 푸는 방식의 접근을 취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이른바 '반박설'로 설명한다. 이 구절의 침묵 요구는 바울의 주장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 남성들의 것이며 바울은 오히려 이에 대해 반박을 하고 있다는 요지이다.77) 서중석은 갈라디아서 3:28의 해방 선언이 바울의 생각이라 보아 그가 교회 내의 여성 사역을 금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는 창조질서의 적용은 가정 내의 규범이며 교회에서의 사역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 서중석의 생각이다.78) 실제로 바울이 여성의 사역을 금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바울이 언급하는 여성 사역자들을 분석하는 작업도 종종 이루어졌다. 김지철은 로마서 16장의 문안(問安)에 등장하는 여성사역자들의 면모를 분석 정리하여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정교회에서 "남녀 역할 차이가 실제로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거증했다.79)
확실히 바울은 여성문제에 있어 어느 한쪽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복음의 해방적 입장과 사역 현장의 가부장적 질서 사이에서 선교적 균형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애매성 때문에 피오렌자(Schüssler Fiorenza)의 '여성해방 비평 해석학'(feminist critical hermeneutics)이 등장했다. 그리스-로마 세계와 유대의 가부장적 억압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바울의 글을 여성해방의 역사적 관점에서 비평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해석학적 입장이다. 국내의 여성신학자들은 약간의 편차를 보이면서 피오렌자의 해석학적 방법을 취하여 바울의 본문을 풀었다. 김경희는 갈라디아서 3:28의 선언을 유대 남성으로서의 바울의 한계적 발언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80) 최영실도 바울의 양면성을 인식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통해 바울의 반여성적 발언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여성차별의 뿌리를 제공한 바울의 한계를 지적한다.81) 이런 입장은 박경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바울과 바울 계열의 글들은, 복음의 종말론적 구원 선포와 로마제국 질서의 바탕이 되는 가부장제 사이에서 애매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비평적으로 읽어야만 여성을 위한 해방의 메시지를 추려낼 수 있다고 본다.82)
4. 요한 문헌
국내의 요한 문헌 연구는 복음서나 바울 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그것은 요한 문헌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는 학자들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약의 전 분야에 책임을 느껴 섭렵하는 일부 석학들의 연구가 요한문헌 연구에서도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요한문헌 연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 지닌 메시지와 스타일의 독특성 때문에 그 공동체와 신학에 관심이 모아졌다.
1) 요한 공동체
일찍이 김득중은 「요한 공동체의 종파적 성격에 대한 연구」(『신학과세계』, 1983년)에서 요한공동체의 종파(sect)적 특성을 지적했다. 세례요한, 사도, 교회, 성례(聖禮), 유대교 등을 반대하면서 편협하고 열등한 사랑을 주창하는 배타성 때문이었다. 이어서 서중석은, 요한 공동체가 상이한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서술하는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서중석에 따르면 요한문헌에는 긴장관계 속에서 대립하는 '비공개적 그리스도인들', '사도계 그리스도인들', '세례요한의 제자들', '세상과 유대인들'이 상호작용을 보이고 있다.83)
이러한 섹트적 성격을 가져온, 또는 섹트적 성격 때문에 생겨난 '공동체의 자의식'에 대한 연구도 여럿 선을 보였다. 서중석은 요한문헌에 강하게 드러나는 '상향 지향적 영광 사상'이 자신들을 박해하는 유대교에 대응하면서 형성된 자의식으로 보았다.84) 박경미는 두 차례에 걸쳐 『신약논단』에 발표한 「요한 15,1 - 16,4a에 나타난 요한 공동체의 자의식」을 통해, 요한 공동체가 교회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교회론을 규명하려 했다. 박경미도 역시 요한 공동체의 상황을 유대교의 박해로 인한 자기정체감의 확립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교회 공동체"라는 "과격한 자인식"으로 "예수의 선포인 공동체의 선포"를 세상 한 가운데서 계시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는 신앙집단을 그려냈다.85) 김동수는 요한 공동체가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를 중심으로 하면서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섹트'로 분류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비록 '애제자'에 대한 강조는 있지만 베드로가 제자 무리의 대표성이 됨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다는 연유에서이다.86)
2) 요한의 신학
요한문헌의 다양한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물이 쏟아져 나왔다. 요한의 신학 전체를 다룬 김득중의 『요한의 신학』(1994년), 김춘기의 『요한복음 연구: 신학과 주석』(1998년) 등이 있지만 적지 않은 학자들이 개별적인 단위 주제들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내어놓았다. 김동수가 유용하게 정리한 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인용한다.
요한 문헌의 신학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로서는 성령론(김희성, 이한수, 최문홍, 박경미), 교회론(이건승, 박경미, 최흥진, 김동수), 종말론(현경식, 최흥진), 여성론(장상, 조태연, 김호경) 등을 들 수 있다. 그 밖의 주요 주제적 연구로는 '사랑과 증오'(임진수), '보편주의와 탈 지역주의'(김득중), '예수의 평화'(최영실) 등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의 개별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는 비교적 적었으나,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대한 연구(배종수, 나채운, 김덕기)는 비교적 왕성했다.87)
5. 기타
신약학 연구가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세계 신약학계의 현실이다. 서구의 주요 대학교에서도 일반서신이나 계시록에 대한 강좌를 들을 기회조차 없을 정도로 전공자가 없는 편이다. 대개는 개론을 공부할 때 약간의 언급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이고 중견학자들이 전 분야에 조금씩 손을 대면서 이루어지는 일부 연구가 있을 뿐이다. 이 점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시록에 있어서는 김철손이 70년대부터 꾸준하게 묵시문학과 함께 연구 결과를 발표해와 전문가로서의 위치를 굳혔고 최근에 독일에서 계시록을 전공하고 돌아와 적극적인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박두환도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 계시록에 대한 주석과 연구서로는 김철손의 『요한 계시록 신학』(1991년)과 『성서주석 요한계시록』(1993년), 박수암의 『요한계시록』(1995년)이 있다.
히브리서에 관한 단행본과 주석으로는, 박수암(1994년), 류호준(1998년), 김달수(1999년), 전경연(1999년) 등에 의한 출판이 있었다. 야고보서 연구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기획한 70주년과 100주년 기념 주석의 책임자로서 김철손과(1967년) 김명수(1994년)의 주석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박창환과 김경희 공저로 『베드로전후서·유다서』(1996년)가 100주년 기념주석의 일환으로 출판되었다.
IV. 맺는 말
성서는 종종 기독론에 유추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한 기독론이듯이 건강한 성서관도 이 양자를 균형 있게 수용한다. 즉,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이라는 양면성을 적절하게 인식하고 그에 부합하는 활용과 적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교회의 교의를 위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신약성서는 위로부터 무조건 부과되는 규범으로 기능한다. 반면 '인간의 책'으로서의 신약성서는 각종 탐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지닌 '인간의 책'으로서의 측면이 우리의 신약학을 가능하게 했다.
이 말은,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신약학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신약성서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약학은 '인간의 책'으로서의 신약성서를 깊이 관찰하여 그 책이 의도했던 바를 여실히 드러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 인간에게 전하고자 하신 바를 좀더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신약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부과될 때는, 오히려 불순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고착된 기성 교의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신약학은 신약성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역동성과 실체성을 지닌 생생한 육성(肉聲)이 되도록 돕는 탐구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정리된 지난 50년의 한국 신약학 연구사는 이러한 말씀의 역동성을 향한 발전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충분한 섭렵이 되지 못했음은 이미 시작할 때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흐름과 방향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 동안 부분적으로 시도된 연구사를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했다는 의미에서 본 연구는 자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필자의 졸고가 차후 더 정밀한 연구사를 위한 골격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인간의 책'으로서의 신약성서가 한국 땅에서 더욱 생생하게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능력을 행사해 나가는 앞날을 가슴 벅차게 기대해 본다.
주석
1) 가블러는 1787년에 있었던 그의 알트도르프 대학교 취임 강연인 Oratio de iusto discrimine theologiae biblicae et dogmaticae regundisque recte utriusque finibus(성서신학과 교의신학의 적절한 구분과 각 영역의 올바른 결정에 대한 강연)에서 이 점을 밝혔고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성서신학 개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2) 본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에 유사한 성격을 갖는 국내 신약학 연구사가 몇 발표되었다. 2001년도 기독교공동학회가 그 동안의 한국신학을 점검하는 내용을 목적으로 모였고 그곳에서 박수암 교수가 한국 신약학의 지난 역사와 현황을 정리했다. 또한 2002년 3월에 출판된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의 제 5부가 이와 동일한 목적에 할애되었다. 이 책에서는 조태연(복음서), 유승원(바울), 김동수(요한문헌), 송순열(신약연구 일반)이 각 분야의 역사와 현황을 정리했다. 필자의 본고가 이들의 연구에 크게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3) 박수암, 「20세기 한국 신약학의 회고와 전망」, 『한국기독교신학논총』22, 2002. 10. p. 127. 물론 박수암은 이 시기를 1950년까지로 본다. 하지만 필자는 조선신학교가 성서관 문제로 분리되는 것이 해방 직후임을 감안할 때 1945년을 분기점으로 잡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4) 이 시기의 주요 출판물을 위해서는 같은 책 pp. 128-129를 보라.
5) 어도만, 「고등비평」, 1920. 같은 책 p. 130에서 인용함. 이와 관련에서 아래에 나오는 조선신학교 분열 사건을 참고하라.
6) 같은 책 p. 130과 p. 139를 보라.
7) 그러나 이 시기에 방법론상의 갈등은 이미 발아하고 있었다. 송순열은 이 시기의 성서학 조류를 대표한 3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서의 완전 영감설과 교리적 성서 이해를 주장한 박형룡(1897-1978), 문학적, 역사적 연구를 통해 성서를 자유주의적·실존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정경옥(1903-1945), 진보주의적·역사적 성서 이해를 주장한 김재준(1901-1987)…"(송순열,「한국 신약성서 연구의 흐름과 전망」,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601. 또한 이를 위해서는,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 174-220을 참고하라.
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6. p. 523.
9) 박수암, 「장신대 신약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교회와신학』40, 2001. pp. 36-37. 박수암은, 요한복음 3:16-21을 저자 요한 자신의 해설이라 본 점과, 4:35의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을 당시 팔레스틴의 격언으로 설명한 것 등을 지적한다.
10) 박창환, 『교회와 신학』, 서울, 홍성사, 1989, 81 (찾아서 읽어보고 자세하게 정리할 것), 박수암, 131에서 재인용.
11) 한국신약학회 홈페이지(www.ntsk.org)의 「한국신약학회 역사」.
12) 한국신약학회 홈페이지의 같은 글에서 인용.
13) 위의 같은 글에서 인용.
14) 김득중은 1970년대 한국 신약학의 상황을 구약학 연구와 비교하면서 '겨울'로 보았다. "지난 10년간의 구약학계를 여름에 비한다면 신약학계는 겨울에나 비교할 수 있을까?"(「1970년대 신약신학」, 『신학사상』36, 1982. p. 57).
15) 같은 글 p. 40을 보라.
16) 저술, 번역된 개론서는 앞의 같은 글 p. 52, 번역된 주석은 p. 53, 번역된 주요 연구서적들은 p. 51에 각각 정리되어 있다.
17) 같은 글 p. 41.
18) 김득중은 1970년대의 한국 신약학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를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신약성서의 입장을 조명하는 논문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둘째, 1971년도에 처음 나온 공동번역 성서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셋째로, 신약학의 시대적 동향을 정리하는 논문이 여럿 나왔다. 같은 글 pp. 44-45를 보라.
19) 발표된 논문들의 목록을 위해서는 김득중의 앞의 글 p. 44와 p. 46을 보라.
20)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국가권력이 자주 악용하는 로마서 13:1-7을 주석하면서, 기본적으로 교회가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지만 통치자가 악을 행할 때는 저항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교회와 정권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저항의 관계로 규정되지 않으며, 핵심 가치인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 추구의 방향성에 따라 교회의 역할이 달라진다고 보고 있다(「권력과 교회」, 『기독교사상』15-7, 1971. 7. pp. 42-45). 이 시기 다른 논문들도 대동소이한 주장을 보이고 있다.
21) 김용옥, 「세계교회와 한국교회」, 『기독교사상』15-7, 1971. 7. pp. 68-71.
22) 김용옥, 「한국적 신학형성의 재시도」, 『기독교사상』15-3, 1971. 3. pp. 110-120. 또한 「한국적 신학의 결산 - 한국에서의 신학의 오늘과 내일」, 『신학사상』1, 1973. pp. 61-67을 보라.
23) 『기독교사상』21-12, 1977. 12. pp. 65-79.
24) 김득증, 「1970년대 신약신학」, pp. 54-55.
25) 같은 글, p. 53.
26) 춘계학술대회에 기초한 『신약논단』은 주제를 가진 별도의 신약연구서 형태로 출판되어 시중에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신약성서의 경제윤리』(1998년), 『밀레니움과 신약성서의 종말론』(1999년), 『새로운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자리 찾기』(2000년), 『신약성서의 화해 신학』(2001년) 등의 시리즈 출판이 이어졌다.
27) 박수암, 「21세기 한국 신약학의 회고와 전망」, p. 133.
28) 해방 후 역사비평의 문제로 한국신학대학과 분리된 후 다시 WCC 소속의 문제로 합동 측의 총회신학대학과 차별성을 갖게 된 장로회신학대학의 박수암 교수는 자신의 성서학적 입장을 고백하면서 주요 신학대학을 불트만의 수용 정도를 기준 삼아 구분하고 있다. "…장신대 신약학은 종교개혁 이후의 복음주의-경건주의의 맥을 이으면서(본교 초창기), 역사적·구속사적 연구와 온건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합한 노선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복음주의-경건주의 노선만을 취하는 고신(高神)의 노선도, 수정적인 불트만 노선을 취하는 감신(監神)의 노선도, 과격한 불트만 노선을 취하는 한신(韓神)의 노선도 아니다. 그것은 좌로도 극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성서적이며, 개혁적이며, 복음적이며, 보수적인 입장이다"(「장신대 신약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p. 41).
29) 이것은 Stephen R. Haynes와 Steven L. McKenzie가 편집한 To Each Its Own Meaning: An Introduction to Biblical Criticism and Their Applicatio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가 현대의 해석 방법론을 분류한 방식에 입각한 언급이다.
30) 사회학적 성서 연구에 대한 서구의 전통과 방법을 정리하고 비평한 필자의 졸고가 있다. 참고하기 원하는 사람은, 유승원, 「신약연구에 있어서 사회학적 방법론이 갖는 의미와 그 한계」, 『나사렛논총』4, 1999. p. 147-174를 보라.
31) 서인석, 「구조분석과 성서해석」, 『기독교사상』27-2, 1983. 2. 104-122.
32) 심상법은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그말씀』에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마가복음의 본문을 서사비평에 기초하여 주해한 글을 연재했다.
33) 오덕호는 최근에 자신의 해석학적 방법을 정리한 단행본을 냈다. 『문학-역사비평이란 무엇인가: 설교자를 위한 독자반응비평 해설』,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이 외에 자신의 방법론을 적용한 『하나님이냐 돈이냐? 누가복음 16장의 문학-역사비평적 연구』(한국신학연구소, 1998년)과 『산상설교를 읽읍시다: 산상설교의 문학-역사비평적 연구』(한국신학연구소, 1999년)를 저술했다.
34) 안병무, 「한국적 그리스도인 상의 모색」, 『신학사상』52, 1986. p. 48.
35)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p. 55, pp. 73-74, p. 166, p. 184. 안병무의 성서관에 대한 민중신학 내부의 비판을 위해서는, 임태수, 「안병무 박사의 서거와 민중신학의 과제」, 『민중과 신학』4, 2000. pp. 11-14를 보라.
36)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p. 78.
37) 김명수, 「민중신학의 해석학(1)」, 『기독교사상』36-3, 1992. 3. pp. 89-101. 그리고 「민중신학의 해석학(2」, 『기독교사상』36-4, 1992. 4. pp. 185-194를 보라.
38) 이에 참여하여 1-2장씩 저술한 학자는 김경희, 김동수, 김득중, 김창락, 김판임, 나요섭, 박두환, 소기천, 송순열, 유승원, 장동수, 조태연, 차정식 들이다.
39) 이 부분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다양화된 논의가 활발했던 8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한다.
40) 이어지는 국내의 공관복음 연구에 대한 정리는 최근에 13인의 국내 신약학자의 공저로 출판된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대한기독교서회, 2002년)의 5부, "한국에서의 신약성서 연구" 중 조태연의 「공관복음 연구」(제 16장)의 자료 조사에 많이 의존했다.
41) 김득중, 「70년대 신약신학」, p. 41. 김득중의 조사에 따르면 70년대의 일반논문과 석사논문들의 연구 영역 배분 비율은 다음과 같다. 공관복음 40 %, 요한복음 5 %, 사도행전 3 %, 바울의 주요 서신 8 %, 옥중서신 2 %, 목회서신 0 %, 히브리서 0.8 %, 공동서신 2 %, 계시록 0.8 %, 기타 37 %.
42) 안병무, 「예수와 민중,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현존』106, 1979. pp. 3-18. 「민중신학,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신학사상』34, 1981. pp. 504-536.
43) 박수암의 마가복음 주석서 『성서주석 마가복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도 기본적으로 같은 구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 케리그마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권면의 글로 좀더 기울어지게 했다.
44) 영어권의 narrative criticism에 대한 번역은 역자에 따라 꽤나 다양하다. 설화비평, 서사비평, 내러티브 비평, 이야기체 비평 등은 모든 동일한 'narrative criticism'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다.
45) 송순열, 「설화비평으로 읽는 신약성서」, 『지구화 시대의 한국신학: 고운 김달수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 서울, 도서출판 한빛, 1997.
46) 권종선, 「마가복음의 서사적 기독론」, 『복음과 실천』27, 2000. pp. 65-102.
47) 조태연은, 야이로의 딸이 일어나서 먹은 음식(6:43),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의 대화 속에 들어있는 '자녀의 빵'(7:24-30), 베다니 여인의 향유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몸'(14:8), 그리고 유월절 만찬의 '빵과 몸'(14:12-25)이 모두 한데 연결되어 '빵의 상징'과 '몸의 신학'으로 정제되어 있다고 믿는다(『태의 소생』, pp. 6-7). "마가는 대단히 정교한 상징체계로써 자기의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기호화하였다"(『태의 소생』, p. 6). 그는 이런 정교한 체계의 발견을 스스로 "개안"(開眼)이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개안"이 저자 마가 안에 있던 것에 대한 객관적 발견이었는지 아니면 저자 마가를 떠나 독립된 텍스트로 존재하던 현재의 마가복음서에 대한 해석자 조태연의 내면적 "개안"인지 판별해 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주관적 독법인 독자반응비평에서 후자는 별 문제가 없다.
48) 서중석, 「마태공동체의 내부대립과 공존」, 『복음서 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pp. 133-165. 물론 이러한 사회학적 결론은 편집비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문 분석에서 이루어지는 추정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의 검증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49) 구제홍, 「마태복음서의 유대인 지도자들: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신학교교수논문집』2, 1991. pp. 61-78. 「마태의 제자상과 사회적 정황」, 『대한기독교신학교교수논문집』4, 1995. pp. 89-105. 「마태복음서 연구동향과 마태공동체 리더십 연구의 의의」, 『대한기독교신학교교수논문집』5, 1997. pp. 51-70.
50) 조태연, 「공관복음 연구」, p. 522.
51) 『한국기독교신학논총』11권, 1994년. pp. 83-116.
52) 조태연, 「공관복음 연구」, p. 523.
53) 사실 오덕호의 이 책은 누가복음 본문 연구에 활용된 방법론의 특성 때문에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앞에서 다룬 문학비평 부분을 참고하라.
54) 문서상으로는 공관복음서, 특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전승 층을 통해서 가정(假定)되던 Q를 실제로 존재했었으나 보전이 되지 못한 '잃어버린 문서'로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복원하려는 작업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대표적인 예로는, John S. Kloppenborg외 4인이 공저한 Q Thomas Reader (Sonoma: Polebridge Press, 1990), Burton L. Mack의 The Lost Gospel: The Book of Q and Christian Origins (New York: HarperSanFrancisco, 1993) 등이 있다. 클레어몬트 대학교에서 Q 복원을 위해 설립한 IQP(International Q Project, '국제 Q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과 그 연구 결과를 위해서는 소기천의 『예수말씀의 전승궤도』,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pp. 205-218을 보라.
55) 유승원,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예수 이야기」, 『기독교사상』509, 2001. 5. p. 235. 이와 같은 구미 학자들의 책은 국내에서 활발하게 번역이 되었다. Marcus Borg, 『미팅 지저스』, 구자명 역, 홍성사, 1995; 『예수 새로 보기: 영, 문화 그리고 제자 됨』, 김기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7; 『새로 만난 하느님』, 한인철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E. P. Sanders, 『예수운동과 하나님 나라』, 이정희역, 한국신학연구소, 1997. John Dominic Crossan, 『예수는 누구인가』, 한인철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역사적 예수: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 농부의 생애』,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김기철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Robert W. Funk, 『예수에게 솔직히』,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1999. Gerd Theissen, 『역사적 예수』, 손성현 역, 다산글방, 2001.
56) 김명수, 『그리스도교와 탈현대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0.
57) 김창락, 「'하나님의 나라': 그 기원과 해석의 역사」, 『하나님 나라: 그 해석과 실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58) Helmut Köster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Trajectories through Early Christian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1), 114-57을 보라.
59) 조태연, 「공관복음 연구」, p. 541.
60) 김광수, 「예수의 귀신 축출 사역의 사회 정치적 이해」, 『성경과신학』23, 1988. pp. 15-84. 또한 『복음과실천』19권(1996년), 23권(1999년), 25권(2000년)에 연속하여 발표한 동일 제목의 논문들을 참고하라.
61) 김광수, 「예수의 병자치유 사역의 사회-문화적 배경」, 『복음과실천』27, 2000. pp. 35-64.
62) 조태연, 「공관복음연구」, pp. 536-537. 그의 비유 해석을 위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잘해야 본전, 아니면 손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세계의신학』46, 2000. pp. 70-97. 「대지에 귀를 가만히 대어보라!: 씨를 살리는 땅의 비유(막 4:26-29)」, 『세계의신학』47, 2000. pp. 51-74; 「아하, 땅 속에 하늘이 있었네!」, 『세계의신학』48, 2000. pp. 55-88.
63) 일찍이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일컬어 "기독교 교리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비취는 태양"이라 했다. 그것은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소유하고 있는 가르침이며 기독교를 다른 기타 종교와 구분해주는 교리였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이 신조에 담겨진 그 어떤 것도 포기하거나 타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다(Martin Luthers Werke 50:199). 이신칭의의 교리가 "다른 모든 교리, 사역, 예배의 형식,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의례에 대해 확실하고 자유롭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시금석"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고도 했다(Werke 27:9). 이후 보수적 그리스도교 진영에서는 바울의 생각이 성서의 다른 부분을 읽는 잣대가 되고 있다.
64) 조태연, 「성스러운 상징변이: 한국문화신학을 위한 신약성서적 토대」, 『한국종교문화와 문화신학』, pp. 38-71.
65) 조태연, 「신을 먹고 신처럼 되어: 문화의 수용과 변용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예」, 『문화의 수용과 그 변용』, 이화여대인문학논총 2, 2000. pp. 94-95.
66) 안병무, 「바울의 전향과 소명」, 『바울 새로 보기』, 김재성 편, 한국신학연구소, 2000. p. 147.
67) 김세윤, 「바울서신들에 있는 예수전승」, 『예수와 바울』, 서울, 도서출판 제자, 1995. pp. 319-386. 장종현, 최갑종, 『사도 바울』, 천안, 천안대학교, 1999. 12장을 보라. 물론 김세윤의 작업은 바울의 예수 전승 지식의 정도를 극대화시키는 '극대주의자'(maximalist)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진지한 석의와 논의 없이 무작정 '극소주의자'(minimalist)를 자처하는 일에 좋은 경계가 된다.
68) 샌더스는 이를 '언약의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69) 홍인규, 「바울은 율법을 잘못 전하고 있는가」, 『목회와신학』66, 1994. 12. pp. 288-301.
70) 이한수, 『바울 신학 연구』, 서울, 총신대출판부, 1993. pp. 99-187.
71) 서중석, 『바울서신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p. 173. 바울이 반대했던 율법주의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의 「바울의 율법 행위 비판」, 『현대와 신학』22, 1997. 6. pp. 74-75를 보라.
72) 최갑종, 『바울연구 II』,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 96.
73) 최갑종, 『사도 바울』, pp. 379-380.
74) 김창락, 「바울의 성의론/칭의론 이해」, 『종교신학연구』10, 1997. p. 31.
75) 김창락, 「바울의 칭의론, 무엇이 문제인가?」, 김재성 편, 『바울 새로 보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p. 214.
76) 유승원,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이신칭의 교의의 기원과 그 의미에 대한 오해와 이해」, 『현대와 신학』26, 2001. pp. 284-323. 샌더스 문하에서 수학한 유승원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일반적으로 공로주의를 표방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바울이 유대교를 공로주의의 종교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요할 경우, 유대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이것이 구원에 '들어가기'(getting in)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울이 그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본다.
77) 서중석, 『바울서신 해석』, pp. 219-234.
78) 서중석, 『바울신학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 370-413.
79) 김지철, 「바울과 여성 선교 동역자들: 로마서 16장을 중심으로」, 『장신논단』13, 1997. pp. 27-48.
80) 김경희, 「갈라디아 3장 27-28절을 통해 본 원시 기독교의 평등의 비전」, 『신약논단』7, 2000. pp. 48-82.
81) 최영실, 『신약성서의 여성들』,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p. 223-224.
82) 박경미, 「바울 공동체와 여성들: 갈 3:28과 고전 11:2-16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신학』1, 1990. pp. 7-12. 「교회의 가부장주의화 과정과 에베소서의 가정규율」, 『한국여성신학』21, 1995. pp. 9-19.
83) 서중석, 「요한 공동체의 기원과 성장」, 『신학논단』18, 1989. pp. 109-127. 요한공동체가 사도계열과 보이는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제일 고별 설교에 반영된 요한 공동체의 정황」, 『신학사상』72, 1991. pp. 35-66을, 베드로계와의 연합과 반연합의 이념적 대립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서의 베드로와 애제자」, 『신학논단』10, 1991. pp. 25-44를 각기 참고하라.
84) 서중석, 「예수의 영광과 요한 공동체의 영광」, 『기독교사상』35-3, 1991. 3. pp. 82-97.
85) 박경미, 「요한 15,1 - 16,4a에 나타난 요한 공동체의 자의식(II)」, 『신약논단』3, 1997. pp. 46-67.
86) 김동수, 「요한문헌 연구」, 『신약성서개론: 한국인을 위한 최신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p. 579.
87) 같은 글, pp. 580-581.
[출처] 한국의 신약성서 연구에 관한 소고 |작성자 성산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