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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기타)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O.S.T
개동(開東) 추천 0 조회 86 07.07.21 14: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O.S.T

 

01. 분계선 코스모스 (작사 작곡 미상/노래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21기)

02. 버스를 타고 (작사 작곡 미상/노래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초급부)

03. Summer Traning camp (작곡 이상훈)

04. 관객이 뽑은 명준감독 나래이션 (축구경기장면)

05. 관객이 뽑은 명대사 (변재훈, 오려실의 인터뷰)

06. Robert Schumann-Traumerei Aus Kinderszenen op.15/From "Scenes of Childhood" (슈만 '꿈' / 연주 차미연)

07. 관객이 뽑은 명준감독 나래이션 (조국방문 전,후)

08. My country (작곡 이상훈)

09. For teacher Li Ho Mi (작곡 이상훈)

10. 관객이 뽑은 명장면 (리호미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11. 관객이 뽑은 명장면 (21기들의 졸업식 중 12년간의 생활 낭독)

12. 약속 (졸업식 노래 / 노래 :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21기)

13. 우리를 보시라(작곡 윤영란 작사 리명옥 노래/연주 조선대학교 경음악단)

14. 하나(작곡 윤영란 작사 리명옥 윤영란 노래/ 노래패 우리나라)

 

음반 이외의 곡

 

- 조선의 꽃으로 너를 피우리 - 김명숙, 박지순, 송명화

- Summer Traning camp (#축구부 합숙 훈련 중 마라톤 씬)

- 약속 (기타연주)

- 우리를 보시라 (기타연주)

-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 이지상 안치환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O.S.T 전곡듣기

 

 

01. 분계선 코스모스

 

작사 : 미상

작곡 : 미상

노래 :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21기

 

곱다고 보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이하여 너는 여기에 피었느냐
임진강 기슭에 새 하얀 코스모스 살랑살랑
남북을 오고가는 그 바람에
설레고 싶어서 피어났느냐

 

반겨서 안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이하여 너는 그리도 설레느냐
임진강 기슭에 연분홍 코스모스 살랑살랑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생각하며 설레이느냐

 

01. 분계선 코스모스

 

 

02. 버스를 타고

 

작사 : 미상

작곡 : 미상

노래 :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초급부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

통학길이 멀다고 어머니는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는 조선사람!
우리의 학교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
찬바람이 분다고 모두가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목한 우리 교실
우리의 동무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달리고 달려가네
학교로 가는 이 길은 그 어디에 잇닿아 있을까
찬바람이 불어와도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의 학교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우리의 동무가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달리고 달려라, 야!

 

02. 버스를 타고

 

03. Summer Traning camp (작곡 이상훈)

 

04. 관객이 뽑은 명준감독 나래이션 (축구경기장면)

 

05. 관객이 뽑은 명대사 (변재훈, 오려실의 인터뷰)

 

06. Robert Schumann-Traumerei Aus Kinderszenen op.15/From "Scenes of Childhood" (슈만 '꿈' / 연주 차미연)

 

07. 관객이 뽑은 명준감독 나래이션 (조국방문 전,후)

 

08. My country (작곡 이상훈)

 

09. For teacher Li Ho Mi (작곡 이상훈)

 

10. 관객이 뽑은 명장면 (리호미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

 

11. 관객이 뽑은 명장면 (21기들의 졸업식 중 12년간의 생활 낭독)

 

 

12. 약속 (졸업식 노래)

 

작사 : 조국과 청춘

작곡 : 조국과 청춘

노래 : 혹가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21기)

 

지나온 길 되집어 가면 힘겨운 눈물도 흐르지만
그래도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눈물 젖은 추억들
가슴에 수 없이 새긴 얼굴 함께 싸운 나의 동지들
못 다한 많은 일들 아쉬워하며
밝은 내일 다짐하던

 

잊지말자 너와 내가 맺은 약속을 통일되는 날까지
승리의 노래 함께 부를 사랑의 길에 우리 다시 만나리

 

세월지나 다시 만나면 떠나간 동지 생각하면서
저마다 투쟁의 귀중한 얘기 밤새도록 나눌때
보고파(하)던 동지의 모습 나의 가슴 깊이 새기며
또 다시 만나리라 약속하면서
기쁜 노래 부르리

 

잊지말자 너와 내가 맺은 약속을 통일되는 날까지
승리의 노래 함께 부를 사랑의 길에 우리 다시 만나리

 

칠천만 겨레 행복누릴 통일 된 그 날
우리 다시 만나리

 

12. 약속 (졸업식 노래)

 

 

13. 우리를 보시라

 

작사 : 리명옥

작곡 : 윤영란

노래 : 조선대학교 경음악단

연주 : 조선대학교 경음악단

 

그 언제나 나를 보는 눈길들 내가 서는 자리마저 하나없듯이
마음을 숨기며 발자취도 감추고 세상에는 저 혼자라 알아왔네
단 하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동무들이 나를 나를 이루어주고
두 팔을 크게 벌려 여기 오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굽이굽이 돌아드는 이 길을 함께 가니 푸른 하늘이 열리여있네
조선옷 입고서 얼굴 바로 들고서 날마다 학교가는 이 기쁨아
불리우는 이름을 몰랐었네 자란 곳이 다른 줄을 몰랐었네
더는 헤매지 말고 웃어 보라고 안아주는 나의 학교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참되게 살아가는 이 행복 넘치네
아침의 해빛이 아름답고 고운 그 모습을 그려 살리라

 

13. 우리를 보시라

 

 

14. 하나

 

작곡 : 윤영란

작사 : 리명옥, 윤영란

노래 : 노래패 우리나라)

 

14. 하나

 

 

조선의 꽃으로 너를 피우리

 

작사 : 강명숙

작곡 : 김정철

노래 : 김명숙, 박지순, 송명화 등.

 

어린 딸아 언제면 네가 알겠는지

멀리 멀리 기숙사로 보내는 이 마음

아침마다 너의 머리 빗어주지 못해도

저녁마다 숙제공부 보아주지 못해도

네 작은 가슴에 민족의 넋을 심어

조선의 꽃으로 피우리 너를 피우리

 

어린 딸아 크며는 너도 알아주리

멀리 멀리 기숙사로 보내는 이 마음

아직은 엄마품이 그리울 네 건만

꿈에서도 오고 싶을 정다운 집이건만

네 작은 가슴에 조국의 해빛 뿌려

조선의 꽃으로 피우리 너를 피우리

 

길을 가다 돌아서 방긋이 웃는 너

멀리 멀리 기숙사가 손저어 반긴다

이 아침은 너를 낯은 엄마 품 떠나도

래일에는 우릴 키워준 조국의 품 알리라

네 작은 가슴에 애국의 뜻을 새겨

조선의 꽃으로 피우리 너를 피우리

 

조선의 꽃으로 너를 피우리

 

Summer Traning camp (축구부 합숙 훈련 중 마라톤 씬)

 

약속 (기타연주)

 

우리를 보시라 (기타연주)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詩    : 허남기

작곡 : 이지상

노래 : 이지상, 안치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 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 놓고 기대노라면

삑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 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여들어

너희들의 앵두같은 두 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오는 날엔 비가

눈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가지 무엇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일본학교보다 좋아요)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 우리도 앞으로

일본학교보다 몇 배나 더 큰 집 지을 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 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이 시를 쓰신 허남기 시인은 조선학교의 교장을 지내셨습니다. 시에 나오는 '1948년 춘삼월엔 때아닌 모진 바람이...' 라는 구절은 '한신교육투쟁' 을 이야기 합니다. 밑에 올려 놓은 <일본에서의 재일동포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상황에 대하여> 중에서 이 부분이 나옵니다. 참조하십시오.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란다 - 詩 : 허남기, 노래 : 이지상, 안치환

 

▲ 김명준 감독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1] 

 

씨네21 오정연

 

진심은 마음을 움직이고, 편견을 거둔 이해는 새롭고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다큐멘터리가 지닌 힘은 그런 것이다. 10월27일 시작한 인디다큐페스티발 2006의 개막작 <우리 학교>는 힘있는 다큐멘터리다. 너무 예뻐서 오히려 슬픈 재일 조선학교의 일상을 담은 이 영화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얼핏 두서없는 듯하지만 누구보다 조리있는 수사를 구사하며, 영화 속 그들의 삶을 넘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올해 부산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서 상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운파상을 공동 수상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촬영감독 출신 김명준 감독은 유명을 달리한 아내를 통해 시작된 인연을, 의심없는 진심으로 이어나간 끝에 <우리 학교>를 완성했다. 수상 소식을 동포에게 전할 수 있어 기쁘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 친구들을 이야기했다. 길고 깊은 사연을 풀어내느라 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행복한 미소는 변함없었다. 행복한 눈물과 절절한 미소의 진짜 의미를 알고 싶다면 11월2일까지 계속될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찾아주시길. 이번 기회를 놓친 분들에게 좋은 소식을 덧붙이자면 <우리 학교>는 내년 초쯤 일반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계획이라고 한다.


 이상한 학교가 있다. 전교생이 162명인데 선생님은 27명이다. 초급부 1학년부터 고급부 3학년까지 학년당 한반씩이어서 12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는 아이들은 자율적으로 조를 짜서, 자습이며 독서, 지각여부를 두고 경쟁한다. 그러나 이에 따른 상벌은 없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수십명인데, 선생님들은 이들에게 오후엔 간식을 직접 만들어주고, 밤에는 함께 놀다가 잠이 든다. 최장 12년 동안 정말 열심히 배우고 운동하지만, 정식학교는 아니다. 일반 대학에 가려면 별도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친구는 “이 학교에 와서 나도 바뀌었습니다. 혹시 이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깡패가 되었거나 경찰에 잡혀서 소년원에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점수를 위해 악착같이 경쟁하는 법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이곳은 ‘혹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 일본 최북단 가장 큰 섬이자 6천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조선학교다.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 1세들은 우리말과 글을 몰랐던 자녀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불편이 없도록 가장 먼저 학교를 세웠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는 80여개의 ‘조선학교’가 남아 있다. 대부분 고향이 남쪽인 재일조선인이 3, 4살까지 이어지는 동안 한반도 남쪽의 사람들에게 ‘조선학교’는 잊혀진 존재였다.-프롤로그 자막 중에서
 

<우리 학교>는 이 사랑스러운 학교의 1년5개월을 담고 있다. 김명준 감독의 꼼꼼한 카메라는 이상적인 학교를 이상한 학교로 생각하는 우리가 이상하지 않은가 질문을 건넨다.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포사회의 모습도 자연스레 묻어난다. 촬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4년 10월이지만 2002년 3월부터 서로를 알았던 카메라와 대상의 친밀감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일상으로 스며들게 만든 것이다. <우리 학교>는 감독이 그 대상과 3년 동안 나누었던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는, 2년 반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조은령 감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 고 조은령 감독. 김명준 감독의 부인이었다. 미완의 장편 <하나> 를 제작하면서 찍은 사진.

 

고 조은령 감독으로부터 시작된 인연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단편 <스케이트>의 감독으로 알려졌던 조은령 감독은 김명준 감독의 부인이었다. 아니, 김명준 감독이 그의 남편이었다. 장편 데뷔작 <하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를 접하게 된 것도, 그들과 사랑에 빠진 것도, 장편 극영화의 메이킹 차원에서 <프론티어>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촬영을 <꽃섬>의 촬영감독으로 디지털카메라에 익숙한 김명준 감독에게 부탁한 것도, 남한의 무관심과 오해로 인해 폐쇄적인 집단으로 낙인찍힌 조선동포들의 닫힌 마음을 솔직함과 성실함만으로 열게 만든 것도 모두 조은령 감독이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고, 그로부터 7개월 만에 거짓말처럼 생사를 달리했다. 고인의 추모영화제를 위해 다큐멘터리를 완성해야 했고, 남겨진 사람은 울다 잠드는 피폐한 생활을 박차고 일본으로 향했다. 애틋한 얼굴이 꿈속에서 환한 표정으로 나타나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된 다큐멘터리 <하나를 위하여>는 둘이 함께 찍은 일본 조선학교 사람들의 모습, 조은령 감독의 일기, 그를 알았던 동포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김명준 감독은 1년 남짓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 생전에 알았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하나를 위하여>는 일종의 숙제였지만, 김명준 감독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완성한 <우리 학교>는 다르다. “화장유골의 반은 부모님 댁 근처 언덕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오사카와 홋카이도 조선학교에 묻었어요. 은령이와 나를 맺어준 것이 조선학교인데, 동포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는데, 은령이 소식에 너무 충격을 받고 같이 슬퍼해주셨는데, 결국은 미완으로 남은 거잖아요.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이야기였어요.” 새로운 조선학교를 발굴해야 한다는 욕심은 없었다. 첨예한 재일동포 문제를 다루려 했다면 오사카나 도쿄로 향했겠지만,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 단독 연출작의 대상으로 ‘혹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택했다. 김명준 감독이 조선학교를 돌아다니던 중 유난히 인간적인 인연을 맺었던 곳이었고, 조은령 감독과 연애하던 시절에는 기숙사의 각 방에서 묵다가 신혼 때 방문해서는 선생님들의 성화로 한방을 썼을 정도로 편한 곳이기도 했다.

 

“처음 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 나는 선생님들과는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는 상당히 힘이 들었다. 아이들끼리의 대화 속에는 많은 일본 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김명준 감독 내레이션 중에서
 

꾸준한 노력으로 까다롭고 조심스러운 총련 중앙의 신뢰를 얻은 조은령 감독 덕분에 촬영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와 그들은 말이 달랐고, 처지가 달랐다.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고도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말이 익숙해지는 데만 6개월이 걸렸지만, 더욱 힘들었던 건 “태어날 때부터 두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였다. 계속해서 카메라를 거부하던 친구가 “명준 오빠, 오빠가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애들은 사실 다 싫어한다, 찍히는 거”라고 말하는 바람에 1주일 동안 멍하게 지내기도 했다(촬영 시작 1년 만에 그런 말을 들은 그 심정!). 간곡한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오해를 풀었지만,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돌아보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아쉽다. “아이들에게 학교가 어떤 곳인지 처음엔 몰랐어요. 졸업식이 끝난 뒤 술자리에서,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한 친구가 담임선생님에게 ‘내 아버지가 돼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많은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 그렇게 많은 힘을 얻고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그들의 진짜 모습을 더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 친구들과 말이 익숙해지는 데만 6개월

 

망설임과 답답함을 이긴 것은 따뜻한 마음이었다. 선생님들은 교무실 한편에 그의 책상을 마련해줬고, 불시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명절 연휴에 홀로 기숙사에 남은 감독을 위해 몰래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밥을 먹어주다가 결국 순번표를 들켜 그를 눈물겹게 만들기도 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포사회는 그저 극진해서, 그가 아프다는 소문이 퍼지면 학부모들이 기숙사에 음식을 날라줬다. 카메라를 든 그에게 서슴없이 다가서던 도시 아이들과 달리 멀리서 수줍어하던 아이들, 교실에 그가 들어서면 일제히 주목하던 아이들은 “이제 그 카메라가 공기 같다”고 말할 정도가 됐다. 체육대회 때 아이들이 직접 만드는 대깃발에는 아이들의 이름과 함께 그의 이름이 적혔다. 행복이 아닌 어떤 말로 그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면 울고, 슬퍼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그건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김명준 감독은 카메라를 든 채로 모든 것을 배워갔다. 한 시간짜리 테이프 500개, 녹취 및 분류에만 1년이 걸렸던 분량을 촬영하면서 생각한 컨셉은 고급부 3학년들의 졸업까지의 1년을 중심으로 다루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다큐멘터리는 처음이었으니, 주인공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인터뷰를 먼저 해야하는 건지, 스케치를 먼저 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어요.” 조선학교 대항 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담겠다는 예상에 농구부를 계속 따라잡았지만 학생들의 대회 포기선언으로 황망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때 찍은 화면은 영화 속에서 축구부 아이들이 일본학교를 상대로 한 경기장면을 설명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됐다. 일반 일본학교 운동부와 달리 후보선수 없이 전원이 뛰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반칙 퇴장을 우려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소극적인 플레이를 몸에 익힌다는 감독의 내레이션은 담담하여 더욱 서럽다. 감독이 직접 쓴 내레이션 일체는, 그가 촬영하면서 알게 된 사실로만 이루어져 있다. 축구부 아이들과 코치선생님은 지는 것이 익숙할 법도 한데, 고급반 3학년과 함께한 마지막 경기를 패한 뒤 경기장을 떠나지 못한다. 시합 전, “싸움 되어도 지지 마라. 조(선)고(등학)생이다, 너희들”이라며 서로를 독려하던 아이들의 분한 눈물을 담으며 김명준 감독의 카메라도 울고 있었다.

 

 

이 밖에도 <우리 학교>의 러닝타임 134분 내내, 학교의 일상과 짧은 인터뷰로 이루어진 영화는 아주 느슨하고 은근한 고리로 연결되었음에도 산만하기보다는 흥미진진하다. 고급반 3학년의 마스코트인 정신지체아 리사의 에피소드는 10명의 아이들을 인터뷰하던 중 발견한 케이스. “애들이 1학년 때부터 쭉 같이 지내서 그런지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아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걔는 좀 그렇지 않냐’고 말하면 ‘명준 형님, 사람은 그렇게 1, 2년 안에 평가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요. (웃음) 근데 리사에 대해서는 모두 ‘처음에는 귀찮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리사 덕분에 우리가 남을 도와주는 정신이 생겼다’고 말하더군요.”

 

“이 아이들은 축구에 재능을 지닌 아이들도 아니고 축구에 미래를 건 아이들도 아니다. 조선사람이 조선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어렵게 실천에 옮겨주신 부모님들과,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선생님들,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는 동무들,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건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김명준 감독 내레이션 중에서
 

한류 열풍도 어쩌지 못할,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들의 뿌리깊은 악감정은 막연하나마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너희 학생 중 한 마리 죽여버릴 거야, 이런 돼지 같은 조선놈들아. 너희들은 짐승들이니까.” 차마 믿고 싶지 않은 전화 욕설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등교하는 모습을 편집한 장면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슬프고, 무섭다. 드물게 충격요법을 사용한 이 장면에서 김명준 감독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심각하고, 그에 반해 우리는 너무 모른다는 이야기다. 심할 때는 하루에도 몇통씩 협박전화가 걸려오고 학교 홈페이지 담당 선생님은 게시판의 욕설을 삭제하는 게 일이다. <우리 학교>를 관통하는 알 수 없는 슬픔의 정서는 내레이션이나 인터뷰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지만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학생들로 늘 시끌거렸다는 기숙사는 썰렁하고, 선생님들은 적은 월급으로 인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가며, 전교생 수는 해마다 열명씩 줄어든다. 졸업식장. 선생님과 학생들 한명 한명이 서로의 시시콜콜한 기억을 발표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뜨겁게 이별하는 모습은 부럽도록 정겹지만, 학교를 벗어난 이들이 맞이해야 할 세상 때문에 가슴이 먹먹하다.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2] 

 

씨네21 오정연

 

한 시간짜리 테이프 500개, 녹취와 분류에만 1년

 

더디나마 변화는 있었다. 별도의 자격 시험을 거치면 이들도 일반 사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공립대 역시 총장의 재량에 따라 가능하다. 예전엔 불가능했던 일본의 각종 선수권대회에도 공식참가가 가능해졌다. 이 학교 역기부가 처음 전국대회 진출했을 때 우리 학생이 세운 전국 신기록은 공인기록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당연한 걸 좋아졌다 말하려니 역시나 민망하다. 여전히 전국대회에 참가하더라도 다른 일본학교와 달리 숙박, 교통비는 지원받지 못한다. 외국인의 공립대 입학을 금지하는 법률에 대해 외국인학교가 항의했을 때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유럽계 학교에 대해서만 이를 허용했고, 이후 중국 및 대만계까지 입학을 허락할 때까지 전체 외국인학교의 60%에 달하는 조선학교는 여전히 노골적인 배제의 대상이었다고 김명준 감독은 말한다. 미움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김명준 감독의 카메라가 담은 아이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모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그들은 카메라가 아닌, ‘명준 형님’에게 말을 건넨다. 카메라가 있는 교실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는 학생에게 담임선생님은 일본 노래를 불러서 되겠냐고 묻고, 아이는 “자연 태를 찍고 싶습니다, 명준 형님은”이라고 말한다. “(카메라를) 의식 안 하는 쪽이 좋습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우리 학교> 속 아이들이 그처럼 예쁜 것은 김명준 감독이 촬영감독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말 그러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학년 초 담임 발표 시간에 선생님 이름이 불릴 때마다 환호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들의 얼굴, 유성매직으로 얼굴에 낙서를 한 뒤 지워지지 않는다는 아이의 울상에 미소짓는다. 운동회 대깃발의 이름을 ‘비빔밥’으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겠냐는 진지한 토론이나 수업시간에 깜빡깜빡 졸다가 자리를 바꾸자는 말에 벌떡 일어나는 아이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합창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선생님들의 묘한 신경전, 아이가 생겼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대한 아이들의 요란한 반응 등은 그저 친근하고 귀엽다.

 

“지나온 길 되짚어가면 힘겨운 눈물도 흐르지만/ 그대로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눈물 젖은 추억들./ 잊지 말자 너와 내가 맺은 약속을 통일되는 날까지./ 승리의 노래 함께 부를 사랑의 길에 우리 다시 만나리.”-졸업식장에서 졸업생들이 부르는 노래
 

김명준 감독은 <우리 학교>라는 지금의 제목을 촬영을 종료하기 3, 4달쯤 전에 정했다. “동포들은 조선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불러요. ‘나고야 우리 학교는 재정이 어떻습니까’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면 뭔가 다르다는 걸 인정해주죠. 남한의 우리도 남의 학교, 북의 학교, 재일동포의 학교가 아니라, 우리 학교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체의 단락 구분없이 진행되는 영화는 아이들이나 선생님의 인터뷰 도중 그 말에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까이서 찍어놓은 화면이 풍부하지 않으면, 혹은 인터뷰이가 진심만을 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레이션과 인터뷰, 생활 속 자연스러운 장면으로만 가려고 처음부터 생각했어요. 무엇보다도 그렇게 예쁜 애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수상하는 동안, 감독과의 대화에서 관객은 영화의 형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극중 인물의 안부를 묻는 일이 더 많았다. 김명준 감독은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며 기뻐한다.

 

 

‘우리 학교’ 친구들은 ‘나의 아이들’이 되었다
 
적어도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그곳은 ‘우리 학교’가 되었고, 김명준 감독은 결국 자신과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이 옳은 선택을 해왔음을 영화로 증명했다. 그것은 또한 그가 4년 동안 잊고 살았던 촬영감독의 꿈을 기억해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의미한다. 실은 “영화현장의 조명이 그리워서 상사병이 날 정도”였다는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9학번이다. 대학 시절과 학생회장 선배였던 이문식, 인문대 학생회장 선배 김광수 청년필름 대표 등과 자취하며 “4년 동안 데모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고 싶었던 미대를 “굶어죽을까봐 포기”하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서 “영화를 하면 굶어죽지 않겠다”는 생각에 재수 끝에 들어온 학교였지만 별수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옥살이도 했고,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턱없이 부족한 학점, 그만큼 모자라는 학비로 졸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복학한 그는 5년 후배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영화를 배웠다. 연출할 돈은 없었지만 영화가 하고 싶어서, 뷰파인더 속 은밀한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촬영전공을 지망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C카메라로 일하는 동안 김우형 촬영감독에게 촬영의 자세를 배우면서 확신도 얻었다.

 

기꺼이 만들었던 4년간의 공백이지만, 이제 다시 육중한 필름카메라 옆에 서려니 설렘과 함께 두려움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꽃섬>을 촬영한 직후 곧잘 찾아주던 사람들 중 누가 다시 나를 찾아줄까” 싶은 불안감도 있다. 그러나 존경하는 촬영감독으로 “특별한 현상이나 테크닉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다른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세계에 맞춤한 영화를 찍는” 존 톨(<씬 레드 라인> 등)을 꼽는 그는 다큐멘터리 연출 경험이 촬영감독의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이 영화를 통해 연출의 마음을 알게 됐죠. 내가 왜 그때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감독이 행복하게 영화를 찍었을 텐데.” 이제는 숙명이 되어버린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들을 틈틈이 다큐멘터리에 담아야겠지만, 단편과 장편, 디지털과 필름을 가리지 않고 천천히 다가서다보면, 또 다른 우연이 그를 촬영으로 이끌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우리는 학교로 가요./통학길이 멀다고 어머니는 걱정하지만/ 괜찮아요 괜찮아요. 우리는 조선사람/ 우리의 학교가 기다립니다/(중략) 학교로 가는 이 길은 그 어디에 잇닿아 있을까.” -노래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중
 

설레는 마음으로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던 일본의 우익 시위대들은 여전할까. 미사일 사태 때도 상황이 험악하여 교대로 선생님들이 기숙사 불침번을 서야 했다는데 요즘처럼 수상한 시절에 아이들은 괜찮을까. 선생님이 되어 학교를 지키고 싶다던 아이의 꿈은 여전할까. 편집을 마무리할 무렵 첫돌이 지났다는 고급부 3학년 담임선생님의 딸은 우리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엔딩 크레딧에 오른 전교생의 이름을 바라보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가족처럼 느껴져 온갖 질문이 꼬리를 문다. “어서 빨리 우리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 선생님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김명준 감독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대로 우리의 바람이 된다.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로 가능한, 어쩌면 최고의 마법. 김명준 감독이 오로지 카메라로 선보일 진심어린 화면, 그리고 그만이 담을 수 있는 우리 학교 사람들의 후일담이 벌써부터 그립다.

 

 

김명준 감독이 꼽은 영화 속 인물들
우리 학교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리호미 선생님

“괜찮아. 하루아침 사이에 몽땅 되지 않아요.”

 

학생과의 의사소통 문제로 상담해온 앳된 여교원에게 교원 30년차 리호미 선생님이 설명한다. 선생님들의 선생님, ‘어머니 교원’으로,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한글능력검정 1급 시험 준비에 골몰한 모습 등이 영화에 담겼다. 지난 2005년 5월, 남쪽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그러나 소원하던 한글능력검정 1급 자격을 딴 직후 암으로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병실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영화에 넣었다가, ‘자신의 마지막이 저렇게 기억되길 원치 않으실 것’이라는 스탭의 만류로 학생들에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넣었어요. 투병으로 많이 변한 모습이 훨씬 극적이겠지만, 영화를 보신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장면을 넣었다면 아이들에게는 보여주지 못했을 거라고. 참 다행이에요.” 감독의 말이다.

 

신경화 선생님

“영화제작도 이제 마감단계겠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진척되기를 바랍니다. 부디부디 몸 건강에는 조심해서 귀한 몸 잃지만 마세요.”

 

영화의 마지막, 김명준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소개되는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속정 깊은 그 모습은 참교육자의 그것이다. 리호미 선생님과 함께 홋카이도 우리 학교 유일의 한글능력검정 1급 자격자. 부엌을 정리하거나, 남들이 단체사진 찍을 때 밖으로 떨어져 나와 줄을 잘 섰나 체크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 모습이 계속해서 보여지지만, 한번 본 관객은 존재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그러나 영화의 프롤로그, 폭설로 등교를 금한다는 전화를 돌리는 모습이 나오는 등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분이다. 섭섭한 걸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종종 술먹고 김명준 감독의 기숙사 방에 쳐들어오셨지만, 정작 힘든 일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돌아가신다고. 영화 속에서는 교무부장이었지만, 현재는 교장선생님이시다.

 

오려실 학생

 

“많이 먹고 자는 것은 행복이 아니죠. 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행복이 아니죠. 그런데 인민들은, 정말의 행복을 알고 있죠.”

 

일본학교를 다니다가 고급부 1학년으로 편입하여, 처음엔 자신이 조선 사람인 것이 싫었다는 려실이가 고국 방문 뒤 상기된 표정으로 북에서 만난 동포를 향한 애정을 고백한다. 인터뷰에서는 항상 야무진 대답을 하는 까닭에 “관객은 려실이를 똑 부러지는 아이로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이 곱고 말도 없는 애”라고 김명준 감독은 설명한다. 같은 반의 정신지체 학우를 돌보며 지내다가 보육교사의 꿈을 키우게 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 따뜻하고 예쁜 아이”다. 현재 조선대학교 교육학부에서 보육을 전공 중이다. 만일 <우리 학교>의 후속편을 만든다면 계속해서 지켜보고픈 주인공이라고.

 

후지시로 류스케 선생님

 

“내가 여기에서 지도한다면 일본말이면 역시 안 되지 않겠습니까. (중략) 우리 학교 와서 제일 변한 것이 타인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것이 아주 행복한 일이구나.”

 

전국에 있는 일본 조선학교 유일의 일본인 교원. 도쿄 축구명문 고등학교 졸업 뒤 축구지도자 학교에서 만난 재일조선인을 통해 우리 학교를 알게 됐고, 축구코치를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급기야 정식 체육교사로 부임하게 된 것. 김명준 감독이 학교 교무실에 자리를 배정(!)받았을 때 마침 옆자리에 있었던 관계로 서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가르쳐주며 친해졌다. 두 남자가 일본과 한국의 동화책을 펼쳐놓고 각자의 말을 공부하는 모습은 교무실의 흐뭇한 광경 중 하나였다고. 노래방 애창곡은 <독도는 우리 땅>,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둔 자식을 우리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하는 것을 “그래도 그건 좀 이상하지 않겠냐”는 교장선생님의 만류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우리학교> 홋가이도에서 온 편지

 

한국에서 영화 <우리학교>를 보시는 관객 여러분께

제가 출연하는 영화 《우리 학교》를 보아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김명준 감독과 조은령 감독을 만났습니다.그들과 만남으로써 저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생각을 깊여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 혹가이도에서 재일동포 3세로서, 국적은 조선, 고향은 남쪽땅이라는 복잡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처음 해본 말은 일본어였으며 자기가 조선사람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 제가 처음으로 우리 민족을 접하여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것은 바로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땅에서도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살아나가고 우리 학교의 대를 이어 지켜나가기 위해 민족교육의 최고학부인 조선대학교 문학력사학부에 입학하여 우리 민족의 력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시고 재일동포들의 존재를 알아받고 싶으며 또 서로 립장은 달라도 우리 민족끼리 하나가 되어 사이 좋게 해나가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일본에서 살지만 일본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조선사람으로서 떳떳이 살아나가며 우리 학교, 그리고 재일동포사회를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 혹가이도 조고 21기 졸업생 서영범

 

이름 모를 동포들께

친애하는 동포들, 저는 먼저 영화 <우리 학교>를 보아주신 동포들과 <우리 학교> 제작을 위해 혼신 분투하신 모든 분들, 무엇보다도 우리 감독님이신 김명준 형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렵니다.

 

동포들, 갑작스럽지만 사람의 한 생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영화로 된 저의 고급부 3년 동안, 지금도 저의 가슴 속에는 옳다고 느끼는 걸 감추고 둘레의 눈치만을 걱정하는 자신이 있습니다.

 

민족교육이 저에게 가르쳐준 것, 그것은 남을 위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학기마다 시험이 있을 때면 화인하고 같이 밤이 늦도록 공부했고, 학급에 대한 고민, 동무에 대한 고민을 학교근처의 “요시노야(음식점)"에서 밤늦도록 영범이와 이야기하였습니다.

 

동무를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동포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언제나 이러한 것들과 자기를 위하여, 지금을 위해서의 대립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고 솔직한 고백을 한다면 고급부 3년 동안에 양보 할 때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자신에게 그때 진짜로 남을 사랑하고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더냐? 그렇게 물어보면 당당하게 대답을 할 수 없는 자기가 있습니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걱정보다도 당신의 걱정을 하는 조선민족, 제가 어려워도 당신을 구원하는 것 밖에 모를 조선민족의 아들로, 앞으로 살 길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있는 힘껏 사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동포들 앞으로 우리 다 같이 민족의 번영을 위해 잘 해 나갑시다.동포들의 건강을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펜을 두겠습니다. -혹가이도 조고 21기 졸업생 변재훈

 

 

<일본에서의 재일동포민족교육에 대한 탄압상황에 대하여>

 

2007년 2월 28일(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구촌동포연대(KIN), (사)동북아평화연대, 조선족연합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독도수호대, 전교조, 민족문제연구소, 6.15 청학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통일위원회), 에다가와조선학교문제대책위, 우토루국제대책위, 6.15공동위 청년학생본부, 통일연대, 전국민중연대, 민주노동당 주최로 열린

 

3.1절 88주년에 즈음하여

<재일 민족학교 학생 인권유린 실태보고회 및 토론회>

뿌리 깊은 재일동포 탄압, 민족학교를 위협하다.

- 민족학교 학생들의 인권유린 문제를 중심으로

 

라는 토론회 중 일부입니다.

 

논문 <민족교육과 재일동포 젊은 세대의 아이덴티티> <-- 읽기

 

■ 오행덕 도꾜조선중고급학교 교원

 

여러분!
총련은 이국땅 일본에서 유치반으로부터 초급, 중급, 고급학교, 대학교에 이르는 120여교의 각급 학교를 자체의 힘으로 운영하여 재일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50년의 력사를 가진 조선대학교를 포함한 우리 학교 졸업생수는 이제 10만명을 넘습니다. 바로 그들이 있기에 세기와 세대가 바뀌여도 재일동포사회에서 민족의 대,애족애국의 대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민족교육을 재일조선인운동의 생명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민족교육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한것이 아니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2년전 8.15해방을 한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맞이한 재일동포들은 식민지시기 강제로 빼앗긴 우리 말과 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동포사는 곳마다에 국어강습소를 내왔습니다.

 

1945년 10월에 첫 동포조직으로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은 수많이 생긴 국어강습소들을 초등교육시설로 개편하고 1946년 10월 부터는 중등 교육도 실시하게 되였습니다.

 

일본당국은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있던 미군총사령부의 사촉밑에 1948년초부터 재일동포들의 애족애국운동과 자주적인 민족교육을 말살하기 외한 책동을 감행해나서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당국은 응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항의해 나선 동포들을 탄압 하였습니다.

 

특히 1948년 4월 24일과 25일에 걸쳐 깅끼지방에서 일어난 《한신 교육투쟁》때에는 《비상사태선언》까지 공포하여 동포들을 무장으로 위협해 나섰으며 이 과정에 16살이던 김태일소년을 쏘아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본당국은 이와같은 류혈적인 폭거끝에 1949년 10월에는 《학교 페쇄령》을 하달하여 민족교육을 영영 없애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은 1955년 5월 총련의 결성과 더불어 그간 여러 형태로 운영된 민족교육을 모두 자주학교로 전환시켰으며 1956년 4월에는 조선대학교를 창립함으로써 민족교육은 초급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정연한 체계를 갖추게 되였습니다.

 

1957년부터 오늘까지 152번에 걸쳐 이북에서 보내온 일화로 457억엔을 넘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은 말그대로 생명수,민족교육 발전의 정신적, 물질적지주가 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당국의 민족학교에 대한 탄압책동은 끄치지 않았습니다. 일본당국은 1965년 문부차관의 명의로 통달문을 하달하여 조선학교를 학교로 인정 안한다고 하면서 우리학교에 대한 법적인가에 제동을 거는가 하면 《외국인학교법안》이라는것을 국회에 7번이나 상정하여 우리 학교를 일본문부성의 통괄하에 넣고 민족교육을 말살하며 재일동포자녀들에게 동화교육을 강요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총련과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선량한 인민들과 힘을 합쳐 이와 같은 일본당국의 책동을 걸음마다 짓부시고 민족교육을 세상사람들이 해외 교포교육의 본보기로 찬양하는 교육 사업으로 강화발전시켜왔습니다. 그런데 일본당국은 40년전의 문부차관 통달문을 구실로 민족교육을 시작한지 60년이 지나고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학교를 인정안하고 법적,제도적차별을 가하고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일본당국은 민족교육을 재정적으로 압박하고있습니다.

 

동포들은 납세의무를 일본사람과 꼭 같이 다하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 대한 보조금은 일본국고에 의한 조성금은 단 한푼도 급부안되고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적지 않은 지방자치체들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조성금을 급부하고는 있으나 일본의 공립,사립학교에 비해볼때 그 액수는 판이합니다.

 

일본의 공립학교에는 1인당 평균90만엔,사립학교에는 평균30만엔이 조성되는것에 비해 제가 일하는 도꾜조선중고급학교 고급부만 놓고보더라도 도꾜도에서 학생 1명에 할당되는 조성금은 한해에 불과 1만5천엔밖에 안됩니다.

 

일본당국은 우리 학교에 대한 동포들의 지성어린 기부금에도 세금을 가하고있습니다.일본학교에 대한 기부금은 이전 부터 손금 혹은 면세 등의 조치가 적용되고있습니다. 2002년 3월 부터는 유럽과 미국계의 학교들에도 기부금을 손금으로 취급하게 된 사실을 놓고 알수 있듯이 이는 완전한 우리 학교에 대한 차별시책입니다.

 

더우기 간과할수 없는것은 최근 년간 일본당국의 반북,반총련정책 으로 말미암아 재일조선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인권침해행위가 급증하고있는것입니다.

 

1990년대중옆부터 오늘에 이르는 10여년동안 북에 대한 일본의 적대정책이 로골화될때마다 민족의 상징인 치마저고리를 입은 우리 녀학생들과 어린 학생들에게 폭력과 폭언이 가해지고있습니다.

 

2003년에 일본의 량심적인 변호사들이 일부지역에서 조사한 수만해도 우리 학생 2710명의 조사대상자중 522명이 봉변을 당했으며 지난해 7월에는 이북의 미싸일발사후 1달 어간에 120여건,10월9일후 단 4일간에 55건의 공갈,협박,폭행사건이 보고되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건의 가해자속에 극우익분자들만이 아니라 일본의 일반시민들도 포함되고있다는것이며 심각한 것은 10살미만의 어린이로 부터 80살을 넘는 로인들도 그 속에들어있다는것입니다.

 

일본의 과거침력사는 어느새 력사의 구속에 매장되고 반북,반총련의 사회적분위기가 인위적으로 조장되는 가운데 1923년에 있었던 간또다진재때 조선인학살만행을 련상시키는 무시무시한 환경이 일본땅을 지배 하고있습니다.

 

지어 일본당국은 최근 우리의 신성한 교육마당인 시가조선초중급학교에 130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더러운 구두발로 부당한 강제수색을 감행 하였습니다. 터무니없는 구실로 민족교육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음흉한 기도를 우리들은 절대로 용납할수가 없습니다.

 

교육에 관한 권리는 인간의 존엄과 직집적으로 관련되는 특별히 중요한 기본적 인권의 하나입니다.《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은 교육에 관한 권리를 명백히 규정하고있습니다. 하기에 일본의 변호사련합회도 유엔의 어린애권리조약위원회와 여러 인권규약위원회도 일본당국의 차별시책을 즉시 시정하여야 한다고 여러 번 권고하였습니다.

 

더우기 일제식민지의 후손들인 재일동포교육문제는 력사적경위로 보나 도덕적의무로 보나 응당 일본 정부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과거청산문제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 문제를 외면하고 오히려 교묘하고 음흉한 여론 조작으로 이를 회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과거죄행을 가시기 위한 노력은커녕 저들이 비준한 국제 선언과 규약들을 무시하고 재일동포들에 대한 박해와 반인륜적인 인권유린 행위 특히는 민족교육을 말살하려는 일본정부당국의 죄행을 견결히 견결히 단죄규탄합니다.

 

우리의 후대들은 본국에서 살건 이국에서 살건 민족교육을 받고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의 떳떳이 살아나갈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후대들의 권리가 심히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을 놓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 이며 보배들인 재일동포자녀들의 장래행복을 위하여 일본당국의 온갖 차별과 인귄유린 행위를 반대 배격하기 위한 투쟁을 과감히 벌려 나갈 것입니다.

 

저역시 교육자의 량심을 걸고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앞을 가로막아도 민족교육을 기어이 사수해 나갈할 것입니다. 저는 끝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께서 뜨거운 동포애로 우리의 민족교육에 대한 지지성원을 보내주시고 전민족의 힘으로 일본정부당국과 극우세력의 탄압과 차별을 시정시키는데 동참해 주실 것을 열렬히 호소하면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 공련순 가나가와조선학교 어머니련락회 대표

 

저는 아들과 딸을 요꼬하마조선초급학교에 1학년부터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1시간이나 전차를 타고 매일 학교에 다닙니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일본학교가 있는데 왜 어린 아이들에게 고생시키면서 멀리 떨어진 우리학교로 보내는지 그 리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학교가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외에 살면서도 자기 나라 말과 글을 배워 자기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는 떳떳한 조선사람으로 아이들을 키워주는 곳은 우리학교외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지켜 오신 조선민족의 넋을 제가 이어 받고, 또한 자기 자식들이 이어나가도록 바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응당한 요구가 아니겠습니까. 일본학교에서는 우리 말도, 옳바른 우리 력사도 배울 수 없으며 더구나 조선사람으로 키워주지는 않습니다.

 

저들이 저지른 침략전쟁, 식민지통치, 학살행위를 외곡하는 교과서까지 만들고 《日の丸》,《君が代》를 국기, 국가로 쓰는 일본학교에 어찌 저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낼수 있겠습니까.

 

저는 재일조선인3세가 되지만 1세, 2세분들이 바쳐온 민족교육에 대한 깊은 사랑을 항상 새기면서 아이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해방된 민족의 기쁨을 안고 지난 수 십 년 간 왜놈에게 짓밟히던 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해방직후인 1945년에 아이들에게 국어강습소를 무엇보다 먼저 지어주시였습니다.

 

당시 모든 것이 부족한 속에서,더구나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로동을 강요당한 재일조선인들이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사는 집을 챙기기도 전에 우리 학교 창설에 모든 것을 바치시였습니다.

 

저의 시아버님께서도 역시 지금 손자들이 다니는 가나가와조선중고급학교 교사를 건설했을때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의 전차길을 매일 곡괭이를 가지고 다니시였답니다. 진지도 하루에 한끼니로 에우시면서 그날장사로 얻은 돈을 몽땅 학교건설에 바치였다고 시어머님께서 웃으며 얘기해주십니다.

 

우리 모든 재일조선인들의 피눈물과 고생이 깃들어있고 기쁨도 슬픔도 희 망도 념원도 다 담겨진것이 바로 우리 학교입니다.

 

이렇게 학교를 일떠세웠으나 우리 학교의 경제형편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바로 그러한때인 1957년,재일조선자녀 들을 위하여 공화국에서 제1차로 교육 원조비와 장학금이 보내왔습니다.그때 동포들이 얼마나 기뻐했고 얼마나 큰 힘을 얻었겠습니까.

 

이제까지 빼앗긴 것은 많아도 이처럼 나라에서 우리 재일동포들에게 거액의 돈을 보내주실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을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 우리는 민족교육을 이국땅에서 해왔으나 그 과정은 탄압과 차별의 련속이였습니다.

 

지금도 일본정부는 우리 학교를 정규 학교로 인정안하고 료리학교와 같은 각종학교로 취급하면서 보조금은커녕 해방직후부터 쓰고 있는 학교부지까지 앗아가려고 책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 일본정부는 국고에서 한 푼의 보조금도 안내고 있으며 일본의 지방자치체가 겨우 조성금을 내게 되였는데 그것은 일본공립, 사립학교에 비하면 2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사람과 똑같은 세금 을 납부하고 있기에 우리 학교에는 일본학교와 동등하게 보조금이 지불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더우기 재일동포들이 일본에 살게 된 력사적 경위를 보아도 일본정부가 응당 우리를 보호하고 권리를 보장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학교들에《어머니회》를 무어 활동하고 습니다. 《어머니회》는 아이들을 위하여, 민족교육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교대로 학교에 나가 학생들에게 점심식사를 만들어주기도 하며 바쟈를 조직하고나 깡통이건, 신문지이건 모아 팔아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각종교육기자재며 학교뻐스《어머니호》까지 선물하고있습니다. 또한 년에 여러 번 김치를 담그어 일본사람에게 판매하여 돈을 만들며 민족교육의 정당성도 알려나가고 있으니 일거량득입니다.

 

우리 학교어머니들은 가정일만을 하는 주부는 거의 없습니다. 온갖 차별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파트, 비정규로동에 종사하는 어머니들이 대다수 입니다. 어머니회는 그런 어머니들의 힘을 합쳐서 학교에 조금이라도 더 보탬을 주자고 노력하는 조직입니다.

 

우리는 일본자치체에도 찾아가 시장, 구장도 만나 사업하며 교육권침해를 반대하는 파부릿크코멘트에도 적극 참여하여 민족교육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힘쓰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3년전에는 어머니들로 대표단을 무어 유엔에도 찾아가 어린이권리조약심의위원회에서 호소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사람보다 더 우대해달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 살면서 세금을 비롯하여 온갖의무를 다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제사회의 상식대로 교육권리를 보장해달라고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일본당국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어찌그뿐이겠습니까. 일본정부는 민족의 넋을 키워주는 우리 학교를 달가와하지 않고 동화정책에 매달리면서 민족교육에 대하여 온갖 차별을 가하고 있습니다. 조일간의 정세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면 일본우익반동들에 의하여 녀학생들과 나어린 학생들에 대한 폭언, 폭행 사건이 련달아 일어납니다.

 

저 자신 일본사람부터 구박을 당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해방이 되여 62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아이들이 계속 민족적 박해와 학대를 당해야하니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여학생의 치마저고리가 칼로 찢겨진 사건은 치가 떨리는 만행입니다.찢어진 치마를 본 순간 우리는 소리를 잃었고 저의 가슴까지 칼로 찢어지는것만 같았습니다. 이 만행은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조선민족에 대한 배타풍조의 표현이며 민족의 존엄에 대한 악질한 도전입니다.

 

놈들이 찢은 것은 교복이 아니며 치마저고리도 아닙니다. 바로 조선아이의 몸에, 조선여성의 가슴에, 조선민족의 심장에 칼질을 했단 말입니다.

 

저의 딸은 당시 초급부 2학년이였으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폭행사건을 알게 되여 학교가는 길이 무섭다고 울었습니다. 아직 어렸던 딸을 2살 나이가 우인 아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0살밖에 안된 아들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저는 통학길을 함께 다니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쉴수가 없었습니다. 우리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어머니들은 다 그러합니다.

 

지금 저의 눈에는 일본이란 나라가 더더욱 우경화되고 군국화가 가속화되여가는 것이 비칩니다. 어머니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당국과 우익깡패들의 책동은 지난해부터 극도에 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1월 28일에는 시가조선초급학교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차고증명서의 불비를 구실로 아무 관계없는 학교에 130여명의 무장경찰부대가 쳐들어 왔으니 우리 어머니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유치원의 3살 어린이부터 초급부 6학년 12살 어린이가 다니는 신성한 교육의 현장에 더러운 구두발로 들어온 경찰의 강도만행에 일본전국의 어머니들이 항의투쟁에 나섰습니다. 특히 깅끼지방 어머니들은 즉각 강제수색을 감행한 오사까부경찰본부앞에 모여 《우리 학교를 구두발로 짓밟은 경찰당국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며 항의투쟁을 힘차게 벌렸습니다.

 

지금 매일과 같이 우리 어머니들은 오사까부경에, 일본수상관저에 항의메루, 전화, 팩스를 보내며 항의요청활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학교를 지키는것은 민족을 지키는것입니다. 아이들은 민족의 미래이며 보배입니다. 우리 귀여운 미래들이 안심해서 공부할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시면 합니다. 또한 일본당국이 부당한 정책을 시정하도록 목소리를 높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고야 말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정부당국의 총련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인권유린 행위의 실태에 대하여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중앙본부 국제국장 서충언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바와 같이 일본군국주의가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된 이후 반세기 이상 일본정부당국은 조선민족 앞에 저지른 국가적 범죄를 진실로 사죄하고 보상하기는 커녕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에 적극 가담하여 우리 민족의 분단의 비극을 오히려 조장하시켜 거기서 어부지리를 얻으면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해왔습니다.

 

일본국내의 재일동포들에 대해서는 민족차별정책을 체계적으로 집행해놓고《차별이 싫고 권리를 얻고 싶으면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동화를 촉구하는 정책을 구사하면서 괴롭혀 왔습니다.

 

특히 일본정부당국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의 해외공민단체라는 리유 하나 만으로 1955년 5월 25일의 결성이래 일관하게《파괴활동방지법》의 적용용의단체로 삼아 공안당국에 의한 항시적인 감시와 규제하에 두면서 간첩강요 등의 모해책동도 일삼아 왔습니다.

 

총련은 결성이래 일본내정에 대한 불간섭과 국내법준수의 원칙을 강령에서 밝혀 철저히 지켜왔으며 주체성과 민족성을 견지하면서 민족교육을 비롯한 재일동포들의 민족권리와 인권, 생활권의 옹호, 동포생활봉사와 복지, 조일우호친선과 민족단합에 이바지하는 애족애국활동을 벌려습니다.

 

총련은《파방법용의》단체로 될만한 위법활동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습니다. 이는 총련이 걸어온 50여년의 력사가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2002년 9월 17일에 있은 김정일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총리의 회담의 결과 발표된 력사적인 《평양선언》에서 일본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여 정식으로 사죄하고 그 보상을약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지위문제에 대해서도 성실히 협의할것을 확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부터 일본당국은 《평양선언》에서 정식으로 정치적결착을 보게된《랍치문제》를 정치적으로 극대화 하였으며 언론매체를 총동원하여 일본 국민들속에 반조선감정을 대대적으로 고취하면서 과거 조선민족에 들씌운 수십, 수백만배의 고통과 비극을 모면하고 자기 나라를《피해자》로 가장하면서 가해자로서의 보상을 회피하려고 획책해왔습니다.

 

특히 지난 7월과 10월의 조선의 미싸일발사훈련과 핵시험이후 일본에서는 정치계와 언론계가 하나로 된 《반조선 대익찬체제(大翼??制)》라고 할수 있는 위험한 태세가 꾸려졌으며 사회전반에 국수주의적인 조선민족배타의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죤을 비롯한 일본 언론매체는 일본정부당국과 우익보수세력의 대변인이나 된 것처럼 조선을 무턱대고 비방중상하고 그 위협을 과장하는 악위에 찬 보도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국내에서는《랍치문제》나 조일관계와 관련해서는《언론의 자유》가 없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실을 사실그대로 반영한 객관보도가 나오거나 량식 있는 정치가나 평론가가 공정한 의견을 말하기만 하면 일본군국주의 시기와 마찬가지로《역적(逆賊)》,《비국민(非?民)》이라는 비난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일본의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위기라고도 할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와같은 민족배타적인 살벌한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재일동포들이 해방후 60여년동안 피와 땀으로 쟁취하고 구축하여 온 귀중한 민족 권리와 재부가 심히 짓밟히고 있으며 동포들의 생존권마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 민족학교에 다니는 조선학생에 대한 박해와 총련기관에 대한 테로행위-그중에서 가장 엄중한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족학교와 거기에 다니는 조선학생들에 대한 박해행위가 련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002년 9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민족학교에 다니는 조선학생들에 대한 폭행, 폭언이 51건 일어났으며 민족학교들에 대한 협박전화, 협박문이 186건, 협박 Email이 114건에 이르렀습니다.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는 조선학생들에 대한 폭행, 폭언이 9건, 학교시설의 파손 4건, 전화와 Email에 의한 협박 등이 157건이나 일어났습니다.

 

특히 가슴아픈 것은 이와 같은 신변의 위협속에서 민족학교에 다니는 녀학생들이 자기 민족의 자랑스러운 상징으로서 력사적으로 교복으로 입고 다닌 저고리와 치마를 양복으로 갈아입지 않으면 안되게 되거나 어린 학생들이 자기 신변안전을 위해 전차와 뻐스간에서 우리 말을 쓰지 않기로 하고 서로의 이름조차 일본통명으로 부르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는것입니다.

 

일본군국주의는 식민지통치시기 1세, 2세들의 우리 말과 우리 이름까지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해방후  60여년이 지난 오늘 일본의 살벌한 사회적분위기는 4세, 5세의 어린 재일조선인들까지도 그와 닮은 상황에로 몰아놓고 있습니다.

 

- 총련과 각급기간에 대한 테로행위도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작년 9월 16일에는 총련중앙 의장 앞으로《하늘을 대신하여 처벌한다》는 협박문과 함께 산사람의 손가락이 보내오는 매우 음험하고 광기어린 법죄행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목숨을 걸고 총련을 공격하겠다는 의사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지난해 8월∼10월에 걸쳐 총련가나가와 세이낭세이쇼지부의 방화사건 (06년 8월 2일)을 비롯하여 총련 이바라기, 미에, 시가, 야마구찌 현본부와 교또부 세이낭지부의 시설들을 파손시키는 사건들이 련달아 일어났습니다.

 

이곳 이남 땅에서 2000년, 2002년, 2006년에 서울, 부산, 전주, 수원 등에서 공연을 하여 호평을 받은 총련의 금강산가극단의 예술공연까지도 방해하는 현상까지 련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익단체들은 선전차를 대대적으로 몰아 소란을 피우면서 관람자들을 위협하는 등 교또, 아끼따, 모리오까, 아오모리, 삿뽀로, 나가노, 나라시노에서의 공연을 방해해나섰으며 일본정부당국의 압력과 우익세력의 협박에 못이겨 미야기현, 혹가이도와 삿뽀로시, 후꾸오까현과 기따규슈시, 이와떼현 모리오까시와 군마현 오따시 등이 후원을 취소하였으며 오까야마현 구라시끼시에 이르러서는 시민회관사용허가를 공연직전에 취소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결국 우리의 재판투쟁에 의하여 끝내 철회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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