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불하는 마음
경 전
수 행 자
서분(序分)
여시아문(如是我聞)-
경(經)을 설(說)한 경위(經緯)
새벽예불로 시작
정종분
(正宗分)
경의 내용(內容)
사시공양과 하루
일과생활
유통분
(流通分)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쁘하여 유포함
저녁예불로 마무리
경전을 보면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 그리고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수행자들도 역시 하루의 일상생활도 서분과 정종분과 유통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듯 경전에서처럼 수행자들도 하루의 일과생활 자체가 곧 수행과 연관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불이란 부처님께 올리는 정성스런 마음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祈禱)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도에는 세 가지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첫 째는 성심(誠心)이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경전 몇번 읽었다 지루해 하지 말고, 절 몇번 했다고 힘들다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나 부처님 계신 곳이라고 생각하고는 함부로 행동해서는 아니되는 마음을 일러 성심(誠心)이라 하였다.
둘 째는 청정심(淸淨心)이다. 청정이란 마음을 맑히는 뜻이니, 마음을 맑힌다 함은 잡다한 생각, 번뇌와 망상에 가득 찬 생각에서 벗어나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깨달음에 오르겠다는 보리심을 발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가진 잘못된 생각을 바뀌어야만 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 우리는 이것을 청정심(淸淨心)이라 한다.
셋 째는 하심(下心)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에서 모든 번뇌가 시작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나를 버리는 공부이다. 바로 그 첫 번째 과정이 하심(下心)이다. 그래서 절 입구에 써여져 있는 글귀도 입차문외막존지해(入此門外莫尊之解 또는 下)로 쓰여져 있고, 공부하는 행자들의 방에는 묵언(黙言)과 하심(下心)이 벽에 붙어 있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다. 세속에서도 나를 비우고 가슴을 열어야만 상대방과 대화가 이루어지듯이 부처님과 대화를 하려 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낮추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아무쪼록 자신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맑혀서, 최대한 자신을 비워 나갈 때 비로소 기도는 시작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앞 에서 하루 일과 생활이 경전의 서분(序分)과 정종분(正宗分) 그리고 유통분(流通分)으로 나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경전에서의 서분은 그 경을 설하기까지의 여러 가지 배경과 조건이 묘사되어 있으며 정종분은 경전의 중심내용이 유통분은 모듬 사람들이 그 경의 말씀을 듣고 환희하며 경의 중심내용이 널리 유포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럼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될까? 서분인 새벽예불은 신심을 일으킨 중생들의 모임이요, 정종분은 사찰의 하루 수행은 보살들의 정진이며, 이러한 수행의 결과가 모여 오분법신향을 이루어 광명의 구름이 피어 오르듯 온 우주 법계가 해탈의 환희를 나타내는 저녁예불이 유통분이 되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새벽예불을 통하여 초발심은 신심과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예불이 끝난 다음 분(分)에 따라 십신(十信)과 십행(十行)과 십회향(十廻向)과 십지(十地)의 수행을 닦아서 나아가는 것이며 저녁예불의 오분향은 법신을 완전히 회복해 가는 부처님의 등각(等覺) 묘각(妙覺) 위(位)를 증득하여 오분법신의 향을 온 법계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여 기서 참회(懺悔)라는 말을 살펴보도록 하면, 육조혜능대사는『과거의 잘못한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참(懺)이라 하고 다음부터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뉘우침이 회(悔)라 한다.』고 하셨다. 이 마음이 곧 부처인데 마음을 깨닫지 못하여 생사번뇌에 시달리는 자신을 참회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것을 참회하는 것을 일러 이참(理懺)이라 하였는데『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 죄의 자성은 본래없이 마음따라 일어난 것이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 마음을 멸하면 죄도 역시 따라 없어지니) 죄망멸시양구공(罪亡滅時兩俱空 - 죄도 없고 마음을 멸하여 두 가지를 다 비우게 되면)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 이것을 이름하여 참된 참회라고 한다네)』라는 천수경의 구절이 있으며, 사참(事懺)이란 다생(多生)을 두고 지은 모든 악업으로 말미암아 현세의 업(業)을 받게 된 것을 참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천수경의 구절을 보면 그 뜻을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 옛부터 내가 지어온 모든 악업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嗔痴 - 모두 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 아닌 것 없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 몸과 마음과 뜻으로 생긴 것이니)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 이 모든 것을 내가 이제 참회합니다)』이렇게 본다면 마음의 향(心香)을 피어 올리기 위해서는 참회(懺悔)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속세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출가한 초심자는 더욱 중요함은 불문가지라 할 것이다.
부 처님의 자비광명은 한량이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그릇은 어떠한가? 부처님의 마음은 우리들의 부모님의 마음처럼 무엇인가를 원하는 중생들이 있으면 주지 못해서 걱정을 하시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많은 것을 원하고 있지만 받을 그릇이 충분치 못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릇을 만드는 도공(陶工)이 되자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그릇이란 공덕(功德)을 말함이요, 도공(陶工)이란 공덕 짓는 일이다. 앞에서 우리는 하루의 일과가 곧 수행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사찰의 하루를 초발심(初發心)에서 해탈(解脫)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수행한 결과 영원한 진리의 몸인 법신(法身)을 회복하여 계율의 향기, 선정의 향기, 지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 해탈지견의 향기를 피워서 광명의 구름으로 온 법계를 가득채워(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퍼지듯)나가는 것이다. 곧 법신이 원래 지니고 있는 계(戒)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다섯 가지 공덕을 ‘나’ 스스로가 낮추어 그 향기로 온 법계를 맑히고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심향(心香)이라고 한다.
心香一炷起雲峰(심향일주기운봉)
直下淸明透碧空(직하청명투벽공)
仰請佛法僧三寶(앙청불법승삼보)
降臨千葉寶蓮中(강림천엽보련중)
심향(心香) 하나를 피워 구름 봉우리를 일으키고
그 밑에 맑고 밝은 창공을 뚫었습니다
우러러 불법승 삼보께 청하옵니다
천잎 갖춘 보배연꽃 가운데 강림하소서
香煙遍覆三千界(향연편복삼천계)
定慧能開八萬門(정혜능개팔만문)
唯願三寶大慈悲(유원삼보대자비)
開此信香臨法會(개차신향임법회)
향 연기 널리 퍼져 삼천대천 세계를 덮고
정혜는 능히 팔만 법문을 여는구나
오직 원하오니 삼보의 대 자비를
믿음의 향(信香)으로 열어 법회에 임하게 하리
위 의 두 가지 향게(香偈)에서 심향(心香)과 신향(信香)이라는 글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데, 이 마음의 향과 믿음의 향이야 말로 비로소 삼보(三寶)를 청할 수가 있고 또 부처님과의 교감(交感)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향은 스스로를 태워 몰락(沒落)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뿜어내어 뭇 생명을 맑고 밝게 가꾸면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향은 타버린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의 몸인 법신으로 환원될 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심 향(心香)하나를 태우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부처님을 향한 마음이 한결 같아야 한다는 뜻이니, 부처님을 향해서 예불(禮佛)하고 찬탄(讚歎)하며 찬양(讚揚)하고 공경(恭敬)하며 공양(供養)하고 또한 나 자신을 죄업(罪業)을 끊임없이 참회(懺悔)하면서 결국은 나도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원(願)을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초발심자(初發心者)가 해야될 중요한 일인 것이다.
부 처님께 올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두 가지 나누어 살펴보면 그 첫 번째로 능례(能禮)이니 능례(能禮)란 예배하는 중생의 마음이요, 두 번째는 소례(小禮)이다. 소례(所禮)란 예배받는 부처님이니 우리들의 부처님 향한 마음에 성심(誠心)이 깃들고, 최선을 다해 마음을 맑히며(淸淨心), 한없이 자신을 낮추어(下心)나갈 때 그때를 일러 비로소 감응(感應)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골짜기에 소리가 울리면 그기엔 반드시 답하는 메아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열심히 기도(祈禱)하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加被)가 함께할 것이다.
***五分香禮佛(오분향례)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무량불법승
無量佛法僧
<해석(解釋)>
오분법신의 향을 사루어 올리오니 정법의 향기가 구름위로 솟은 대(臺)위에 빛나는 광명처럼 법계에 두루 퍼져 어느 곳 어느 때 아니 계신 곳 없으신 한량없는 부처님과 법과 스님께 공양(供養)하여지이다.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지 오래되지 아니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 존경(尊敬)할 자가 없고, 공경(恭敬)할 자가 없는 것은 괴롭다. 따라서 나는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에게 歸依하여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나 나 보다도 수승(殊勝)한 계온(戒蘊). 정온(定蘊). 혜온(慧蘊). 해탈온(解脫蘊). 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을 갖춘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깨달은 法(dhammo maya abhisambuddho)을 존경(尊敬)하고 공경(恭敬)하여 주(住)하리라" 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계온. 정온. 혜온. 해탈온. 해탈지견온은 "오분법신"을 말한다.
존중경(尊重經)에는 "계(戒). 삼매(三昧). 지혜(智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분향을 태워서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이유에 대하여 [관심론(觀心論)]에서 달마스님은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 [향을 피운다 ]는 것은 또한 세간의 형상 있는 향이 아니라 진리(眞理) 자체(自體)의 정법(正法)의 향이다. 모든 더러운 냄새를 물리치고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의 악업(惡業)을 끊어서 모두 소멸(消滅)시킨다. 바른 法의 향이라는 것에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모든 惡을 끊고 모든 善을 닦는 것이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결정코 大乘의 마음을 믿어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혜향(慧香)이니, 항상 몸과 마음을 안팎에서 잘 관찰하는 것이다.
넷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능히 온갖 고통의 원인(原因)인 무지(無知)의 결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니,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알아차려 깨어있음이 항상하여 무명(無明)의 장애(障碍)를 걸림없이 통달하는 것이다.
이 와 같은 다섯 가지 향이 가장 높은 향이라 하여 세상에서 견줄 것이 없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에 날마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지혜의 불로서 이와 같이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진리의 향을 사루어 십방(十方)의 온 우주(宇宙)에 항상 머무시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라] 하셨거늘, 요즘의 중생들이 둔하고 어리석어서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고 오직 밖의 불로서만 세간의 침단과 훈육등 형체있는 향을 사루어 福의 결과를 희망(希望)하니 어찌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요. }
위 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다섯 가지를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또는 줄여서 오분향(五分香)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오분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모든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키는 것이다.
공 덕(功德)을 크게 말해서 만행(萬行), 만덕(萬德)이라고 하는데, 흔히 부처님께서는 팔만 사천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다섯 가지로 말할 때 오분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 속에는 온갖 수행의 결과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오 분향의 끝에 <향(香)>자를 붙인 것은, 옛날에는 세속에서 가장 값진 물건으로 향을 첫째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향의 고귀함을 마음에 심는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멋진 말이니다.
<계(戒)>가 잘 실천되면 향기롭고, <정(定)>이 잘 이루어지면 또한 향기롭고, <혜(慧)>가 얻어지면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 것이다.
처음에 나오는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의 세 가지는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그래서 삼학은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학이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신행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이다.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도 삼학에서 발전한 것이다.
삼 학의 첫째인 <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경계한다'는 뜻인데. 흔히 계율(戒律)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글자 모양을 잘 분석해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戒)>라는 글자는 '울타리[井]'에 창[戈]'을 들고 서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는 집 밖에서 창을 들고 서 있으면서 집 안을 지키는 수위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수 위의 역할이란 집 안으로 들여 보여야 할 사람은 들여 보내고, 들여 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들여 보내지 않는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또 수위는 사람을 함부로 들여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낯선 사람이면 무조건 안 들여 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수 위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하려면 취사(取捨-취하고 버리는) 선택의 분별을 잘 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수위의 역할에 미루어 볼 때 <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여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뜻이 담겨 있다.
오 늘날 <계>의 의미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이나 질서, 사회의 규범, 도덕성 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계율 자체에 너무 매달리고 집착하여 좁은 안목이 되는 것은 계율의 근본 정신에서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또 계율은 개인이나 단체의 역할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즉, 승려 집단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과 신도 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은 각각 다른 것이다.
계 율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딘다.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익되는 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아는 융통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계율을 잘 지키고, 잘 범하고, 잘 열고, 잘 막을 줄(지(止)범(犯)개(開)차(遮))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이나 규칙, 질서가 한데 모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덕과 규칙, 질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질서나 규칙을 잘 지키면서 매사를 모범되게 행동하는 것은, 마치 물이 흐르듯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계향(戒香)>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면 혼탁하고 무질서한 사회가 밝고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저절로 향기가 풍겨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 시 말해서 어떤 단체에 나아가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흐르듯 조용히 규범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오게 되듯이,그렇기 때문에 <계>에가 <향>자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이다. 여기서 <정>은 '안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첫 번째의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개인의 안정은 물론 집안의 안정과 나아가 사회의 안정까지를 통틀어서 <정향>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불안정한 것은 모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고용주의 욕심만 부리고, 종사자는 종사자의 욕심만 부릴 때 그 결과는 마찰과 충돌이 일어나며,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 정향>이란 남편은 남편의 할 일을 충분히 행하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마찬가지로 각자가 자기의 위치를 충분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안정이 오며 거기에는 향기가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흔 히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신발을 벗어 놓은 곳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구절이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말은 ‘너의 발 밑에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은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실행하라는 뜻이다.
일 본의 어느 종파에서는『조고각하』라는 말을 보물처럼 여기며 신앙하고 있다. 그 절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마다 그 말을 풀어서 ‘한 모퉁이를 비추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의 보배’라고 써서 그 말이 의식 속에 배이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가 처해 있는 그 부분에 충실한 사람은 바로 나라의 보배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 말뜻을 이해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 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해 있는 한 모퉁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 부분만 잘 비추면 그 사람은 보배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잘 할거라고 해서 남의 자리까지 참견하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데서 모든 안정은 찾아지는 것이다.
< 정향>이란 말의 뜻은 바로『조고각하』라는 한 마디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안정을 얻을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서 저절로 향기가 뿜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중 국의 어느 시인이 쓴 수필에 ‘안면문답’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입, 코, 눈, 눈썹’의 문답이다. 서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 잘 알겠지만, 대체로 사람얼굴의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입이고, 그 위에 코, 그 위에 눈, 제일 위에 있는 것이 눈썹이다. 입의 불평, 코의 불만, 눈의 불복은 이 눈썹 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썹의 존재가치를 의심했던 것이다. 입, 코, 눈들이 눈썹을 향해서 ‘어째서 너는 우리들 위에서 그처럼 거만을 부리고 있느냐. 대체 너는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이냐?’하고 눈썹에게 힐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썹의 대답이 참으로 재미있다. ‘과연 너희들은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물을 먹고 호흡을 하고, 사물을 바라 보고하는 그 수고스러움에는 정말 감사하고 있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도 너희들이 ‘네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냐?’하고 물어 보니,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되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으니 대답할 수가 없군. 다만 조상 대대로 여기 이렇게 있어서 밤낮으로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열심히 내가 있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네. 너희들은 자랑 할만한 그 무엇을 각기 다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자랑 할만한 것이 없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는 데 대답할 말이 없구먼.’ 했다.
끝 으로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첨부해 두었다. ‘나는 오늘까지 입과, 코와, 눈의 마음으로 살아왔다. 금후로는 눈썹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겠다.’ 참으로 우스운 얘기 같지만 잘 음미해 볼만한 말이다. 눈썹의 태도는 무 자각해서 자각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의젓한 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각 없는 듯이 보이면서 역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눈썹의 태도야말로 참으로 인연에 순종하면서, 무아에 사는 생활인 것이다.
세 번째의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뜻한다. 지혜로운 인생, 지혜로운 사람 등 지혜를 항상 강조한다. 그 어떤 것이라도 지혜가 없다면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한 삶을 살기보다는 지혜롭게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잘못 쓰여질 수가 있다. 그러나 비록 조촐한 삶이라 하더라도 지혜가 있다면 그 삶은 밝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기 때문이다.
불 교에서는 자비와 지혜를 일러 양족존이라 하는데, 자비는 복덕을 쌓아가는 것이라면 지혜는 올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자비와 지혜라는 표현 대신에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여 항상 지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올바른 자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는 <계>와 <정>이 마련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삼학 중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덕목이 된 것이다.
삼 학의 가르침을 흙탕물에 비유할 수 있는데, 바람이 불고 돌을 던져 흐리게 된 흙탕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더욱이 그 물은 마실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이다. 그런 흙탕물을 맑게 하려면 우선 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돌도 던지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야 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금지(止)하는 일이 바로 <계>에 해당된다. 그 다음에는 흙이 가라앉도록 조용히 기다리면 안정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 상태이다. 수면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면 그 물 위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비춰볼 수 있고, 맑아진 물은 마실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혜>라고 할 수 있다.
우 리의 인생살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무질서하고 혼탁해져서 엉망진창이 된 삶이 있다면 우선 질서를 바로잡아 안정을 되찾는 일을 먼저 해야한다. 안정을 되찾는 일은 해야할 일은 열심히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안정 위에 우리가 기대하는 발전된 삶을 꿈 꿀 수 있는 것이다.
계· 정·혜 삼학의 실천은 개인의 인생살이나 가정생활에서는 물론 이웃과 사회에까지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불교를 한마디로 삼학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삼학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 를 들어 우리가 짧은 편지를 한 장 쓰려고 해도 삼학의 순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금 전까지 누구와 다투고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다면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부터 해야한다. 지난 일을 자꾸 생각하면 마음은 끝까지 움직이게 된다. 생각을 멈추는 일이 <계>이며, 그래서 안정이 되면 <정>을 얻고, 그 다음에 <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 계·정·혜 삼학의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삼 학의 이런 뜻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삼학이란 모든 개인적인 수행이나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을 모두 멈추게 달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위시해서 가정과 사회가 안정되고, 나아가서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이다. 이런 의미에서『예불문』의 한 대목이 우리에서 주는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흔 히 삼학을 삼층집에다 비유할 수 있는데,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임금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근사한 삼층집을 보게 되었는데, 자기도 그런 삼층집을 짓고 싶어 목수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한참 후에 가 보니 겨우 일층만 지어져 있길래, 어리석은 임금은 일층은 필요가 없고 다만 삼층만 지어 달라고 우겼다는 우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세상에서 삼층집만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층이 있어야만 이층이 존재할 수 있고, 이층을 지어야만 비로소 삼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 인적인 발전과 마음의 지혜를 얻는 일이나 가정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그와 똑 같은 이치이다. 제대로 밑거름도 닦아 놓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결실을 바란다면 삼층만 갖겠다는 어리석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계·정·혜 삼학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가 되새겨야할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네 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히 벗어나야 한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현 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야 말로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그런 삶에는 향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이다.
우 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을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옷 입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같은 옷이라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에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면 외형적인 몸치장 또한 마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대 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얕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한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로 상쾌해지게 마련이다.
관 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하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관세음보살님처럼 화려한 장식을 하고 오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 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한 정돈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이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해 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해탈이다.
어 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 할 수 없는 걱이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이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런 의미에서 한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주부의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가 밝고 행복한 쪽으로 바뀌면 그 가정은 틀림없이 밝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부는 항상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가 전부 자신의 인생이다. 그 사이에 단 일 초라도 빼 버린다면 자기 자신의 전체 인생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전부 자기의 인생이라면 매 순간을 의욕적이고 신선한 생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늘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가짐이 바로 해탈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이다.
인 간의 일생은 한 번 밖에 없는 예술이다. 우리의 인생은 평생을 통해 자신의 예술품을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을 보다 아름답게 자신의 작품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탈의 의미를 되새기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 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지견(知見)>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한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開), 보여서(示), 직접 깨달으시고(悟)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그 지견속으로 들어오게 하셨느니라(入)’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지견이란 모든 중생이 함께 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행하여 중도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불 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법(傳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정향><혜향><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향>이 되는 것이다.
이 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된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은 평생을 통해서『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 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실제로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壓卷)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계·정·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써 해탈지견이 되는 것이다.
불 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학(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니다. <계>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學)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분향 다음으로 이어지는 위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광명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어느 곳에서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 광명운대>에서 광명은 바로 진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의 부처님의 말씀대로 진리에 입각하여 사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깨달은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로 진리의 구현인 것이다.
진리라고 말하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광명이라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진리란 곧 광명이라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광명은 진리를 현상적으로 나타낸 말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광명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이 있다. 경전이 설해지기 전에 먼저 광명(光明)을 놓는 일부터 시작을 한다. 쉽 게 이야기해서 법당 안에 인등을 켜는 일도 광명과 관계되는 일이며, 초파일에 등을 다는 일도 광명인 것이다. 광명은 곧 빛을 뜻한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만약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잘 분별할 수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가도 부딪히고 넘어지고..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은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여기에서 광명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앞 에서 오분향은 불교인의 인격 완성에서 오는 다섯 가지 덕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광명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광(光)은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광명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괴롭고 힘들었던 것은 광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혜의 광명은 항상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준다.
『금 강경』에 광명에 대한 말씀을 설해 놓은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삼주어법(心柱於法) 이행보시(而行布施) 여인입압(如人入暗) 즉무소견(卽無所見) 약보살 (若普薩) 심부주법(心不住法) 이행보시(而行布施) 여인유목(如人有目) 일광명조(日光明照) 견종공색(見種種色)”이다. 그 뜻은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햇빛 아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해 보면, 마음이 자기만의 소견과 편견과 고집과 굳어진 사상에 의해 생활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반대로 마음이 만약 자기만의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물을 실상대로 진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도 밝고 햇빛이 환히 비춰서 아무탈 없이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우 리들의 아름아리 즉 소견이나 고집, 편견들은 결코 지혜가 아니며, 슬기도 아니며, 빛이 아니다. 사물이나 감정, 사건 등을 실상대로 관찰할 줄 아는 밝은 눈이 열릴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환한 광명의 삶이 될 것이다. 밝은 눈이란 바로 깨달음의 슬기요, 지혜의 빛인 것이다. 불 교에서는 도처에서 깨달음의 안목(眼目)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의 일어나는 일체의 모습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광명의 눈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광명의 눈이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상처 받지 않고 목적한 곳에 다다를 수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말씀은 곧 지혜의 광명에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교의 의식가운데 촛불을 켜고 등에 불을 밝히는 의미는 모두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에서 오분법신향으로 무장한 사람은 광명스러운 삶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은 엄청난 밝기로 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따라 밝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래서『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광명을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이라고 하여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뜨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처님은 참으로 밝은 완벽한 광명의 화신인 것이다. 우리가 그나마도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앞길만이라도 비출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마저 없었다면 이리저리 부딪혀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흔한 말로 눈 뜬 장님이란 이야기가 있듯이 보면서도 제대로 판단할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보고 있어도 차라리 보지 못하는 장님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빛을 잃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법신향이 각자의 마음 속에 원만히 성숙되어 광명을 밝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명을 우리의 육신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참으로 밝게 웃는 모습이야 말로 참다운 광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웃 는다는 것은 밝은 인상을 말한다. 밝은 인상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옆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이다. 반대로 무겁고 침울한 표정은 옆 사람까지 칙칙한 기분을 안겨준다. 그것은 진리의 세계에서 위배되는 일이다. 진리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웃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웃음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한다. 출근할 때 웃고, 퇴근할 때 한 번 웃어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은 없는 것이다. 웃음이라고 해서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광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온몸 전체에서 향기로운 웃음이 간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게송에서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라고 하였다.
< 광명운대>에서 운대는 구름 덩어리를 말하는 것이며, <주변법계>는 법의 세계의 두루두루 펼쳐져 있다는 말이다. 흔히 세속적인 표현으로 지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을 세계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온 우주를 통틀어서 법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세계는 물론 텅 빈 공간까지를 전부 합하여 법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으로,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해서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여 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면, 어떤 스님이 개신교 목사와 함께 우연히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목사는 자신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여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스님이 그럼 화장실에도 하나님이 있겠다고 말했더니 목사는 발끈하여 화를 내며 ‘어떻게 신성한 하나님이 화장실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러나 진리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법계>는 진리의 구름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 리들의 광명은 처음에는 자기 혼자만을 비출 수 있는 정도의 빛이지만, 기도와 수행을 통해 더 많은 빛으로 발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빛은 다른 데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광명 덩어리를 발산하는 일이다. 우리들의 업과 어리석음에 의해 가리워진 어두운 구름을 걷어 버리고 부처님과 똑같은 덕과 지혜의 빛으로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갖추고 있는 그 광명을 수행을 통해 확연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는 분이시다.
다음으로 <공양시방>이라고 할 때 공양(供養)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공양은 흔히 꽃·음식·초·향·음악·춤·의복 등 부처님께 이바지하고 도와주는 모든 사물과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 올리는 모든 것을 공양이라 하여, 엄밀히 말해서 부처님께만 쓰는 말이고도 하다. 그 런데 신분에 관계없이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양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도 공양이란 말을 쉽게 쓰는 것이다. 절에서 밥 먹는 일을 ‘공양 하십시오’고 말하는 것에는 ‘당신도 부처님입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부 처님께 쓰는 공양이란 말을 우리들에게도 쉽게 쓰는 것은 바로 우리도 부처님처럼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공양 올리는 자가 곧 공양 받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같은 인격으로 대한다는 뜻이 공양이란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들에게 부처의 씨앗이 없다면 공양이란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법 화경”에는 상불경(常不輕)이란 참으로 훌륭한 보살이야기가 나오는데, 상불경 보살은 평소에 수행을 할 때 남들처럼 경을 읽거나 기도,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같이 존경하고 예배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다. 상불경 보살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이 넘쳤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예배라는 일에도 너무 바빠 다른 수행은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경전에 나오듯이, 공양이란 말속에는 상불경 보살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각 가정에서 ‘공양 하십시오’ 라는 말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 말속에는 훌륭한 만행 만덕과 무한한 능력과 광명을 지니고 있는 부처님의 씨앗이 당신에게도 심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처럼 존경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공양이란 말은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제일성(第一聲)으로 삼아도 좋은 훌륭한 말이다. 공양이란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포교가 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금강경』에는 법공양의 위대성을 ‘설사 삼천대천 세계만한 금은 보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희사한다고 해도 짧은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만이라고 서사수지(書寫受持) 위인연설(爲人演說)을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법공양의 훌륭함을 나타낸 말로, 결국 자신 속에 무한한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공양 하세요’라는 말 한마디가 가지는 존칭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다. 공양이란 말을 계속 씀으로써 은연중에 상대방의 가슴속에 파동쳐 마침내 부처님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공양이란 말을 일상생활 속에 사용함으로 해서 우리는 무한한 공덕을 짓게 되는 것이다. 속으로는 아무리 미운 생각이 들더라도 상대방을 향해 ‘공양 하십시오’라고 하면 그 뜻은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진정한 표현이 된다.
공 양이라고 해서 단지 먹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공양, 법에 대한 공양, 가르침에 대한 공양을 가르키고 있다. 이것은 곧 지혜의 광명으로 주변의 시방법계의 무량한 존경하는 모든 분들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예불문』의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리의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양이란 말은 참으로 고맙고 빛나는 값진 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공 양이란 말과 함께 있는 시방(十方)은 동·서·남·북의 사방(四方)과 동남·동북·서남·서북의 사유(四維)에 상·하를 합한 것이다. 결국 시방은 불교의 공간 개념을 나타낸 말로써 온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어느 곳에서나 항상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계 속해서 <무량불법승>은 ‘한량 없는 불·법·승 삼보’라는 말인데, 불·법·승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와 스님 및 사부대중(남 녀 신도와 어린 동남 동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온 인류, 모든 만물에게 모두 진리의 빛이 펼쳐지도록 한다는 뜻이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과 온갖 만물에게 진리의 빛이 골고루 펼쳐져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무량불법승>속에 들어 있다. < 계향>에서부터 <무량불법승>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볼 때, 이속에는 불교의 목적하는 바가 모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대목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자기 자신의 수행과 덕을 쌓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原文>
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 (3번)
향을 사루어 올리는 진언
옴! 금강소향존(金剛燒香尊)이시여, 훔.
< 헌향진언>은 ‘향을 올리는 진언’이다. 여기서 향(香)이란 부처님이나 불보살의 완성된 인격체를 다섯 가지 덕으로 표현한 오분법신향을 말한다. 향을 올림으로써 우리도 부처님처럼 위대하고 원만한 공덕을 갖춘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향을 하나 올리라도 <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의 마음으로 올려야 하는 것이다. <헌향진언>에서 <진언>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참된 말’이란 뜻이다. 진언은 우리가 쉽게 그 뜻을 모르는 말로 되어 있다. 진언이라는 말 외에 다라니 혹은 주문이라는 말도 함께 쓰는데, 그 뜻은 비슷하다.
진 언은 인도어로 만트라(mantra)라고 하는데 주(呪)·신주(神呪)·밀주(密呪)·밀언(密言)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이유는 진언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두 가지로 잘못 번역하면 오히려 본래의 의미와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 뜻을 모르고 외워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진언이다.
우 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을 이해하려는 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훨씬 더 크고 넓다. 정신의 세계, 영혼의 세계, 귀신의 세계, 불보살의 세계 등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가 옛날부터 뜻도 알지 못하는 진언을 자꾸 외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이 미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언의 영향력에 대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해 보자면, 옛 날에 조선의 유명한 거지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중국으로 간 김에 거짓말을 꾸며 융숭한 대접을 받으려고 했다. 그래서 변방의 어느 고을에 가서 조선 왕의 조카라고 속이고 칙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그는 자기가 왕족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늘 반찬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하면 귀족 취급을 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의 한 사신이 중국에 볼일이 있어서 우연히 그곳에 들르게 되었다. 그 고을 원님은 사신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왕의 조카가 반찬투정을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왕의 조카가 중국으로 여행을 왔다면 그 사신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인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당장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사신이 왕의 조카라고 하는 이에게 나아가 인사를 하려고 보니 그는 조선의 유명한 거지였던 것이다. 고을 원님에게 그가 거지라고 한다면 그는 당장에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 래서 사신은 현명한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사신은 고을 원님에게 그가 반찬투정을 할 때마다 자기가 한 마디의 진언을 일러줄테니 그 말을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이었다. 중국 사람은 그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었다. 사신이 떠나고 난 후 왕의 조카란 자가 반찬투정을 할 때마다 뜻도 모르고 원님의 ‘거지인 주제에’라고 외웠다. 그렇게 무심코 뜻도 모르고 내뱉은 한마디 말이지만 진짜 거지가 듣고는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 사람은 아무 뜻도 모르지만 진짜 영험을 발휘하는 것이다. 진짜 거지에게는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은 자신의 생명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엄청난 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언은 모르고 외워도 신비한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앙적인 면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 사람이 ‘거지인 주제에’라는 진언의 말뜻을 알려고 노력하면 결코 모를 말은 아니다.
요 즘은 진언을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진언의 뜻을 알고 외우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신심이 고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야기 속의 고을 원님이 ‘거지인 주제에’라는 말의 뜻을 알았더라면 그 거기에게 어떠한 상황이 벌어졌겠는가를 상상해 보면 믿음이 갈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인 진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 옴 바아라 도비야 훔>에서 <옴>은 모든 진언의 정형구조로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진언이 된다. <옴>은 모든 진언의 모체가 되는 진언 중의 진언으로서 모든 법문의 어머니이며, 상대를 지극히 찬탄하는 극찬구(極讚句)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며, 상대를 섭복(攝伏)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옴>은 우주의 핵심이며, 피안에 이르는 범선(帆船)이며, 우주와 삼라만상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와 삼라만상은 <옴>의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다.
< 옴>은 시작의 단어인 오와 계속의 단어인 아, 그리고 마침의 의미인 마가 합친 단어로서 영원(永遠)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모두를 조화시킨다는 통일(統一), 길상(吉祥), 행복(幸福)등등의 최상의 단어가 곧 <옴>인 것이다.
이 처럼 <옴>은 그 뜻이 매우 깊고 중요해서 한 두마디로 해석할 수 없다. <옴>은 항상 진언의 맨 앞에 위치며, 전체 진언의 내용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옴>은 모든 진언 중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진언인 것이다.
다음의 <바아라>는 원래 <바즈라>라고 해야 한다.
서 양 사람들에게<바즈라>라고 물어 보면 ‘다이아몬드’라고 그 뜻을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인도에서는 <바즈라>라는 말을 흔히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 <바즈라>는 우리가 쉽게 쓰는 말로 하면 ‘금강(金剛)’이 됩니다. 다이아몬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 그렇지만 다이아몬드는 다른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흔 히 금강과 같은 견고한 지혜를 금강반야(金剛般若)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의 지혜는 그 어떤 탐·진·치 삼독이나 번뇌 망상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나 지혜 그 자체를 깨뜨릴 물건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 도비야>의 뜻은 ‘소향존(燒香尊)께’라는 말입니다. 끝의 <야>는 ‘∼께’라는 위격조사이다. 소향존이란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과 같은 지혜의 향을 사루는 분이 소향존인 것이다. 그 소향존은 지혜로, 광명으로, 오분법신으로 포장된 소향존인 것이다. 금강의 지혜가 마음속에 간직된 소향존이기 때문이다. 그 향으로써 이세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맨 끝의 <훔>은 ‘이구청정(離垢淸淨)’이란 뜻인데 진언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정형구입니다. <훔>은 더러움을 벗어난 청정의 세계를 뜻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수양자들이 마음으로부터 미심쩍은 음식을 먹을 때 먹기 전에 음식에다 <훔>자를 쓰고 먹기도 했다.
청 정하게 하는 데에는 향이 꼭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향이 있는 곳에 더러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향기도 중요하지만 좀더 강력하고 좋은 향기를 발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향기를 풍겨야 온 세상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그 래서 <옴 바아라 도비야 훔>을 붙여서 해석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하고 훌륭한 마음으로 향을 올리는 존귀한 분을 지극히 찬탄하면 이 세계가 청정해집니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부처님의 공덕은 향과 같이 이 세계를 청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