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의 마라톤 일화
지난 8월 15일 광복절 폭우가 예보된 이날, 나는 마라톤 참가를 위해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행사장이 있는 신대방역으로 향했다. 며칠전 36도가 넘는 폭염속에 마라톤을 뛰어 본 나는 비오는 날의 마라톤이 더욱 좋은 기회라 믿고 상쾌한 기분으로 참가했다.
이날의 대회는 "공원사랑 마라톤"이라는 작은 단체가 연중 매주 토요일과 국공일에 개최하는 대회이다. 개최장소는 도림천과 안양천 그리고 상암월드컵 세 곳을 번갈아 순회하며 개최하는데, 이날 개최하는 장소는 도림천지역으로 신대방역 고가도로에서 출발하여 도림천 하구를 돌아 하천 반대편 출발지점과 마주보이는 곳까지의 10여km를 두번 왕복하는 풀코스(42.195km) 마라톤이다. 달리는 주로가 하천 양안에 평행하게 건설된 고가도로밑 고수부지에 조성한 자전거도로로 대부분 그늘 밑 코스이기 때문에 햇빛이나 눈, 비바람에 큰 영향없이 뛸 수 있어서 나이많은 연장자나 교회 신자들이 즐겨 찾는 대회다. 비록 참가자는 적지만 모두가 자주 만나기 때문에 즐거운 친목회 같은 대회다.
상쾌한 출발 대회 출발시간은 8시이지만 일찍 출발하고자 원하는 참가자들을 위하여 7시 출발하는 조가 있다. 나도 이들과 함께 일찍 출발했다. 나란히 뛰면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서로 페이스를 조절하며 첫번째 반환지점까지 갔다가 무난히 돌아와 하프 마라톤을 뛰고 다시 두번째로 돌기 위해 출발했다. 비는 계속 오고 있으나 터널식 고가도로밑 밖 노천구간을 지날 때만 번갈아 비를 맞으며 뛰고 있었다. 그리고 2차 반환점(30km)을 돌아나올 때부터는 각자 능력에 따라 제각각 떨어져 말 동무도 없이 혼자 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늘은 무난히 제한시간 보다도 빨리 완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중간중간에 있는 음료수 있는 곳에서 다소 쉬어 가기도 했다.
그런데 30km 지점부터 굵은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때 까지도 아무런 위기를 모르고 쏘나기 같은 시원한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이 즐겁기만 했고,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은 몸으로 빗속을 달리니 시원하고 온몸이 세척되는 듯 좋았다. 드디어 마의 벽(37km)을 통과하고 마지막 승리의 질주가 시작되는 40km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지붕같은 고가도로 아래 구간이기 때문에 비도 안 맞으며 결승선까지 한숨에 달릴 각오로 마지막 힘을 다해 입구로 달려갔다. 앞에 바라보이는 주로는 중간 하천에서 약간의 낮은 물이 넘쳐 흐르고 있었지만, 통행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바닥의 물도 발목 깊이라서 나는 거침없이 그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발목까지 찬 물위를 달리는 신발속은 발바닥까지 세척되는 기분이라 좋기만 했다. 스스로 들어간 지옥의 길, 결승선까지 마지막 남은 2km 되는 길은 양쪽가에 고가도로를 받치는 육중한 원형기둥들이 열지어 서 있고 기둥 사이 넓은 도로바닥은 붉은색을 띄고 있어서 마치 개선문을 향해 들어가는 로마포름같기도 하여 누구나 이 길에 들어서면 결승선을 바라보며 마지막 사력을 다해 질주하게 되는 코스다.
나는 어서 골인을 할 생각만 하고 물이 넘쳐가는 길은 일부분일 것이라고 여기고 계속 뛰어 갔다. 처음에 낮았던 물길은 가면 갈수록 점점 물이 무릎위로 오르고 물살이 세어져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걸어가는 흙탕물속은 보이지않는 콩크리트 웅덩이들이 있어 갑자기 빠져 들어가는 바람에 종아리가 시멘트 콩크리트면에 걸려 다쳐 피가 나기도 했다. 무의식 중에 로보트 처럼 달리던 나는 잠시 정신차려 살펴보니 아무도 없이 나 혼자만 가고 있었다. 이제는 물이 허리까지 올라와 걸어가기도 힘들었다. 그때 먼 앞쪽에 한사람이 내벽 경사진 호안 블럭에 붙어 이동하는 것이 어른거려 보였다. 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보니 다소 위안이 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물에 잠기지 않은 벽쪽 호안부록 경사면 위에서 춤추듯 가는 것을 보고는 그때서야 물속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도 내벽 경사면쪽으로 이동하여 스파이더 맨처럼 호안 블럭 미끄럼 방지 턱을 딛으며 앞으로 가 보니 훨신 빨리 갈 수가 있었다.
하천 중앙수로부분은 여전이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고 고가도로 난간에는 낙수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는데 어느새 바닥의 물은 점점 불어나 허리깊이로 올라오고 있고 각종 쓰레기들이 둥둥 떠 내려오고 있었다.
폭우 속 고립 그런데 앞에 가던 사람이 안보이고 뒤에도 아무도 없다. 이길을 들어서기 전 내뒤에 뛰어오던 후속 주자들이 10명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길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리 살펴 봐도 하천 중앙 급류가 흐르는 곳 이외는 탈출구가 안보인다. 이제는 오던 곳으로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도 많이 올라 왔다. 만일 하천 수위가 호안벽 위까지 찬다면 익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앞에 있던 사람이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어딘가 탈출통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앞으로 더가기로 마음먹고 부지런히 호안벽을 타고 서둘러 갔다. 거친 블록벽을 잡고 이동하니 손발이 벗겨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탈출하기에 바빴다.
그때 내가 벽을 따라 가고있는 바로옆 호안블럭위에 쥐 한마리가 꼼짝 않고 앉아 있다,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인데도 달아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쥐구멍도 물에 잠겨 갈 곳이 없는 모양이다. 이 긴박한 순간에 동병상린의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다 내가 이런 쥐와 같은 신세가 되었는지 한숨이 난다.
도림천은 폭우가 내리면 순식간에 고가도로밑은 모두 수몰되고 말 터인데 내가 이 길을 뛰어 들어 오다니 후회가 막심 했다. 그런데 왜 대피시설을 안 해 놓고 경보시설도 안 해 놓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호안벽을 따라 기어가듯 한참 더 올라가다 보니 멀리 어두운 물가에 한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앞서 가고 있던 사람으로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마침 횡단 교량이 지나가는 곳으로 지상으로 올라가는 철계단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계단은 하천 중앙 고가도로끝 난간쪽에 붙어 있고 계단 밑부분이 급류가 흐르는 깊은 물속에 잠겨 있어서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아무튼 나는 반가웠다. 계단 까지는 10여미터 정도인데 수영으로 돌진하면 충분이 잡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탈출해 볼까 구조를 기다릴까. 계단까지 수영거리는 10m 이지만 급류를 가로질러 3~4초 이내에 건너야 하는 모험이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매일 아파트 실내수영장에서 10여 바퀴씩 돌기 때문에 수영에 자신은 있지만 아직 급류를 횡단하는 것은 경험이 없어 다소 위험을 느꼈다. 옆에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오기 전 한사람이 계단쪽으로 가까스로 탈출했는데 그가 신고하여 구조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물은 점점 올라오고 아무런 소식도 없는 적막한 순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40여Km를 뛰고 두시간여를 물속에서 헤매고 난 후라서 몹시 지쳐 있고 배도 고팠다. 더욱이 팬티와 런닝셔츠만 입고 오랜시간 지하에 있다보니 더위는 어디로 가고 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를 기다리기 보다는 헤엄쳐 나가는 것이 나을 것으로 결심하고 일어섰다. 긴장된 몸으로 발 부터 물속에 넣고 점프 하려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후다닥 놀라 내 오른팔을 두손으로 꽉 잡고 큰일 난다고 잡아 당겨 못가게 한다. 나는 괜찮다고 그를 안심 시켰지만 그는 완강히 만류한다. 그의 진심어린 충고에 나는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앉았다.
드디어 구조대가 다시 긴시간이 지났을 때다. 드디어 멀리서 부터 구조대 차량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조대원들이 계단쪽으로 나타났다. 내려와 안을 살펴보고 두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분주히 구조 준비를 한다. 이제는 일단 안심하고 구조대원의 구조 작업을 적극 도왔다. 구조는 쉽지 않았다. 던져 주는 로프가 우리앞에 도달하지 못해 수십번의 시도 끝에 겨우 잡아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구조대원 1명이 건너오고 행거 설치를 한후 드디어 내가 먼저 로프에 매달려 건너 가는데 로프가 낮아 도중에 머리까지 물속에 잠겼다가 되돌아 나오기도 했다. 다시 낮은 로프를 높은 곳으로 옮겨 달고 여러번 시도끝에 드디어 구조되어 나왔다.
구출되어 지상으로 올라가니 그 일대는 교통통제와 구조장면을 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그들이 놀라는 것은 구조되어 올라온 사람이 뜻밖에도 런닝셔츠 가슴에 번호판(7114)을 부착한 마라톤 선수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대회가 있었기에 마라톤 뛰던 노인이 물속에서 나왔느냐"고 묻기 바빴다.
나는 취재원들에게 간단한 사항만 말해 주고 구급차에 올라 탔다. 간단한 외상치료를 받으며 출발지점인 신대방역 하천가로 갔다. 그곳은 물바다가 된 상태라 근처 뚝방길 쪽으로 가보니 대회진행 요원들이 비를 맞으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선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나타나자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내가 제일 늦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두사람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는데 잠시후 두사람도 모두 돌아왔다. 나를 빼고는 모두가 먼 시내길을 돌아 오느라고 늦었던 것이다. 나는 내 배낭을 찾고 대회주최 사장이 안내하는 인근식당으로 가서 젖은 몸을 간단히 닦고 옷를 갈아 입었다. 먼저 도착한 선수들이 식사중에 무사히 귀환한 늙은 선배를 환호해 주어 나는 다시 살아난 기분으로 이들과 한동안 어울려 즐기다가 귀가했다.
무모한 자만심을 반성 노망이 부른 혹독한 시련이었다. 신분당선을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악몽 같았던 순간을 돌이켜 보며 왜 그런 위기를 겪어야 했나 하고 스스로 뉘우 치고 있었다. 우연이라기 보다는 우둔하고 무모한 나 자신 대한 자책감이 크게 느껴졌고 구조없이 스스로 탈출 할 용기도 없었는가 후회도 해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도 없고 지상 외부에서 구조요청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발견되기도 힘든 곳에서 혼자 방황하다가 하천 물이 급격히 넘쳐 올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니 천만 다행한 것이었다.
나는 이번 사건을 나의 자만심과 망령에 대한 경고로 받아 들였다. 어쩌면 나는 자신이 아직 젊은이로 착각하고 만용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마라톤은 나의 70번째 마라톤 완주였고 그것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마라톤은 스스로 체력의 한계를 느껴보는 자기 훈련이지만 뜻하지 않는 위태로운 위기를 맞아 탈출하는 것은 일부러 체험해 볼 수 없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인데 이날의 수난은 모든것을 체험하는 귀중한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휴대폰이 배낭 속에 있어서 아내가 수없이 건 전화가 불통이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하루종일 걱정하고 있던 아내를 보고서야 내가 무심했음을 느끼고 미안하다고 했다. 오늘 겪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더러운 물에 잠겼던 나는 목욕부터 하러 갔다. 오후 3시부터 폭우피해 속보로 "도림천에 고립됐던 75세 정모씨 긴급구조"라는 자막과 함께 나오는 구조장면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믿는 사람이 없기를 바랬고 MBC의 인터뷰는 거절했다. 일찍 침실로 들어가 감사의 기도와 함께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정유희 / 201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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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큰 일 날뻔했네요.무사하셨으니 정말 다행입니다.우리 9회의 마라토너!!! 자랑스럽습니다만
아찔하네요. 부인이 얼마나 마음 조렸을 까요. 이제는 컨디션과 날씨를 따져 보시고 뛰세요.
정말 다행입니다.
훌륭한 친구 한분 잃을뻔 했군요.
무사하셔 천만 다행입니다.
남편과 함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