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도
- 불심가득한 절경의 섬 여행지
- 역사 깊은 사찰 연화사와 보덕암 해수관음상
- 연화봉 정상 바로 옆 15미터 높이의 아미타대불
- 연화도의 절경 동부마을과 출렁다리
- 연화도 깃대바위와 후박나무
- 인근 우도의 몽돌해수욕장과 구멍 섬
연화도 전경
연화도 개요와 유래
연화도는 통영시 욕지면에 속한 섬이다. 한려수도 청정해역에 위치한 신비의 섬으로 총 면적이 3.41km2, 해안선길이 2.5km, 연화봉해발 212m, 인구는 105 세대 170명(2016)이다.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24km 해상에 위치하며, 북쪽에 우도, 서쪽에 욕지도가 있다.
연화도는 통영시의 43개 유인도서 중 제일먼저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는 섬이다. 그것은 우도와 사이에 배가 안전하게 정박 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며 식수가 풍부한 덕분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섬의 관문인 북쪽 포구에는 연화마을, 동쪽 포구에는 동머리(동두)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다.
연화도(통영)
어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고기를 잡고 우도와의 사이에서 가두리양식과 하면서 살아가는 섬이다.
‘연화도’란 바다에 핀 연꽃이란 뜻인데, 실제로 북쪽 바다에서 바라보는 섬의 모습은 꽃잎이 하나하나 겹겹이 봉오리진 연꽃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 섬에 들어온 시기는 약 130여 년 전으로 도산면 수월리에 살던 김해 김 씨가 흉년으로 인해 뗏목을 타고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은 산 능선의 평탄한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고구마인데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연화도 선착장
연화도 둘러보기
연화도 표지석
연화도의 서북쪽은 움푹 들어간 곳에 왼쪽에 긴 방파제가 있고 오른쪽은 곶이 있어 방파제가 필요가 없는 곳이다. 왼쪽 안쪽으로 짧은 방파제가 있고 반대편 오른쪽 방파제에는 빨간 등대가 있다. 왼쪽 방파제에는 철부선이 닿을 수 있는 경사제가 있으며 마을은 섬의 북쪽에 위치해있다.
본촌마을 선착장은 작지만 비교적 깔끔했다. 매표소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다. 여객선 통영행 카훼리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연화도까지 1일 5회 운항한다.
이곳 연화도에도 관광객들이 많은데 대부분 산행객들과 연화사라는 절을 찾는 불교도들이다. 일행들과 연화도 부둣가 포장마차에 들어가 싱싱한 회를 맛보았다. 양식업을 하는 주민들이 관광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간이 식당이다.
학교에 가는 길목 입구에 아주 오래된 탐방로안내도가 있다. ‘연화도 탐방로’는 연화봉 주능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경치가 수려해 산행 중 줄곧 바다풍정을 조망할 수 있다. 먼저 본촌 마을 뒤편의 연화봉에 오른 뒤 용머리 쪽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탐방순서.
산길 곳곳에 쉬어가기 적당한 휴식처를 조성해 절경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본촌마을에서 동두마을까지 전체 탐방로 길이는 약 5km. 돌아오는 포장도로 약 3km를 합하면 총 8km다.
학교는 마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원량초등학교 연화분교장. 통영 원량초등학교는 두 개의 분교를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연화분교로 2013년 기준 학생 수는 2학급에 4명인데 남학생이 한 명, 여학생이 세 명이며 여학생들은 1, 2학년 저학년 생들이다. 학교운동장은 잔디가 깔린 깨끗한 편으로 학교 교사 역시 깔끔하다.
학교 앞에 이정표가 있는데 밭쪽으로 가면 산림욕길이고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연화사 보덕암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왼쪽으로 KT기지국이 나오고 그 맞은편으로 천막으로 된 식당이 있다. ‘연화도맛집’이라는 식당이다.
식당 앞으로 샛길이 있다. 발전소로 이어지는 길이다. 연화사가는 길은 직진. 그런데 이 길 아래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연화천’이라는 하천으로 KT기지국 앞에서부터 복개가 되었다.
여기서 얼마를 가면 또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에 일주문이 있다. 왼쪽은 ‘옛까꼬막길’로 ‘동두길’이기도 하다. 이 길은 동두마을로 가는 산 중턱을 가르는 포장도로다. 연화도에는 본촌, 십릿골, 동두마을 3개 부락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본촌마을이 정기여객선이 닿는 가장 큰 포구다. 산자락이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분위기가 아늑하다.
역사가 깊은 사찰 연화사
5층 석탑
일주문에는 ‘연화장세계문(蓮華藏世界門)’이라는 편액이 있다. 이어 아스팔트길이 이어진다. 언덕을 조금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건물이 한 채 있고 그 앞에서 오른쪽으로 길이 살짝 꺾여 들어간다. 주변에는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어 조금 더 가면 공터가 나오고 그 뒤로 2층짜리 전각이 나온다. 바로 절의 입구다. 1층은 천왕문이고 2층은 범종이 걸려있는 ‘범종루’인데 2층에는 ‘연화산연화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좌우로 법당이 있고 가운데 대웅전이 있다. 면적이 적다보니 공간이 좁은 편이다.
천왕문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위치한 마주 보는 두 개의 건물은 거의 쌍둥이다. 왼쪽은 ‘안심료(安心寮)’, 오른쪽은 ‘해행료(解行寮)’라는 현판이 붙어있는데 집 ‘료(寮)’자가 붙은 전각은 드물다. 두 채 다 2층 규모다. 이 사이로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끝에 양쪽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 이 계단을 타고 오르면 경내이다.
대웅전이 압도한다. 대웅전 왼쪽에는 쉼터를 만들어두었다. 대웅전과 함께 오른쪽에 대형 사리탑이 눈에 들어온다. 사리탑을 감상한 후 대웅전의 벽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그림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연화사가 제공하는 매력이다.
이 사찰의 역사는 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연산군의 억불정책으로 한양에서 이 섬으로 피신해온 승려가 불상 대신 둥근 전래석을 토굴에 모시고 예불을 올리며 수행하다가 깨우침을 얻어 도인이 되었다.
도인은 입적하면서 ‘바다에 수장시켜 달라’는 말을 남겼다. 유언대로 제자들과 주민들이 수장했더니 도인의 몸이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 승화했다. 이에 따라 섬 이름을 ‘연화도(蓮花島)’로 일컬었으며 입적한 승려도 ‘연화(연꽃)도인’이라고 불렀다.
그 후 사명대사가 이 섬으로 들어와서 연화도인이 수행하던 토굴 아래에 움막을 짓고 정진한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얼마 후 사명대사는 그를 찾아 연화도로 들어온 세 여인을 출가시킨다. 사명대사의 누이동생인 보운, 대사를 짝사랑하다가 비구니가 된 보월, 대사가 출가 전 정혼했던 보련 등이 그들이다.
연화도인 사명대사
연화도인 토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명대사는 육지에서 승군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쳤으며 바다에서는 보운, 보련, 보월 세 비구니가 왜군과 대적하여 승승장구했다. 이때 이 세 비구니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거북선 도면을 그려주고 만드는 법을 알려주어 거북선이 건조된 것이라는 말이 전해지지만 명확한 증빙 자료는 없다. 충무공은 이 세 비구니를 통틀어 자운선사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연화도에 실제로 사찰이 들어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8년 8월에 이르러서야 하동 쌍계사의 조실(큰스님)이던 고산이 연화봉 아래에 연화사를 창건한 것이다. 돌담과 8각 9층 진신사리 석탑 등이 어우러진 매우 여성스럽고 운치가 있는 절이다. 이곳 연화사에는 대웅전, 범종루, 일주문, 천왕문, 미륵불, 팔각구층석탑, 요사채, 진신사리비 등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 앞 경내 왼쪽으로 문이 있다. 이 문으로 나가면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연화사 담장을 두르는 길이다. 담장 뒤에도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그러나 괜찮은 건물은 몇 채 되지 않고 거의 폐가나 흉가들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이곳이 ‘십리골’이라는 마을인듯싶다. 그러기에 길 이름도 ‘십리골길’이라 하지 않았겠나 싶다.
여기서 약 3분 정도 올라가면 길이 좌우로 연결된다. 왼쪽으로는 생긴 도로로 ‘십리골새길’이다. 보덕암은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직진하면 또 다른 마을이 있다. 아마도 이곳 역시 십리골의 일부일 것이다.
보덕암으로 향한다. 여기서 약 2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왼쪽으로 마을이 보인다. 이곳 역시 집이 10여 채도 채 되지 않아 보인다. 집들이 두세 채씩 더덕 붙어있다. 길 오른쪽으로 보니 이곳에도 집들이 있는데 잡초 속에 숨겨진 집들로 흉가 그 자체다. 여기서 약 3분 정도 더 올라가면 능선. 섬의 동서의 중심인 셈이다.
연화도라는 섬은 하늘에서 보면 희한하게 생긴 섬 중의 하나이다. 섬의 서쪽은 제법 넓은 편인데 비해 이곳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국이다. 구불하게 점점 좁아지면서 가늘어졌다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사각형의 섬이 이어지는 형국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연화산 정상이 나온다. 이어 몇 발작 지나면 이정표가 보인다.
5층 석탑 가는 길은 흙길이었다가 이내 계단 길로 바뀐다. 주능선 한가운데 우뚝 선 5층 석탑은 조성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흰색 화강암이 번쩍일 정도로 깨끗했다. 이곳도 정상의 일부인지라 조망이 그런대로 좋은데 정면으로 국도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동머리에 그 유명한 네 바위가 보인다. 남동쪽으로 나란히 연결되다시피 한 네 개의 바위섬.
5층 석탑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이어진 내리막길로 가면 보덕암 가는 길이다. 길 자체가 에스S자 형으로 되어있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내려가다 먼저 만나는 것은 화장실이다. 이어 더 내려가면 법당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바다를 향해 있는 해수관음상은 화장실에 서 직선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2002년에 세워진 해수관음상이 바다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법당 뒤 공간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오른쪽 것은 온통 한자로 되어 제대로 파악이 안 되지만 왼쪽은 보덕암 건립에 대한 비석이었다. 이 앞에 석등과 함께 자판기가 있고 그 옆으로 바다를 향한 법당이 있다. 절벽 속에 자리 잡은 사찰 ‘보덕암’이다.
이곳은 뒤편이라 쪽문 하나밖에 없다. 정면은 내려가서 봐야 한다. 3년간의 불사 끝에 2004년 11월 3일 낙성법회를 열고 문을 연 5층 법당이다. 바다를 굽어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있는 자태가 웅장하기 그지없다.
보덕암은 연화사와 함께, 불교성지 순례지로서 연화도가 갖는 명성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암자이다. 보덕암에서는 통영 팔경 중 하나인 용머리해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며, 양양 낙산사, 여수 항일암, 남해 금산 보리암 등에 결코 뒤지지 않은 빼어난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연화도 보덕암
5층 석탑이 있는 능선에서 섬의 서쪽 방향으로 가면 아미타대불을 만나게 된다. 가는 중간에 토굴이 있다. 5~6분 정도 올라가면 비포장도로 오른쪽으로 돌담이 쌓인 동산 가운데에 안내표지석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토굴 가는 길이고 왼쪽 직진은 아미타대불 가는 길이란다.
오른쪽으로 잔돌이 깔린 길을 걸어가면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 뒤로 올라가면 바로 토굴이 있다. 토굴이라고는 했지만 돌을 쌓아 사각형의 묘처럼 조성한 후 그 안을 비워 토굴을 만든 그런 것처럼 보인다. 문이 닫혀 안을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아니면 이곳은 입구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흙을 파서 만든 토굴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곳이 연화도사 토굴 터와 사명대사 토굴 터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의 억불정책을 피해 이 섬에 은신한 연화도사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가 수행하던 장소라고 한다. 여기서 섬의 동쪽을 보니 섬의 끝으로 바위섬이 몇 개 있다. 네 바위가 뚜렷하게 보인다.
토굴에서 약 3분 정도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연화봉 정상. 정상에는 정상석과 함께 주변에서 보이는 풍경을 촬영한 조망도가 있고 해발의 기준점이 되는 삼각점도 있다. 그리고 사방이 확 트인 ‘망양정(望洋亭)’ 이라는 정자도 있어 이곳에 앉아 주변을 빙 둘러가며 조망해도 일품이다.
연화도의 절경 동부마을
연화도 제일의 절경인 섬 동쪽 끄트머리 용머리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두마을 부근의 4개 바위섬인 네 바위를 포함한 이 해안절벽 지대는 ‘통영8경’에 꼽히는 비경지대다. 뽀족한 바위섬들의 배열이 마치 대양을 헤엄쳐 나가는 용의 날카로운 발톱을 보는 듯하다.
동머리 혹은 네바위섬이라 불리는 이곳은 금강산의 만물상을 연상시키는 바위들의 군상이 볼 만하다. 일몰 직전 찾으면 더욱 비경이고 지는 해의 빛을 받아 황금으로 물드는 바위가 장관이다. 이곳은 또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경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동두마을 뒤로 출렁다리가 있다. 2011년 12월 15일에는 출렁다리가 개통되었다. 일명 돼지목으로 불리는 험준한 협곡에 놓인 연화도 출렁다리의 총길이는 44미터에 이른다. 섬의 끝 동두마을은 작고 조용한 어촌이다.
동부마을 전경
출렁다리
연화봉 정상 바로 옆에는 아미타대불이 우뚝 서서 위용을 뽐낸다. 흡사 남해바다를 호령하는 듯한 모습이다. 높이 15미터의 이 불상은 2010년 1월 18일 봉불 및 점안 식을 열고 공개되었다.
산책로는 서북쪽으로 이어진다. 길은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게 편하도록 제법 넓게 조성해 놓았다. 흙에 둥근 나무를 일정한 간격으로 깔아놓은 계단 길이었다. 물론 숲 속 길이다. 능선에서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통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멋스런 산길이 운치가 있다.
길은 아주 잘 만들어두었다. 중간마다 벤치 등으로 앉아서 쉴 수 있도록 해두었다. 산길 곳곳에 쉬어가기 적당한 휴식처를 조성해 절경을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 거기에다 주위에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이 햇빛을 막아준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본촌마을의 서쪽 끝 해안이다. 이 앞 바다에는 많은 양식장이 있다. 이곳에는 원형의 치어장도 한 곳 설치되어있다. 근해에서는 도미, 낙지, 문어, 민어, 갈치, 멸치 등이 많이 잡히고 김과 굴의 양식도 활발하며 청정 해역을 활용한 가두리양식장도 발달했다.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빨간 등대로 이어지는 방파제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안 길이자 물양장. 이곳 물양장 가운데에는 녹지지대가 조성되어 있다. 물양장에는 다양한 어구들이 즐비하다.
한편 연화도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낚시꾼에게는 훌륭한 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경관이 아름다운 용머리해안이 최고의 낚시 포인트이다. 동머리 주변과 촛대바위는 남해에서 손꼽히는 갯바위 낚시터로 명성이 자자하다. 여름이면 참돔, 농어가 데로 몰려들고, 가을 겨울에는 감성돔과 볼락이 많아 바다낚시꾼들에게 인기 있는 섬. 북쪽에서 볼 때 한 떨기 연꽃 같은 형상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연화도의 해상 관광
연화도는 주변에 있는 우도와 함께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섬 동쪽의 절경인 ‘네바위’와 ‘용머리’가 최고이다. 기암절벽이 그야말로 장관인 용머리 바위 끝에는 신비한 태고적 모습을 간직한 채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달리 바람과 파도가 거센 외해에 속한 이곳에 꿋꿋하게 서 있는 사형제 바위, 거북바위, 천년송과 비경은 여행객들의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뾰족뾰족 솟아오른 네 개의 바위섬은 마치 넓은 바다를 헤엄쳐 가는 용의 날카로운 발톱 모습을 연상시킨다. 연화도의 부속섬 우도의 구멍 바위와 주위에 무인도는 장사도, 비진도, 추도 등과 연계해도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연화도는 바다낚시의 천국일 정도로 섬 주변에 사시사철 대물들이 넘쳐난다. 여객선이 닿는 선착장 주변은 초보 낚시객들도 손쉽게 고기를 낚을 수 있다. 이 섬에 마땅한 해수욕은 없지만 그 대신 뛰어난 풍광과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짜릿한 낚시의 손맛은 경험할 수 있다. 갓 잡아 올린 활어와 싱싱한 무공해 채소가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할 것이다.
연화도 남쪽 풍경
연화도의 가두리 양식장과 미래 산업
연화도 마을을 38명의 어촌계 주민들은 대부분은 기르는 어업인 가두리 양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연화도 앞바다는 고기를 양식하기에 천혜의 장소를 가진 섬으로 인근 7ha의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설치해 놓고 기르는 어업에 종사하는데 키우는 고기의 대표 어종은 우럭이다.
필자가 가두리 양식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3년도이다. 서울에서 살다가 여수로 이사를 와서 배(선교선)를 가지고 14개 섬을 한 주일에 정기적으로 순회를 하면서 당시 호황을 이루던 가두리 양식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너나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두리 양식업에 투자를 하였다. 어선들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만 기름 값과 인건비, 어족의 고갈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잡는 어업에서 신개념 사업으로 ‘기르는 어업’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우리나라 양식업은 1970년대이며, 이 시기에 양식업은 소규모 개인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양식기술 개발로 인한 생산량을 늘리면서 비교적 양식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1990년을 전후로 시작된 대규모 가두리 양식업은 섬을 떠난 젊은이들이 다시 고향을 찾는 현상이 벌어졌으며 고소득 효자 산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가두리 양식장은 난립과 비싼 냉동고기 사료 값, 태풍, 적조, 고기병, 중국산 활어 수입 등으로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육지와 가까운 가두리 양식장은 오염된 부유물로 문제가 심각하다. 이로 인해서 연안에 위치한 가두리 양식은 이미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외해에 가두리 양식 기술의 발달로 인해 거문도, 추자도, 울릉도, 제주도 등에서 가두리 양식을 하고 있다. 연화도는 통영 지방의 연안에 있는 수많은 가두리 양식장과는 달리 준 외해에 속하는 곳이다.
외해의 가두리 양식의 장점은 섭씨 10도 정도의 수온 유지와 청정해역이라는 것이다. 남해수산 연구소에 따르면 ‘연안 가두리 양식장에서 많이 나타나는 어류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고기에 감염되어 우럭 등이 폐사가 늘고 있지만, 거문도 등 외해 지역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로 세로 7m의 가두리 안에 그물을 설치하고 우럭 광어 참돔 조피볼락 등을 넣어 사료를 주면서 키우는 방법이다. 가두리 그물코의 크기는 크게 하면 물의 순환과 산소 공급이 잘 되고 배설물 밑으로 잘 빠져 나간다.
하지만 치어(작은 물고기)를 키울 때는 그물코가 작으면 빠져 나가기에 고기의 크기에 따라서 그물을 넣는다. 그물코가 작으면 물의 소통을 가로막고 이끼가 많이 낀다. 그래서 점점 그물의 무게가 무거워 지면서 나중에 터지게 된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물을 갈아주고 이끼가 까지 않도록 갈을 먹이기도 한다.
치어들이 자라면서 그 크기에 따라 분류하여 놓고 기른다. 그렇지 않으면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괴롭히고 잡아먹기 때문이다. 어린 물고기들은 사료를 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일꾼이 먹이를 주려고 가면 수천마리 고기 떼가 팔딱거리며 사료를 먹으려고 달려든다.
이 고기들은 드넓은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는 없지만,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힐 염려도 없고, 먹을 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팔자가 좋은 고기들이다. 바다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아주 위험한 곳이다. 큰 물고기가 어린 치어들을 잡아먹어 버린다.
치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거의 00% 수준이라고 한다. 야생에서 자라나는 모든 동물이 그러듯이 바다 속의 물고기도 손수 먹이를 찾아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다가 먹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먹이 사슬이며 자연의 법칙이다. 내가 만약에 물고기라면 안전한 양식장, 아니면 전쟁터 같은 바다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되는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내가 물고기라면 널따란 바다를 자기 마음대로 자유를 누리면서 다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서 편안한 양식장과 험악한 바다를 선택할 것이다.
여자는 비교적 안전한 양식장을 선호하고 남자는 거친 바다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독립심이 강하고 모험심과 문제를 과감하게 돌파하는 적극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겠지만 시련의 파도가 심하여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하다하다. 모험을 하고 싶지만 실패라는 현실 때문에 안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양식장 같은 곳과 야생과 같은 바다는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을 무시 할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바다 보다 양식장 같은 곳을 택하는 경우도 많게 된다.
지난봄에 이어 이번 봄에도 당진시의 난지도 등을 답사하면서 도비도에서 좌대 낚시점을 하는 지인을 두 번이나 만나 대접을 받았다. 가두리 사양길에 접어든 통영과 여수 지방에 이런 산업을 도입하면 되겠다는 결론을 얻고 지금 통영의 학림도에서 시도 중이다.
연화도에도 워낙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오고 청정 해역이라서 가능성이 보인다. 가두리 양식장은 입어료 받고 낚시 허가 법령 2006.12.12. 가두리양식장 낚시터업 허용된다. 연화도가 가두리 양식장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장소 덕분이다. 먼 바다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지와 가까운 바다가 아닌 외해에 속한 지역이다.
통영으로 이어지는 교통(1일 5회)이 아주 좋고, 청정 해역이라는 최대의 장점이다. 그래서 어병이나 적조 등의 발생률이 적은 편이다.
연화도 가두리 양식장은 연안과 달리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태풍과 파도에 강한 소위 잘 휘어지는 내파성이 강한 PE(폴리에틸렌)를 사용한다. 현재 통영 연안 해상 가두리 양식장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밀집 형태로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적조 때문에 수십억 원의 피해와 조류소통의 방해, 배설물과 사료가 양식장 바닥에 가라앉아 바다 생태계와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연화도는 바다 물의 흐름이 원활하고 청정 해역으로 적당한 파도가 일어서 바다를 청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그 만큼 연화도 가두리 양식장 물고기들은 건강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셈이다.
불과 몇 년 20-30년 전만 해도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채소와 과일들이 비닐하우스 재배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출하되어 저렴한 가격으로 먹는다. 그 중에 가두리 양식장도 자연산 활어회 가격을 안정시켜 준 곳이다. 산지에서 한 마리 9,000만 원 정도에 팔리는 참돔은 서울에서 5-6만원을 주어야 먹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어획되는 고기의 생산량도 한계에 도달하여 가두리 양식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미래학자들은 수산 양식 사업이 미래의 산업으로 각광 받게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를 권유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는 저서인 〈제3의 물결〉에는 수산양식과 해양산업은 ‘21세기 미래 10대산업’으로 포함시켰고, 세계의 식량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피터 드러커 같은 저명한 미래학자도 고기 양식업은 미래의 중요한 식량자원 산업 중에 하나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렇게 미래의 산업인 가두리 양식업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애물단지 전락하고 원가에도 못 미치는 우럭이 kg당 6,000원-7,000원으로 가격 폭락하여 어류양식업계 붕괴되고 말았다. 요즈음은 8,000원으로 올랐는데 적어도 1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어민들은 말한다. 어렵지만 그래도 연화도에서는 아직도 35가구가 가두리 양식업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연화도를 떠난다.
연화도의 관광명소
연화사
연화사는 통영시 욕지면 연화리에 위치하고 대웅전, 석탑 등이 1,300여 평의 자리잡고 있다. 이 사찰의 역사는 5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연산군의 억불정책을 피해온 연화도사가 제자 3명과 함께 연화봉 암자에서 전래석을 모셔놓고 도를 닦으면서 살았는데, 연화도사가 타계하자 제자들과 섬 주민들이 도사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수장했고 도사의 몸이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해 승화되었다고 하여 연화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연화사는 쌍계사 조실인 고산 스님이 19세기에 창건한 관음도량이다. 오래된 사찰은 아니지만 돌담과 8각 9층 진신사리 석탑 등이 어우러진 매우 여성스럽고 운치있는 절이다. 대웅전, 3각 9층석탑, 요사채 2동, 진신사리비, 연화사 창건비 등의 건축양식들이 있고 연꽃 위에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우도 생달나무, 후박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344호)
녹나무과의 상록활엽수로서 우도마을 옆, 밭 가운데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3그루의 생달나무와 1그루의 후박나무가 있으며 생달나무 3그루 중 동쪽에 있는 것이 가장 큰데 약20m에 이르며 우리나라 전남 보길도의 것과 더불어 가장 큰 생달나무다. 잎은 마주보고 긴 타원형이며 뒷면은 회록색을 띠는데 4~5월경에 꽃이 피고 9월경에 열매를 맺는다.
후박나무는 중국, 일본, 대만과 우리나라 남해안에 분포하는 상록활엽수로서 마을의 당산나무로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당산제가 매년 열리기도 한다.
연화도 깃대바위
연화도에 전해오는 이야기
연화도사를 봉양하던 제자들이 떠난 후 도사의 불심을 계승하기 위해 이 섬에 들어온 사명대사가 연화 도사의 뒤를 이어 수도했다고 한다. 대사를 찾아헤매던 대사의 누이(보운), 약혼녀(보련), 대사를 짝사랑하다 수도승이 된 보월, 이 세 비구니는 대사가 떠난 후에도 이 섬에서 도를 닦아 득도하여 만사에 형통했다고 하며 이 세 비구니들을 자운선사라 한다.
이들은 후에 임진란이 발발할 것을 예측하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 거북선 건조법, 해상지리법, 천풍 기상법 등을 알려주었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의 유명 섬 시리즈 - 경남 통영 연화도|작성자 ECO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