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북한에서의 교회쇄신운동
한국교회도 친일 반신앙행위 청산 실패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친일청산을 통해 신앙적 정의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여 교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된 동시적 과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나라가 해방 후 친일청산에 실패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친일적인 반 신앙 행위 청산에 실패했다. 친일 전력(前歷)의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였고, 교회쇄신론자들의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은 교권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해방 정국의 혼란은 교계도 동일했다. 친일 경력의 교권주의자들과 교회쇄신론자들 간의 대립은 결국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해방 후의 상황과 여러 교파들의 활동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 강요로 폐쇄되었던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여러 지역에서 교회와 지방회 혹은 노회를 재건하였다. 장로교를 비롯하여 감리교나 성결교회 등은 9월말까지 교회와 교회 조직을 복구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북한에서는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났다. 흔히 ‘교회재건운동’이라고 말해왔지만 단순히 외형적 조직이나 기구의 재건만이 아니라 영적 쇄신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교회쇄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운동은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이기선 채정민 목사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기철 목사가 담임했던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재건을 위해 기도하며 쇄신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또 평양노회는 1945년의 9월4일 산정현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열었다. 부흥회와 3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죄를 통회자복하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출옥 성도 중심의 교회쇄신론자들은 9월 20일 신사참배에 대한 공적인 회개와 자숙(自肅), 신학교육기관의 재건을 골자로 하는 5개항의 교회재건 원칙을 발표하였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장로)들은 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징(權懲)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痛悔淨化)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痛悔自服)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노회(各老會) 또는 지(支) 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 교회재건안에 대해 다수의 교회가 지지하고 실행했으나,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일례가 1945년 11월14일 선천 월곡동(月谷洞)교회에서 개최된 평안북도 6개 노회(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 교역자퇴수회였다. 해방을 기념한 이 부흥집회에 참석한 2백여 명의 목회자 중 감리교나 성결교 소속은 소수였고 절대다수가 장로교 목회자들이었다. 출옥 목회자인 이기선 목사와 만주 봉천신학원장 박형룡 박사가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기선 목사의 간증 집회에 이어 박형룡 박사가 위의 5개 항의 재건 원칙을 발표했다. 이때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이들은 재건 원칙에 반대하고 자신들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했다고 변론했다.
특히 월곡동교회 담임목사였던 홍택기 목사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을 가결했을 당시(1938) 총회장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우격다짐의 합리화였으나 한 집단의 의사를 대변했다.
또 이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자숙은 개인이 결단할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공적 권징안을 거부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된바 있는 쇄신론자들과 신사참배를 수용했던 이들 간의 최초의 만남이었던 교역자퇴수회는 교회쇄신의 험난한 행로를 예고해 주었다. 이때 이기선 목사 등은 교회쇄신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직감하였고, 후일 기존의 조직을 떠나 혁신복구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박형룡은 교역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회개의 의도는 없고 교권유지에만 급급한 현실에 실망하고 다시 봉천으로 돌아갔다.
평북 6개 노회 교역자 퇴수회에서는 ‘북한 5도 연합노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합의에 따라 6노회와 평양노회가 중심이 되어 이북의 5개도(道)의 16개 노회 대표가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이북5도연합노회’(五道聯合老會)를 조직하였다. 이 기구는 이북지방에서 총회를 대신할 잠정적 기관이었다. 회장에는 김진수(金珍洙) 목사가 피선되었고 김철훈(金哲勳), 이유택(李裕澤), 김길수(金吉洙) 목사 등이 임원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이전의 교회재건 5개 원칙보다 완화된 6개항의 교회재건안을 결의했다.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하고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외에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3개월간 근신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구속력 없는 개인적 근신으로 완화된 것이다. 비록 평양노회와 봉천노회는 자숙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 공산당의 권력 장악으로 북한의 교회는 또 다른 고난을 감내해야만 했다.
북한에서의 공산정권의 수립
김일성 “기독교 놔두면 공산화 불가능”
해방과 함께 온 정치적 혼란과 남북분단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었다. 해방과 함께 연합군이 즉시 진주하고 상해임시정부가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했던 송진우 계열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을 대표하는 기구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여운형 계열 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송진우 계열이 임시정부 귀국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이 여운형 계열은 1945년 8월15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었다. 이 건준(建準)에는 민족주의자들도 가담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은 곧 건준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 때 남아 있던 좌익세력은 9월6일 인민대표자회의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라는 일종의 정권조직을 결성하고 중경의 임시정부와 대립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민족주의자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국민총의를 집결하기 위해 국민대회준비회(國民大會準備會)를 조직하여 이에 맞서게 되었다. 이처럼 국내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대립하고 있을 때 미국과 소련 양군(兩軍)이 각각 진주하게 된다.
북한지역으로 먼저 진주한 것은 소련군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패망이 분명해진 8월9일 일본에 선전 포고하고 이미 한·소 국경을 넘어 웅기와 나남으로 진출하였고(12일), 일본의 항복 이후 계속 청진(16일) 원산(22일)을 거쳐 평양(24일)으로 진주하여 함흥 등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제25군으로 병력은 12만5000여명에 달했다. 미국은 9월7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렇게 되어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하게 되었다. 이 38선이 우리 민족의 고난과 아픔의 실체가 될 줄은 예견치 못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8월25일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군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자주국이 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부여하였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약탈자를 구축했다고 했던 소련군이 또 다른 약탈자가 되었다. 조선인민의 창조적 노력을 후원하겠다던 이들은 인민의 행복을 박탈했다. 이것은 그 후 70여 년 간 계속되는 압제의 서곡이었다.
소련군은 처음에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와 현준혁 등 공산주의자를 포함하는 오도임시인민위원회(五道臨時人民委員會)를 조직하여 행정을 담당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14일 33세의 김일성(1912∼1994)이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평양시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평남 건준의 지도자인 조만식은 체포, 구금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축출되었다. 해방을 맞으면서 서구형의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민중의 갈망은 이룰 수 없는 절망으로 무너졌다.
김일성은 초기에는 공산주의를 드러내 말하지 않고 반제국주의, 반봉건,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가장하여 기독교 민족주의자들도 포섭하려 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는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기독교를 처리하지 않으면 북의 공산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당시 북한의 인구는 940만 명이었는데, 이 중 기독교 신자는 30만∼35만 명으로 추산된다.
북한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은 1946년 2월8일에 성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로부터 시작된다. 위원장은 김일성, 서기는 강양욱(康良煜, 1904∼1983)이었다.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삼촌으로 1943년 3월 평양신학교를 38회로 졸업한 목사였다. 해방 전까지는 목회에 종사했으나 1945년 11월3일 조만식이 창당한 조선민주당에서 상무위원을 맡으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곧 김일성을 도와 인민위원회에 가담하였고 후일 기독교 탄압에 앞장서게 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소련군 통제 하에서의 임시정부와 같은 성격의 기구였다. 이 기구를 통해 공산정권 기반을 구축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우선 무상 몰수, 무상 분배 원칙에 의하여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모든 토지의 국유화 혹은 협동조합 소유화가 된다.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1946년 3월5일자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서기장 강양욱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이 때 몰수된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 종교단체 토지는 1만4400 정보인데, 전체 몰수 토지 약 1백만 정보의 1.4%에 해당했다. 토지개혁 때 반혁명 계급으로 약35만 명이 희생되었으나 기독신자의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토지개혁에 이어 여러 법령이 제정 공표되었다. 20개조의 정강(1946. 3. 23.), 북조선노동자 및 노동법령(1946. 6. 24.), 그리고 주요 산업 철도 운수 전신 은행을 국유화하는 법령(1946. 8. 10.)이 발표되어 모든 자산의 국유화가 추진됐다. 그해 10월에는 ‘개인 소유권을 보호하고 산업 및 상업 활동에 있어서 개인의 창조성을 발휘시키기 위한 대책에 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런 여러 조치들을 사회개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국유화의 과정이자 강압적 통제를 위한 조치였다.
‘20개조 정강’ 제2조에서 ‘국내에 있는 반동분자와 반민주주의적 분자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하며 파쇼적 반민주주의적 정당, 단체 및 개인들의 활동을 금지할 것’이라 규정, ‘신앙활동’은 반동분자의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금지할 여지를 만들었다.
종교인들에게는 여러 제한이 가해져 종교인의 재산이 몰수되거나 제한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압박과 통제는 이제 눈앞에 닥친 현안이 되었다.
북한에서의 기독교 탄압
예배방해·교계 분열 노려 ‘주일선거’ 시행
북한에서 소련군의 진주와 김일성의 등장, 그리고 공산정권의 수립은 기독교와의 불안한 동거를 예고했다. 그 첫 사례가 1946년 3월 1일에 발생한 3·1절 기념예배 사건이었다. 그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정일)는 교회측의 3·1절 기념행사를 금지시키고 임시위원회가 주관하는 평양역전 집회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공산당에 대한 충성과 단결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교회측은 3·1운동은 기독교회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을 주장하며 교계의 기념예배를 취소할 수 없다는 점을 통보했다. 이 때 인민위원회는 2월 26일 평양시내 교역자 다수를 체포하는 등 방해했으나 3월 1일 유서 깊은 장대현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약 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길수(金吉洙) 목사의 사회로 평양 창동교회 황은균(黃殷均) 목사가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던 중 20여명의 적위대원이 난입, 설교자를 강단에서 끌어내리는 등 예배를 방해했다.
신교의 자유를 유린당한 일에 분개한 3000여명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시위 규모에 놀란 소련군은 일단 돌아갔으나 교인들은 그날 밤 교회당에 모여 철야 단식기도회를 개최했다. 밤이 되자 무장한 적위대는 황은균 목사를 비롯하여 김명길 김인준 김석원 박대선 이춘생 이학봉 목사 등과 신도들을 연행했다. 체포된 김인준(金仁俊) 목사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당의 교회간섭을 반대하고 신교의 자유를 주장했던 그는 아오지탄광으로 끌려가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산당의 교회 간섭을 보고 충격을 받은 황은균 목사는 월남의 길을 택했다.
3·1절 사건은 의주에서도 일어났다. 인민위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9000여명의 신도들이 의주동(義州東)교회에 회집했다. 이 일로 김석구 목사가 체포되기도 했다. 3·1절 기념예배 사건은 기독교와 공산정부와의 공개적인 첫 대립이었다. 이 사건 이후 김일성 정권은 3·1절 행사를 폐지시켰다.
공산정권의 보다 구체적인 기독교 탄압은 의도적인 ‘주일선거(主日選擧)’ 시행이었다. 1946년 6월 5일,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있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전국 면·군·시·도 인민위원회 위원선출을 위한 투표일을 주일인 11월 3일로 공고했다. 이것은 의도적인 조치로서 예배를 방해하고 교계를 분열시키기 위한 저의였다. 북한 교회들은 예배를 폐하고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받아드릴 수 없었기에 주일선거를 반대했다. 이런 일은 전례가 없던 예배탄압이었다. 이북오도연합노회는 선거일의 재고를 요구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북오도연합노회 대표들은 10월20일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대책을 숙의했다. 이때 주일선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재고를 바라는 진정서를 내기로 하고, 김진수 김철훈 김화식 이기혁 이유택 지형순 한덕교 등 7명을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북한정권의 기독교에 대한 간섭과 탄압을 저지하고, 주일에 실시되는 선거에 불참하겠다는 결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 3일 주일선거가 강행되었고, 평안남북도의 교회는 총선에 불참했다. 북한지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선거에 불참했다. 이때의 선거는 북조선 노동당이 추천한 단일후보의 가부를 묻는 선거였다. 찬성표는 흰 투표함에, 부는 검은 투표함에 넣도록 되어 있었다. 이날 선거는 강제와 협박으로 이루어졌고, 유권자 451만6120명 중 450만1813명이 투표하여 99.68%의 투표율을 보였고, 그 중 97%의 찬성으로 그들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진정한 선거가 아니었다.
공산당의 술책은 적중했다. 김일성 정권은 교회의 선거 거부를 기독교에 대한 탄압 명분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예배를 방해하고 목사의 설교를 감시했다. 또 교회당에서의 정치 강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교역자들이 투옥되는 등 수난이 뒤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저항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은밀한 저항이 일었고 기독교반공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1946년 11월 3일 명목상의 선거를 통해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강화한 김일성 집단은 1947년 2월에 시·도·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소집하고 북한 최고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 설치를 결정했다. 김두봉이 상임위원장이었다. 곧 이어 소집된 제1차 북조선인민회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행정기관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김일성이었다. 이것이 북한에서의 독립정권이었다. 유엔은 1948년 1월 유엔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8월 25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내각(수상 김일성)을 구성함으로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였다. 북한에서의 단독 정부수립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공산정권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만으로는 기독교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강양욱을 시켜 교회탄압 및 분열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기독교도연맹’이라는 이름의 어용 조직이었다.
‘기독교도연맹’ 조직과 기독교 탄압
親日전력자들 회유와 협박으로 가입시켜
북한에서의 기독교 탄압은 어용조직을 통해 보다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그 조직이 기독교도연맹(基督敎徒聯盟)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할 때 기독교를 가장 저항적인 세력으로 인식했듯이 북한의 공산정권도 그러했다. 일제가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 정책으로 기독교의 무력화를 시도했듯 북한의 공산정권도 회유와 탄압을 병행했다. 처음에는 탄압 일변도였으나 탄압만으로는 한국 기독교를 장악할 수 없다고 보아 공산정권을 지지할 어용단체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평양 기림시 소재 고정교회 목사였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인 강양욱(康良煜)을 이용했다.
강양욱은 처음 평양의 유력한 목회자들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하자 함경도의 조희렴(曺喜炎) 목사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1946년 가을 곽희정(郭熙貞) 이웅(李雄) 신영철(申英徹) 심익현(沈益鉉) 나시산(羅時山) 배덕영(裵德永) 김치근(金致根) 등을 중심으로 소위 ‘기독교도연맹’이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였다.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1946년 11월3일 주일선거 이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강양욱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의 기독교인들은 위대하신 김일성장군을 중심으로 함께 뭉쳐야 한다”는 내용을 방송(1948년 11월)하고 기독교도 연맹가입을 촉구했으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평양시내 교역자 중에는 가입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 때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던 목사나 친일파 목사와 장로를 회유와 협박으로 가입케 하였다.
강양욱과 함께 연맹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심익현은 일제하에서는 친일조직인 기독교내선친목회(基督敎內鮮親睦會) 회원이었고 신사참배가 가결될 당시는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했던 인물이었다. 강양욱은 황해도 지방의 목사이자 1942년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김응순(金應珣), 전(前)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일했던 박상순(朴尙純), 그리고 당시 저명한 부흥사이자 교계 원로였던 김익두(金益斗) 목사를 감언이설로 꾀어 연맹에 가입시켰다.
11월28일에는 기독교도연맹 중앙대회를 평양 신양리(감리)교회에서 개최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강양욱 강석록 김은석 김응순 김치근 김태은 변봉조 배덕영 박건수 박성채 박상순 이피득 조희렵 최수걸 하지산 등 15명을 중앙위원으로 선임했다. 상임위원은 강양욱 김임길 김치근 박건수 박기천 배덕영 박상순 등이었다.
1946년 11월3일 선거를 앞두고 ‘북한오도 연합회’는 주일에 실시되는 선거에 불참할 것을 결의했으나, 기독교도연맹은 주일날 실시되는 선거에 솔선참가 한다는 등 4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2. 우리는 남한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3.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4. 그러므로 교회는 선거에 솔선참가 한다.
북한 공산정권은 이 결의문을 각 교회에서 교인 앞에 낭독하도록 했으나 평안남북도의 교회들은 불응했다. 이때로부터 기독교도연맹을 통한 교회의 탄압이 노골화되었다.
한편 기독교연맹을 반대하는 이북오도연합노회의 회장 김진수(金珍洙) 목사 이하 주요 간부인 김인준(金仁俊) 김철훈(金哲勳) 이유택(李裕澤) 허천기(許天機) 김길수(金吉洙) 목사 등 강경파 목사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그리고 평양숭실학교 대강당에 평양시내 각 교회 목사와 장로들을 소집하여 강양욱의 사회로 김응순 목사, 김익두 목사로 하여금 강연을 통해 기독교도 연맹가입을 설득케 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자 수개월 후에 평양남문밖교회에서 평양시내 목사 장로들을 다시 소집하여 기독교 연맹가입을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교직자만 가입케 하였으나, 1948년 이후에는 일반신자들의 가입을 강요했다. 면, 군, 도 연맹을 조직한 후 1949년에는 각도 대표로 소위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결성하였다. 총회장은 김익두 목사, 부회장은 김응순 목사였다.
연맹 총회는 연맹에 가입치 않는 자에 대한 목회금지건을 재확인 했다. 1949년 4월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모인 노회에서는 기독교도연맹 가입원서를 준비해 두고 가입원서에 서명 날인한 목사, 장로만 노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가입을 거부한 노회원들은 제명하기로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평양 노회원중에서 60여명의 목사 장로들이 제명되었다. 평양노회가 주기철 목사를 위시하여 신사참배를 반대한 노회원을 제명했던 것과 똑같은 전철을 답습한 치욕적인 조치였다. 김익두 목사는 이북5도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이란 이름으로 제명장(除名狀)까지 발송했다. 북한이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가입연맹원수는 8만5118명(1948년 9월1일 현재)에 달했다. 평신도도 포함되었지만 거의 전 교역자가 망라되었다고 한다.
강양욱은 연맹에 가입하지 않는 자들을 탄압했는데, 이때 투옥된 이들이 김진수(金珍洙) 목사를 비롯하여 김화식(장대현교회), 김인준(평양신부교회), 김길수(신암교회), 김철훈(산정현교회), 정일선(산정현교회), 장윤성(황해도), 지형순(기림리교회), 장도신(고정교회) 박경구(황해도 장연교회) 이정심(함경도 청진중앙교회) 이성주(평북정주) 목사, 김의근(신리감리교회) 백인숙(산정현)전도사, 유계준(산정현교회) 방계성(산정현교회) 장로 등이 있다. 이들은 결국 순교자의 길을 갔다.
기독교도연맹은 공산정권에 의해 조정된 교회분열과 파괴를 위한 어용조직에 불과했다. 기독교도연맹은 현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란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북한 기독교계 정당 결성과 와해
공산당 탄압에 대항 기독정당 잇단 창당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 하에서 심각한 탄압과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취한 방식은 ‘무저항적 인내’였다.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했던 초기 교부들은 이러한 태도를 ‘파티엔티아(patientia)’라고 불렀다. 영어의 ‘인내(patience)’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지만 이 단어가 라틴어 파티엔티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칼 대신 펜을 선택했다.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인내할 여유도, 펜을 선택을 상황도 되지 못했다. 북한의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라는 포악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정당의 힘으로 저항하고자 했으나 공산주의 앞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가 곧 드러났다.
기독교 정당 조직의 첫 경우가 19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를 배경으로 조직된 ‘기독교사회민주당’이었다.
신의주제일교회 윤하영(尹河英·1889∼1956) 목사와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1902∼2000) 목사에 의해 주도된 이 정당은 한국 최초의 정당이었다. 본래는 ‘기독교민주당’이 정식 명칭이었는데 ‘북한 인민의 전적인 포섭을 위해’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고 불렸다. 민주적 정부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정강으로 제시하였다.
‘사회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그것이 당시의 정치적 트렌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경직에게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후에는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하게 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다. 정당의 조직과 함께 지역적으로 지부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북한 공산당은 이 정당의 와해를 시도했다. 한경직은 그해 10월 말 북한을 탈출하여 11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지부 조직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사건이 11월 23일 발생한 신의주학생사건이었다. 11월 23일 용암포(龍岩浦)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 지부창립대회에 공장 직공들을 동원하여 습격했다. 장로 1인이 즉석에서 피살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개한 신의주 기독학생들이 중심이 된 5000여명의 시위대는 공산당 본부를 습격했다. 공산당은 소련 군대와 비행기까지 동원,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80여명은 구속되었다. 당 간부들은 체포되었고, 정당은 곧 해체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또 하나의 기독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조만식(曺晩植·1883-1950) 장로와 이윤영(李允榮·1890∼1975) 목사가 주도했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던 조만식은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당을 조직하고 반공노선을 분명히 하는 한편 신탁통치도 반대했다.
소련군정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와 신탁통치 반대로 민족의 스승으로 불리던 조만식은 1946년 1월 5일 체포돼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조선민주당 역시 공산당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제자들은 월남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던 조만식 장로는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당수였던 이윤영은 1946년 2월 월남했고, 1948년 5·10 총선거 때 서울 종로 갑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의 요청으로 기도했던 이가 바로 이윤영 목사다.
1947년 11월에는 김화식(金化湜·1893∼1947)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자유당’을 창당하고자 했다.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민주당 결성이 준비되고 있을 때 평양에서는 기독교자유당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화식은 1945년 11월 초 정주 옥호동 약수(藥水)에서 몇 교회 지도자들과 자유당 정강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당 조직을 준비했다. 이것은 향후 이룩될 통일정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화식 목사 외에도 김관주 우경천 황봉찬 등이 이 일에 관여하였고, 고환규(高漢奎) 장로는 당수로 내정되어 있었다. 결성식은 1947년 11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감지한 내무서는 결당식을 하루 앞둔 11월 18일 김화식 목사 등 4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해 투옥하였다. ‘기독교자유당’은 공식적으로 창당되지도 못한 채 와해되고 말았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개 정당이 공산당에 의해 탄압을 받고 와해되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정당을 시도한 것은 공산정권에 맞서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순연(純然)한 열정이었다. 체포된 교회 지도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자의 길을 갔고 일부 인사들의 행방은 아직까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였다. 선택의 길은 분명했다. 공산주의에 순응하고 살든지 순교자의 길을 가거나 아니면 월남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북한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월남의 길은 피할 수 없었다. 6·25 발발 이전까지 월남한 기독교인은 7만∼8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북한의 기독교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전체 월남 인구를 정확히 산정하기는 어렵지만 최대 150만명이 월남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 다수가 기독교신자였다. 기독교반공주의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학습된 것이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http://cafe.daum.net/stigma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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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