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 입니까?
비록 지역 산악회이기는 하지만 정겨운 분들의 모임인 목동산악회와 함께 한 산행이.
그러니까 2014년 말 감악산 송년 산행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근 1년 반이 되었군요.
즐여서 '목산'이라고 부르는 이 산악회의 특장特長이라고 한다면 첫째 매주 꾸준히 산행을 이어가고 있고, 둘째 자신들의 전용차량이 있어 참석 대원들의 숫자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며, 셋째 산줄기 산행인 백두대간도 매주 마지막 주에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비록 50~60대의 좀 나이 드신 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어 조금은 노쇠老衰한 감이 없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 점이 단단한 팀웍을 갖게하고 끈끈한 정으로 뭉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목산'에서 북한산성 12성문 종주를 한다고 하면서 정중하게 산행 리딩을 요청해 옵니다.
사랑하는 마마님도 뵙고 싶던 차에 거부할 이유가 없군요.
이 목동 산악회와 제가 연緣을 맺은 게 아마 2009년 여름이었죠?
저는 백두대간의 대부분의 구간을 홀로 진행하여 6개월 12일만에 마무리를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대중 교통 수단이 아주 불편하기도 하며 국공파의 통제구간이기도 했던 '버리미기재 ~ 이화령' 구간을 진행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구간을 진행할까 고민을 하면서 인터넷을 뒤지던 중 마침 '목동산악회'라는 곳에서 무박산행으로 '버리미기제 ~은티고개'를 진행한다고 하여 어차피 그 분들의 날머리는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었으므로 버리미기재 구간의 신청을 하면서 목동 산악회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꾸준히 같은 방식의 산행을 고집하고 있는 목산의 북한산성 12성문 종주 날짜가 마침 제가 산행 시간이 비어 있는 6월 셋째 주이기도 하여 흔쾌히 참석을 알려드리고 2년 전 작성한 산행기를 카페 홈페이지에 올라고 나름 산행 준비를 합니다.
북한산성 개요
북한산성은 성남과 광주 그리고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에 대응하는 개념 맞습니다.
그리고 그 원천은 BC 18년 고구려 왕자 비류와 온조 등이 추모왕(동명성왕)이 부여에서 온 유리(황조가黃鳥歌와 관련인물)를 후사로 삼자 졸본을 떠나 한강 유역에 정착을 하여 백제를 건국하고 삼각산을 도읍으로 삼았는데 이게 위례성입니다.
AD 5년(온조왕 14년)에 하남 부근으로 도읍을 옮겨 이름을 그대로 위례성이라고 하였는데 이 위례가 백제말로 현재의 울타리 즉 성城이라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온조가 도읍한 삼각산835.6m과 추모왕이 도읍한 오녀산820m은 산세가 험난하다는 것과 한강과 혼강을 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고구려나 말갈 등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북한산성을 어느 정도 부분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이라 평가받는 선조는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단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도망을 갔었는데 이는 정묘 · 병자호란 때 도성결전을 포기하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갔던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집권자들의 도성과 산성에 대한 인식이 숙종 대에 이르러 재논의 되기 시작합니다.
즉 조선 왕조 최대의 바람둥이인 숙종28년(1702년)이 청나라에 갔던 사신들로부터 중국 절강성에 해적이 침입을 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면서 이런 해적들이 해류를 타고 조선에 침입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잇따른 재해로 백성들이 굶어죽고 사방으로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상황이어서 신하들로부터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어 답보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숙종 36년(1710) 해적들이 요동과 심양까지 침략을 했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지자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를 결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성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규모로 축성이 되게 된 것인데 결국 이 북한산성은 단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니 나약한 군주가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히는가를 역사는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삼각산인가? 아니면 북한산인가?
북한산(北漢山)은 서울특별시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 성북구· 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양주시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5.6m(2013년 6월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산으로, 이름은 조선 후기시대때 한성의 북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북한산은 1억 7천만년전에 형성되었으며, 이곳은 최초 백제땅으로 지역명으로 한산, 산의 명칭으로 31년 이후 횡악(橫岳)이라고 하였다. 고구려가 475년 백제로 부터 이곳을 정벌하여 지역명으로 북한산주이라 칭하고 산명은 그대로 횡악으로 불렀다.
신라가 이곳을 정벌하고(553년)난 후 557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라 칭하였다. 신라는 횡악을 부아악으로 고쳐부르고, 이곳 북한산주 부아악에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백제 초기에는 횡악(橫岳), 신라때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負兒岳)이라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는 부아산이라 불렀고, 고려 시대에는 993년 이후 때 부아봉(현 인수봉 810.5m), 중봉(현 백운대 835.6m), 국망봉(현 만경대 800.6m, 국토지리정보원) 세 봉우리가 모여 있어 삼각(三角)처럼 보여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려왔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에 측성한 중흥산성을 보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한성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로 점차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북한산'이란 별칭은 고려시대부터 천여 년 간 사용해온 '삼각산'이란 본래의 산 이름을 제치고 일반화 된 것이 1915년에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을 지낸 금서룡(今西龍)에 의한 것인데, 그는 삼각산의 유적을 조사하고 그 보고서의 명칭을 "경기도 고양군 북한산 유적 조사보고서"라고 하였던 바, 이 보고서에서 '북한산은 경성의 북방에 솟아 있는 조선의 명산으로, 이 산은 일명 삼각산으로도 일컫고 달리 화산 또는 화악이란 이름도 있다'고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유별나게 방위각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서울의 모든 대문들도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홍지)문 등의 고유 이름에 동서남북을 붙여 멋대로 동대문, 남대문 등의 이름을 불렀으나 우리 조상들은 유별나게 '북(北)'이란 한자에는 '달아나다 혹은 지다'라는 뜻의 배(北)의 음(音)도 가지고도 있어 그 글자를 달가워 하지 않아 북한산이라는 이름은 그저 남한산성을 축조한 다음에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북한산성이라고 부르기만 한 것이지 북한산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본인들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괜히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불렀겠고 백운대 위에 우리의 혈을 끊겠다고 쇠말뚝을 박은 게 심심해서였겠습니까.
고의적으로 혈을 끊고 지명이나 산이름을 바꾼 것 역시 침략의 저의가 분명하고 나아가 조선의 수도인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굳이 북한산으로 불러야 했던 것은 백두대간과 정맥이라는 우리 고유의 산줄기를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훼절시킨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산 행 개 요
1. 산행일시 : 2016. 06. 18. 토요일
2. 동행한 이 : 목동산악회
3. 산행 구간 : 삼각산(북한산) 12성문 종주 산행
4. 산행거리 : 14.25km (올해 누적 산행거리 : 694.78km)
구 간 | 거 리 | 출발시간 | 소요시간 | 비 고 |
산성매표소 |
| 07:35 |
| 170분 휴식 식사 |
대 서 문 | 1.15km | 07:52 | 17 | |
가사당암문 | 2.22 | 08:58 | 66 | |
부왕동암문 | 0.82 | 10:05 | 67 | |
청수동암문 | 1.34 | 11:01 | 56 | |
대 남 문 | 0.18 | 11:27 | 26 | |
대 성 문 | 0.33 | 12:13 | 46 | |
보 국 문 | 0.64 | 12:31 | 18 | |
대 동 문 | 0.71 | 12:53 | 22 | |
용 암 문 | 1.41 | 13:32 | 39 | |
백운봉암문 | 1.2 | 14:28 | 58 | |
북 문 | 1.23 | 15:24 | 56 | |
서 암 문 | 1.60 | 16:01 | 37 | |
산성매표소 | 1.42 | 16:28 | 27 | |
계 | 14.25km | 08:49 | 05:59 | 실 소요시간 |
산 행 기 록
목산의 출발지는 항상 변함없이 양천구청.
비어 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대원들과 인사를 나눕니다.
처음 뵙는 분들도 허다하고....
두 손을 꼭 잡아주는 마마님의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이 어느 덧 만차로 출발한 전용버스는 국립공원북한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행장을 갖추고 간단한 몸풀기를 한 다음 오늘 산행에 대한 개요를 설명해 드립니다.
마음같아서는 저 첫번째 봉인 의상봉을 올라 의상능선 ~ 북한산성 주능선 ~ 원효능선을 잇는 코스로 걷고 싶었지만 주지하다시피 용암사 ~ 의상봉 루트는 삼각산 최대의 난코스인지라 대원들의 '나이'를 고려하자는 풍경님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대서문 ~ 국녕사 ~ 가사동암문 루트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선두 리딩은 제가 맡고 중간은 만수대장님이 왔다갔다 하며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루트 이탈을 방지하며 후미는 풍경님이 맡아 진행하기로 합니다.
자, 그럼 오늘 산행을 시작합니다.
북한산성 분소 초소가 북한산성 기점의 들머리이자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되겠군요.
국립공원에 많은 예산이 할당 되는지 여기도 공사판이 벌어졌습니다.
의상봉으로 향하는 들머리 제1루트.
패스합니다.
용암사를 거쳐 의상봉으로 향하는 제2루트.
역시 패스.
그러고는 대서문입니다.
오늘 12성문 중 첫 성문입니다.
단체사진 촬영을 위하여 후미를 기다립니다.
예전의 대서문 사진도 보면서 내역도 읽어봅니다.
10여 분 정도 기다리다 단체 사진을 찍고 출발합니다.
성문안으로 들어서서 창능천 지류는 새마을교로 건넙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틀하면 대동사, 상운사 방향으로 걸어 삼각산의 최고봉인 백운대835.6m로 오르는 최단 코스가 되며 우틀하면 ①국녕사, ②비석거리를 거쳐 부왕사터, ③행궁터를 지나 청수동암문, ④금위영터를 지나 대성문, ⑤대성문, ⑥보국문, ⑦대동문, ⑧봉성암을 지나 북한산 대피소 등 성내 주요 루트로 진행할 수 있는 북한산성계곡 루트로 진행이 됩니다.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12성문 종주 산행의 두 번째 성문은 법용사 앞 다리를 건너,
우측에 있는 법용사 안으로 무조건 들어갑니다.
그러면 작은 규모의 법용사 계단을 지나 좌측의 대웅전을 거쳐 '국녕사' 안내판을 따라 오로지 외길을 따르면,
국내 최대의 '합장환희 여래불'이 눈길을 사로 잡는 국녕사에 도착하게 됩니다.
저 좌불의 높이만 27m나 되어 이것을 운반할 때 3등분으로 나눠 헬기로 옮겼다고 하는군요.
이 국녕사가 승영사찰僧營寺刹이라....
즉 성내의 군사 요충지에 사찰 13곳을 건립하여 산성의 수비와 성곽관리를 맡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산선 애에 중심이 되는 사찰은 고려 태조 왕건 때 건립된 중흥사로 이 사찰은 고려 말 승려 보우에 의하여 한 차례 중수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숭유 정책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숙종 때 이르러 무려 136칸이나 되는 클 절로 증축이 되었는데 이는 승려들이 국가의 역부役夫나 마찬가지여서 이 북한산성 축성 공사에 동원되었던 승려 숫자를 짐작케 해주는 수준입니다.
당시 이 중흥사가 승군대장의 지휘본부가 되어 북한산성 내의 중심 사찰이 되게 되었으며 이 산성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승영僧營으로 바뀌어 북한산성의 방위 임무를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승영僧營을 치영淄營이라고 하는데 북한치영에는 승군대장 1명과 승려 350명으로 편제되었다고 합니다.
승군들은 낮에는 군사훈련 밤에는 불경을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선애네는 승군들이 있던 사찰이 태고사 용암사 등 13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이 사찰들은 전통 가람배치 대신 성문 가까이에 위치하게 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케 하였음은 물론 국가의 명령이 있을 때 쉽게 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중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출가한 곳이라고 하지요.
후미 대원들을 기다리고 기념 촬영을 하는 등 20여 분을 머물다 다시 산행을 진행합니다.
만불전 뒤로 올라,
안전시설을 오르면,
뒤로 조망이 터집니다.
좌측부터 염초봉, 백운대 그리고 만경대와 용암봉.
그리고 그 앞 줄의 노적봉 맨 앞이 기린봉.
국녕사를 떠난 지 10분 정도 되니 갈림 이정표가 나옵니다.
우린 가사동암문을 찍어야 하므로 의상봉 쪽으로 올라,
가사동암문을 인증합니다.
암문暗門은 성곽에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어놓은 문으로 은밀하게 사람이 오가거나 물자를 이동시키던 문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진행은 대남문 방향입니다.
숲을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용출봉으로 오르는 암벽을 만납니다.
당연히 조망이 "뻥" 터집니다.
지호지간에 국녕사가 보이고....
좌측으로 의상봉501.5m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그에 맞대응하려는 듯이 원효봉510.8m이,
그 원효봉 우측으로 염초봉662.2m, 백운대835.6m, 만경대 800.6m 가 보이고, 만경대 앞에 노적봉715.5m.
그리고 맨 앞에 기린봉472.1m이 보입니다.
안전시설을 잡고 대원들이 힘차게 오르고 있고.....
의상봉 너머로 한북정맥 상의 노고산487m을 봅니다.
날이 좋으면 그 우측으로 앵무봉이나 개명산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군요.
날씨가 좀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안전시설을 이용하여,
용혈봉으로 오릅니다.
조금 전 지나온 용출봉 뒤로 의상봉이 보이고 그 뒤 멀리 한북정맥 상의 노고산이 보입니다.
바로 뒤가 증취봉이고 그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나월봉이고 그 뒤 높게 솟은 봉이 남장대와 문수봉이겠군요.
그리고 그 우측으로...
문수봉658.7m에서 흘러내린 비봉능선은 승가봉을 세운 뒤 중앙에 볼록한 비봉527.4을 빚고 향로봉505.m에서 그 뒤로는 탕춘대능선으로 진행을 하고 우측으로는 속칭 족두리봉으로 내려가겠군요.
탕춘대성은 도성과 이 북한산성을 잇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양곡 10만 석을 비축할 평창平倉의 물자를 이 탕춘대 성곽을 통하여 운송하여 비봉능선을 거쳐 행궁으로 운송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 평창이 있었던 곳이 지금의 평창동이고...
비봉 앞으로 사모바위가 선명하건만 사진으로는 영....
저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있어서 비봉碑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으로 순수巡狩라는 이름에서 보듯 신라 진흥왕은 스스로를 황제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즉 순수巡狩라는 말이 황제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보고받는 의례를 일컫는 말인데 이 순수비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짐朕이라는 말이나 연호 등의 글귀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 다음 봉우리인 증취봉은 큰 바위 뒤로 돌아가야 이 표지목을 볼 수 있고.....
바람이 시원한 이곳에서 대원들을 조금 또 기다리면서 백운대를 봅니다.
좌로부터 원효능선라인이 뚜렸하고 앞의 기린봉을 따라 올라 노적봉도 확실합니다.
그러니 이쪽에서 볼 때 백운대, 만경대에 노적봉을 합하여 삼각산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 증취봉은 왜 이렇게 어려운 한자어를 쓰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증취란 말이 떡시루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냥 일반적인 봉우리 이름인 시루봉이라고 했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부른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니....
부왕동암문 가는 길에 큰 바위옆을 지납니다.
세 번 째 성문인 부암동암문을 지납니다.
삼천사 계곡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아주 시원하군요.
나월봉 오르는 길은 이렇게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사실 이 길로 올라 가도 크게 위험한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국공파의 업무에 협조하는 차원에서 좌측으로 우회하기로 합니다.
그 우횟길에서 이제 얼굴을 내미는 인수봉을 봅니다.
안전시설을 따라 진행하면,
나월봉에서 내려오는 길을 만나게 됩니다.
국공파가 나월봉을 통제하는 이유는 봉 정상에서의 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내려오는 갈에 변변한 안전시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좁은 통로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인데....
어쨌든 후미로 오는 대원들도 다 나월봉을 통과하여 오는군요.
20여 분을 대원들이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삼천사 계곡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
나한봉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봅니다.
나월봉과 좌측의 의상봉.
가운데 좌측 봉우리가 비봉능선의 비봉527.4m.
앞 라인이 승가봉 옆애서 가지를 친 매봉(응봉鷹峰)능선.
이 삼각산에서 대표적으로 잘못된 산 이름이 이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부르는 것과 시루봉을 증취봉甑炊峰으로 그리고 저 매봉을 응봉鷹峰으로 부르는 것 등인데 일본인들이 개명해 놓은 이 이름들이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그대로 존치되어 있다니 정말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나한봉 가는 길은 문화재 발굴 및 정비관계로 막아놓고....
좌측으로 우회하여 그 봉을 지납니다.
이른바 사면치기라고 하지요.
봉을 넘어서 마루금을 따라 가야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봉 사면으로 진행한다고 하여....
산줄기를 할 때 왕왕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새로 성곽을 복원하고 있는 현장을 지납니다.
비봉능선은,
좌측 문수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줄기이고...
안전시설이 되어 있는 가파른 바위봉을 치고 올라가면,
2등급삼각점(서울22)이 있는 남장대715.5m에 오르고,
여기서 우틀하면,
비봉능선과 이어지는,
청수동암문으로 오늘 4번째 성문입니다.
청수동靑水洞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푸른 물과는 거리가 있는 고개인데 이런 이름까지 붙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후미를 기다리느라 좀 쉬었다 가기로 합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후미와 교신을 끝내고 오늘 점심은 대남문 옆 공터에서 먹고 가기로 합니다.
이 대남문에서 후미팀들은 하산을 하기로 하고 12성문 풀코스 주자들은 지원자에 한해 성문을 이어가기로 합니다.
문수봉727m은 사면치기로 진행하고...
예전에 친구들과 산행을 할 때 무조건 문수봉으로 끌고 올라갔다가 나중에 이 지름길이 있음을 알게 된 친구로부터 모진(?) 푸념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곳입니다.
이 문수봉이 이 부근에서는 최고봉으로 12성문을 진행하는 저희로서는 북한산성 주능선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줄기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한북정맥에서 가지를 친 매봉단맥이 여기서 우측으로 의상여맥을 하나 가지치고 계속하여 비봉~탕춘대능선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되겠고...
물론 이 탕춘대능선은 홍지문 부근에서 사전으로 잠겨 그 맥이 다하지만 강북 6산(무악재 너머 안산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도봉산~사패산~울대고개의 32.3km)을 하는 이들이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있는 창의문이 10시에 문을 여는 고로 진행시간을 고려하여 부득이 인왕산 ~ 홍지문 ~ 당춘대 루트를 이용하게 되는데 이때 이 길로 올라와 잠시 후 만날 대성문에서 다시 오리지널 강북 6산길과 만나게 되는 것이죠.
일종의 타협책입니다.
5번째 성문이자 이제 암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제법 누각이 있는 4대문 중 하나인 대남문으로 들어섭니다.
좌측 숲으로 들어가 그늘 아래 자리를 폅니다.
이런...
얼려온 막걸리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투덜거리며 싸가지고 온 빵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후미 그룹에서는 선두로 사랑하는 마마님께서 내려오십니다.
75세라는 연세가 무색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분.
인터넷을 이용하시고 카페에 글을 올리시고 산행기까지 빠짐없이 작성하시는 분.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아침에 버스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한 번은 목산에서 뒷풀이로 회까지 먹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저는 부모님이 충북 충주 분들이셔서 고등어, 꽁치, 갈치 이외에는 생선이라는 것을 사회에 나와서야 알게 되었고 회라는 것도 한참 뒤에야 먹어보게 되었습니다."
"나도 그랬어요. 진주라는 곳이 워낙 생선이 귀한 곳이 되놔서..."
"아니, 진주는 바닷가 바로 옆 아닙니까?"
마마님 曰.
"그래도 삼천포나 통영까지 가려면 교통이 좋지 않아서..."
"아 그렇군요. 그게 바로 낙남정맥이 가로 막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낙남정맥이 남강을 가로 막고 있는 울타리가 되어서 예전 진주 사람들이 바닷가로 가려면 산을 넘어 가야 했기 때문에 쉽지가 않았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저는 빵과 초밥으로 어느 정도 요기가 된 뒤였는데 뒤늦게 도착하신 마마님께서 가방을 여시고는 찰밥 한 통을 건네 주십니다.
저를 위해 정성스럽게 싸오신 것입니다.
아뿔사...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분명 배가 불렀었는데도 마치 그 찰밥이 사랑으로 기화가 되었는지 별 부담없이 먹게 되더군요.
마마님.
정말이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풍경님이 대신 지고 오신 마마님표 슬러쉬 장수 막걸리.
"마마님 이 막걸리는 수입쌀로 빚은 게 아니고 국산쌀로 빚은 장수 막걸리인데 이건 아무 데서나 살 수 없는 건데요?"
"내가 우리 사위 줄 거라고 제일 좋은 막걸리 두 통을 달라고 하니까 마트 직원이 이걸 주더구만...."
어련하시겠습니까....
마마님 덕분에 대원들과 저.
그 정성이 담뿍 담긴 장수 막걸리로 기력을 회복하여 쉽게 완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2R 완주할 대원들이 12명으로 압축이 됩니다.
나머지 분들은 여기서 좀 더 쉬시다가 풍경님과 함께 하산을 하기로 하시고....
B조 분들께 이따 만나기로 인사드리고,
대성문을 향합니다.
6번째 문인 대성문을 찍고....
1992년 복원된 이 대성문은 북한산성의 성문 중 가장 그 규모가 크다고 하죠.
이 성문이 가장 큰 이유는 왕을 위한 문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경복궁을 떠난 왕이 보토현을 거쳐 산성 안 행궁으로 오르기 가장 편한 루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단 한번도 이루트를 사용해 보지도 않았지만....
참고로 보토현補土峴은 지금의 북악터널 위의 고개입니다.
그리고 대성문의 '성'자의 한자어가 成이 아니고 城이라는 것도 주위해서 보아야 할 글자입니다.
이 대성문을 통하여 나가면 형제봉능선과 이어지게 되는데 그 능선은 큰바위 ~ 북악산 매표소나 형제봉 매표소로 나가게 되고 마루금을 타면 북악산 ~ 인왕산 루트로 이어지는 매봉단맥의 오리지널 마루금이 됩니다.
강북6산(약 32.3km) 혹은 강북 9산(약75km)을 하는 이들이 북악산에서 올라오는 길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죽은 성완종씨의 주검이 발견된 곳이 북악산 매표소 부근이기도 하고...
보국문을 향합니다.
보국문을 진행하면서 성곽 너머로 형제봉을 봅니다.
이렇게 개스가 자욱한 분위기에서 보니 금남정맥에 있는 마이산의 두 봉을 보는 것도 같군요.
저 형제봉에서 보면 보현봉과 산성주능선 그리고 칼바위능선까지 한눈에 볼 수 있을 텐데...
이제 7번째 문인 보국문입니다.
축성 당시에는 동암문이었는데 부근에 있던 사찰인 보국사의 이름을 따서 보국문으로 버뀌게 되었다는군요.
성문 안쪽 좌측의 돌을 보면 한자로 변수 김아무개가 신묘사월일시始하여 구월에 그 역을 필하였다는 글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칼바위 능선 갈림길을 지나면,
여덟번째 문인 대동문입니다.
예전에는 이 일대를 석가령이라고 불렀다 하고 성호 이익은 석가령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1박 2일의 산행기를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라는 문집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깨끗하게 정비된 화장실에서 볼일들도 보느라 잠시 휴식.
바람따라님은 오늘따라 정강이에 근육이상을 느끼신다고 하시고....
20분 정도 쉬었다 진행합니다.
삼개 장대將臺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장대가 있는 시단봉591.8m을 지나면서 이제는 녹았을 법한 막걸리 통을 열어보니 더위에 다 녹았군요.
대원들과 함께 비웁니다.
완전한 슬러쉬.
좌측으로,
북한산 대피소를 보다보면,
9번째 문인 용암문을 지나게 됩니다.
울창한 숲으로 인해 약간 어두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용암암문이었는데 용암사 덕에 용암문이 되었고 도선사로 내려가는 최단코스가 되겠죠.
저도 한 번 이 루트로 힘들게 오른 기억이 있습니다.
백운대로 향하는 이 길이 좀 녹록치 않습니다.
어쩌면 편하게 오던 길이 갑자기 악다구니를 써야 하는 모양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암봉과 만경대,
그리고 노적봉 때문입니다.
노적봉에서 뒤에 오는 분들을 위해 좀 쉬어가기로 합니다.
산식도 먹고 이바구도 떨고....
20여 분 좀 넘게 쉬다가 갑니다.
백운대가 보이고....
좌측 의상봉과 우측 원효봉....
그리고 연이어 나타나는 염초봉.
그리고 그 염초봉과 상원사 사이에 절이 하나 보입니다.
상운사입니다.
상운사 스라브 지붕 헬기장 같은 같은 곳에 '卍'자 표시가 되어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따 북문에 오르기 위하여 지나갈 곳입니다.
노적봉의 뒷모습.
아까 용출봉이니 용암봉에서 보았던 노적봉의 하얀 속살은 온데간데 없고....
백운대만은 여전합니다.
노적봉이 저런 이중적인 행태 때문에 삼각산에서 탈락이 되고 인수봉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것은 아닌가요?
북한산성 주릉의 마지막 문인 위문衛門입니다.
백운봉암문이라고 붙여놨네요.
일제강점기때 부터 위문으로 불르던 것을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려놨군요.
아주 타당한 행정입니다.
그러면 빨리 증취봉이나 북한산 그리고 응봉도 빨리 바꾸셔야지......
15분 정도 후미 그룹을 기다립니다.
여기서 다섯 분은 상황을 보면서 진행을 하신다고 하여 7명만 완주를 위해 내려가기로 합니다.
우측으로 예전 백운대 길을 지나,
쉼터 두어 개를 지나니,
대동사입구입니다.
사실 오리지널 북문 오름길은 100여 m 더 내려가서 우틀하여 올라가야 하지만 대원들이 조금 힘들어 하시는 부분도 있는 거 같아 잠시 지름길로 가기 위하여 대동사에서 우틀합니다.
여기서 tip 하나!
북한산성 안의 모든 사찰의 일주문에는 다 '삼각산 OO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데 유독 이 대동사만큼은 북한산영취봉대동사北漢山靈鷲峯大東寺라고 하여 '북한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일주문을 설치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것입니다.
우틀하여,
대동사를 지나면서 좌틀합니다.
그러면 통행금지라는 안내판을 지나 작은 실개울 하나를 건너게 됩니다.
그러고는 상운사입니다.
아까 국녕사는 만물전이 있었는데 이 상운사는 천불전이군요.
천 분의 부처님을 모셔놨다는 이야기.
그 천불전 지붕이 아까 노적봉을 지나며 보았던 헬기장 같은 곳의 '卍'자 지붕.
바로 이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진행은 원래 안으로 들어가 좌측 삼성각 뒤로 진행하였는데 진돗개 한 마리가 산꾼들의 진입을 막았고 절에서도 그 루트를 봉쇄하였으며 최근에는 국공파들이 출입을 통제해 출입금지 구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는 수없이 진행은 이 안내판 좌측으로 윤형 철조망이 훼손되어 있고 그 뒤로 희미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부도촌과 큰 바위를 통과하면,
로프가 나오고 다시 정규 등로입니다.
한 300m 정도 잘라먹었습니다.
그러면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오늘 11번째의 성문이자 홍예虹霓의 멋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이중문 형태의 북문입니다.
원래 이 문은 대서문, 대동문, 대남문같이 큰 문이었으나 '大'자를 붙이지 않은 것은 순전히 조선조의 관례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측에 있는 국공파 초소에는 공단 직원이 혹시나 있을 염초봉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북문에서 좌틀하여,
원효봉으로 오르면서 뒤를 돌아봅니다.
연초봉 그 뒤로 백운대 구 우측으로 만경대와 용암봉.
맨 우측 노적봉.
원효봉입니다.
그런데 용암봉 부근으로 헬기 한 대가 비행을 하고 있습니다.
아까 만경대 부근으로 경찰산악구조대가 뛰어 오르던데....
의상봉과 그 뒤로 용혈봉 등 의상봉 라인.
뒤로 상장능선.
그 뒤의 오봉라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약간은 초라한 원효암을 지나,
성량지 그러니까 엣 군인들 초소를 지나,
오늘의 마지막 성문인 서암문입니다.
산성내의 시체나 나가는 문이라고 하여 시구문이라고도 하는 데 한양에서는 광희문과 서소문이 그 역할을 하였다고 하고.....
이제 다 왔습니다.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둘레길과 만나고....
수문터를 지나 오늘 처음 들머리로 이용했던,
북한산성 내표소가 있던 관리사무소 앞에서 끝까지 종주를 한 7명의 대원들이 격려의 악수를 나눕니다.
오늘 산행 중 서운했던 것이나 오해가 있었던 부분은 안산으로 만족하니 이 악수로 모든 것을 털어냅니다.
그런데 이때 "형님"하는 외침이 들립니다.
만수대장님이 바람따라 님 등 5분과 함께 안전하게 백운대 루트에서 나머지 두 개문은 포기한 채 하산을 하여 우리와 다시 합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분들과도 악수를 하고는 미리 하산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대원들과 만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아니나다를까 마나님께서 완주를 축하해 주시면서 대원들과 알일이 축하 악수를 나눠주십니다.
오늘 산행 뒷풀이는 의정부의 유명한 맛집 '强男장어'로 옮겨 푸짐하게 맛깔난 음식과 하산주로 마무리를 합니다.
무사하게 하산을 하여 주신 대원 모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뒷풀이까지 깔끔하게 책임을 져 주신 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중간과 뒤에서 대원들의 안전 산행을 책임지신 만수대장님과 픙경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산행은 개인적으로 마마님의 사랑을 만끽한 하루였고 이정희 선생님의 찬조로 하루가 더욱 빛났습니다.
그리고 집행부에서 요청하신 백두대간 산행은 제 산행 일정을 고려하여 만수대장님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끝까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함께해서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현오님!
따라 걷기만 했던 산길ㅡ
상세한 글과 사진들이
12성문의 발자욱들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ᆞ
감사합니다ᆞ
뿌듯합니다ᆞ
여유있는 산행 참 멋져보였습니다.
시간 되면 더 좋은 코스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한 산행기 읽으면서
감동 입니다
산행일시 2015년 으로 되었네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
힘드셨죠?
그래도 꾸준히 걸으시는 걸 보고 감동 받았습니다.
조금 힘들면 포기하는 게 일반인데. .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대단하십니다.
가끔식 가던 삼각산에 대하여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글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두고 두고 보아야 알것 같은 폭 넓은 설명에
놀라움을 금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두번째 만남이지만 만날 때 마다
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읽는 분들에게 산을 보는 눈을 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 걸 알아주시는 것만해도 상당한 수준(?)이시고요.
기회되면 또 뵙겠습니다.
현오님~
산행기를 읽을때마다 감동입니다.
산길을 걸으면서 산새들의 노래소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길,기암괴석,계곡의 물 소리,아름다운 야생화.....
이것으로 감격하고 만족하였는데~
산행에도 차원이 느껴집니다.
두고두고 몇번 더 읽어야만 ~
감사합니다.
넘치는 마마님의 사랑 속에 풍요롭고 산뜻한 산행을 무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코스에서 또 뵐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현오 시간 나는대로 합산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선량하고 온화하고 반듯하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 목산산우님들이 좋습니다.
대자연의 법칙과 숨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언젠가
새벽부터 홀로 산행으로
성문 종주기를
올리신걸
열심히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
오늘도
만만찮은 장문 종주기를
접해 봅니다
그 발자취를 내가 직접 밟은
탓이겠지요
왠지 정감있고
역시 체험은 산교육이라는 걸
새삼 또 한번 실감합니다
울 막내 동생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환영해줄때 자주
뵈옵지요~~~
바람따라~~
바람따라님~
또 시적인 댓글이~
읽을 때마다 문학소녀임을 확인합니다.
상큼하고 맛있는 글 잘 봤습니다.
언제까지나 목산회에서 한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어여삐 봐주셔서 감사드리고...
시간을 내서 자주 함산하도록 하지요.
님도 항상 나오시는거지요?
@현오 바람따라는
목산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마마님과 함께
정예멤버 이옵니다
@들꽃고양 맞아요^^
바람따라님과 저는 산 만큼이나 목산산우님들이 좋아서 매번 나섭니다.
산우님들의 맑은 눈동자를 품고,
미소짓는 얼굴을 품고,
따뜻한 말한마디를 품고,
맑고 푸른하늘을 품고,
아름다운 야생화를 품고,
싱그러운 수풀 속에서 행복을 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