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7개월 간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2021-02-11 (목)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28) 제주 4.3의 슬픈 역사
7년7개월 간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1949년 겨울 1월17일 북촌리 주민 학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 되었으나 어린 아이들의 시신은 ‘너븐숭이’ 애기무덤에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7년7개월 간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간 밭이라는 뜻이다. 4.3 학살 사건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로 기록된 1949년 겨울 북촌대학살 현장의 한곳이 바로 옴팡밭이다. 이 밭의 가운데 있는 작은 봉분이 당시 1월17일 희생된 8살 김성국 소년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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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안에 있는 목시물 굴의 동쪽 입구 작은 구멍이 나무뿌리 옆에 숨겨져 있다. 당시 선흘리 주민 200명 이상이 집에 있으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임시 먹을 것을 들고 목시물 굴에 숨어들었다. 1948년 11월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가 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을 나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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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7개월 간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1948년 4.3 이후 주민들의 피난처로 사용되었다는 서우봉 오름에 있는 진지동굴 안의 모습. 함덕 해수욕장 옆에 있다. 4.3 당시 북촌 주민들 뿐만 아니라 함덕 주민들도 숨었던 장소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1948년 12월26일경 4~5명의 여성들이 절벽 위에서 총살당하는 등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곳이다. 방문객들이 동굴을 들여다보고 서둘러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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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제주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했던 ‘큰넓궤’ 굴 입구.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이 야산으로 흩어져 숨어 있다가 이곳으로 온 뒤 40여 일이 지나 토벌대에게 발각돼 한라산으로 들어갔으나 결국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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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의 촬영 장소인 4.3 당시 제주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했던 ‘도엣궤’ 굴 입구. 토벌대를 피해서 이곳으로 왔던 주민들은 40여 일 후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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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넓궤’ 굴 앞에 핀 4.3의 상징 동백꽃. 동백꽃이 4.3 희생자 애도는 물론, 이를 기억하고 평화와 인권을 생각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된 것은 강요배 화백이 1990년대 초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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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봉개동의 제주 4.3 평화공원 안에 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이 행방불명인 4.3 사건 희생자들을 위해 특별히 개인 표석들을 설치했다. 그 뒤로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인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대부분 4.3 사건의 와중에 체포되어 육지 각 지역의 형무소에 수감된 후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이다. 이들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이어 총살되어 암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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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 본토로 이송되어 피살된 영남지역(위) 및 호남지역(아래)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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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 북촌에 들어온 토벌대가 사살한 북촌 주민 443명(현재 집계 사망자)의 집단 학살 현장인 북촌초등학교에 바위로 된 비석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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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넓궤 4.3 유적지의 안내석. 동백꽃이 4.3의 상징이 된 것은 강요배 화백이 1990년대 초 ‘동백꽃 지다’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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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의 석양 모습. 제주 4.3 사건 당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어린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조차도 이유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 명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7년7개월 간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던 제주도
20세기 들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전 세계에 친미 국가들을 세우는 정책을 시작했으나 대부분이 실패해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이 수년 간 지원하던 중국 국민당(中國國民黨)은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에 밀려 대만으로 쫓겨 갔고, 월남은 1975년 4월30일 패망할 때까지 미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이란에서는 수년간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성공 이후로는 미국의 설자리가 없어졌다.
대한민국에서도 미국의 세금으로 친미 국가를 세우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1945년 9월 8일 마침내 미군이 인천에 도착해서 3년간의 군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1948년 제주 4.3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이 민중봉기가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거부와 주민 학살로 이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많은 비극이 제주에서 있었다.
제주에서는 일제시대 때 제주와 일본을 주기적으로 왕래하는 여객선은 물론 타 지역과 교류가 잦은 밀선들이 있다 보니 바깥 세상의 지식 전달이 활발했다. 무오년(戊午年) 1918년 10월7일 제주도 도순리 법정사 일원에서 일어난 무장항일운동도 1919년 3.1 운동 보다 5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일본인 축출과 국권회복을 주장하며 일으킨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
제주 주민들은 1945년 8월15일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겨우 해방된 우리나라가 38선으로 갈라져서 반토막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1948년 5.10 단선거·단정부 반대 운동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전국에서 인민위원회 조직이 가장 잘 유지되고 있던 제주도는 원래 전라도 관할이었는데, 미군정은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주도(島, 섬)을 제주도(道, 도)로 1946년 8월1일 승격시키며 경찰과 군인들을 제주도(道)에 주둔시킬 명분을 마련해놨다.
1947년 3월1일 6명의 제주 주민이 경찰 발포로 숨지는 사건으로 시작된 제주 주민 탄압은 1948년 4월3일(4.3) 남로당 제주도 당원들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제주 4.3 사건’이 시작됐고, 같은 해 겨울부터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로 변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중산간 마을(한라산 중턱에 있는 마을)들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토벌대의 방화로 불태워져 3만9,000여 가옥들이 잿더미로 변했고, 이재민이 된 9만여 명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생고생을 했다. 열약한 섬 생활의 공동체가 파괴된 것이다.
1948년 겨울에 토벌대를 피해서 갈 데가 없는 주민들이 숨어든 곳은 땅굴이였다. 4.3 당시 제주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했던 ‘큰넓궤’ 굴은 1948년 11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이 야산으로 흩어져 숨어 있다가 추위를 피해서 들어갔던 곳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위치한 ‘큰넓게’ 굴과 바로 옆 ‘도엣궤’ 굴에서도 주민들이 토벌대 피해서 두 달 정도 숨어 살다가 결국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생포된 후 학살됐다. 추운 겨울에 앉기도 눕기도 불편한 자연 석굴속에서의 삶은 지슬(감자를 부르는 제주도말)을 나누어 먹는 4.3 당시 주민들을 기록한 영화 ‘지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의 촬영 장소인 도엣궤 굴에서, 군인들이 어린 아이들과 여성, 노인 민간인들을 총으로 쏴서 죽인 우리 민족의 비극 중 비극이 1948년 겨울 제주도에서 있었던 것이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 안에 있는 목시물 굴은 선흘리 주민 200여 명 이상이 집에 있으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임시로 먹을 것을 들고 숨었던 곳이다. 1948년 11월26일 아침,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가 주민들이 은신해 있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을 나오게 했다.
목시물 굴에 숨었던 당시 목격자는 “군인들과 굴 안에 있던 청년이 말을 주고받으며 몇 시간씩 대치했다. 결국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굴 내부의 의견이 모아지면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벌써 굴 밖에는 총살당한 시신들이 뒹굴고 있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안된 어린아이도 죽었고 50세 넘은 노인도 쓰러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군인들은 바로 전날 고문을 통해서 목시물 굴의 위치를 가르쳐준 주민도 현장에서 총살했다.
북촌리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인 북촌에 들어온 토벌대는 1949년 1월17일 북촌초등학교와 주변 인근 너븐숭이(‘넓은 돌밭’이라는 뜻의 제주도말)와 주변 ‘옴팡밭’(오목하게 쏙 들어간 있는 밭)에서 북촌 주민 443명(현재 집계 사망자)을 집단학살했다. 북촌은 4.3 주민 학살사건의 최대 피해 마을이다.
전체 집단학살 피해자의 신분과 숫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알지 못할 많은 시신들이 토벌군들에 의해서 바다에 버려졌고, 전 가족이 피살된 경우에는 신고하는 사람도 없어 신원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죽은 가족과 친척, 동네 사람들의 이름도 언급을 못하다보니 잊혀진 이름들이 많다.
토벌대는 연좌제(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특정한 관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 또는 불이익을 가하는 제도)를 적용해서 젊은이들이 사라진 집안의 가족들을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까지도 예외 없이 총살했다. 1948년 12월10일 경찰은 하귀리 마을 가족 가운데 남자가 없는 집안의 사람들을 끌어내서 임산부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4.3 사태는 1947년 3.1절 사건 이후 7년7개월만인 1954년 9월21일 한라산 입산을 금하는 금족령(禁足令)이 해제되면서 일단락됐다. 금족령은 외출을 못하게 벌하는 명령인데,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어린아이들과 여성, 노인들조차도 이유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 명이 집단으로 희생됐다.
한라산 입산을 금하는 금족령이 해제된 후에도 주민들의 불이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4.3 학살 피해자들은 한국전쟁 이후 군사독재 시절 동안 연좌제 피해를 계속 당했다. 신원조회에 걸려 육사에 합격하고도 못 들어가거나,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할 때 여권을 발급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4.3 사건 후 고향을 등지고 아예 육지나 일본으로 도망간 주민들도 많다. 일본 오사카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는 미등록자를 포함해서 15만 명이 넘는다.
제주 4.3 민중봉기 토벌과정에서 악명 높은 역할을 했던 서북청년회의 이념적 성향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반북 노선을 따랐고, 활동 자금은 미 군정청의 원조물자 유출을 통해 마련하고, 봉급 없이 경찰 보조 역할을 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위하여 갈취와 약탈, 폭행을 자행했다고 한다.
탈북 출신 서북청년회원들은 남조선노동당 무장대와는 정부군과 경찰의 역할로 맞섰는데, 우리 민족의 지도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간 중 독립운동의 리더였던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암살자 안두희(安斗熙, 1917~1996) 역시 서북청년회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인천에서 버스기사 박기서(朴琦緖)에게 ‘정의봉(正義棒)’이라고 쓴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1949년 미국 비밀문서는 평안남도 평양 출신, 태평양 전쟁 당시 특별지원병 제1기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준위로 복무하였고 제주 4.3 사건 당시 제2연대장으로 활동하며 초토화작전에 책임이 있는 “함병선이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했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에 일반인들을 (불법적으로) 군법회의로 처리해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낸 제주도민 2,500여 명을 1950년 7월경에 집단 학살했다.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 평화공원 안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지석에는 본토로 이송되어서 피살된 제주도민을 기리는 표지석이 있다.
2000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의 ‘4.3 특별법’ 제정 서명에 이어, 2003년 10월15일 4.3 사건을 ‘국가 공권력의 인권 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같은해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라마다 호텔에서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공식 선포했다.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우리·문화·역사 Visual History & Culture of Korea 전체 프로젝트 모음은 다음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kang.or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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