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2월, 이름조차 생소한 외진 마을인 나주시 반남면에 일단의 일본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소속의 다니이 일행이었다
다니이는 이 일대에 산재한 수십기의 고분을 조사,발굴한후 마차11대분량의 유물을 싣고 갔다
그는 이후 단 한장짜리의 보고서를 발표한다
...(전략)여기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대도(大刀), 및 도자(刀子)]과 도끼, 창, 화살, 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이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히 제출하겠다."
다니이가 훗날 내놓겠다던 보고서는 끝내 제출되지 않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63620E49CE535623)
반남고분군, 고대인은 죽은자의 영역을 신성시해서 무덤양식을 쉽게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묘제의 변화는 권력집단의 자리바꿈을 의미한다 -------
그로부터 20년후인 1938년, 일제는 다시한번 조사단을 파견, 반남면일대를 발굴 조사했는데, 당시 조사단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고 회고할 정도로
고분군은 망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보고서를 본 도굴꾼들이 몰려들어 무차별적 도굴이 자행된 결과,완전한 봉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조사단도 겨우 2기의 옹관을 수습했을 뿐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6F241949CE5251E1)
------ 옹관묘(=독무덤) ,두 옹관을 끼워 놓은 합구식같은 경우 길이가 2-3M에 달하고 무게가 400-
500kg까지 나가는 것도 있다 이런 대형 옹관은 제작이 매우 어려워 지금도 만들지를 못한다-
당시 일본사학계의 핵심과제중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조선병합의 정당성을
고토회복으로 둘러댈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야고분군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과 조사가 이루어 졌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런데 반남고분군에서왜인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될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형호재를 가지고 있던 고분군에 대해 일제는 침묵했다 보고서의 내용이 알려져서 도굴의
위험성이 커졌는데,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고 방치하였다 왜 그랬을까?
후세인들은 추측만 할뿐이다..그때의 유물이 오히려 일본에 불리한 것들이 아니었을까하고...
![](https://t1.daumcdn.net/cfile/blog/1361CB0E49CE561635)
신촌리9호분에서 일본인들에게 발견된 금동관(국보 295호)
![](https://t1.daumcdn.net/cfile/blog/172B820F49CE57144F)
금동신발
![](https://t1.daumcdn.net/cfile/blog/12633A0E49CE573113)
환두대도--하나같이 지배층의 강력한 권위를 나타내는 물건들이다
1995년 전남대박물관은 나주 복암리고분군에 대한 정비복원사업을 맡았다 특히 이 중 3호분은 안동권씨의
선산이었는데, 분구가 계속 유실되자 복원계획을 세웠다
포클레인으로 표토를 살짝 걷어내자, 큰 판석이 노출되었고판석 사이에 조그만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내부를 들여다 보니 희미하게 옹관같은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처녀분이었다
여기서 3m에 달하는 대형옹관 26기를 비롯해 금동신발과 장식대도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졌다
특히 이고분은 하나의 봉분(분구)에 41기의 무덤을 3층 아파트처럼 조성하였다 이는 동일집단이
3-7세기 사이 400년동안 고분을 가꾸어 왔다는 것으로 영산강지역 무덤의 변천양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29B90F49CE57B642)
복암리 3호분
삼국사기등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 영산강지역의 옹관묘세력들...한국고대사 최대의 미스테리인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살다가 어느 때 사라져 갔을까
또한 5세기말-6세기초, 영산강유역에 홀연히 등장했다가 50년도 안돼 갑자기 사리진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대표적,독자적 묘제로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6세기때 절정에 이르다가 7세기에 소멸된다
그런 전방후원분이 영산강유역에서 지금까지 14기 정도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본인이 영산강유역에 진출했다는
소리인가
역사기록은 불충분한데 심상치 않은 고고학 자료는 나오고…. 논점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장악시기와, 이른바 마한 혹은 마한의 잔존세력이라 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실체, 그리고 이 일대에서 등장하는 왜계의 무덤과 유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모아졌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608A1149CE5D6201)
함평 신덕의 전방후원분
![](https://t1.daumcdn.net/cfile/blog/20610E0E49CE583823)
--- 전방후원분으로 추정되는 덕산리 고분,과거에는 사각형부분과 원형부분이
합쳐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
<영산강유역 묘제의 변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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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
4세기 |
5세기 |
6세기 |
대형옹관묘 |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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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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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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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규슈 |
------ 백제식출현 |
전방후원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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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현-- |
--소멸 |
정치적으로 중요한사건 발생기 1-----2----------3-------------4
1.백제 근초고왕이 전남해안지역까지 복속시킴(강단사학계주장:369년)
2.왜가 고구려와 싸움에서 대패함(400년,404년 광개토왕 비문)
3.백제 웅진천도(475년)
4.백제 사비천도및 지방행정체제개편(기존의 22담로제에서 5방제로 개편:6세기 중반)
영산강유역은 369년 근초고왕때 백제에 병합되었고 5세기중엽부터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석실분(=돌방무덤)이 유행했다는 것이 학계(=강단사학계)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5세기말까지 이지역의 특징으로 남아 있는 대형옹관묘는 백제 간접지배하의 토착세력무덤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5세기말부터 축조된 석실분은 백제의 직접통치에 따라파견된 백제관리들의 묘제라는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2A220F49CE58F232)
- 옹관묘에서 백제무덤양식인 석실분으로 변해가는과정을 보여준다 석실에 옹관이 안치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의 고고학 성과에 따라 다양한 반론들이 쏟아졌다
먼저 5세기말에 등장하는 석실분은 백제식이 아닌 일본규슈양식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5세기말부터 6세기초 50년간 영산강유역에 홀연히 나타나 갑자기 사라진 전방후원분(앞쪽은 네모지고 뒤쪽은 원형인 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계와 가야계유물의 출토는 어떻게 볼것인가
![](https://t1.daumcdn.net/cfile/blog/1504050C49CE59E0FB)
--------광주시 월계동 전방후원분(=장고분), 무덤둘레를 따라서 깊이1-2M의 도랑을 만들었다 석실은
원형부에 있고 관 혹은 도랑주위에 원통형 토기를 파묻었다 고대 일본의 대표적 묘제로 한일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79A11449CE5CC3B7)
관이나 도랑주위에 배열했던 원통형토기
이런 배경하에서 일각에서는 영산강 독자세력설을 주장한다 백제식 석실분이 도입되는 6세기 중엽까지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세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 독자세력을 마한 잔존세력 혹은 왜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왜는 우리민족의 한갈래로 한반도의 서남부에 상주했던 강대한 세력이었다 백제와 신라등 주변국을
영향력아래 두고 고구려 광개토왕과 사활을 걸고 두차례 싸웠으나 대패하고 중심 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6세기중반 백제성왕은 지방행정체제를 개편하여 5방제로 바꾼다 이때 영산강유역에도 백제식석실분들이
출현한다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직접지배체제에 편입이 되었다는 의미다
커다란 고분 수십기만 남겨놓고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그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잊혀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리라
이제 반남고분군 주위에 국립박물관이 들어서고 흩어진 유물들이 모아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더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