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2:1~12, 마9:1~8, 눅5:17~26
예수님은 본문의 중풍병자를 고치시기 며칠 전에 나환자를 치유하신 일이 있었다. 예수님은 나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지만 나환자는 병 나음에 대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바람에 더욱 예수님의 인기는 높아지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든 군중들이 몰려들었고 이때에도 예수님이 가버나움, 집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몰려 든다.
여기서 가버나움, 이 집이 예수님 자신의 집이냐, 베드로의 집이냐, 신학자들의 의견이 나뉘는데 예수께서 여우와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다고 하셨기에 예수님은 자신만의 집이 없으셨지 않나 싶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셨기 때문에(마:4:13~16) 예수님의 거하시는 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예수님 혼자만의 집이 아닌 마리아와 가족이 함께 사는 집이였을 것이다.
좌우간 사람들은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집 안에 다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까지 북새통을 이룬다.
그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네사람이 메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온다.
그런데 문앞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 도저히 침상을 들고 집 안으로 뚫고 들어갈수 없는 것이다.
난관에 봉착한 네사람은 고민을 한다. 돌아가기엔 너무 고생스럽게 왔고 기다리기엔 사람들이 사라질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네 사람 중 한명이 묘안을 낸다.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그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아래로 내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네사람은 옥상으로 가 지붕을 뜯는 작업을 하고 한창 사람들에 둘러 싸여 말씀을 전하고 있던 예수님의 머리위로 후두둑 흙이 떨어진다.
예수님과 놀란 사람들이 천장을 바라보자, 지붕이 뻥 뚫려 하늘이 보이고 사람이 누운 침상이 내려오는 것이다.
남의 집 지붕을 뜯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몰상식한 행동인가.
아마도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화를 내며 비난을 해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절박한 마음을 귀히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자 무리에 섞여 있던 서기관들이 속으로 서로 눈짓을 하며 말을 한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
예수님은 그 속엣 말을 알아 들으시고 그들에게 한마디 하신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네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중 어느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네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라 중 더 쉬운 것은 무얼까
인간 적으로 보면 반신 불수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라 하는 것은 확실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여야 하니 일어나 걸으라는 말이 더 어렵지만 신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죄사람의 권세가 있어야 하니 죄사함이 더 어렵다.
예수님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을 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에게 신적인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인데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 두 말씀을 모두 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죄를 사하는 권세와 육체의 병을 고치는 능력 모두
갖추고 계심을 알리신 것이다.
그러자 중풍병자는 곧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상을 챙겨들고 사람들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놀라 두려워 하며,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말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 기사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이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은 우리 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준다.
본문에서 이 네사람이 누구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가족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돈을 주고 산 일꾼인지.. 그러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데로 편의상 친구라 해두자.
좌우간 이 네 사람이 메고 온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준다.
네 친구의 병든 친구에 대한 긍휼과 희생, 그리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불굴의 의지, 예수께 나아가야 만 살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넷이 한마음이 되어 목적을 이루려는 협동정신 등이 그렇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단연코 이 네 친구이다.
이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보통 믿음 어린 자녀나 성도를 예수앞에 이끄는 부모나 목회자 같은 중보자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묵상하면 이 일을 네 친구에게서, 진정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엿 볼수 있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죄로 인해 병든 자를 예수께 데려가기 위해 감수했던 희생과 넘어야 할 장애는 죄많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올리기 위해 그리스도가 치러야 했던 희생과 댓가가 연상된다.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예수앞에 갈수 없어서 새로운 방법, 지붕을 뜯어 곧바로 중풍병자를 예수께 내린 것 처럼, 지금의 율법으론 하나님 앞에 나아갈수 없기에 예수님은 다른 방법, 깜짝놀랄 새로운 길을 내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올렸다.
즉,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하늘의 지붕을 뜯어 우리를 곧바로 하나님께 올리신 것이다.
이것은 문앞에서 서성이던 사람들, 즉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에겐 엄연한 불법이며 새치기로 그들의 분노를 살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분노할만도 한 게 자기들의 노력과 수고에 비해 침상에 누운 이가 한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지어 병을 얻은 일 외엔 철저히 무능한자로 다만 자신을 예수께 데려다 줄수 있는 자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제발, 날 그 사람에게 데려다줘. 부탁이야."
하지만 이 중풍환자를 예수께 데려가기 위한 네 친구의 수고는 문앞에 서성이는 자들와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는자완 비교할 수 없게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었다.
같이 들 사람을 설득해 모으고 무거운 침상을 들고 험한 길을 걷고, 계단으로 침상을 올려 지붕을 뜯고 예수께 내리기 까지 그러는 동안 눈물겨운 고생이 있었다.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준것은 이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데리고 온 자의 불굴의 의지와 믿음이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의 힘만으로 중풍병자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풍병자의 침상을 든 사람은 넷인데는 이유가 있다.
침상의 귀가 넷이니 네명이 필요해 넷 이겠지만, 여기 이 4의 숫자의 뜻을 알면 또다른 영적인 의미가 부여 된다.
3은 하나님의 숫자이다. 여기서 1을 더한 4는 동서남북 땅의 수이며 우주의 수이다.
그러니까 중보자는 그리스도 한분이나 결과적으로 하나님 세분과 사람이 합해 넷이 힘을 합해 중풍병자된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침상은 혼자서는 물론, 넷중 한명이라도 빠지면 들기 힘들다. 넷이 일심으로 협동해 들어야 한다.
이 무능한 중풍병자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고침을 받은 후엔 침대를 같이 드는 협력자가 된다.
하지만 때론 우린 너무 무거워 혼자 들고 간다는 착각을 할수 있다. 그러나 절대 우린 혼자 스스로 중풍병자인 죄인을 메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겐 그러한 능력도 힘도 없다.
또한 우리는 중풍병자를 메고 가는 동안 장애도 생기고 포기하려는 마음도 생기지만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놓고 가버리지 않는 이상 절대 침상에 손을 놓는 일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된 가족이나 친구들을 외면치 말고 간절히 그리스도께 도움을 요청하는 자가 되자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