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군림하는 걸작.>
-김희곤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을 다시 만나듯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을
다시 읽었다.
“한국문화재단” 월간문화재 원고 요청으로
10권이나 책을 썼지만 출판된 나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두렵다.
2019년 한국의 서원
‘유네스코세계유산등재’ 유치 위원이었던
L박사님이 보내준 다양한 자료 더미에서
2년간 눈이 아프도록 살펴보았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 9곳을
수차례에 걸쳐 살펴보고서 난해한 건축양식
설명에서 벗어나 발자국의 시선으로...
한국의 서원만큼 빛과 그림자가
선명한 한국 건축도 드물다.
그러나 그 빛은
그림자에 쌓여 있을 때 더욱 빛난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원에 제향 된 9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암울한 그림자 속에서
민족의 방향을 제시한 선각자들이자
민족의 미래를 밝히기 위해 기꺼이
등불이 된 인물들이다.
유네스코 유산에 등재된 9곳 서원 중에서
4곳의 제향자는 ‘동방오현’이다.
유학의 명헌 18인 중에서도
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대 유학자,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선생이다.
사상의 축에 안긴 도동서원의 김굉필
문향이 가득한 남계서원의 정여창
봉황의 둥지 옥산서원의 이언적선생은
모두 시대의 비탈길을 걸어가며
바른 소리를 하다 죽었다.
대쪽 같은 죽음으로 지조를 지킨 선각자들이다.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좇는 이 시대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삶의 지표를 알려주는 스승들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치열한 삶으로 보여준 참 스승이다.
저자로서 한국의 서원 걸작을 하나만
꼽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각자 고유한 사상의 박물관이기에...
그럼에도 세분하여 살펴볼 때
디테일의 백화점은 도산서당이다.
유학자이자 건축가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디테일의 총합이다.
평면도 접고 펴기를 반복하고.
입면도 닫고 열기를 반복하며,
화원으로 던지는 연민의 시선과
바람을 맞이하는 손끝까지...
병산서원 만대루는 이순신 장군을 추천한
서애 류성룡의 담대함이 스며 있다.
강학공간을 품고 있는 고졸함으로.
자신을 비워 병산의 살기를 해체하여
강학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만대루는
조선 최대의 명작이다.
경주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봉황의 둥지 옥산서원의 자궁으로
한국 건축의 은밀함과 사색적인 호탕함까지
갖춘 조선 최고의 파빌리온이다.
유장한 개울가 맑은 물에 자신의 비추어
마음을 씻고서 한 점 부끄럼 없는 결기로
정진한 선비의 정자로는 조선 최고다.
예학의 종장 김장생의 돈암서원 응도당은
단일 건물로는 그 당당함이 하늘을 찌른다.
당돌하고 힘차게 뻗어 오르는 기둥과
비룡의 풍모로 하늘을 나는 대들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당당한 자세를
갖춘 측면의 눈썹지붕은 엄격하고
단아한 선비의 풍모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된 9곳
서원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사상의 집으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들의 학교다.
천편일률적으로 입신출세의 관문인
오늘날 고교와 대학이 나아갈
오래된 미래 학교이다.
9곳 서원은 하나같이 제향자의 사상을
건축공간 속에 독창적으로 투영하였다.
산수가 빼어난 곳에 터를 잡았지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였다.
여유(노는 것)과 긴장(공부하는 것)을 들숨과
날숨으로 숨 쉬며 선각자의 학문 세계로...
우리가 그동안 압축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 챙기다
놓쳐버린 소중한 가치가 박제되어 있다.
한국의 서원 매력은 시중時中의 건축이다.
산과 구릉이 많은 지형 조건에서 개념적으론
중심축을 받아들이되 지형 조건에 따라
부분적으로 축을 비틀고 깨뜨리면서
조화를 꽤한 것을 시중의 건축이라 부른다.
전체적인 구도를 유지하면서 단위건물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한국건축의 매력이다.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9곳 서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갈고 닦아 민족의 미래를 궁구하기 위해
독창적인 학문의 전당을 세운
우리 민족의 참 스승들이다.
학문이 출세 수단이 아닌 인격과 덕성을
함양하는 미래 교육의 산실로서
한국의 서원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험실이었다.
*이미지-<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표지
-도산서원, 만대루, 독락당, 응도당
(by Heegon Kim & 서원관리단)
소리 없이 군림하는 걸작의 채취를
가슴으로 느끼시길...
<저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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