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참선(參禪)의 바른길
*본 소참법문은 청화(淸華) 대종사께서 경주 고불선원(1992년4월19일) 초청으로 선원의 봉불식 법문을 마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흥륜사에 들리시어 점심공양을 하시고 삼년결사 중이신 스님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실참실구에 적절한 귀중한 법어입니다.
요심수도(了心修道)
밥만 좀 얻어먹고서 갈려고 맘먹은 것인데........
삼년결사(三年結社)를 하신 스님들이 계신다기에 감동한 나머지 말씀을 좀 드리고자 들어왔습니다. 저도 삼년결사를 몇 번이나 해 보았습니다.
태안사(泰安寺)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대중과 더불어서 한 적도 있고, 그 전에는 혼자 묵언정진(黙言精進)을 여러 해를 했습니다.
더욱더 가깝고 친밀한 감동을 느낍니다. 달마(達磨)스님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지금은 돈황(敦煌) 문서들이 발견된 뒤로 달마스님이 쓰신 관심론이 아니라 신수(神秀)대사가 썼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관심론에 보면 약능요심수도(若能了心修道)면 즉생공이이성(則省功而易成)이요, 깨달을 요(了)자, 마음 심(心)자, 마음을 깨닫고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닦으면 생공이이성이요, 생략할 생(省)자, 공들일 공(功)자, 공을 별로 들이지 않고 이성이요, 쉬울 이(易)자 이룰 성(成)자, 쉽게 이룰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반대로 약불요심수도(若不了心修道)면 내비공이무익(乃費功而無益)이라. 그 반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헛수고만 할 뿐 이익이 없느니라. 그런 법문이 달마스님 괸심론에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증사작반(烝砂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요심수도 하는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여야 이제 공부도 더 쉽고 또 성취도 빠른 것입니다.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먼저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 합니다.
그 「아인슈타인」이 자기 제자인 「하이젠베르그」에게 한 말도 실험을 하려고 하면 정확한 이론(理論)이 먼저 앞서야 실험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참선(參禪) 공부, 우리 불도(佛道)를 찾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정견(正見)이 앞선단 말입니다. 정견이 먼저 앞서지 않으면 바른 공부가 못 되는 것입니다.
정견만 명확히 확립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말도 여법(如法)히 해지는 것이고 생각도 바르게 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의 대요(大要)라는 것은 공부해 보면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견 자리에 가서 우리 공부의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根本佛敎)쪽으로 정견을 생각할 때는, 정견을 그냥 사제법문(四諦法門)으로나 말하고 인생고(人生苦)의 원인과 또는 고의 소멸과 고를 해탈하는 방법이 팔정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근본불교 소승적인 팔정도의 해석이지만 대승불법(大乘佛法)으로 생각할 때는 차원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견 자리에서 본래시불(本來是佛)자리, 본래 바로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본래시불 자리, 본래 바로 부처라!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라! 이렇게 느껴버려야 이른바 참다운 대승적인 정견이 됩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우리가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한테 대한 자기의 공덕이, 가사 보조(普照) 어록대로 말하면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수(分毫不殊)라.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류(分毫不謬)란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서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성취하신 불과(佛果) 그런 공덕이 우리 중생과 더불어서 분호불수라,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무량한 신통(神通)을 갖춘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호리도 차이가 없이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과불공덕이 분호불수라. 불과를 성취한 그런 공덕이 만중생(萬衆生)과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버려야 응당 정신(正信)이라, 신심(信心)도 참다운 믿음이란 말입니다. <방성신야(方成信也)>
따라서 참다운 믿음도 바른 견해, 정견이 있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할 때는 바른 믿음이 앞서야 하고, 또 용맹심(勇猛心)과 참구(參究)하는 마음이 곁들어야 하는 것인데, 바른 믿음이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철학(哲學)이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본래시불 자리, 당래(當來)부처가 되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이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가 되어 있다는 자리, 그 자리를 분명히 느껴버려야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됩니다.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하면 돈오(頓悟)도 못되고 돈수(頓修)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삼년동안이나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그때그때 선지식(善知識)들 한데서 법문을 많이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자기 공부하는 길에 관해서 확연히 견해와 신(信)이 차있어야 합니다. 신해(信解)>
그래서 선행적으로 본래시불 자리를 느낀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우리 범부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자기 숙세 누겁(累劫)의 숙업(宿業) 때문에 습기(習氣)가 우리한테 끼어 있으니까 습기를 녹여서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修道의 位次>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목을 잘 모르면 공부하는 경계가 많기 때문에 더러는 자기 몸뚱아리가 텅텅 비어 오기도 하고, 더러는 공중으로 떠올라가는 듯한 경쾌한 마음도 느끼는 것이고, 가지가지 경계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또는 빛이 훤히 이렇게 밝아서 나오기도 하고 방안도 훤하고, 벽을 뚫고서 저편도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인데 그런 때를 당할 때 기분이 나쁠 때는 모르거니와 쾌적하고 그렇게 상쾌하고 자기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때는 아!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이런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혼동(混同)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 하는 경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안 되고 동시에 증상만(增上慢)이라, 못 통하고 통했다하고, 또 못 증(證)하고 증했다하는 그런 증상만을 안 내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한번 내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수도(修道)의 과정, 수도의 위차가 그것이 비록 한번 깨달으면 다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깨닫기 자체도, 앞서 말씀과 같이 깨닫는 과정에 경계가 많아서 참다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점검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설사 초견성(初見性)을 했다 하더라도 성불까지 가는 길은 또 요원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시불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頓悟)이지만 우리가 부처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습기를 녹이는 과정을 생각할 때는 또 역시 점수(漸修)란 말도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더불어서 본래로 성불되어 있다. 이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인데 그렇다고 그 자리를 분명히 좀 느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른바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로 해서는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정작 자기 자성(自性)을 증명 못한 경우에는 불공덕(佛功德)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란 것이 있습니다.
밝을 명(明)자, 행할 행(行)자, 족할 족(足)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밝음’ 이것은 바로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그런 지혜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지혜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명행족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그런 모든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만 좀 개운하고 무엇에 막힘이 없고 그 정도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명행족이 되어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길이 본래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부처가 되어 있지만 습기를 녹여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요원(遙遠)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지명(十地名)에서 보살초지(菩薩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도리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것은 교가 아닌가?
선법(禪法)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지 않는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앞서 허두에서 말씀드린 요심수도,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본래 공(功)을 많이 안 드리고도 성불(成佛)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나누어 생각하고,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하고 부처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요심수도(不了心修道)면 증사(蒸砂)가 작반(作飯)이라. 다만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애쓰고 닦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응당 본래시불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느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선 공부나 일반 공부나 한말로 하면,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맨 나중에가 있습니다만 무슨 경(經)이나 부촉품(咐囑品)이 경의 결론(結論)인데, 부촉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고자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증(證)할 지니라.4조(四祖) 도신(道信)대사의 법문이나, 또는 5조 홍인(弘忍)대사의 법문이나, 6조혜능(六祖慧能)대사의 법문이나 그와 같이 일관되어 왔던 것입니다. 일상일행(一相一行)이란 말입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두를 진여불성(眞如佛性)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우주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불성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물(物)과 신(神)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와 나와 따로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천지 우주를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보고 일상삼매라고하고, 그렇게 분명히 느끼는 것보고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 해(解)자, 해오입니다.
그래가지고서 그런 자리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그런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공부를 이어 간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구(參究)가 됩니다.
그러기에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남악회양(南嶽懷讓)선사, 6조 혜능대사의 정법을 받은 스님입니다.
남악회양선사 휘하에서 마조(馬祖)가 공부할 때에 마조가 팔척장신이고 장부다운 사람이라 공부도 열심히 하겠지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만 있단 말입니다.
남악선사가 보아하니 그릇은 좋은데 법(法)의 한계를 잘 모른단 말입니다. 법을 잘 모르고 닦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다시 말하면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과 일체 존재의 관계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힘의 낭비를 많이 합니다.
따라서 저 사람의 마음을 이제 깨우쳐 주어야 되겠구나. 그래가지고 마조가 공부하는 방 앞에 가서 조사스님이 벽돌을 뜨르륵 뜨르륵 갈았단 말입니다. 벽돌을 가는 소리가 몇 시간 동안 계속된단 말입니다.
마조역시 공부하는 학인이지만 이상하기도 해서 은사스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대관절 무슨 필요로 그렇게 벽돌을 갈고 계십니까?
남악선사의 대답이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조가 웃으면서 노장님도 참 망령이 드셨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이 된다고 그렇게 갈고 계십니까.
그 말끝에 남악선사 답이 가부좌 틀고 앉아가지고서 무슨 놈의 부처가 될 것인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지금 소가 끌고 가는 구름마<달구지, 수레>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구름마가 안가면 구름마를 때릴 것인가? 소를 때릴 것인가?
마땅히 채찍질을 소한테 해야 달구지가 잘 굴러 가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데 몸뚱이만 애쓰고 앉아본들 그걸로 해서는 큰 공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공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인 마음이 앞선다고 생각할 때는 몸뚱이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할 때는, 마음은 부처거니 하지만 몸뚱이는 부처라고 생각을 잘 안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나 일체존재, 일체물질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까지도 물질이 아닌 바로 부처라고 불성이라고 생각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서 불성(佛性)이 되겠지만, 내 몸은 물질이 아닌가? 하루에 몇 칼로리를 먹어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 몸뚱이 건강하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합니다. 잘 먹여야 하고 잘 입혀야 하고, 그러나 이 몸뚱이가 존재가 아닌, 물질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를 천만 개를 곱하고 보태고 한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림자 아닙니까.
제로를 역시 천만번 곱하고 보태도 제로는 제로입니다.
똑 같이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인연(因緣) 따라서 상(相)을 내서 사람 같은 상을 내고, 또는 해 같은 상을 내고, 달 같은 상을 낸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상에 불과한 것이지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요즈음 철학에서 말하는 실존 분명히 이 몸도 그림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허망한 상이 계속 되는 것이니까. 허망상이 계속 되는 그것 보고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나라고 하고 너라고 하고 금(金)이라고 하고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것이지 그런 상이 실존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것만 잘 느껴버려도 이 몸뚱이가 항시 가볍단 말입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자도 그만 안자도 그만, 이 몸뚱이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거기서 생기는 피해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누가 한번 때리면 금방 진심(嗔心)을 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함경(阿含境)을 보면 그대가 공부할 때 양날톱으로 그대 목을 슬슬 자른다 하더라도 표정을 굳히면 불자가 아니다.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이고, 네 것도 아닌 것인데 몸뚱이 누가 헤친다고 생각할 때 불법적(佛法的)으로 여법(如法)하게 생각할 때는 성낼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래시불(本來是佛), 본래 바로 부처라고 생각할 때는 내 마음만 본래 부처가 아니라, 내 몸도 일체 존재, 일체 물질이 다 본래 부처란 것입니다. 삼천 대천세계 부처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느껴서 마음을 먼저 열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닦아야 그래야 돈오돈수(頓悟頓修)입니다. 그래야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말입니다.
돈오돈수라 해서 금방 다 된 것이 아니라, 습기가 있어 놓아서, 금생에 지은 번뇌 금생에 나와서 잘 못 배우고, 잘 못 듣고, 잘 못 생각하고, 이런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꽉 끼어있고, 또 무수 생(生)동안 윤회(輪廻)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우리 습관성(習慣性), 이런 것은 갑자기 녹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못 녹이면 마음이 좀 열렸다 하더라도 아무란 힘을 못 내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원효(元曉)와 더불어서, 보조(普照)와 더불어서, 우리가 갖추고 있는 것도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똑 같지만 다만 그 분들은 습관성을 녹여버렸기 때문에 명행족이라, 참다운 법력(法力)을 갖춘 도인(道人)이 되고,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는 것이지, 증명(證明)을 아직 못 한 것입니다.
증명(證明)을 제대로 했다고 한다면 분명히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는 그러한 소중한 불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요즈음 잘 못 생각한 사람들은 신통 그 것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 아닌가?
신통의 본 고장이 불가(佛家) 아닙니까. 외도는 기껏해야 5통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는 바르게 닦으면 반듯이 6통까지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위대한 것이고 불심(佛心)이 위대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위대한 도인들이 많이 나올 것이지만, 그렇게 나와 버려야 과학을 온전히 제어하고 과학을 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불교인들이 항시 그 아는 것으로만 그쳐 버리면 과학을 우리가 굴릴 수가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物理學)도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리학도 모두가 에너지뿐이다. 에너지라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의 정기(精氣)란 말입니다.
<물리학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일체 존재는 물질이 아닌 우주에너지의 활동 형상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이 부처님 도리를 차근차근 밝히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이 물질은 본래가 없는 것이고, 일체가 에너지뿐이다. 현대과학도 이렇게 증명을 하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불자들이 상(相)에 걸리고 물질에 걸린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도 없고, 눈곱만큼도 없고, 따라서 절대공간 절대시간이 원래 없는 것입니다. 절대물질(절대공간 절대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우리 중생이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있다고 잘 못 보는 것뿐입니다.<삼독심(무명심)즉 물질은 본래 없고 있는 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들은 꼭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바른 말씀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공간 절대시간(절대물질)은 절대로 없습니다. 있는 것은 불성(佛性)뿐인데, 우주에는 불성뿐인데, 우리 중생이 업에 가려서 잘 못 본다는 그런 차이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는 내 몸도 공(空)이요, 모두가 공이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제법공(諸法空)자리, 오온개공 자리를 느끼고 공부를 하여야 참선(參禪)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없으면 불법(佛法)이 되지를 않습니다. 반야지혜가 없이 남한테 베풀고 보시(布施)하고 하는 그런 것은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반야지혜가 전제가 되는 가운데서 불법이 불법다운 것입니다. 불교의 도리가 반야지혜에 있습니다. 반야지혜로 닦아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를 많이 하고 ‘무(無)‘자 화두(話頭)나 ’이뭣고(是甚麽)‘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반야지혜(般若知慧)가 없이 할 때는 단순한 의심(疑心)인 것이지 참다운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체(體)와 더불어서, 용(用)을 거두어서, 상(相)을 거두어서 본 성품으로 가는 그런 자리에 참선이 있는 것입니다.
일반 방편공부는 현상적인 상에 걸려 있지만, 참선 공부는 우선 나라는 상을 걷어 쳐부수고,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라. 삼천대천세계가 텅텅 비어서 공공무대천(空空無大天)이라. 모두가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분명히 비어 있는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한 노장 스님들께서는 다 느끼셨을 것입니다만 공부를 하다보면 정말로 자기 몸뚱이고 무엇이고 다 비워져 버립니다.
그런 때는 정말로 이러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했겠구나. 그때야 공을 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그걸 잘 못 느낀단 말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옴마니 반메흠」이나, 또는 화두나 애쓰고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業障)이 녹는 정도에 따라서 차근차근 비워옵니다. 욕심도 줄어들고 차근차근 비워온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워오는 것을 느껴버려야 정말로 ‘이러니까 무아(無我)라고 했구나.’ 이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는 말씀이지만 삼년결사(三年結社)하는 참으로 거룩한 우리 스님 네들입니다. 삼년 세월이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람을 피해서 산속에 가서 몇 년이나 있어 보면, 사람을 피해서 왔지만 사람들이 그립단 말입니다. 참선을 우리가 결사할 때는 될수록 신구의(身口意) 삼함(三緘)이라, 몸으로 될수록 활동을 삼가고, 입으로 말을 많이 않고, 뜻으로 헤아리지 않고, 삼함이라, 석 삼(三)자, 봉할 함(緘)자, 신구의 삼함을 해야 삼매(三昧)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습기가 녹습니다.
우리 공부는 쉬운 대로만 그냥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당가에 <한가롭게> 앉아서 참선은 못 하지 않습니까. 참선은 무서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생명(생명)을 걸고 하는 공부입니다.
그러기에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활현전(大活現前)이라. 한번 크게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부생(凡夫生)을 꼭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구의 삼함이라. 몸으로 망동, 몸을 될수록 차분히 하고, 말도 필요 없는 말은 절대로 않고, 말 한마디 하면 한마디 한 만큼 우리 마음이 무거워 오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함을 명심코 하셔서 꼭 한사코 삼매에 드십시오. 삼매에 들어서 멸진정(滅盡定)을 통해야 이른바 아(我)가 녹는 것입니다.
멸진정을 못 통하면 아(我)라 하는, 원수 가운데 가장 원수가 아(我) 아닙니까. 아(我)가 녹니 못하면 범부입니다. 결국은 뭐~ 속한(俗漢)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못 녹이면, 몇 만생을 지나도 아(我)를 녹여 버려야지 윤회(輪廻)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공부, 관음보살을 하면 관음보살을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 한 생각 훤히 열려있는 그 자리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마음을 열고 해야지 마음은 원래 열려 있는 것인데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꼭 붙잡고서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주 끝까지 다 볼 수 있는 힘이 우리한테는 다 있습니다. 다만 그 번뇌(煩惱)에 가려서 못 한단 말입니다.
삼년결사 저도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삼년을 제대로는 다 채웠습니다. 산문밖에는 한 발도 안 나갔습니다. 그렇게 형식은 다 취했다 하더라도 마음을 제대로 못 다스렸기에 아직도 공부를 다 마치려면 천리만리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서는 2년 동안 공부를 하셨습니다. 나머지 1년 동안에 꼭 앞서 말씀드린 습기를 녹여서 멸진정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말씀을 많이 드리면 밥값이 비싸지므로 이대로 끝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