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의 자유 욕구는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이나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인 ‘관념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자유’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분야에서 사람의 자유욕구와 지적능력이 힘을 발휘해 온 것이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물질적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 많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동안은 인류 역사에 진보적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이 자본주의를 세계의 보편적 시스템으로 만들어 온 배경이다.
생산력의 궁극적 목표는 물자를 둘러싸고 타자(他者;현대에 들어 와서 타자의 개념에는 인간 뿐 아니라 자연도 포함되고 있다)를 침범할 필요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사실 1970년대 후반에 이미 세계의 총생산이 세계의 총수요를 넘어섰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 양극화의 심화와 기후·환경을 비롯한 생태계의 교란에 파묻혀 그 인류사적 중요성이 각광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마도 인류 진화의 과정에 피치 못할 문화지체가 있다.
부족(不足)한 시대에는 이익추구의 극대화와 사적 소유 그리고 치열한 경쟁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풍요(豊饒)로운 시대가 되어도 부족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의식이나 습관 그리고 정서 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즉 필요를 넘어서는 개별적 축적에 대한 탐욕(貪慾) 등이 상당한 기간 인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그 변화의 바탕으로 되는 물적(物的) 조건들이 충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 즉 자신의 폭(幅)을 넓혀 타자를 침범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인간의 정신적 진보도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데, ‘물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진화’를 향하여, 고등종교를 포함하여 인류의 지적(知的)혁명이 요청되는 것이다.
양극화나 불평등 그리고 실업 등이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지속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로 될 때야말로 진정한 위기가 올 것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그에 따른 자동화, 무인화와 같은 생산력의 발전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소유제도 등과 근본적으로 모순이 될 때, 자본주의는 결정적으로 그 진보적 역할이 종료될 것으로 보인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한 인터뷰에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건 로봇이 아니라 그 로봇이 생산해낸 재화를 적절하게 분배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고 말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물질적 생산력을 중시한 것은 근대 사회변혁 이론의 바탕이기도 했다.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했을 때, 토대는 물질적 생산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의 명제가 될 수 없다.
궁핍과 착취가 지배적일 때는 맞는 말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회는 제3세계의 여러 곳에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이론을 극단적으로 맹신한 사회주의권의 나라들이 생산력의 침체 때문에 체제가 붕괴한 것이나,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하는 곳에서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리고 천민자본주의에서도 이런 현상은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상당한 수준의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보편적인 민도(民度)가 높아진 나라에서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것보다, 의식이 존재를 확장하는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기고 있다.
물론 극단적 반전은 아니다.
항상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어떤 이론이나 신념이 현실정합성을 잃었을 때. 이번에는 그 반대의 극단 쪽으로 가기 쉽다는 점이다.
한 때 사회제도의 변혁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절대적 신념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 한계에 부딪치자, 이번에는 ‘마음이다’하고 극단적인 반전을 하는 경우를 보지만, 사실 제도와 의식은 그렇게 어느 한 쪽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서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달라질 뿐이다.
지금 한국의 위기는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 업그레이드하지 못하는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의식(意識)’ 쪽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라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유영(遊泳)을 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는 것은 같은 시간대에도 원시부족 사회에서 최첨단의 선진 사회에 이르기까지, 성인(聖人)으로부터 흉악한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단위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잇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앞 부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뒷 부분이 가진 모순이나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앞 부분이 개척해 나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빛 속에서 뒷 부분의 테마들이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라고 하는 생명체의 앞 부분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선물한 물질적 토대 위에 어떤 문명을 만들어 갈 것인가?
지난 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을 보면서 페북에 올린 글이다.
<<바둑 방송에서 '지배할 것인가?'
'지배당할 것인가?'라는 대단히 자극적인 멘트를 하고 있다.
나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지만, 이 멘트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이번에 이세돌이 이긴다 해도,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공지능에 지배당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지금도 끊임없이 물어지는 인간의 지적능력의 사용방향에 대한 테마와 같은 테마에 불과하다.
인간이 물질을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물질에 지배될 것인가?
인간이 관념을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관념에 지배될 것인가?
알파고가 아무리 우수해도 인간의 최첨단의 생산물이다.
자극적인 멘트는 흥미는 유발하지만,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이제 그야말로 인간의 자유욕구와 지적능력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그 물음이 절실하면서 가깝게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인간의 생산물,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활용한다는 것은 인간의 최고의 지적능력 즉 '사랑' '자비' '연민' '양보' 등을 이제 본격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놀라운 인공지능 등은 새로운 세상을 의외로 빨리 가져올 수 있다.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벗과 나눈 대화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놀라운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소유제도는 근본적 모순이 됩니다.
양극화 ᆞ생태계 파괴보다 더 근본적 모순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선택의 길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로 나아가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회는 아마도 '무소유사회'를 향하게 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 과정이 폭력과 무리(無理) 없이 진행되는 것이 과제라고 보입니다.
인공지능(로봇)과 인간의 대립관계는 사실 상상력의 부족이거나 지금의 사회제도나 의식을 전제로 한 어두운 그림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아마도 우리 선배들이 그려온 종합혁명 즉 '개벽'을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놀라운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개벽'을 앞당기리라 봅니다.
단지 걱정하는 것은 '지적(知的)혁명'과 '물적(物的)혁명'의 부조화 같습니다.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은 아무리 발달해도 물적 혁명입니다.)
즉 지적혁명의 지체(遲滯)현상이지요.
아마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보입니다.
종교혁명과 과학혁명의 결합 보완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먼저 이루는 지역ᆞ나라가 미래 세계의 선두를 개척하리라 봅니다.
지금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저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구호가 그 어렵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나왔던 그 선구성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함으로서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무리가 없이 넘어설 수 있을까?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과 인간의 대결 또는 로봇과 같은 인간들의 약육강식 같은 디스토피아를 향해 갈 것인가?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해방되며, 소유(所有)가 별 의미가 없는, 모두가 자기실현의 욕구를 마음껏 발현하는 자유의 왕국을 향해 갈 것인가?
요즈음 포스트휴먼(posthuman; 脫 인간, 인간 이후)이라는 말을 하는데, 정보과학 · 인지과학 · 나노기술 · 바이오공학 · 로봇공학등의 첨단기술의 힘을 빌려 기술이 인간의 몸 안으로 삽입되거나 혹은 정신이 생물학적 몸을 대신하여 기계적 또는 인공적 몸을 입는 현상, 즉 기술을 통해 기계와 결합된 인간을 가리킨다.
나는 이런 과학기술적 발전이 전망하는 세계를 탈인간(脫人間)으로 보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떼이야르 샤르탱(신부이자 고고인류학자)이 전망한 진정한 인간의 출현을 앞당기는 물적 기술적 토대로 보고 싶다. 말하자면 탈동물(脫 動物)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동물을 경시하는 말이 아니라, 동물적 한계를 넘어서는 즉 물질적 조건에 제약받지 않고, 자기중심성이라는 동물적 본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질적 변화를 그려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디스토피아 쪽이 유력하게 된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도 2500여년 전 공자의 지혜에서 영감(靈感)을 얻을 수 있고, 자유를 향한 인류의 대장정에 훌륭한 이정표를 세우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먼저 다음의 논어 구절에서 시작해 보자.
<공자께서 위나라에 가실 때 염유가 수레를 몰고 따르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백성들이 참 많구나.”
염유가 말씀드렸다.
“백성이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
염유가 다시 여쭈었다.
“부유해지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쳐야 한다.”
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 (子路 第十三)>
1)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먼저다.
사회가 이루어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공자는 ‘부지(富之)’라고 답한다.
공자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있어 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도덕주의자·정신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인간에 대한 고찰은 요즘 말로 하면 과학적이었다.
인간의 1차적 행복의 조건을 ‘물질적 수요의 충족’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치지는 않는다.
물질적 수요의 충족(富)이 정신적 성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정신주의자나 도덕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생각들은 물질은 풍부해 졌지만 정신이 성숙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실제로 나타나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에 대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고찰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는 물질적 부(富)가 정신적 성숙의 바탕으로 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보편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도 정당한 부(富)를 추구하였다.
< 공자 말하기를 “부를 구함이 옳은 것이라면 비록 마부 노릇이라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살리라.”
子曰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제 7편 술이)>
그는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그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일반적으로는 가난한 사람 즉 먹고 사는 것이 당장의 목표인 사람이 정신적인 성숙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고 보았다.
<공자 말하기를,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子曰 貧而無怨 難 富而無驕 易 (제 14편 헌문)>
여기서는 원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원망과 함께 아첨(비굴)이라는 상태까지를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른 장들에서 공자는 아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인문운동가로서 강의를 하는 경우에 공자의 이야기라고 하면서 더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가난한 사람이 원망하지 않는 것(또는 비굴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가, 아니면 부자가 교만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가?’
많은 사람들이 둘 다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부자가 교만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공자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교만하지 않은 부자를 별로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급속한 산업화·자본주의화의 길에서 아직 천민(賤民)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현실적으로 ‘물신(物神)에 지배되는 차가운 이기주의’의 폐단 때문에 과거 농경 사회의 가난했지만 인심이 흐르던 공동체 사회를 마치 돌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처럼 그리는 사고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특히 귀농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농촌 현실에 접하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농촌과 너무 다른 것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농촌 깊숙이 침투하면서 과거의 공동체적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이것을 부정적인 현상으로 볼 것인가?
과거의 공동체는 과연 돌아가야 할 미래인가?
그것은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가부장제 · 봉건적 수탈 · 신분계급제 · 전제군주의 횡포 · 절대적 가난 등이 그 사회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자유라는 세례를 받은 현대의 인류가 지향해야할 미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산업화·민주화를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욕구가 나타나고 있다.
급속한 변화의 부작용이기도 하겠지만, 그 동안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세월호의 비극을 겪으면서, 아마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으로 온 국민이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돈이면 못할 것이 없는 불의한 물신(物神)지배의 사회,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차가운 파편화된 이기주의 사회’를 후손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반성과 참회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새로운 사회나 새로운 국가의 개혁의 에너지로 살리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고질적인 진영의 블랙홀이 있고, 다른 면에서 보면 ‘충격적인 사건’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오랫동안 굳어진 심층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돈이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를 넘어서 인정이 흐르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이제 점점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물론 시행착오나 거품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요즘 일어나고 있는 협동운동이나 마을운동·공동체운동 등은 이런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매우 사명감이 넘치고 헌신적인 리더가 가장 걸림돌이 되어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원인을 보면 그 리더의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단주의적 성향이 결국 구성원들의 욕구와 맞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인정이 흐르는 사회’를 원하지만, 결코 과거의 ‘집단주의 사회’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이미 개인의 자유, 개성의 해방을 충분히 맛본 것이다.
미래의 공동체는 ‘개인의 자발적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조차도 넘어 활사개공(活私開公;개인을 최대로 살려 公을 일깨운다)이 바탕이 될 것이다.
테두리가 있고 집단주의적 성향이 있는 공동체 대신에, 테두리가 없고 자발적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새로운 공동체 문화가 미래의 사회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2) 부(富)와 교양(敎養)을 갖춘 시민계급
공자의 이상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봉건적 신분계급제와 절대왕정의 압제에 저항하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근대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 시민계급을 통해서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부(富)와 교양(敎養)’이었다.
공자가 2500년 전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 두 개의 기둥이었다.
지금은 ‘월가를 점령하라’든지, ‘1%대 99%의 사회’라는 말들이 나올 정도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각해지고 있기는 하나 아직도 유럽이나 미국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은 부와 교양을 갖춘 중산층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중산층에 대한 유럽의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은 다음과 같다.
- 페어플레이를 할 것 /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 -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그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모 연봉정보 사이트 직장인 대상 설문 결과라서 일반화하긴 힘들더라도 다음과 같다.
- 부채 없는 아파트 평수 30평 /-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 - 2,000cc 이상의 중형차
- 잔고 1억 원 이상의 예금액 / - 1년에 1회 이상의 해외여행
이런 자료를 통해서 보면 한국은 시민계급이 정신적으로 성숙할 만큼의 역사적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꼭 유럽의 선례를 따르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후발성(後發性)의 이익, 즉 역사의 단축(短縮)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여러 기회에 ‘시민운동의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런 새로운 운동의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한 때 인문학 열풍이 불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인문운동 즉 삶의 가치와 질을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나의 의미 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공자가 태어난 중국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은 부(富)는 자본주의에, 교(敎)는 중국공산당이 분담해서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맑스주의보다 공자의 사상이 더 들어올려지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할지는 불투명하지만, 어떻든 세기적 실험임에는 분명하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공자의 사상이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때 심하게 왜곡되거나 통치 수단으로 되어 참되게 살려지기 힘들었다는 역사의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서 느낀 점이 위와 같은 상반된 두 심정이었다.
나는 요즘 논어를 인문운동의 도구로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공자가 정치적·종교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도 그 배경의 하나다.
3) 공자가 제시하는 정신적 성숙의 목표
<자공子貢이 여쭈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자공이 여쭈었다.
“《시경》에서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란 바로 이를 말하는 건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비로소 함께 시를 논할 만하구나. 하나를 말하면 그 다음을 아는구나!”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學而 第一)>
참으로 윗 문장은 대단하다.
사회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어냐는 질문에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富之)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부유해진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가르쳐야 한다(敎之)’라고 답한다.
여기서 ‘교(敎)’라는 말을 무슨 교본이 있어 그것을 가르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요즘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스승 중의 스승으로 오랫동안 떠받들려 온 사람이라 ‘가르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논어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공자 스스로는 ‘교(敎)’보다는 ‘학(學)’에 그 정체성을 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교(敎)’는 정신적 성숙을 위한 인위적 노력(물론 좁은 의미의 교육도 포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부유해진다고 저절로 정신적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스스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면서 하는 활동도 이러한 인위적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다.
그 성숙의 목표에 대해서 ‘빈이무첨(貧而無諂)’ ‘부이무교(富而無驕)’ 정도면 어떻겠느냐고 제자 자공(子貢)이 묻는다.
공자는 그 정도도 좋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빈이무첨(貧而無諂)은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요즘 말로 하면 비굴해지거나 컴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전술(前述)한 것처럼, 원망하는 마음도 포함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공자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이 ‘빈이락(貧而樂)’ 과 ‘부이호례(富而好禮)’다.
빈이락(貧而樂)은 ‘가난하면서도 즐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오해가 많다.
가난을 즐긴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특히 생태주의에서 사용하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이 있다. 심지어는 공생공빈(共生共貧)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분들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이 말들이 보편성을 띠려면, 현대인들의 높은 자유도와 부합되어야 한다.
즉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명감이나 의무감으로는 보편성을 획득하기도 지구적(持久的)일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빈이락(貧而樂)은 가난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가난은 원망하거나 아첨하는 마음 없이 받아들이고(安貧), 도를 즐기는(樂道) 것이다.
자기 책임이 아닌 가난에 대해 컴플렉스(열등감)를 느끼지 않으며, 정신적·예술적 욕구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즉 욕구의 질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물질에 대한 수요나 욕망은 부자유 없이 감소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풍요’인 셈이다. 나는 ‘자발적 가난’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그 뜻은 같으리라고 본다.
아마 ‘단순소박한 삶’, ‘소유에서 존재로의 삶’을 원하는 현대인들의 욕구는 사실 상당한 물질적 풍요를 경험한 바탕에서 나타난다.
자기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사회전반의 물질적 풍요가 그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말은 현대에 와서 새로운 의미로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분들이 이 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가난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는데 그것에 투쟁할 생각은 않고 ‘빈이락’같은 한가한 이야기나 하느냐고 비난한다.
이것은 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공자도 그 시대의 경제 정의에 대해서는 확실한 입장이 있었다.
<공자 말하기를,
“나라가 있고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한다. 대체로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합하면 부족함이 없고, 안정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제 16편 계씨)>
물론 농경 시대의 이야기라서 산업화 시대에는 꼭 들어맞지는 않았지만(자유경쟁은 생산력의 원천인데, 그 결과 불균등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고도 성장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심한 양극화 등으로 심해지면서 이 말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특히 사회적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공자의 말이 있다.
<공자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배개를 하고 살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있어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제 7편 술이 >
나도 처음에 이 글을 읽을 때, 의롭지 않은 부귀에 대해서는 그것을 미워하거나 싸워야지 왜 뜬구름(浮雲) 같다고 했을까하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음 문장을 읽으면서 공자가 그렇게 말한 그 뜻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공자 말하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인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을 위함에 있어서 불인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특히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더라도 그 인을 위함에 있어서 불인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강하게 들어 왔다.
독재와 싸우며 독재에 물들고, 불의한 부자를 미워하고 싸우며 부자를 부러워하고, 차별에 반대하며 싸우며 스스로 차별의식에 물드는 것을 극히 우려한 마음이 ‘뜬구름 같다’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나는 새로운 사회, 차별이 없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열등감이나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별의식이 없고,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얼마전 오랜 벗의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했다.
주례사에서 “어떤 성직자가 청년 시절 그 스승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스승의 대답이 ‘조금 사랑하면 조금 행복하고, 중간 쯤 사랑하면 중간 쯤 행복하고, 최고로 사랑하면 최고로 행복하다.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기는 최고의 행복을 선택해서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는 말을 들었다. 꼭 성직자여야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부모를 만나는 것이 이른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성직자는 내가 티브이 대담에서 우연히 본 카톨릭의 드봉 주교의 이야기였다.
요즘 부(富)와 심지어는 지식의 세습까지 이루어지는 세태를 ‘금수저’ ‘흙수저’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시대착오적인 계급사회로의 후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절실하며 정당하다.
그 때 어떠한 열등감이나 컴플렉스를 가지지 말고, 오히려 당당한 긍지를 가지라는 말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부이호례(富而好禮)’도 ‘부이무교(富而無驕)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예(禮)’야말로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태산(泰山)이나 종묘(宗廟)에서 제사(祭祀) 지내는 의식 절차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여기서는 ‘아름다운 질서’ 또는 ‘이상적인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공자 말하기를,
“예와 양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예와 양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면, 예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 何(제 4편 이인)>
이 때 예(禮)는 외형의 질서이고 양(讓)은 내면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부유한 사람이 ‘양보하고 싶은 마음(讓)이 바탕이 된 ‘아름다운 질서(禮)’를 ‘좋아하는 것(好)’이다.
요즘 말로 하면 나누고 풀어놓는 것이다. 그것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부자에게서 빼앗는 방식은 미래의 방식으로 될 수 없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스스로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의식의 변화가 미래의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복지의 전면적인 확대는 중산층 이상의 의식의 진화(이민이나 해외도피가 아니라 고율의 조세를 큰 저항 없이 부담하는 것)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다.
‘빈이락’의 락(樂)이나 ‘부이호례’의 호(好)는 그 마음의 세계의 진화라는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자공이 여쭈기를, “만일 널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능히 대중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면 어떠합니까? 인자(仁者)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자에 그치랴. 반드시 성인(聖人)이로다. 요순(堯舜)도 오히려 근심하신 바이니라. 인자란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우며,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어주느니라. 능히 자신을 미루어 남을 헤아릴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인에 이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느니라.” (제6편 옹야)
子貢曰, 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 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필자의 지나친 생각일지는 모르나,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4) 어떤 의식과 어떤 생산력이 미래의 이상 사회를 가능케할까?
요즘 우리나라에 협동조합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내적 동력이 그런 바람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외부의 환경들이 그런 바람을 만든 면이 강하다. 사실 그러다보니 거품도 엄청 많았고, 몇 년이 지나면서 거품은 빠져 나가고, 한국형 협동조합들이 건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뿌리내릴 수 있는지가 엄중하게 물어지는 시기가 되었다.
한 때는 ‘개량주의’니 ‘좌파의 온상’이니 하는 진영 논리에 휘말리기도 했지만(물론 지금도 그런 말들이 오고 가겠지만), 나는 그런 낡은 논리를 떠나 진심으로 협동조합운동 특히 생산자 협동조합들이 건강하게 뿌리 내리기를 바란다.
어떤 점에서는 낡은 진영논리를 넘어 경제의 최전선에서 과거의 좌우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사상과 실천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장쾌한 그림이지만, 협동조합의 생산력이 뒷받침될 때의 이야기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 포섭된다. 그래서 체제순응적이다.
그런데 내부의 작동원리는 이윤동기와 경쟁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혁명적이다.
이 조화가 폭력과 무리(無理)없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여기서 핵심은 이윤동기와 경쟁을 넘어서는 동기로 작동되는 협동조합의 생산력이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일반기업과의 시장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경제적 동기로만은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협동조합이다.
동시에 경제외적 ‘거룩한’ 동기만으로도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협동조합이다.
과연 ‘자발적이고, 자기실현의 고도한 집중이 즐겁게’ 생산력으로 전화(轉化)할 수 있는가?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이 점에서 실패했다.
몬드라곤 등의 성공사례를 충분히 검토해야겠지만, 시대·사회·민족의 특성을 살리면서 세계협동운동의 보편성을 더 심화시킬 수 있으면, 그야말로 후발성의 이익을 최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핵심은 ‘사람’이다.
공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공자가 말하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
증자가 말했다. “예, 그러합니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이다.” (제4편 이인)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는 충(忠)과 서(恕)는 단지 마음의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짝을 이룬다.
서(恕)는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충(忠)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상태다. 서(恕)는 참는 것(忍)과 다르며, 충(忠)은 의무나 사명감과 다르다.
자타(自他)의 생명력을 최대로 신장하는 것이다.
즐겁지 않으면 가짜다.
그리고 이것이 생산력으로 전화(轉化)되지 않으면 가짜다.
이 지면에서 여기에 대해 상술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지만, 내가 협동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상당히 갖추어진 조건과 경쟁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기실현의 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등은 현실적인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나는 중견 기업들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꿈을 가끔 꿀 때가 있다.
이 때 그 내부의 동력은 표현을 무어라 하더라도 서(恕)와 충(忠)의 현대적 살림이 될 것이다.
진정한 진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의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는 그 가장 중요한 분야다.
이것을 위해서도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보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진보, 평화적이고 무리없이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문명을 지향하는 새로운 길, 이 삼자가 협치(協治)하는 연정(聯政)이 이루어져야 한다.
벗과의 대화 한토막이다.
<<오늘 바닷가 드라이브하면서 나눈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ᆞ실천ᆞ운동의 변증법적 통일이 아마 합작과 연정의 성패의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2차 대전후 신생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의 문턱까지 접근한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을 1차적으로 보고, 그 문제점(모순)을 부차적으로 본 우파 계열이 그 부차적으로 보았던 모순이 이제 성장 자체의 최대 장애로 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순과 문제점에 집중했던 좌파계열이 한국자본주의의 성장이 가져온 밑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미나 유럽의 경험들을 성숙하고 과학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좌파의 이론ᆞ실천적 태도가 요청됩니다.
아마도 선생과 내가 공감한 이 같은 방향으로의 상호접근이 이제 이루어질 여러 조건이 되었다는 판단입니다.
가장 큰 장애는 사실과 유리된 완고한 관념과 정서가 아닌가 합니다.
여러 가지 위기들을 겪으면서 그 완고함을 무너뜨릴 수 있을 때, 비로소 희망이 보일 것 같습니다.
뭐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하는 노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을지라도, 저울추가 희망 쪽으로 기우는데 때로는 작은 힘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바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