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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李氏)는 관향이 영천(永川)인데 한 파(派)가 군위현(軍威縣)으로 옮겨 7대를 살았으며, 또 나뉘어 의성(義城)으로 옮겨 오니, 공에 이르기까지 2세(世)이다. 공은 휘가 민성(民宬)이고 자가 관보(寬甫)이다. 증조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된 휘 세헌(世憲)이고, 조고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휘 여해(汝諧)이다. 선고는 행 강원도관찰사(行江原道觀察使)인 휘 광준(光俊)이며, 선비는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고려(高麗) 때의 태사(太師)로 시호가 장절공(壯節公)인 휘 숭겸(崇謙)의 후손이고 선무랑(宣務郞) 권(權)의 따님이다. 공은 융경(隆慶) 경오년(1570,선조3) 11월 임신일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밝아 겨우 7, 8세 때에 이미 글의 뜻을 깨쳤으며 기국(器局)이 단정하고 후중하며 문장의 생각이 뛰어나니, 보는 자들이 이미 비범한 인물임을 알았다. 마침내 부지런히 힘쓰고 공부를 쌓아 성취함에 이르렀다. 기축년(1589,선조22)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으며, 정유년(1597,선조30) 정시(庭試)에 등과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제수되고, 신축년(1601,선조34)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602)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다가 사서(司書)로 승진하였으며,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에 임명되어 명(明) 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다. 계묘년(1603)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 겸 지제교(兵曹佐郞兼知製敎)로 옮겼으며, 갑진년(1604)에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을사년(1605)에 조정에서는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보임(補任)하고자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자에게 배척을 당하여 공은 제주도(濟州道)에 가서 말을 점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바다를 건너가는 위태로움을 위로하자, 공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남해(南海)에서 발을 씻고 한라산(漢拏山)에서 옷을 떨치면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제주의 관아(官衙)에 이르자, 수행하여 온 사람들을 단속하고 세 고을을 엄하게 명하여 말을 점검하는 이외에는 소요하는 바가 전혀 없게 하였다. 공은 일을 마치자마자 즉시 돌아오는 배를 출발시켜, 조정에서 하직 인사를 올리고 떠난 지 40여 일 만에 복명(復命)하였다. 공은 마침내 어버이의 병환이 있다고 칭탁하고는 가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무신년(1608,광해군즉위년)에 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권력을 잡았던 간신들을 치죄(治罪)하여 세력에 붙은 자들을 모두 축출하였는데, 공은 일을 논하기를 공평(公平)하게 하니, 한때에 잘못 죄망(罪網)에 걸린 자들이 공 때문에 죄를 면한 자가 또한 많았다. 한 간장(諫長)이 애매모호한 일을 가지고 정승인 이덕형(李德馨)을 탄핵하려 하자, 공은 시종 강력히 저지하여 발론(發論)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체직되고 문학에 제수되었다. 이 해 겨울 다시 지평(持平)에 제수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유년(1609,광해군1)에 옥당(玉堂)으로 뽑혀 들어가고 원접사 종사관(遠接使從事官)에 차임되었으나 어버이의 병환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가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며, 계축년(1613,광해군5)에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고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정조(鄭造)가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발론하여 대비(大妃)를 별궁(別宮)에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폐출(廢黜)할 계책을 부리려 하였는데, 헌납(獻納) 유활(柳活)이 이에 가담하였다. 공은 한두 명의 관료와 더불어 차자(箚子)를 올려 정조와 유활의 죄를 지극히 논하니, 공론(公論)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이이첨(李爾瞻)이 또한 이덕형(李德馨)을 모함하자, 공은 지극히 변호하였으나 끝내 저지하지 못하고는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갑인년(1614,광해군6)에 다시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여 체직되었으며, 을묘년(1615,광해군7)에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이이첨이 또다시 이원익(李元翼)을 논죄하려 하자, 공은 저지할 수 없음을 알고는 병으로 사직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지난번 광해군(光海君)이 생모(生母)를 추존(追尊)할 때에 백관(百官)들이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올렸는데, 공은 지제교(知製敎)로 있으면서 노(魯) 나라의 성풍(成風)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이첨이 불경죄(不敬罪)로 논하여 공의 관작을 삭탈(削奪)하니, 공은 이후로 여러 해 동안 한가로이 버려져 있으면서,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밤낮으로 탐독하여 거의 잠자고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계해년(1623)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공은 즉시 종부시정 겸 사헌부장령(宗簿寺正兼司憲府掌令)으로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바닷길을 가게 되니,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히 길에 올랐다. 황제(皇帝)의 도성(都城)인 연경(燕京)에 이르자 조정의 의론이 서로 배치되어 저지하고 막기를 백방으로 하였으나, 공은 글을 올려 무함(誣陷)을 변명하고 주선함에 마땅함을 얻어 끝내 요청한 것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갑자년(1624)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있다가 품계를 올려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을축년(1625)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좌승지로 승진하였으며, 병인년(1626) 가을에 사직하였다가 다시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병으로 사직하였다. 정묘년(1627) 겨울에 또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무진년(1628) 가을에 사직하여 체직(遞職)되니, 전후로 승지에 임명된 것이 수십 개월이었다. 공은 밤낮으로 은밀히 돕고 좋은 말씀을 아뢰어 임금을 보필한 것이 실로 많았으며, 사무(事務)가 운집(雲集)하였으나 거행하기를 물흐르듯이 하니, 승정원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기사년(1629) 여름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8월 15일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60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성상께서는 애도하시고 특별히 부의(賻儀)하도록 명하였으며, 중외(中外)의 선비들은 서글퍼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해 11월 3일 선대부(先大夫)의 선영(先塋) 아래에 장례하니, 곧 의성현(義城縣)의 서쪽인 하현(霞峴) 태좌 진향(兌坐震向)의 언덕이었다. 다음해인 경오년(1630,인조8) 가을에 공의 아우인 전 군수 민환(民寏)이 찾아와서 나에게 이르기를 “형을 장례하던 날에 무덤 속에 묘지명을 만들어 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글을 청하옵니다.” 하였다. 나 역시 일찍이 공을 알고 허여(許與)한 친분이 있으므로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행장(行狀)을 받들어 보니, 대략 위와 같았다. 공은 영특한 자질로 문학(文學)을 널리 통달해서 옛날 전적(典籍)을 두루 섭렵하여 남김없이 꿰뚫었으며 세상의 일에 유념하여 참으로 잘 헤아렸으니, 쓰임에 적당한 재주라고 이를 만하다. 공을 아는 자들은 모두 크게 경륜(經綸)을 펴기를 기대하였는데, 공은 세력과 이익이 있는 곳에는 항상 겸양하고 물러가서 장차 몸을 더럽힐 듯이 여겼다. 그러므로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곤 하여, 전후(前後)에 걸쳐 대각(臺閣)에 출입할 적에 억지로 나아갔다가 곧바로 물러나 돌아오곤 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3년 동안 조정에 있은 적이 없었고, 오직 문을 닫고 한가로이 거처하며 책을 보고 시를 읊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기국(器局)과 재주를 간직하고 태어났으며 / 生挺器材 어려서부터 지조를 힘썼네 / 幼礪志操 벼슬살이는 밖에서 이르는 것이니 / 宦業外由 어찌 공의 심오함이겠는가 / 豈公之奧 세속의 경영에 마음이 없고 / 無心俗營 구차히 벼슬하는 것을 단념하였네 / 絶意苟冒 분화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 不喜紛華 항상 방탕하고 쓰러짐을 경계하였다오 / 恒戒放倒 자신이 퇴폐로 흐를까 두려워하고 / 懼己流頹 남의 교만함을 미워하였네 / 疾人驕傲 수립함이 이미 올바르니 / 竪立旣貞 스스로 좋아하는 바가 있었다오 / 自有攸好 서사를 널리 꿰뚫어 / 貫穿書史 예와 지금을 흉중에 간직하였네 / 今古胸中 글을 짓고 시 읊는 것을 일삼아 / 撰詠是事 옛사람의 기풍을 따랐다오 / 追古人風 한결같이 편안하고 고요함에 맛을 두었으나 / 一味恬靜 세속 사람들과 때로 함께하였으며 / 俗子時同 벼슬하지 않고 잠겨 있어도 즐거워하여 / 沈淪猶適 마음과 회포가 항상 화하였네 / 心懷常融 물러나려는 생각이 비록 견고하나 / 退思雖堅 사람들의 바람은 더욱 높았는데 / 人望益隆 하늘의 빼앗아감 너무 빠르니 / 天奪遽促 세상만사가 뜬구름처럼 공허하여라 / 萬事雲空 유편이 세상에 남았으니 / 遺篇留世 반드시 공을 아는 자가 있으리라 / 必有知公 [주D-001]노(魯) 나라의 성풍(成風) :
성풍은 노 나라 장공(莊公)의 첩으로 아들 희공(僖公)을 낳았는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金氏) 역시 선조(宣祖)의 왕비가 아니고 후궁(後宮)이므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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