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에서 5일(3)
(2024년 1월 3일∼7일)
瓦也 정유순
2-3. 숭산과 숭양서원(2024년 1월 4일)
넓디넓은 소림사 경내를 바람에 스치듯 지나치고 발걸음은 숭산으로 향하는데, 서쪽으로 약 300m 거리에 모양도 제각각 다양한 승탑(僧塔)이 숲을 이룬다. 대부분 소림사 역대 고승들의 묘탑(墓塔)으로 이곳이 바로 탑림(塔林)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唐),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는 천년 정도의 시간에 각 시대별 전탑(塼塔)이 있다. 소림사 탑림은 넓은 면적에 촘촘할 정도로 탑들이 배치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소림사 탑림>
탑은 일반적으로 7층으로 가장 높은 것이 15m이고, 탑의 형태나 층수 높이와 크기, 건축과 조각의 표현이 각 다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숭산에 왔을 때 탑이 숫자를 물으니 주지가 답을 못하자, 어명을 내려 탑 하나에 한 명씩 지키라 하여 500명의 어림군(御林軍)이 늘어섰으나 부족했다. 군대를 철수시키며 ‘실로 탑림이로다(實乃塔林也)’라 했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248기만 남았다. 탑림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소림사 탑림>
탑림을 지나면 숭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삭도에 승선한다. 중국은 케이블카를 삭도(索道)로 표시한다. 쑹산[숭산(嵩山)]은 중국 오악 중 중악(中岳)이다. 중국의 오악(五岳)은 천년 수도였던 낙양(洛陽)을 기준하여 다섯 방향의 5대 명산에 각 방위를 붙여 부른 것이다. 동쪽 산동성의 태산을 동악, 서쪽 섬서성의 화산을 서악, 남쪽 호남성의 형산을 남악, 북쪽 산서성의 항산을 북악, 그리고 중앙 하남성의 숭산을 중악으로 부르며,
<중악숭산(태실산)>
그 모습들을 형용하기를 태산여좌(泰山如坐 : 앉아있는 태산), 화산이립(華山而立 : 서있는 화산), 숭산여와(嵩山如臥 : 누워있는 숭산), 형산여비(衡山如飛 : 날아가는 형산), 항산여행(恒山如行 : 걸어가는 항산)이라 하며 오랜 산악신앙의 대상으로 흠모해왔다. 五岳歸來不看山(오악귀래불간산)이라 하여 ‘오악을 보면 다른 산을 볼 필요가 없다’고 했을 정도다.
<숭산(소실산)>
숭산은 동쪽의 태실산(太室山)과 서쪽의 소실산(小室山)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황하의 치수(治水)를 성공시킨 고대의 전설적인 우왕(禹王)이 두 명의 부인을 거느렸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숭산은 모두 72개 산봉우리를 지니고 있으며, 최고봉 연천봉(連天峰, 1512m)은 소실산에 있다. 태실산 최고봉은 준극봉(峻極峰, 1491m)이다. 한무제(漢武帝) 이후 역대 제왕들이 오악을 받들기 시작하여 당의 현종(玄宗)은 왕(王)으로, 송의 진종(眞宗)은 제(帝)에 봉하였고, 명의 태조(太祖)는 더 높여 신(神)으로 삼았다.
<숭산의 준령>
우리는 이연걸이 영화촬영을 했던 숭산 정상인 연천봉 아래 이조암(二祖庵)까지 연결돼 있는 삭도를 이용한다. 산 능선이 반듯하게 일자로 누워 있는 형상은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옛날에는 이러한 지형에서 왕이 나올 형세라며, 그런 곳에 집터나 묘를 잡으면 역모를 꾸미려 한다며 처형”하기도 했다. 청나라 위원(魏源)이 ‘중악 숭산은 높고 가파르다(中岳嵩山之峻·중악숭산지준)’라 한 것도 태실산의 준극봉에서 유래했다.
<케이블카에서 본 숭산 아래>
연천봉 아래에 있는 이조암은 달마에 이어 선종의 2대조 혜가(慧可)를 모신 암자다. 혜가는 한쪽 팔을 잘라 달마의 첫 제자가 된 사람으로 달마가 인도 사람이라면 혜가는 중국인으로 실질적 선종을 이끈 인물이다. 한쪽 팔이 잘렸을 때 달마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가사를 벗어 잘린 혜가의 팔을 감싸 한쪽으로 붉게 물들었던 옷을 ‘혜가단비(慧可斷臂)’라고 하며 지금까지 전한다. 혜가의 동상을 중앙에 봉안하고 양쪽으로 제자가 있다.
<이조암(二祖庵)>
<이조암의 혜가(중)와 제자>
숭산에서 내려온 발길은 바쁘게 숭양서원으로 향한다. 숭산 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숭양서원(嵩陽書院)은 중국 고대 4대 서원의 하나로 꼽힌다. 북위(北魏) 시대인 484년 숭양사(嵩陽寺)라로 창건되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숭양관(嵩陽觀)이라 불렸고,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때는 태을서원(太乙書院)으로 개칭되었다. 북송(北宋) 초기에는 태실서원(太室書院)이라 불리다가 인종(仁宗) 때인 1035년 현재의 명칭으로 다시 바뀌었다.
<숭양서원>
1천 년 전 송나라 시대에 창건한 유교서원으로 사마광(司馬光)이 중국의 고전, 자치통감을 저술하였다. 송나라의 평화로운 시절에 유학생들은 이미 5대에 걸친 난세를 겪은 까닭에 숭산서원이 있는 곳처럼 조용한 산속에 모여 공부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서원의 입구인 패방(牌坊)의 중앙 문루에는 ‘高山仰止(고산앙지)’라고 쓰여 있다. 이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글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숭양서원 입구 패방>
숭양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중악숭양사비가 서있다. ‘중악숭양사비(中岳嵩陽寺碑)’는 535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글자가 들어갈 자리 칸칸마다 불상들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다. 혹시 이곳이 옛 절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서원입구에 부처의 비석이 있다니 조금 아이러니하다. 우리나라 서원 같았으면 어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답답한 것은 이 비에 대한 설명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악숭양사비>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대당비이다. 대당비(大唐碑)는 높이 9.02m, 넓이 2.04m, 두께 1.05m 로서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돌로 만든 비석 중 가장 큰 이비는 ‘대당숭양관기성덕성응이송비(大唐嵩陽觀記聖德盛應以頌碑)’로서 당나라 744년(천보3년)에 세워졌다. 숭양서원의 도사 손태충(孫太冲)이 당현종의 병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1078자의 글씨로 비면을 꽉 채운다. 금석문(金石文)의 역사·예술적 가치가 클 것 같다.
<대당비>
숭양서원 정원 안에는 오래된 측백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BC110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숭산을 왔을 때 첫 번 째 문을 들어서자마자 이 측백나무를 보며 ‘내가 천하를 두루 댕겨봤지만 이렇게 큰 나무를 본적이 없도다. 짐은 이 나무를 제1장군이라 칭하노라.’ 이렇게 말하고는 두 번 째 문을 들어서니, 첫 번 째 측백나무보다 훨씬 큰 나무(수령 4,500년)를 만나게 되자 ‘이 나무는 제2장군이도다.’ 라고 했고,
<제일장군 측백>
한무제가 다시 걸어 3번째 문을 들어섰을 때 눈앞에는 두 번 째 본 나무보다 더 큰 측백나무가 서 있었다. 한무제는‘크고 작은 게 뭐가 그리 대수냐! 먼저 들어온 것이 왕이다.’ 그래서인지 한무제가 숭양서원을 다녀 간 뒤 첫 번 째 나무는 미안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힌 모습을 하고 있고, 두 번 째 나무는 화가 나 나무속이 터졌고, 마지막 나무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화병으로 죽어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다고 한다.
<제이장군나무 측백>
이 측백나무를 지나면 선성전을 만난다. 선성전(先聖殿)은 이미 성인 반열에 오른 공자의 상을 모신 전각이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사상가·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儒敎)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 취급될 수 없으며,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로 인식되어진다.
<선성전에 모신 공자>
선성전을 나올 때는 이미 해는 서산에 기울었다. 길옆에는 음력 12월에 핀다는 납매(臘梅)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은은한 향기로 갈 길이 바쁜 발목을 잡는다. 납매의 ‘납(臘)’은 음력 12월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납매를 당매(唐梅)라고도 하며, 줄기는 뭉쳐나며 높이는 2∼4m이다. 꽃 지름은 2cm 내외로 꽃받침과 꽃잎은 다수이며, 가운데 잎은 노란색으로 대형이고 속잎은 암자색으로 소형이다.
<납매>
선성전 위에 있는 도통사(道通祠)에는 요임금을 중앙으로 우측에는 우임금이, 좌측에는 주공이 나란히 있다. 요(堯)임금은 검소하고 근면한 인물로, 천자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쓰러져가는 움막에서 살았다. 음식은 백성과 같이 거친 쌀과 푸성귀만 먹었고, 여름에는 누더기 같은 옷을, 겨울에는 녹피(鹿皮) 한 장을 입고 지냈다.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선정을 베푸는 군주의 모습으로 그의 덕치(德治)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요임금>
우(禹)임금은 중국 전설상의 하(夏)왕조의 시조로 치수(治水)를 성공해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었다. 재위 십년 만에 죽자 아들 계(啓)가 이어 받아 최초의 세습왕조인 하왕조가 시작된다. 주공(周公)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周公) 단(旦)이다. 공자(孔子)는 논어를 통해 그의 꿈을 꾼지 오래되었다며 멘토로 삼았다. 요순(堯舜)임금을 비롯하여 중국신화와 우리나라 고대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자세한 언급은 다음으로 미룬다.
<우임금>
<주공>
숭산서원을 대충 둘러보고 어둠 속을 뚫고 나오는데 길가에 앉아 있는 동자상 뒤 돌기둥에는 ‘讀萬券書(독만권서) 行萬里路(행만리로)’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는 명나라 서화가(書畵家)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걸어보아야 인생을 안다.’는 뜻을 내 나름대로 ‘行路萬里(행로만리) 讀書萬券(독서만권)’으로 변형하여 ‘만 리를 걸으면 만 권의 책을 읽는 것과 같다.’로 자주 사용하는 문구다. 발걸음은 한 권의 책을 더 읽기 위하여 낙양(洛陽)으로 향한다.
<讀萬券書(독만권서) 行萬里路(행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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