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들어 가장 춥다는(-7) 예보가 걱정되고, 요즘 사이 내렸던 눈 때문에 성곽 음달길을 걱정하면서 안국역으로 향했습니다. 한기를 느끼며 내린 안국역, 북촌입구로 열린 2번출구, 나도 모르게 회상의 늪으로 잠시 빠졌습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브람스란 찻집, 옛적에 가끔씩 들러 음악과 커피향에 침잠되던 곳인데... 강북의 골목길을 사랑하는 이유는 태어나 자라고 여태껏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벌써 나오신 자매님들과 파스칼형제님 참 부지런들 하십니다. 30여 명~ 오랜만에 많은 인원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이영숙데레사 자매님 부군께서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명산도 동행해 주셨던 제노베파 조부영 자매님도....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틈틈히 찾아 주신 낮익은 얼굴들, 참! 강지양글라라 자매님도 지구사무실 일이 없으셨는지 오랜만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장은기 데레사님께서 분주하고 솜씨있게 총무 역활을 발빠르게해 주셔서 인원파악과 회비정리가 된 것 같아 성대 후문까지 가는 2번 마을버스를 타고 와룡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내린 후 성곽 안부로 들어서자 마자 아이젠 착용을.... 그런데 동절기 트레킹에 아이젠 없이 참석해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큰일이죠. 차 후에는 꼭 지참해 주시기 당부 드려봅니다. 행장이 꾸려진 후 출발한 일행은 성축(城築) 역사인 태조, 세종, 숙종, 순종으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고 보수된 관계로 성곽을 만들면서 쌓아 올려진 돌의 모양이 제각각입니다. 약 18,6km로 4개의 정문과 4개의 소문이 있으며 문마다 이름을 짓을 때 유교사상의 핵심인 인,예,의,지,신을 넣어 작명했습니다. 오행설에 입각하여 동쪽은 봄이라 보고 새싹의 기운을 만드는 일이라하여 인(仁)을 넣었으며 또한 동쪽의 내사산에 하나인 낙산 일대는 다른 내사산과 달리 지형이 낮고 물이 많은 곳이라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하나 더 넣어 興仁之門이란 현판을 걸었으며, 남쪽은 여름으로 보고 불(火) 뜻하였습니다. 여름철에는 모든 행동거지가 예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예(禮)자를 넣어 숭례문(崇禮門)이라 한 후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火山이라 불은 불로 막아야 한다는 뜻에서 현판을 세워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가뭄이 들면 화기를 쫓는다는 뜻에서 남대문은 닫아 걸었습니다. 그리고 찬기운이 서린 북문을 열었습니다. 서대문 즉 돈의문(敦義門)은 가을로 보고 석양빛으로 보면서 마지막까지 올바른 의를 세우라는 뜻에서 옳을 義를 넣어 현판을 걸었습니다.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은 분명하게 들어가야 할 知자가 없습니다. 북문 쪽은 계절로는 겨울로 보았습니다. 찬 한기가 서려 있는 북문은 항상 닫혀 있었습니다. 풍수에 의한 영향이 있었지만 북문을 열어 놓으면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의미로 항상 닫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북쪽은 오랑케들이 살고 있어 처들어와 아녀자들을 잡아간다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고들 합니다.
북문의 원래 이름을 정도전은 홍지문(弘知門)이라 붙였지만 당시 정치인들은 백성들이 똑똑해져서 정치를 바르게 하는지 잘못하는지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대문을 홍지문이라 부른 것을 반대하여 개혁과 정화의 의미가 담긴 숙청문(肅淸門)이라 작명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의 문이란 뜻이었습니다. 1396년 이태조 시기에 완성된 숙청문을 당시 유명한 풍수학자 최양선은 동쪽 서쪽 봉우리가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하여 축조 18년만에 폐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연산군 때 다시 동쪽으로 조금 이동하여 석문만 세우죠. 그리고 이름을 현재의 숙정문(肅靖門)으로 바꾸게 됩니다. 후 서울시에서 한양성곽을 복원할 당시 현재의 누각을 세운 것입니다. 오주 이규경은 자신의 저서인 오주연문 장전산고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 놓습니다. 숙청문은 음기의 자리이므로 열어두면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난다. 이는 정월 보름 이전에 숙정문을 세 번 오고 가면 액운이 사라진다하여 부녀자들이 숙청문 나들이가 많아져 남정네들이 많이 몰려 들어 그런 속설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 지는 곳이 바로 숙정문입니다. 숙종 때인 1715년 세검정 홍제천에 세운 수문인 한북문(漢北門)에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知門)이라 써 현판을 달아 놓아 그 때부터 북문 역활을 대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양도성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각자 신의적인 생활로 도성안의 질서를 잡은 것이죠. 그리고 새벽 4시를 파루라하여 33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성안의 모든 일정의 시작을 알렸으며 저녁 10시에는 인정 또는 인경이라하여 종을 28번 쳐 성안의 모든 것들은 잠들게 하였습니다. 28번의 종은 별자리가 28개인 관계로 친 것이고 28개의 하늘위에 도솔천이라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하늘이 서른 세겹으로 있다는 뜻과 그 이상적인 하늘로 가기위하여는 하루를 최선을 다해 선덕을 베풀며 살라는 뜻이 들어 있다합니다. 이런것들은 대부분 불가에서 빌려 온 듯 합니다.
그리고 북악산 자체가 바로 이조선의 정궁이 경복궁의 후원입니다.
정궁을 세울 때 기준이 되었던 북악산, 동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능선아래 산 기슭에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이 자리를 잡고 있어
법궁들의 후원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창덕궁 안으로 들어가 뒷산을 살펴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절묘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알게 되어 탄복하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 궁궐 모습입니다. 45각으로 흘러 내리는 산능선과 기슭 그리고 궁궐의 지붕선이
산주름처럼 순한 매듭이 되어 다가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숙정문을 올라 곡창을 지난 후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청운대에 모두 섰습니다. 시야는 제로였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주작대로, 광화문 육조거리를 바라 보며 육조에 관한 설명을 나눔한 후, 백악마루에 올라섰지만, 주말을 이용하여 많은 탐방객들이 방문 혼잡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때와 다르게 많은 병력이 동원되어 보안에 신경쓰고 있어 많은 촬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약된 자하 손만두 집에서 재촉 전화가 이어졌다. 주말과 휴일에는 손님이 넘쳐 예약을 할 수 없는데도 때를 써서 만든 자리라 주인장이 안달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우리가 늦어지면 피해를 입을 수가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지요. 마음이 바뻐져 서둘러 내려 서서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2층 양옥을 개조하여 만든 집이라 많은 인원이 들기에는 공간이 좀 인색하지만, 30여명의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이 부근에서 이 집뿐입니다. 추위에 떨다 먹는 손만두국, 속이 알차고 국물이 고명때문에 시원했는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셨는지요? 점심을 챙긴 후 다시 트레킹을 떠났습니다. 북악스카이웨이 밑으로 난 부암동의 유명한 산책로가 있습니다. 노동시인 박노해 전시공간이 있고 드라마촬영으로 유명해진 산모퉁이가 있으며 도시 게스트하우스와 명상을 할 수 있는 종교시설이 있으며 호젓한 길이 끝나면 소나무가 근사한 백운동천을 만나게 됩니다.
옛적 한양성 안과 부근에는 한양 8경(또는 북악팔경)이 있었습니다. 압구정, 광교 달맞이, 삼청동, 이 세곳을 빼고 5경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청운동, 옥인동, 필운동 지역입니다. 옛적에는 이 일대를 장동이라 불렀던 곳이죠.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인 정선은 이곳에 살면서 많은 그림을 남겼는데 대부분이 이 지역의 산수화입니다. 그래서 우린 5경을 트레킹하는 목적에서 백석동천을 찾았습니다. 북악산을 우린 백악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북악산에 있는 바위색이 흰빛이 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조정궁인 경복궁을 자리 잡을 때 기준축으로 삼은 산이 바로 북악산입니다. 북악산을 깃점으로 인왕산, 남산, 낙산을 연결하여 축조한 것이 바로 한양성곽입니다. 산에는 석성을 쌓았지만 평지에는 토성으로 처음에는 쌓았었습니다. 그러다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석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600척을 97개로 나누어 각지방 행정관과 백성들에게 도급을 주어 쌓은 성입니다. 만약 하자가 생기면 쌓은 지방에서 와 보수해야 할 만큼 책임을 끝까지지어던 책임제 었습니다. 그리고 각구역의 명칭을 천자문에서 따와 명명하였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을 별서(별장)이 있던 백석동천 위로는 능금마을이 있어 60년대 후반까지 서울 시민들에게 능금을 공급했던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흐르는 물은 세검정을 지나 홍제천 홍지문 5간수 밑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계곡물을 끌어드려 큰 연못을 만들고 육모정을 세운 후 마주 보이는 언덕위에 별장을 지었습니다. 동천(洞天)이라함은 산과 물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별서가 백사 이항복의 소유로 알려져 사람들은 이 계곡을 백사실 계곡이라 불러왔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1928년도 동아일보가 찾아 낸 자료에 의하면 추사 김정희 집안의 별서였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보도된 육모정 사진 때문에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밑에 사진이 바로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사진입니다.
두 사진을 비교하시면서 육모정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사진에 서 있는 6개의 돌 기둥이 바로 윗 사진 육모정이 서 있던 주춧돌 입니다.
또한 최근에 동아일보 자료를 근거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명승 36호로 지정된 지금의 서울 종로구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일대를 조선 후기 서화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사들였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연구소에 따르면 백석동천은 백석정(白石亭) 백석실(白石室) 또는 백사실(白沙室) 등으로 불렸는데,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9권에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추사의 주석(註釋·해설)에서도 “나의 북서(北墅·북쪽 별장)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라고 한 대목이 발견됐다. 연구소는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일대 땅을 사들여 별장을 새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백석동천은 2008년 사적에서 명승으로 변경 지정됐다. 자연경관이 잘 남아있고 전통조경 양식의 연못, 정자터, 각자(刻字) 바위 등의 보존 상태가 좋아 별서(別墅·별장) 정원으 서 가치가 높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백석동천과 관련된 글과 사진을 올립니다. 이 별서 맞은 편 산능선에 월암(月巖) 각자가 있습니다. 달이 떠서 지는 쪽입니다. 바위 모양이 만월(滿月) 때 상단의 둥근 모습을 닮았다하여 각자를 새긴 것 입니다.
저희들이 찾았을 때 절기가 겨울이라 삭막했지만 봄, 여름과 가을 전경은 정말 풍광이 근사하답니다. 참고로 가을사진 올립니다.
둥근 달의 욋부분 같습니다.
바위 형세가 石자를 닮아 그 안에 새긴 석문입니다.
육모정과 연못
별서 자리입니다.
도시안에 이런 비경과 문명을 벗어난 원시가 있다는 사실은 도시인들에게 큰 위안입니다. 저는 가끔 자연을 찾으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문명을 벗어나야 원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다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시비와 청계동천을 찾아 가기 위하여 산수유카페를 거슬러 올랐습니다. 되돌아 가는 길이지만 오면서 보지 못했던 뒷 길을 다시 볼 수 있어 되돌아 가는 길도
새삼스럽답니다. 오면서 보지 못했던 북악정상 부근의 성곽들 .. 대단하죠. 높고 가파른데 어찌 그 많은 석성을 사람의 힘만으로 쌓을 수 있을까! 감탄하며 되돌아 와 다시 인왕산 자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창의문 앞에서 잠시 쉬면서 행동식을 나눔한 후 길을 건너 윤동주 시비 동산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출입을 막아 놓아(윤동주 기념회관 측에서) 우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왕산 자락에 붙으면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청계동천입니다. 청계천의 이름도 이 동천이 청계천의 시원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청계천 원류는 청계동천입니다. 경복궁을 끼고 돌아 나간 후 삼청동 물길 과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러듭니다. 그림으로 잠시 그 개념도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림처럼 청계동천에서 시작된 물 길은 경복궁 옆으로 흘러 삼청동 맷돌바위에서 흘러 내려 오는 물과 합수되어 청계천을 만든 것입니다 또한 청계동천은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깊은 연관이 있는 동천입니다.
(몽유도원도 핵심부)
본명은 이용(1418-1453), 봉호는 안평대군,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서른다섯의 나이에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시서화의 천재. 후대 사람들은 그를 <몽유도원도>라는 그림으로 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이 29세에 꾼 꿈의 내용을 따라 안견이 수묵담채로 그린 그림입니다. 전체 구성은 ‘夢遊桃源圖’라는 그림제목(제첨), 안평의 시, 안견의 그림, 안평의 발문(跋文), 그리고 이 그림을 보고 난 뒤 박팽년, 최항, 신숙주, 이개, 정인지, 서거정, 성삼문 등 당시의 유명인사 21명이 남긴 감상문 등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몽유도원도의 제첨과 시, 이 시는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이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씨고 천 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이며, 그 뒤에
"後三年正月一夜 在致知亭 因披閱有作 淸之"
(삼 년 뒤 정월 초 하루날 밤에 치 지정에서 다시 이를 펼쳐 보고서 짓는다. 청지 씀)
라고 쓰여 있으며 청지는 안평의 호입니다.
발문에 나타난 꿈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꿈은 정묘년(1447) 4월 20일 밤에 꾸었고, 그림은 안견에 의해 3일만에 완성되었으며
2) 꿈속에서의 여행은 처음에 박팽년과 함께 말을 타고 시작했는데, 뒤에 신숙주와 최항 등이 동참하였다.
3)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 지 모를 때, 야복을 한 사람이 나타나 북쪽으로 가도록 일러주었다.
4) 주변의 경치는 기이하고 아름다웠다.
5) 도원은 2,3리쯤 되는 넓고 트인 곳으로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6) 도원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가집이 있으나 가축들은 없고 오직 조각배만이 보였다.
7) 도원이 신선의 마을과 같아 보였다.
몽유도원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경관은 왼편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으로, 흔히 마주하는 현실의 세계이다.
제2경관은 도원으로 접근하는 외곡 지역으로 도원의 바깥쪽 입구이다. 산은 험하면서도 환상적이고 길은 아득하게 그려져 있다.
제3의 경관은 사라진 산길이 다시 나타나며, 도원으로 이끌어주는 곳이다.
제4의 경관은 이 그림의 핵심인 도원의 경치이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붉으스레한 복사꽃과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가집 등이 그려져 있으며, 아득한 느낌을 준다.
그의 꿈은 단순한 꿈이었을까요? 아니면 현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일까요? 그 속을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그가 처한 현실과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야망을 그림에 투영하였을 것이라고 말들 합니다. 안평이 발문에서 토로한 바와 같이 ‘낮에 행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혈기 방장하고 총명한 이 젊은이는 궁중에서 자신의 야망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중요한 기관을 장악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실세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야망을 실현하기에는 여러 난관들이 앞에 놓여 있었다. 세종의 3남이었던 그는 기본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으며, 권력 경쟁에서도 수양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아까운 서화에 천재였는데...... 북악 2경인 청계동천 옆을 지나 다음 동천인 백운 동천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청계동천을 지나면 인왕산 정상으로 올라 갈 수 있는 등로가 있습니다. 야고바트레커들과 다시 인왕산 성곽길을 올라 걷는 일은 분명 무리가 따를 것 같아 피하고 인왕중간 길 따라 트레킹을 하면서 도심을 관조하고 주변 동천의 풍광을 조망하면서 걷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백운 동천을 조망하기 위하여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안평대군 별서인 무계정사 뒤에 있는 각자입니다. 아무래도 武(굳셀 무자가) 수양의 심정을 사납게 만들어 한 살 아래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낸 후 다시 사약을 내려 죽음으로 몰고 간 것 같습니다. 모반의 뜻으로 적어 김종서가 보냈다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大空本寂寥 玄化憑誰訊
(큰하늘은 본래 고요하고 공허하니 현묘한 조화를 누구에게 물으랴)
人事苟不差 雨暘由玆順
(사람의 일이 진실로 어그러지지 않으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그로 말미암아 순응한다.)
隨風着桃李 灼灼催花信
(바람이 복숭아 오얏꽃에 부딪치면 화사하게 꽃소식을 재촉한다)
沾濡及麥隴 率土均澤潤
(촉촉한 윤기가 보리밭을 적시면 온 땅이 고르게 윤택해지리라)
읽고 또 읽으며 모반의 흔적을 찾고자 하였으나 전혀 낌새 조차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시에 불과 하거늘 ...... 권력은 부자와 형제지간에도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 속성인가 봅니다. 권력은 참 추악합니다.
정선이 그린 창의문 주변과 백운동천 주변 산수화입니다. 백운동천을 지나 수성대로 나갔습니다. 수성대는 안평대군이 살던 비해당이 있던 곳입니다. 안평대군 사후에는 삼촌인 효령대군이 살기도 했던 집이었습니다. 또한 겸재 정선은 장동팔경이란 화첩을 만들면서 수성대를 그렸습니다. 수성대에는 안평대군이 설치했다는 기린교란 돌다리가 있는데 정선의 그림에도 기린교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동란을 거치면서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서 풍광을 망치기 시작하였지만, 정비사업 일한으로 옥인아파트를 건축하여 환경을 개선하였지만 근년에 들어 이곳 아파트를 철거하고 수성동(水聲洞)을 자연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세종대왕이 이 지역에서 탄생하셨다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역 주민들은 옥인동천이라 부르지만 그 근거는 미약하고 옥류(玉流)에 수성동이라 함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선이 그린 수성동, 기린교(돌다리) 수성동으로 내려 서는 길을 지나 필운대 위에서 잠시 멈춰 그 아래를 조망하였습니다. 인왕산에서 도성을 바라 보며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가 좌측 계곡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우측 기슭입니다. 백사 이항복이 살던 집터로 현재 배화여고 안에 있습니다.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 명승조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유득공이 어느 봄날 필운대에 올라 살구꽃 구경을 하다 시를 지었다.
살구꽃이 피어 한껏 바빠졌으니
육각봉 어구에서 또 한차례 술잔을 잡네.
날이 맑아 아지랑이 산등성이에 아른대고
새벽바람 불자 버들꽃이 궁궐 담에 자욱하구나.
새해 들어 시 짓는 일을 필운대에서 시작하니
이곳의 번화함이 장안에서 으뜸이라.
아스라한 봄날 도성 사람바다 속에서
희끗한 흰머리로 반악을 흉내내네.
유득공은 역시 검서였던 친구 박제가와 늦은 봄이면 필운대에 올라 꽃구경을 했는데,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일품이었다. 육각현에서 술 한잔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필운대 산수화다. 이 작품은 겸재가 오성대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꽃과 나무를 심었던 필운대(弼雲臺)를 붓 끝으로 완성한 작품입니다. 겸재는 60세에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면서 숨 고르고 연구한 결과로 진경산수화를 완성하게 됩니다. 필운대를 끝으로 오늘 계획했던 조망을 완성했습니다. 추후 2014년 서울 도심 길을 걸을 때 이 부근 탐방이 계획에 잡혀 있습니다. 그 때가서 권율장군, 백사 이항복, 추사 김정희, 세종대왕. 윤동주 하숙집, 빙허 현진건, 이상, 무계정사 등등을 탐방할 계획입니다. 우린 사직터널을 넘어 월암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옛성곽이 남아 있는 월암공원 옛기상대 건물이 있는 성곽 앞에서 단체로 촬영을 하였습니다. 모두들 피곤한 기색들이 없습니다. 촬영 후 많은 노래로 우리들을 즐겁게 한 홍난파 선생께서 사셨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주말과 휴일에는 휴관이라 집 내부를 볼 수 없었지만........
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화성군 수원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남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22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친일과 관련하여 그에 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 나던 날, 저의 아빠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 (임) 자돌림에다 丁축년에 태어났다고 丁 (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 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
국권를 빼앗긴다는 일은 너무 슬픈 일입니다. 몇자의 글로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하여 친일파라 부르며 응징하는 것 또한 또 하나의 테러를 범하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수 많은 긍정적인 음악적 업적을 남겼으며 그의 가족들 또한 사화와 국가를 위한 무수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예를 들어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새로운 화합의 물꼬를 터야하는데 세상은 그러하지 못하니 걱정입니다. 용서를 통하여 화해의 언덕에 서서 통합의 평화를 노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분열을 벗어날 수 없을 것 입니다. 긴 안목으로 조국의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데 자기 쪽의 유리함으로 정쟁의 도구로만 이용하려고 드니 가슴 아픕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집 앞 홍난파 선생 흉상 앞에 모여 노래를 함께 부르며 선생의 일생에 대하여 회상하였다. 그리고 다시 정동 교육회관향해 길을 나섰다. 이젠 트레킹 막바지다. 아침 안국역에서 모여 와룡공원으로 그리고 숙정문을 올라 곡장과 청운대, 창의문을 지나 자하 손만두 집에서 점심을 챙긴 후 백석동천, 청계동천, 백운동천, 옥류 수성동, 필운대를 지나 월암공원과 홍난파 선생의 마지막 시기 거처을 마주하고 정동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다들 유쾌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었다. 트레킹을 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일 적이 많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그렇지 않고 함께 가려면 천천히 걸어야 한다. 더군다나 자연과 함께 가려면 느림의 미학을 알아야 한다. 숨이 가쁘기 전에 호홉을 고르고 지치기 전에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이 되뇌임 안에서 트레킹은 시작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 하시기를 ~~~
야고바형제회 평의원, 구역장, 양성교사, 성가대 단장 등등 그리고 야고바 트레커들이 함께 2013년 감사미사 참례 계획이 있어 교육회관에 모인 것입니다. 신부님과 통화 후 2층 20호 강의실에서 미사를 집전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220호실 모였습니다. 가장 바쁘신 12월에 신부님께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미사를 참례하게 된 것입니다. 죄송함과 기쁨이 공존하는 마음으로 강의실로 모두 모였습니다.
입당성가를 다함께 부르며....
제1독서..
제2독서....
복음 말씀과 강론
봉헌....
주님의 기도....
성체성사....
2013년을 소회 하시는 모니카 회장님~~~ 함께 한 시간들 행복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꾸벅...
황영진 세레자 요한 형제께서 준비해 주신 포도주 2병, 넘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공급부탁 ㅎㅎㅎㅎ
포도주를 따라 주시는 신부님.
후식으로 녹차 까지.... 송구하옵고... 신부님 여러모로 전부 고맙습니다. 영육간에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1년 동안 자신을 숨기며 형제회를 위하여 애를 써주신 평의원, 구역장님들, 성가대원들, 의료구역봉사팀들, 양성부 교육담당 자매님들과 그리고 오늘까지 함께 동행하셨던 모든 야고바 형제, 자매님들에게 감사드리며 야고바 트레커님들의 협조와 동행에 대하여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