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젊은 영웅(英雄)들
①
백육호는 만화루로 들어섰다.
만화루의 대청에는 수십 명의 부상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으며 항주 근방에 있는 이름난 의원들이 총동원된 듯 그들은 분주히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곧바로 후원쪽으로 안내되었다.
벌써 십여 명의 의원들이 남궁청운의 상세를 보았으나 모두가 포기했던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흑흑흑......."
방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여인의 흐느낌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안에는 십여 명의 군웅들이 침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백육호가 들어서자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해졌다. 개중에는 기대에 찬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고, 어떤 자는 그가 지나치게 젊은 것에 실망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어디 봅시다."
군웅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음에도 백육호는 추호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군웅들 사이를 헤치고 남궁청운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남궁청운은 반듯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으며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마치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백육호는 맥도 짚어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두들 나가 주시겠소?"
군웅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소연이 그의 소매를 잡고 매달렸다.
"이보세요! 의원님.... 저희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을까요?"
남궁소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백육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소. 하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오. 상태가 워낙 위중하여 시간이 없소이다. 그러니 모두들 나가 주시오."
군웅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연 눈앞의 젊은 의원을 믿을 만한 지가 자신이 없는 듯했다.
한편 백육호는 군웅들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철무영을 거쳐 황보수선에게 멎었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황보수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육호는 무심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요, 여러분. 이 분이 고칠 수 있다잖아요. 어서들 나가주세요."
남궁소연은 다급하게 군웅들에게 말했다.
호사붕이 미심쩍다는 듯이 반론을 펼쳤다.
"이것 보시오. 정말 당주님을 살려낼 수 있소? 공연히 두 번 죽이는 짓을 할 것 같으면 손을 떼는 게 좋을 것이오."
그러자 황보수선이 나서며 꾸짖었다.
"호소협! 그 무슨 망발인가요?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할 때예요. 어쨌든 의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니 더 이상 실례의 말씀은 삼가세요!"
평소 온화한 성품이던 황보수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옳소."
"맞는 말이오.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소."
군웅들은 하나둘 밖으로 사라졌다. 호사붕은 여전히 불만인 듯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이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원님."
마지막으로 남궁소연과 연채령, 황보수선이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남궁청운과 백육호만이 남게 되었다.
"황보소저, 왜 그리 화가 나셨소?"
황보수선이 회랑으로 나선 순간 기다리고 있던 철무영이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황보수선은 당혹한 표정으로 대꾸한 후 종종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그녀는 회랑의 좌우에 있는 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딘가 모르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철무영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늘 침착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이던 그녀였다. 그런데 방금 전의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무엇엔가 홀린 듯했던 것이다.
군웅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며 의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인지라 아무도 감히 방안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의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일각이 여삼추라 했던가?
기다림의 시간은 한없이 지루했다.
인시(寅時) 무렵, 드디어 방문이 열리며 젊은 의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밖에서 기다리던 군웅들은 우르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됐나요? 백공자님."
극도의 긴장으로 안색이 창백해진 남궁소연이 백육호의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며칠 요양하면 일어날 것이오."
"와아!"
백육호의 무심한 답변에 군웅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남궁소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급히 반문했다.
"정말... 오라버니께서 살아나신 건가요?"
"그렇소."
"아!"
두 여인이 픽 쓰러졌다. 남궁소연과 연채령이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싸여있던 두 여인은 일시에 탈진현상을 보인 것이었다.
"다른 중상자가 있소?"
백육호는 군웅들을 둘러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백호단주 포곤명이 공손히 답했다.
"대인께서 직접 수고하실 일은 없소이다. 다른 의원들이 무난히 수습하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대인께서 사경을 헤매던 소성주님을 구해주셨으니 그 은혜는 하해와도 같습니다. 무림군왕성 사천여 식솔을 대신하여 소생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포곤명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때 호사붕이 눈알을 굴리며 나섰다.
"백대인, 소생이 신의를 몰라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곧 주안상을 보라 이르겠소이다."
백육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겠소. 내 환자들이 몰려올 시간이오."
백육호는 휭하니 몸을 돌려 성큼성큼 회랑을 걸어나갔다.
"아니... 백대인! 그렇다면 수고비라도 받아가야 할 것 아니오?"
호사붕은 품속에서 대충 잡히는 대로 한 웅큼의 금자를 집어들고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육호는 호사붕이 거만한 자세로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그가 집은 것은 금화 한 닢이었다.
"이것이면 충분하오."
백육호는 어이없어 하는 호사붕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니... 뭐 저런 건방진 놈이......."
무안을 당한 호사붕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군웅들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음을 알고 급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포곤명이 급히 나섰다.
"이대로 은공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오. 내 직접 배웅이라도 하고 오겠소이다."
포곤명은 빠른 걸음으로 백육호를 쫓아 나갔다. 그러자 황보수선과 남궁소연, 철무영 등도 뒤따라 나섰다.
"백대인!"
포곤명은 저만치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던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은공을 마차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백육호는 고개를 저었다.
"호의는 고맙소만 사양하겠소. 의원으로서 의당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러면 도리어 거북할 뿐이오."
백육호는 끝내 포곤명의 호의를 거절하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뒤따라 나왔던 군웅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백육호의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군웅들은 왠지 그에게 신비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②
백육호는 만화루을 빠져나온 후 관도를 거쳐 한 야산으로 접어 들었다. 새벽 안개가 자욱이 깔려있는 산길이었다. 이제 언덕만 두어 개 넘으면 명승지 육화탑이 나타나고 그가 경영하는 약방이 나올 것이다.
그가 한적한 이 길을 택한 것은 항주 시내로 가는 것보다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
그는 유람에 나선 풍류객인 양 유유자적한 자세로 안개를 헤치며 걸어갔다.
방금 전 당대의 영웅으로 불리는 남궁청운을 구해준 일도 그는 이미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안개 속을 걸으며 명상에 잠겨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쉴새없이 수많은 상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되풀이된 일이었다. 동사군도를 탈출한 이후 지금까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틈만 나면 동사군도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부질없는 상념인 것을.......'
백육호는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멈춰라!"
문득 뒤쪽에서 음침한 외침이 울렸다.
백육호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히 돌아섰다. 안개 속에서 십여 개의 홍색인영이 날아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앞에는 얼굴에 붉은 두건을 이마에 두른 홍의인 십여 명에 내려섰다.
그들은 사사련의 구구환사객이었다.
"네놈이 백가 성을 쓰는 의원이 맞느냐?"
한 명이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렇소만."
백육호는 자신을 빙 에워싸는 무리들을 둘러보며 담담히 대꾸했다.
"클클! 다행이군. 고작 여기밖에 안 왔으니."
그자는 일행 중 수뇌로 보였는데 육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북망산(北亡山)의 입구로 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군."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무슨 소리요? 이곳에 무덤 쓸 일이 있소?"
"흐흐흐!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군. 그렇다. 이 호젓한 곳에 네놈을 묻어주기 위해 사사련의 사대호법의 일원인 노부 추도남(秋途南)이 친히 행차하게 되었다."
백육호의 눈에 한순간 기광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오?"
추도남은 만면에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물론 궁금하겠지. 너 같은 약장수를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사사련의 어르신께서 거동하셨으니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지. 그건 네놈이 어설픈 잔재주로 칠절신군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느냐?"
백육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죽어야 할 이유란 말이오?"
"흐흐, 그렇다."
추도남은 한 걸음 물러나며 명령을 내렸다.
"시간끌 것 없다. 어서 이 약장사를 북망산으로 보내라!"
구구환사객 중 한 명이 번뜩 신형을 날려왔다.
쐐애액!
그는 다짜고짜로 장도를 휘둘렀다. 아마도 일도(一刀)면 충분히 상대를 양단할 수 있다 생각했는지 그는 단순한 초식을 펼쳤다.
그런데 상황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엇?"
환사객 전두충(田杜忠)은 장도가 텅 빈 허공을 가른 것을 느끼고 엉거주춤 선 채 두리번거렸다. 의당 피를 뿌리며 두쪽이 나있어야 할 젊은 의원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돌아가시오. 난 당신들과 놀 생각이 없소. 더구나 하나뿐인 목을 그냥 내줄 생각은 더욱 없으니 말이오."
백육호의 음성이 전두충의 등뒤에서 들렸다.
"헉!"
전두충은 머리털이 곤두섰다. 지척에서 들린 소리로 미루어 만일 상대가 슬쩍 손만 뻗었다면 그는 등에 일격을 고스란히 얻어맞았을 것이다.
전두충은 이를 악물며 장도를 뒤로 돌려 휘둘렀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놈! 어디 다시 한 번 피해봐라!"
쐐애애액!
이번에는 흉흉한 기세로 장도가 허공에 칼그물을 이루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릴없이 허공만 베었고, 상대방은 허공에 둥실 뜬 채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오. 다시 갈 길을 방해하면 용납하지 않을지도 모르오."
"......!"
이 사태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특히 우두머리인 추도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사련의 호법 중 하나인 그 자신도 허공에서 몸을 띄운 채 입을 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알을 굴리더니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구나! 여봐라, 모두 합세하여 놈을 죽여라!"
십여 명의 환사객들은 각자 병장기를 뽑아들고 백육호를 향해 공격해갔다.
슈슈슉! 쐐애액!
안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며 가공할 경기와 칼빛이 난무했다. 그야말로 숨돌릴 틈도 없는 공격이었다.
백육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왼손을 뒤집으며 뿌렸다.
우르릉!
뇌음과 함께 환사객들이 비명을 발하며 날아갔다. 단 일 장의 공세에 모두 허공으로 곤두박질쳐 버린 것이다.
추도남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눈앞의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후, 간신히 이성을 회복한 추도남은 수하들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버린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내 미처 말하지 못했소. 내게서 인정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라는 사실을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백육호의 표정은 음울하기만 했다.
"으으, 방금 전 그 무공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느냐?"
나름대로 평생을 무공 외길로 달려온 추도남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는 상대의 무공에 대해 알고자 했다. 백육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려하지 마시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그럼... 노부를 살려주겠단 말이냐?"
"내 앞길을 막지만 않는다면 노인장을 굳이 죽일 이유가 없소."
"괴이한... 자로군. 자네는."
추도남은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 휙 신형을 날렸다. 상대가 자신을 죽일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한 이상 한 시라도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서서히 돌아섰다. 그의 눈은 숲쪽으로 향했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이제 모습을 보일 때가 되지 않았소?"
"하하! 점입가경(漸入佳境)이로군."
숲으로부터 한 가닥 낭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젊은 중이 걸어나왔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는 어찌나 살이 쪘는지 마치 공처럼 둥글게 보였다.
기이한 것은 뚱뚱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이 꽤 준수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신에 잿빛의 가사(袈裟)를 입고 있었다.
"하하! 그대가 천축(天竺) 밀교비전인 유가기환술(琉伽奇幻術)까지 꿰뚫어 볼 줄은 몰랐소."
중은 듣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백육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날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소. 스님의 기척을 알아낸 것은 무공이 고강해서가 아니라 내게 남보다 발달된 오감(五感)이 있었기 때문이오."
백육호는 솔직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육노인에게 시달리며 추나심법을 전수 받았던 그는 범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감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잘 이해가 안되는구려."
승려의 의혹은 당연한 것이었다.
"스님은 소생에게 무슨 용건이 있소?"
백육호는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질문을 던졌다.
젊은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용건은 없소. 그저 만화루를 향해 가던 중 호기심이 발동하여 방금 전의 일을 지켜보았을 뿐이오. 만일 무심코 지나쳤다면 평생 후회할 뻔했소."
"......."
백육호는 침묵했다. 그가 무슨 일로 만화루에 가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알려하지 않는 것이 그의 습성이었다.
"그곳에 칠절신군이 있다기에 만나서 담판을 지으러 가는 중이었소."
"칠절신군과 담판을?"
자신도 모르는 반문하는 백육호였다.
온화해 보이는 젊은 중이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칠절신군과 담판지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도 은연중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젊은 중은 순후한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전에 먼저 내 이야기부터 해야겠소. 내 비록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있기는 하나 본시 중은 아니오. 본시 타고난 심성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워 아무리 면벽십년을 해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오."
"......."
백육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자는 비록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고 있으나 말처럼 포악한 위인은 아니다. 어쩌면 정반대로 소탈담백한 위인인지도 모르겠다.'
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일곱 살 이후로 이십 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소림사에서 지내다보니 자연히 스님 흉내를 내게 되었소이다. 어쨌거나 사람에겐 호칭이 필요하니 지금부터는 날 혜왕(彗王)이라 불러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백육호는 그만 안색이 변했다.
"아니? 그렇다면 스님이... 아니 귀하가 바로 소림과 무당의 공동전인으로 용봉칠영에 꼽히는... 혜왕이란 말씀이오?"
혜왕!
일찍이 무림에서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림, 무당의 공동전인이란 무림사상 유례없는 내력이 그렇거니와 무림군왕성 출신의 칠절신군 남궁청운과 쌍벽을 이루는 이 시대의 젊은 영걸이란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니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혜왕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보이지 않는 구름 속의 신룡(神龍)인 양 지금까지 그를 보았다는 위인은 거의 없었다.
그는 최근까지 천축(天竺) 지방으로 수행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혜왕은 준수한 얼굴에 한 가닥 기이한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할 일 없는 위인들의 입에 오르내렸구려. 하하! 아무래도 좋소이다. 아무튼 소문의 일부는 사실인 것 같소이다."
백육호는 새삼스런 눈으로 혜왕을 바라보았다.
"소생이 만화루로 그를 찾아가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소?"
"궁금하오."
백육호는 순순히 대답했다. 혜왕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친근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하, 그건 소생이 천축에 가 있는 동안 칠절신군이 소림사와 무당산에 올라 지나친 행동으로 모욕을 끼쳤기 때문이오. 내 비록 두 문파의 정식제자는 아니나 한때 수행의 은을 입은 도리로 어찌 그 사실을 방관하겠소? 그래서 그 일을 따지기 위해 가는 길이었소이다."
백육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금 전 남궁청운을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안되었소이다. 혜왕. 그 때문이라면 헛걸음했소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혜왕의 가느다란 눈이 커졌다.
"칠절신군은 어젯밤 큰 싸움을 벌여 중상을 입었소이다. 요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귀하와 자웅을 결하려면 최소한 한 달 이상은 요양을 해야 할 것이오."
"이런, 이런!"
혜왕은 낭패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혜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소이다. 소생은 이만."
백육호는 가볍게 포권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버리자 혜왕은 안색이 변했다.
"아니? 여보시오! 그렇게 가버리는 법이 어딨소?"
혜왕의 뚱뚱한 몸이 구르듯 백육호를 따라갔다. 백육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건 세상사의 흔한 이치요. 귀하는 불문(佛門)의 도리를 알면서 어찌 집착하시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도 한참 전도되었다. 혜왕의 얼굴에는 히쭉 괴상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껑충 뛰어올라 백육호의 곁에 내려서며 말했다.
"불문에는 이런 말도 있소. 옷깃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 있다 하였소. 이대로 헤어진다면 부처님도 아쉬워할 거요."
육화탑 근처의 관도변에 위치한 반점(飯店).
변변한 현판도 갖추지 못한 궁색한 곳에서 두 사람은 조반을 먹었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백대인, 오늘은 조반이 빠르시구려."
칠순이 넘은 반점의 영감은 직접 요리를 내오며 깍듯이 인사했다.
기실 이곳은 백육호가 자주 오는 곳이라 안면이 익어 있었다. 반점 주인도 그가 오는 것을 크게 환영했다. 이 일대에서 명의로 소문난 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가는 곳마다 백형은 환영받는 존재이구려."
혜왕은 감탄한 듯 말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백육호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백형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신을 보는 듯하외다. 아마도 그건 백형이 이곳 사람들에게 큰 음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그만 하고 어서 식사나 하시구려."
백육호는 듣기 민망하여 혜왕의 말을 중도에서 끊어버렸다. 혜왕은 반점 영감이 내놓은 황주(黃酒)를 병째로 들며 물었다.
"어떻소? 해장술 한 잔 하는 것이?"
백육호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다 해도 귀하는 스님 차림이 아니오? 그런데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백육호는 벌써 잔을 내밀고 있었다. 그 역시 술생각이 났던 것이다. 혼자 사는 동안 그는 꽤 술이 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주거니받거니 하며 황주를 거의 비워가고 있었다. 술이 얼큰해지자 혜왕의 얼굴도 불콰해졌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백형, 백형의 무공에 대해 알고 싶은 점이 한둘이 아니오. 그런데 아까 들으니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던데 나 역시 그렇소?"
"그렇소. 누구라도 예외는 아니오."
백육호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런 빌어먹을!"
혜왕은 불평을 터뜨렸다. 도무지 중이라 할 수 없는 말투였다.
"좋소, 대체 왜 그런지 이유라도 말해 줄 수 없소?"
백육호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에 음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다시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다.
"간단하오. 난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의원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소. 그때문이오."
혜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뿐이란 말이오? 백형의 내력이 노출되어 무림에 휘말리게 될까봐서란 말이오?"
"그렇소."
"이런 빌어먹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였군, 그래."
혜왕은 술잔을 탕!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물읍시다. 백형은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육호는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난 운명을 믿지 않소. 신(神)도 마찬가지요. 자신의 삶은 철저히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소."
확신에 찬 말이었다. 혜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엇이 백형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 몰라도 나는 다르오. 난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다고 굳게 믿고 있소."
"내 생각일 뿐이오. 귀하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무정한 말투였다. 그러나 혜왕은 백육호가 비정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겉으로는 무정해도 그의 속마음은 정열(情熱)과 격정(激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혜왕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형, 사실 내가 칠절신군을 만나려는 이유는 그와 잘잘못을 따지기 위함만은 아니오. 사실은 백도무림의 단결을 이루어보기 위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것이 목적이었소."
백육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무림 얘기를 하지 마시오. 관심 없소이다."
"하하! 이미 늦었소. 백형은 이미 무림의 일에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소. 아무리 발을 빼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백육호는 눈썹을 꿈틀했다.
"어째서 그렇소?"
"백형이 남궁청운을 구해주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된 것이오. 조금 전 사사련의 호법을 놓아주지 않았소? 그것으로 인해 백형은 사도무림의 공적으로 지목된 것을 아시오?"
"......."
백육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물론 백형은 살생을 저어하는 마음에 그를 놓아주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로 인해 무림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바로 백형의 운명이라오."
"......."
백육호는 묵묵히 혜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무림의 일에 끌어들이려는 한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호의에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혜왕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소이다. 소림과 무당, 개방( )을 비롯하여 곤륜, 청성 등의 명문정파는 얼마 전 비밀리에 회동했소이다. 그것은 당금무림의 혈겁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함이었소이다.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소."
혜왕은 히쭉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태자당과 맞서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혜왕이 주제 넘게도 명문정파 연합의 맹주(盟主)를 맡게 되었소이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귀하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한 모양이구려."
"그렇소. 비록 맹주의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각파의 장로급 인사들로 구성된 원로회(元老會)가 있기는 하지만 배분을 중시하는 명문정파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결정이었소. 그것은 그만큼 당금무림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오. 난 맹주를 맡은 이상 이 한 몸 아끼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서 강호에 나오게 된 것이오."
"......."
"강호에 나오자마자 첫번째 찾아간 곳이 어딘지 아시오? 바로 두 갈래로 갈라진 백도세력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황보세가를 찾아갔소이다."
백육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황보가주께서는 내 뜻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셨소. 그분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개봉으로 달려가 무림군왕성주를 만났소이다. 그러나 군왕성주는 그분의 중재에 응하지 않았소. 아마도 그는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소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칠절신군을 만나기 위해 나선 것이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이오. 무림군왕성이나 백도연맹이나 모두 한 길을 가는 동지인데 어찌하여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단 말이오? 그것은 사도로 하여금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게 하는 일이 아니오?"
혜왕은 히죽 웃었다.
"바로 그것이오. 겉으로는 무림평화를 위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사사로운 명예욕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백도인들이 사도무림에 당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오."
"......."
"백형, 날 도와주시오. 백형이 내쪽에 서 주신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소이다."
백육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귀하는 중대한 우(愚)를 범하고 있음을 아시오?"
혜왕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우? 어떤 우를 말이오?"
"지금 귀하는 백도무림의 단합을 피력하면서도 내게 백도연맹을 밀어달란 말을 하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귀하가 무림군왕성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단 말이오?"
"......!"
혜왕은 할 말을 잃었다. 백육호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술잔을 기울였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는 황주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쓰디쓴 탕약처럼 느껴졌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백형의 고언 마음 깊이 담아두겠소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어디로 가시오?"
"마음을 바꾸었소이다. 백형을 만난 후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소이다.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겠소이다. 소림사로 돌아가겠소."
백육호는 담담히 말했다.
"배웅하지 않겠소이다."
혜왕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중히 합장했다.
"백형, 머지않은 장래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그때는 밤새도록 마셔봅시다."
백육호는 빈 술병을 들어보였다.
"그러려면 꽤 많은 술이 필요할 것 같소. 내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그 날의 술값은 내가 내겠소."
혜왕의 가느다란 눈에서 섬광이 번쩍 빛났다. 그는 한동안 백육호를 주시하더니 가사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③
낙도서원(落島書院).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서 서쪽으로 삼십 리쯤 가면 천민들이 사는 마을이 나온다. 주로 사냥꾼이나 백정 따위들이 어울려 사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게 서원(書院)이 생긴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이었다.
한 젊은 유생이 홀연히 마을에 들어와 직접 대나무로 엮어 지은 허름한 서원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냥꾼, 백정, 또는 퇴기(退妓)의 자식이거나 걸인들의 아이들이 학문을 익힌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웃을 일이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젊은 유생이 하는 짓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함없이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주자 마침내 그의 참뜻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십오 년이 흐른 지금, 유생은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며 백여 호 남짓한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원주님, 송구스럽습니다. 이거 번번이......."
"허허! 내가 좋아 하는 일이니 그런 인사는 접어두시오. 어서 가보시구려."
백정 노대삼(魯大三)은 오늘 낮 소에게 받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는 낙도서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중이었다.
늘 그랬듯이 낙도서원의 원주는 아무 대가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뚝거리며 서원을 나서는 노대삼을 직접 문앞까지 나와 배웅해 주기까지 했다.
원주의 눈동자에는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듯했다. 또한 수양의 깊이를 짐작케 하듯 정갈하게 빗어 묶은 머리와 청수한 이마, 곧게 뻗은 콧날은 고매하고 강직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낙도원주.
그의 이름은 사마을지(司馬乙支)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를 사마선생(司馬先生), 또는 그저 원주라고 불렀다.
"......."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으니....... 그가 십오 년간이나 백정마을에 틀어박혀 서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범인은 감히 상상도 못할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마을지는 노대삼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환령(幻靈), 출입을 삼가라 했거늘."
"화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군사(軍師)."
어디에서 들려온 음성인가?
분명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둘러보아야 서원 주위에 우거져 있는 청죽림(靑竹林) 뿐,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마을지의 안색은 여전히 평정할 뿐이었다.
"간단히 고하도록."
사마을지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예, 우선 동사군도의 일부터 보고하겠습니다. 그곳에 들이닥쳐 관리들과 죄수들을 모두 납치해간 자들은 동영(東瀛)의 해적들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해적?"
사마을지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동사군도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또 무슨 이유로......?"
환령이라 불린 인물에게서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마을지의 의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뜻이었다.
"태화천(太華天)의 후예도 끌려간 것이 확실한지 알아보았느냐?"
이번에는 환령의 응답이 있었다.
"그 점이 이상했습니다. 해적들이 납치해간 죄수들 속에 그자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인물들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사군도를 둘러본 결과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잘려진 팔과 오래 전에 흘린 듯한 선혈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짐작컨대 그곳에서 혈투가 벌어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자는 그때 바다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사마을지의 안색이 흔들렸다.
"탈출했을 가능성도 있지."
"속하의 판단으로는 동사군도에서 탈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불변의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확인하지 않은 이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
환령은 응답하지 않았다.
'제왕의 후예가 수장(水葬) 되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사마을지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떻게 할까요? 명만 내리시면 바로 해적들의 본거지를 쓸어버리겠습니다."
사마을지는 한 가닥 조소를 입가에 물었다.
"형제들이 수만 리 바다를 건너가 하찮은 해적들을 소탕할 정도로 한가하단 말인가? 주군(主君)께서 출관(出關)하실 날이 머지 않았다. 그 전에 무림의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 우선이다. 해적들의 일은 그대로 두어라. 너는 계획대로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해라. 또 다른 소식이 있느냐?"
"칠절신군이 이끄는 무림군왕성의 토벌대가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공격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칠절신군은 한때 사경에 빠졌으나 엉뚱하게도 한 무명의원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회생했습니다."
"무명의원?"
"예, 군사. 한데 칠절신군을 구한 그자는 사사련의 환사객이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단 일초에 열두 명의 환사객을 저승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사마을지의 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그의 부드러운 눈에서 일순 날카로운 빛이 솟아났다.
"그자의 내력은 파악했느냐?"
"아직.... 다만 그자는 약방을 열고 있으며 백육호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아냈을 뿐입니다."
"백육호? 그런 이름도 있단 말이냐? 무슨 일련번호 같은데... 백육호라... 엇!"
사마을지는 갑자기 경악성을 발했다. 그의 안색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경직됐다.
"환령! 너는 지금 즉시 형제들에게 일러 백육호란 자의 신원을 파악하도록 해라. 또한 지금 이후로 그자의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절대 행적을 놓쳐선 안된다. 알겠느냐?"
"옛! 알겠습니다."
환령은 심상치 않은 사마을지의 태도에 황급히 복명했다.
"또 다른... 소식이 있나?"
"예, 군사 어른. 녹림 쪽의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인가?"
사마을지의 안색이 비로소 풀렸다. 그는 녹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고, 이제 그 결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금까지 포섭한 녹림의 산채는 이제 이십사채(二十四寨)에 달했습니다."
사마을지의 눈살이 가볍게 찌푸러졌다.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 중 이십사채라면 아직 멀지 않았느냐?"
"그건... 녹림대종사가 워낙 만만치 않은 작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자를 회유시킬 가능성이 다소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최근에 들어온 희소식입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한 일이군. 그렇게만 된다면 힘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신중을 기하라 전해라. 녹림대종사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마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조만간 노부가 직접 녹림을 둘러볼 생각이다. 이제 더 없느냐?"
"예! 이상입니다."
"알겠다. 그럼 복귀하도록."
청죽림이 바람에 흔들렸다. 환령이 사라졌는지, 아직 어딘가에 숨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마을지는 몸을 돌려 유유히 걸어갔다. 저만치 대나무로 지은 서원의 전경이 보였다.
"쯧쯧, 당분간은 서원을 비워야하겠군."
그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그래도 이제 청아(淸兒)가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순 있게 됐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
그는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세월은 참으로 화살과도 같이 빠르다.
십오 년 전 그의 앞에 나타났던 청아는 일곱 살짜리 코흘리개 계집애였었다. 부모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구걸하는 그녀를 우연히 제남성에서 발견하고 데려왔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문을 가르쳤고, 친딸처럼 양육해왔다. 그러기를 어언 십오 년, 지금은 어엿한 스물두 살 아리따운 여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제 낙도서원의 대소사를 혼자 도맡아 꾸려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타고난 총명과 온화함으로 인해 아직도 혼자 몸인 사마을지의 가슴에 늘 훈훈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십오 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청아는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딸처럼 느껴졌고, 그녀가 차츰 자라면서는 알 수 없는 정(情)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이성간에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에 가깝기도 했다. 물론 사마을지는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때로는 그의 고독한 마음 한구석에서 그녀의 존재는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으로 점점 더 큰 자리를 차지해오고 있었다.
"녀석.... 또 어딜 가냐고 따지려 들 테지. 이번엔 뭐라 변명하나? 옳거니, 그래! 녀석이 입만 열면 장가가라 재촉했으니 이번엔 색시감을 보러 나간다고 하면 되겠구나. 허허허......!"
사마을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서원으로 들어섰다. 지금쯤 청아는 자신을 위해 맛깔스런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