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사부와 제자
①
탁!
붉은 빛이 번쩍 하더니 자색 기둥에 무엇인가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와서 꽂혔다.
"헉!"
그것을 본 순간 진혼검(鎭魂劍) 해대웅(海大雄)은 안색이 잿빛이 되고 말았다.
그는 형산파(衡山派)의 직전제자로서 차기 장문인 후보였고 형산파 이대 고수 중 서열 일위였으며 형산파 장문인의 수제자였다.
남악신검(南嶽神劍) 구자명(仇子明).
형산의 장문인이다. 그는 당금 십대문파 중 오대검파의 하나인 형산파의 백 년 이래 가장 뛰어난 고수다.
해대웅은 늦은 밤 사부인 그가 최근 남무림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혈우전의 준동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부심하여 잠 못 이루고 있는 것을 알고 차를 끓여 막 장문인 실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소리도 없이 날아와 그의 머리 위를 스친 후 기둥에 박혔다.
그것을 본 순간 그의 눈이 공포에 질려 뒤집어졌고 안색은 흙빛이 된 것이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혈... 혈우전!"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일개 장문인의 신분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세치 길이의 짧은 핏빛 화살, 그것을 본 자는 필사(必死)라는 당금 무림의 불문율을 순간 떠올린 것일까?
활촉은 무엇인지 모를 뿔(角)로 된 것이었는데 무엇과도 비할 데 없이 날카로웠다. 깃털은 섬뜩한 핏빛이었고 화살대에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 사십사 살(四十四 殺).
끔찍한 글이었다.
형산파 장문인 남악신검 구자명의 눈썹 끝이 가늘게 떨렸다.
"사십사 명을 죽이겠다고......?"
혈우전에는 독특한 법칙이 있다. 그것은 반드시 살인통고를 하는 것이고 통고는 혈우전을 날려 알리고 꼭 죽일 대상의 숫자를 화살에 새겨 넣는다.
어김없이 그 숫자만큼 살인을 하며, 기간은 화살을 날린 날로부터 정확히 십 일 이내에 실행한다. 이제껏 그 규칙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
"기어이... 본문에게도 손을 뻗치는구나......!"
구자명은 혈우전을 제자 해대웅에게서 받아 들고는 신음을 흘렸다.
혈우전의 죽음의 소용돌이가 남무림에 끼쳐오기 이 개월.
그 동안 남무림은 공포에 잠겼다. 그러나 요행히도(?) 아직 형산파에는 그 혈수가 뻗쳐오지 않았는데 기어이 살인통고가 날아온 것이다.
구자명의 흰 수염이 섞인 턱수염이 흔들렸다.
그는 침중하게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해대웅은 창백한 낯빛으로 사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부님."
구자명은 문득 제자를 보았다.
그는 탄식했다.
"너는 겁이 나느냐?"
"제... 제자는 단지... 문파의 희생이 클까 두려울 뿐.......""허헛...! 명색이 십대문파이자 중원오대검파(中原五大檢波) 중 하나인 형산파가 이까짓 사악한 무리를 두려워 해서야 되겠느냐?"구자명의 눈에서는 형형(炯炯)한 신광이 흘러나왔다.
해대웅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새삼 용기가 솟아 나왔다.
"맞... 맞습니다. 제자는 틀림없이 본문의 힘으로 그 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구자명은 문득 제자의 의기가 가상한 듯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대웅(大雄)."
"네, 사부......."
"네가 형산에 입문한 것이 언제이냐?"
"올해로 꼭 이십 팔 년째 됩니다만......."
"으음, 네가 다섯 살 때 이곳에 들어왔으니 네 나이 서른 세 살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동안 너는 열심히 무예를 연마했다. 그래서 형산파의 젊은 고수 중 가장 무공이 높다.“
"과찬이십니다......."
"허허...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너는 그 누구도 연성하지 못했던 본문의 비전검법 등천제룡십이식(騰天帝龍十二式)을 이미 육성(六成)가량 터득했다. 가히 검의 귀재라고 불릴만 하구나. 헌데 네 자질이 너무 아깝구나. 검으로 대성할 수 있으련만.......“
해대웅의 강직한 얼굴이 흔들렸고,
"사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구자명은 담담히 말했다.
"본문은 지난 칠백 팔십 년 동안 오대검파의 하나로서 줄곧 남무림을 은연 중 영도해 왔다. 그것은 끊임없이 유능한 문하 제자들이 그 대(代)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사... 사부......?"
해대웅은 문득 무엇인가를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허허...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대가 끊어져셔야 되겠느냐?“
"사부!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제자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라! 이건 명령이다!"
구자명은 엄중하게 외쳤다.
"사... 사부!"
해대웅은 울부짖다시피 외치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피를 토하듯 애원했다.
"제자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제자도 이곳에 남아 싸우겠나이다... 떠나라시면 차라리 제자의 목을 끊어 주십시오!"구자명의 얼굴이 납덩이같이 굳어지더니 준엄하게 꾸짖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사부가 그렇게 약골인 줄 알았더냐? 사부는 충분히 그들을 물리칠 자신이 있다. 단지 너로 하여금 후일을 도모하고 이 일을 무황께 알리기 위해 봉황성으로 보내려는 것뿐이다.“
"사부......."
"시끄럽다! 이건 명령이다!"
구자명은 벽에 걸린 한 자루의 고색이 창연한 장검을 꺼내었다.
"이것은 본문의 장문신부이자 진산지보인 축융신검이다. 너는 이것을 갖고 떠나거라. 봉황성으로 가 무황을 만나 오늘의 일을 알리거라.“
"사부......."
해대웅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서 받아라. 사부의 명을 듣지 않을 테냐?"
"사... 부......!"
구자명은 그에게 축융신검을 전하고 나서 등을 돌렸다.
"허허... 등천제룡십이식을 열심히 연마하거라. 그것을 십성까지 익히면 검왕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본문의 희망은 오직 너에게 있느니라.“
"사부......!"
"지금 떠나거라. 사부는 그동안 준비를 하마. 떠나는 길로 둘째에게 알려 삼십삼타종(三十三打鍾)을 울리게 하거라. 자... 어서 가거라.“
해대웅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큰 절을 했다.
"사부...! 떠나겠습니다. 기필코... 기필코... 돌아 오겠습니다. 이 해대웅은.......“
그는 뒷말을 다하지 못했다. 사나이의 눈물이 앞을 가렸고, 그는 그 길로 뛰쳐 나갔다.
사나이는 대의와 명분에 의해 움직일 때 비로소 자신의 힘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후일을 도모하며 해대웅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형산은 오악(五嶽) 중 남악으로써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기로 이름 높다.
근 칠팔백 년 간을 형산에 자리잡은 형산검파의 장원은 고색창연했다.
해대웅은 장원을 한 바퀴 돌았다.
어린 시절부터 동거 동락한 그립고 정다운 그 광경을 뇌리에 오래 잡아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만감이 교차되는 듯 그는 하늘을 본다. 밤하늘은 맑다. 그 맑은 빛이 해대웅의 눈을 찌르며 들어온다.
별빛은 영롱했으며 달빛은 무정하게 투명했다.
그는 축융신검을 가슴에 안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돌아온다... 반드시.......“
②
"어떠냐, 기분이?"
화삼(華衫)을 입은 청년이 물었다.
그는 준수한 용모의 미청년이었다. 훤칠한 키에 약간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미루어 그는 몹시 낙천적인 기질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언뜻 평범해 보이나 보면 볼수록 기이한 매력이 풍겼다. 그의 옆에는 십오륙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연신 생글거리며 따라 걷고 있었다.
깜찍한 용모는 마치 계집아이 같았다.
"헤헤.... 정말 좋아요. 강남(江南)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몰랐어요.“
그는 종알거리는 게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얼핏 주종간처럼 보였고 부잣집 공자와 서동(書童)의 관계처럼 보였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강남은 아름답다. 더욱이 곳곳의 수류(水流)가 더욱 경치를 돋우는 것 같구나.“
소년은 음성을 낮추었다.
"그런데 저는 생각할수록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
"후훗... 그때 공자님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멍청한 모습이란... 호호... 군방원의 언니들을 혼줄 내고 하던 공자님은 정말 괴짜였어요.“
화삼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녀들을 골탕 먹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 무슨 이유인가요?"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였지."
소년은 어린 눈이 지혜로움으로 반짝거렸다.
"아! 생각나요. 그때 말한 그 팔대전시 중 한 명인 녹상언니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거다."
"그런데 왜요?"
그들은 바로 천우(天羽)와 초초였다.
낙화군방원을 떠나 이곳 강남의 풍치를 즐기며 남하하고 있던 것이었다.
천우는 빙긋 웃었다.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다. 언제고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초초는 입술을 뾰죽 내밀었다.
"피이! 비밀인가요?"
"훗훗... 아무튼 나중에 알게 된다."
초초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요.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더운데 계속 걸을 건가요? 저기 주막이 있는데.......“
천우는 히죽 웃었다.
"엄살이 심하구나. 좋다. 잠깐 쉬었다 가자."
초초는 얼굴을 활짝 폈다. 사실 그녀는 더위가 딱 질색이었다. 어서 빨리 시원한 그늘을 찾거나 주막이나 객점에 들러 가능하면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호호...! 먼저 가겠어요!"
그녀는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천우는 싱긋 웃었다. 이번 길에 초초를 동행했다. 명랑하고 꾀가 많은 초초와는 서로 의기가 잘 투합 되었다. 그래서 그녀를 서동으로 분장시켜 데려 온 것이었다.
그의 목적지는 남해였다. 남해의 어느 신비한 섬이었으며, 그 곳을 가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낙화군방원은 그 동안 문을 닫기로 하였으며 그는 그 동안에 후일을 철저히 안배해 두었다. 군방원주이자 황금대총의 제사장인 그에게 그는 후사를 부탁해 두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다녀오기로 했다.
제사장을 생각하면 그는 그토록 공교로운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새삼 놀라왔다.
'만리숙부(萬里叔父)... 그를 그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님께서는 그 분의 얘기를 하셨다. 아버님 다음으로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것은 바로 만리숙부라고......'만리숙부?
그럼 제사장이 그의 숙부였단 말인가?
천우는 생각에 잠겨 어느덧 주막 앞까지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공자님! 이리로 오세요!"
활기찬 초초의 음성에 그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막은 멀리서 보기보다 꽤 규모가 컸다. 뒤채에 객원까지 딸려 있는 것으로 도상의 행객들을 위해 차려진 곳으로 자리도 꽤 많은 편이었다.
이곳은 호남성(湖南省)의 장사(長沙)를 조금 지난 곳으로 계속 남하하면 형산으로 이르는 관도뿐이었다.
"이놈! 너는 뱃속에 거지라도 꿰차고 있느냐?"
천우는 초초가 이미 천연덕스럽게 걸터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호통 쳤다.
"헤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고 그랬어요! 공자님도 어서 드세요. 이곳의 소면은 모양은 신통찮은데 맛은 기가 막혀요.“
천우는 초초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점원이 바로 와 물었다.
"헤헤... 공자님께선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본 주점에는 중원에서 나는 산해진미를 골고루 갖추고 있으며 손님들의 다양한 취향에 따라.......“
천우는 손을 흔들어 그의 수다를 막았다.
"시원한 술이나 가져오게."
점원은 머쓱해져 물러났다. 이때 주점 안을 둘러보던 천우는 시선이 구석진 자리에 머무르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낮부터 인사불성이 되다니.......'
천우의 시선이 구석 자리에 가 닿았다.
한 명의 남삼을 입은 삼십대 청년이 식탁 위에 온통 십여 개나 되는 술병을 늘어 놓은 채 취해 엎드려 있었다.
그 정도면 항우장사라 해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우는 주위로 눈길을 돌렸다.
주점 안에는 이십여 명의 손님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무더위에 길을 강행군할 수 없어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해서 들른 자들이었다.
장사꾼 차림의 상인 몇 무리와 별 특징이 없는 여행자들이었다.
천우는 눈썹을 꿈틀했다. 취해 엎어진 청년의 옆자리에는 세 명의 험상궂게 생긴 중년인들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림인들로 보였는데 그들은 계속 청년을 향해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탐욕에 찬 눈빛이었다. 천우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훌륭한 검이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곯아떨어진 남삼청년의 의자 옆, 한 자루의 검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는데 고색(古色) 창연한 것이 예사로운 검이 아닌 것이었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검을 노리고 있군.'
아니나 다를까? 세 명의 중년인 중 쥐 눈을 한 자가 슬며시 일어서더니 남삼청년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좌중을 살피며 접근했다. 그리고 재빠른 수법으로 검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무림인에게 보검은 탐욕의 대상이다. 그자는 벌써부터 그 검을 노린 듯했다.
천우는 내심 뇌까렸다.
'재미있게 됐군. 보아하니 남삼인의 무공도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말야.'그는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마침 점원이 술을 날라 왔으므로 그는 술을 따른 후 손가락에 술을 찍었다. 처음의 중년인은 막 검자루를 낚아채려는 참이었다. 허나 남삼인은 그것을 까맣게 모른 채 엎드려 있었다.
그때였다.
천우는 손가락을 슬쩍 퉁겼다.
물방울이 마치 암기라도 되는 양 날아갔다. 그것은 물방울에 내공진기를 실어 암기처럼 날리는 수법이었다. 물방울은 마치 단단한 한 자루의 비수처럼 중년인의 양곡혈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억!"
고통스런 비명이 들렸다. 중년인은 느닷없이 손목 부위에 강렬한 통증이 오자 그만 손목을 움켜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그는 몸의 중심을 잃고 식탁에 쓰러졌다.
그 때문에 식탁 위에 있던 술병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이때 남삼청년은 그 소란성에 일순 취기가 달아난 듯 고개를 번쩍 치켜 들었다.
그는 중년인이 손목을 감싸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워낙 가까이 있었으므로 남삼청년의 아미는 당혹감과 의혹으로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당신 지금 뭐하는 거요?"
그는 술기운에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제법 준수했으나 술기운에 찌들어 있었고 큰 비감에 젖어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난 그저......."
중년인은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이때 느닷없이 소년의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저씨! 그가 아저씨의 검을 훔치려 했어요! 내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초초는 소란한 가운데에서도 천우의 전음을 듣고 천우가 시키는 대로 그렇게 외친 것이었다.
찰나적으로 중년인의 얼굴은 똥색이 되었고 남삼청년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졌다.
"그게 정말이오?"
그의 음성에는 무서운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쥐 눈 중년인의 얼굴엔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 아니야, 난 그저......."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초초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쳐죽일 놈아! 사람을 모함할 셈이냐? 그 따위 허튼 소리하면 이 어르신이 네 눈깔을 파... 억!
"그는 비명을 질렀다. 남삼청년이 벌떡 일어서며 그의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들려졌다.
남삼청년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네 놈은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셈이냐? 나 해대웅(海大雄)은 결코 너 같은 놈은 용서 못한다!“
순간 중년인은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그의 일행 두 명은 자리에서 벌떡 얼어섰다. 그의 명호를 듣자 좌중은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진혼검 해대웅!
남무림 일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 누가 있으랴?
바로 중원 오대검파인 형산파의 젊은 검의 귀재가 아닌가?
“해... 해대협이였구료... 끄윽... 몰라보았......."
"닥쳐!"
해대웅은 비록 술에 취한 상태였으나 그의 일격은 파괴적이었다. 그는 형산파 제이고수가 아닌가? 우람한 주먹이 중년인의 수구혈(水溝穴)에 그대로 꽂혔다.
처절한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년인은 얼굴이 묵사발이 되어 벽에 처박혔다. 그러나 해대웅은 비틀거렸다. 분기에 힘을 썼으니 워낙 만취한 상태라 그는 중심을 잃은 것이었다.
이 며칠 간 그는 괴로움과 비탄으로 일주야를 쉬지 않고 술독에만 빠져 지냈던 것이었다.
사부와 사형제 동문들의 혈겁을 뒤로 하고 혼자만 빠져 나온데 대한 죄책감으로 그는 자기비하와 절망감에 자신을 자학하고 있었다.
"흐흐흐... 그래... 형산검파가 이젠 안중에도 없다 그 말이지... 감히 진산신검을 훔치려 들다니... 오늘... 나 해대웅... 네 놈을 쳐죽여 형산검파가 그렇게 쉽게 보여주지... 끄윽...! 않음을 보여 주마.......“
갈짓자 걸음으로 그는 구석에 내동댕이 쳐져 있는 쥐눈에게 다가갔다. 형편없이 취한 걸음걸이였다.
이때 쥐눈 일행 두 명은 처음에는 겁을 먹었으나 곧 그가 만취 상태임을 깨닫자 서로 눈알을 굴리며 암습을 하려는 듯 슬금슬금 해대웅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이때 손님들은 모두 밖으로 몸을 피한 뒤였다.
천우와 초초만이 텅빈 주점 한 가운데 자리에 앉아 태연히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초초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 재미있는지 연신 싱글거리며 천우의 얼굴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흐흐... 쥐새끼 같은 놈... 너를... 죽여 주마.......“
해대웅은 쌍장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뒈져라!"
"차앗!"
등 뒤에서 일제히 두 중년인이 그를 향해 어느새 뽑았는지 두 자루의 면도를 해대웅의 명문혈(命門穴)을 향해 재빨리 날렸다.
쐐애액!
날카로운 쇠붙이가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해대웅은 술에 취해 감각 능력이 거의 소실된 상태였다.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손바닥을 칼같이 세워 쥐 눈에게 뻗어가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땅! 땅!
돌연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두 자루의 면도가 썩은 가지처럼 맥없이 부러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억!"
"누... 누구냐?“
③
다시 한 번 술방울을 퉁겨 중년인들의 면도를 부러뜨린 것은 천우였다. 그의 귀신같은 수법에 중년인들은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하하...! 본 공자는 암습 따위를 가장 싫어하는 성미요.“
평!
쥐눈 사나이는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괴성을 내질렀고 기사혈(氣舍穴)에선 선혈이 콸콸 뿜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해대웅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두 중년인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해대웅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살기가 등등했다.
"흐흐흐... 쥐새끼 같은 놈들......."
번-- 쩍!
언제 어떻게 뽑았는지 모른다. 해대웅의 손에서 축융신검이 발출되었고 찰나적으로 검왕이 번뜩인 순간 처절한 비명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두 중년인은 그가 취중에서도 이렇게 절륜한 검법을 구사할 줄은 몰랐다. 그들이 축융신검의 눈부신 검강을 느꼈을 때는 이미 그들의 머리가 바닥에 뒹군 후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들 중 한 명은 거의 본능적으로 부러진 면도를 재차 내던졌으며 그것은 해대웅의 왼쪽 쇄골 아래쪽 중부혈(中府血) 속으로 깊숙이 박혀 버렸다.
해대웅은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하더니 중심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 일련의 광경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공자님!"
초초는 쓰러진 해대웅을 바라보며 물었다.
천우는 중얼거렸다.
"이 자는 심적으로 더 큰 타격을 받은 것 같다. 우선 형산검파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야겠다. 서둘러 그를 객방으로 옮겨라.“
"알겠어요. 공자님!"
초초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점원을 손짓했다.
검소하게 꾸며진 방안.
"부끄럽소이다. 이런 추태를 부려서......."
옆구리의 상처를 흰 천으로 동여맨 해대웅은 얼굴을 붉혔다. 그는 흰 목양천이 깔려 있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천우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초초는 금창약을 챙기고 있었다.
천우는 빙긋 웃었다.
"괜찮소이다. 그보다 형장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하오만?“
해대웅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가득했다.
"은형도 알다시피 소제는 형산사람이오......."
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은공의 성함은?"
해대웅의 조심스런 물음에 천우는 담담히 말했다.
"인사가 늦었소이다. 소제는 그저 산천구경이나 하고 다니는 떠돌이 서생(書生) 천우라 합니다.“
그 말에 해대웅은 의아한 듯 물었다.
"헌데 천세형의 무공이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것은......?“
"하하... 과찬이십니다. 불초는 그저 잔재주 몇 가지를 익혔을 뿐입니다. 그것도 우연히 책을 읽다가 한 고서(古書)에서 발견한 이름 없는 무공이지요.“
"아, 그렇소이까......?"
해대웅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우에게서 귀인의 풍모를 발견하고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예의 그 어두운 신색으로 변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천세형이시니 말씀드리오... 실은 소제의 사문(師門)에 혈겁이 떨어졌소이다. 부끄럽게도 소제는 사문을 등지고 달아나는 길이오.......“
"......!"
해대웅은 수치감으로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형산에 날아든 한 개의 혈우전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형산파 고수 사십 사 명이 죽는다는 것은 형산의 멸문을 의미한다는 것과 혈우전의 살인통첩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가 풍전등화의 형산을 뒤로 하고 하산한 참담하고 절망적인 자신의 신세까지 자세하게 늘어놓았다.
해대웅은 자신을 구해준 천우에 대해 모종의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면부지의 유랑서생에게 무림인이라면 수치스러워 입 밖에 꺼내기도 싫은 이야기를 세세하게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객점에서 본 천우의 무공실력이라면 풍전등화 같은 지금의 형산파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천우는 듣고 나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혈우전이 그렇게 무섭단 말이오?"
해대웅은 탄색했다.
"남무림이 이미 혈우전의 손에 반쯤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러나 형산파로 말할 것 같으면 강호 십대명문의 하나가 아닙니까?"
"그렇소... 그러나 본문은 물론 십대파는 그 동안 허명(虛名)만 지켜왔을 뿐... 사실은 모두가 빈껍데기에 불과하오.“
"그건 어째서입니까?"
해대웅의 얼굴에는 비감의 표정이 어렸다.
"그것은... 이십 년 전의 마왕성(魔王城)과의 대전 때문이오. 그 당시 정도무림은 마왕성과 싸우기 위해 비밀 결사맹을 조직했었소. 그 당시 결사맹에 가맹한 인물은 십대문파의 정예였으며 그들은 십문의 최고기인들이었소.“
"......."
"결사맹은 현 무황(武皇)이신 단목신수 그 분을 맹주로 도합 삼백 명이었소이다. 각파의 최고 인물들로만 선발되어 명실공히 정도의 대표였소이다.“
천우는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헌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대웅의 얼굴에는 의혹이 빛이 역력했다.
"마왕성과의 싸움에는 그 분들은... 믿어지지 않게도 완전히 전멸했소이다. 그 이후 각 문파는 아직도 그 상처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분들의 죽음으로 각 문파들의 많은 최상승의 절학들이 절맥된 상태이오.“
천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단 말이오?"
"그렇소. 그 분들은 모두 돌아가셨소이다. 심지어는 시체마저 찾지 못했소.“
"그럴 수가......?"
"사실이오. 그 분들은 기습을 받았던 것이오. 마왕성의 환우겁천백팔마의 기습으로 전멸된 것이오.“
그 말에 일순 천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어린 시절 환우겁천백팔마의 유골들 사이에서 마공을 익히며 자랐다. 그런데 그들의 기습으로 결사맹이 전멸을 했다니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가슴 속에 무한한 의문의 먹구름이 덮이는 것을 느꼈다.
"결사맹 속에 첩자가 있어 사전에 정보가 누설된 것이었소...... 그 분들은 백팔마를 상대하기 위한 일종의 파해진세(破解陣勢)를 연마 중이었는데 그것이 채 삼성도 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만 역습을 당한 것이오.“
천우는 문득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백팔마의 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오?"
"그 분들이 비밀 연공하던 외방산(外方山) 홍화곡(紅花谷) 부근에서 날개 다친 한 마리 전서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전서구의 발목에 백팔마의 습격에 대한 비밀전서가 묶여 있었소.“
"그걸 누가 발견했소?"
"단목맹주이셨소. 그 분이 직접 발견하셨다고 들었소.“
천우는 문득 기소를 터뜨렸다. 무언가 기분 나쁜 구석이 있었다.
"후후후훗......! 그럼 그 당시 맹주라는 분은 무엇하고 계셨소?“
"그 분은 홍화곡으로 가던 중이셨소."
천우는 히죽 웃었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일이 너무나 공교롭군요."
해대웅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뜻이오?"
"아닙니다. 그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해대협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천우의 물음에 해대웅의 가슴 속 밑바닥에 깔려 있던 혈우전에 대한 증오가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벌써 칠 일이 지났소이다. 본문에 이미 혈겁이 닥쳤을지도 모르오. 나는 이 길로 봉황성으로 달려가 무황을 뵙겠습니다. 그 분께서는 필시 대책을 세울 것이오.“
천우는 냉소했다.
"흥! 그럴 것이라 생각하오?"
"천세형, 말씀 삼가시오. 그 분은 무림의 신과 같은 분이시오. 결코 좌시하지는 않으실 것이오.“
천우는 고개를 돌렸다.
"불초는 지옥삼겁천이 준동한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소이다. 헌데 어째서 그는 아직 이렇다 할 방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단 말이오?“
"그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실 것이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안배를 해 놓고 계실 것이 분명하오.“
해대웅은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꺾지 않았다.
천우는 아무런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듯 냉냉하게 말했다.
"그럼 가시오. 불초는 본래 무림인이 아니니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해대웅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해 주지 않는 천우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형산의 제자답게 공손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천세형은 계속 남하하실 셈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형산을 지나거든... 본문을 들러 주시지 않겠소?“
천우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심 혈우전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번 기회에 혈우전의 진면목을 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한 번 들러 보겠습니다."
"고... 고맙소."
"하하... 고맙긴... 그저 들러보는 것뿐입니다."
"만일 본문에 참화가 일어났다면... 소제의 사부님을.......“
해대웅은 자책와 울분으로 차마 그 다음 말을 하지 못했다.
천우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의협지정(義俠之情)을 느꼈다. 그는 진심으로 해대웅을 돕고 싶어졌다.
"걱정 마시오. 해대협의 사부께 일이 생겼다면 불초가 알아서 해 드리리다!“
"고맙소... 이 은혜는......."
해대웅의 강직한 얼굴에 감격이 어렸다. 그는 본래 의협심이 많고 성품이 강직한데다 무공까지 고강하여 벌써부터 차기 장문인으로 낙점되어 있었다.
천우는 내심 뇌까리고 있었다.
'이 자는 성격이 곧고 대인의 풍모를 지녔구나. 내게 있어 십대파는 숙적이다. 허나 이 자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싶은 생각은 없구나.‘
그는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사뭇 부드러운 어투였다.
"그럼 몸조리나 제대로 한 후에 떠나시오. 불초는 길을 계속 가야겠소이다.“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해대웅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어렸다. 그는 웬지 천우의 예사롭지 않은 풍모에 끌리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기약도 없이 보낸다는 것이 못내 서운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그를 남겨두고 천우와 초초는 다시 길을 떠났다.
④
긴장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공포의 밤은 계속되었다. 밤마다 찾아드는 죽음의 공포로 천하오악의 남악 형산은 완벽하게 세상과 차단된 채 서서히 멸문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중원오대검파의 하나인 형산파는 밤이 되면 죽음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을 부릅뜬 채 불귀의 몸으로 화하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적막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심장이 파열되는 듯 하다.
형산파의 문도는 도합 백 사십 팔인이었다.
비교적 다른 문파에 비해 문도 수는 적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상검파가 함부로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뜻했고 그만큼 정예고수들을 길러내는 문파임을 뜻한다.
사십사 살(四十四 殺).
혈우전에 명시된 사십 사 명을 모두 죽인다면 형산파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중심인물 사십 사 인이 죽는다면 형산파는 붕괴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남악신검 구자명은 문하제자들에게 혈우전의 살인통첩을 알리고 철저하게 대비시켰다.
그들은 검을 안고 하루 온종일을 지냈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검을 안고 잤으며 화장실을 갈 때도 검을 끼고 갔다.
그들은 반드시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다녔다. 언제 혈우전의 암습에 불귀가 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사위의 경계도 물샐틈없이 삼엄했고 그들은 오감(五感)을 극한으로 곤두세우고 있었다.
"헉!"
이대제자 화양(華陽) 이었다.
그는 측간에 들어선 순간 숨이 콱 멎었다. 측간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 사제......!"
그는 그만 넋이 나가 울부짖었다. 거꾸로 매달린 시체는 그와 한 조를 이룬 사제 관사성(關査成)이었다.
그가 측간에 간 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확인하러 왔다가 그의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관사성의 목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참으로 극악한 수법이었다.
"사제... 이럴 수가......!"
이때였다.
"허억!"
그는 경악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관사성이 돌연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크... 크윽...! 사... 사......."
화양의 얼굴이 의혹과 공포로 삽시간에 일그러졌고 마침내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두둑!
기분 나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손을 써 볼 여유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화양의 몸은 축 늘어졌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귀신도 혀를 내두를 솜씨였다.
"크크크... 스물 하나......."
스스스......!
섬뜩한 괴소와 함께 검은 인영이 측간을 유령처럼 빠져 나갔다. 알고 보니 시체의 팔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시체 뒤에 바짝 붙어 있던 혈우전의 살인마가 화양의 목뼈를 부러뜨린 것이었다.
늦은 저녁이었다.
매화신검(梅花神劍) 조자경.
그는 하루 종일 굶었다. 그래서 늦게 저녁을 들게 되었다. 그의 앞에는 사형제인 섬전비검(閃電飛劍) 석전(石田)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남악팔검(南嶽八劍)으로 불리우는 형산파의 수뇌들이었다. 장문인 남악신검과 동배였다.
조자경은 무겁게 탄식했다.
"벌써 스물 한 명이 죽었소......."
석전도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아직도 놈들의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으니.......“
석전의 안에는 숨 막히는 긴장과 얼음장같은 적막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수하들이 하나 둘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조자경은 분노가 극에 달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놈들을 발견하면... 피를 갈아 마시겠소!"
"이르다 뿐인가? 크흑... 형산파가 이 지경이 되다니... 조사님 면전에 나갈 수 없게 됨이 부끄럽다 못해 치가 떨리.......“
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젓가락으로 생선을 한 점 떼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게 뭐지......?"
새까만 구슬 같은 물건이 생선 뼈 속에서 나온 것이다. 옥빛으로 아주 정교한 가공품이었다.
조자경은 의아했다.
"글쎄... 진주가 고기 뱃속에 있을 리가......?"
석전은 구슬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건... 소뢰자(小雷子)!"
그는 공포에 질려 들고 있던 검은 구슬을 냅다 내던졌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꽈꽈꽈... 꽝!
벽력음이 들렸다.
동시에 온통 불덩이가 내실을 꽉 채웠고 천장과 벽이 날아갔다. 무서운 폭발력이었다. 대전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고 충천하는 화염이 밤하늘에 치솟았다.
섬전과 조자경, 그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다. 유골이나 살점의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크흐흐흐... 이십오... 이십육......."
어디에선가 저승사자와도 같은 음침한 웃음이 들리고 있었다.
석벽.
음양검(陰陽劍) 철생(鐵生)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는 남악팔검의 막내였다. 중년의 나이였으나 그의 검법은 오히려 남악팔검 중 중간 정도였다.
그는 지난밤 두 사형이 소뢰자(小雷子)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참혹하게 희생된 것을 알고 비분에 몸을 가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새벽이 되자 그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세수를 했다. 은대야에 받은 물은 차고 맑았다. 찬물로 얼굴을 씻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으윽...! 혈우전,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해라. 이 철생이.......‘
그는 눈을 부릅떴다. 무엇인가가 대야 속에 빠졌던 것이다. 그것은 천장으로부터 투명한 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일견 평범한 투명한 액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 한 번 닿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한 줌의 독수로 화하고 만다는 희대의 극독이었다.
'헉! 반독흑혈지주(反毒黑血 蛛)!'
그는 기겁을 하고 놀라 대야 속에 담그어져 있던 손을 빼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대야의 물은 삽시에 시커멓게 변했고 그는 손가락뼈가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으와아악!"
그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치지지직......!
그의 손끝부터 연기를 뿜으며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에 손목에서 어깨까지 시커멓게 변했다. 철생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때 머리 위 천장으로부터 잔혹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크크크... 이십구......."
"으아악!"
철생은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츠... 츳츳......!
그의 얼굴이 보기도 역겨운 흑빛이 되었다. 전신에서는 적색의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올랐고 그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더니 마침내 한 줌의 시커먼 혈수만 남고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암습이요, 가공할 독계(毒計)였다.
남악신검 구자명.
그는 눈이 충혈된 채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모두... 삼십 팔 명이 당했다고......?"
그의 앞에는 이제자 자천검(紫天劍) 진교의(陣敎義)가 온통 비분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며 부복해 있었다.
"크흐흑...!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사부... 그 놈들은 인간도 아닙니다. 유령이거나 악마.......“
"닥쳐라! 고작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단 말이냐?"
"사... 사부... 못난 제자를......."
"이제 놈들이 명시한 숫자는 여섯뿐이다. 그리고 최후의 목표는 노부가 되겠지. 노부는 결코 그냥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이... 며칠째냐?“
진교의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마지막... 십 일째입니다."
구자명의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태산도 단칼에 두 동강을 낼 듯한 태세였다.
"최후의 승부를 걸 때가 왔다. 조과(朝果)를 마친 후 제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측천대전(測天大殿)으로 모이게 해라.“
"알겠... 습니다......."
진교의는 절을 하고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엔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결의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가 나가자 구자명은 무릎에 놓여있는 애검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모두 한 자리에 있게 되면 놈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노부가 아무리 힘이 모자란다지만 놈들과 최후의 승부를 결하리라.......'그는 검을 서서히 뽑았다. 과연 벽라검은 천하의 보검이었다. 주인의 심정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검이 낮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그그긍!
애검 벽라검(碧羅劍).
지난 수십 년 간 그와 같이 숨 쉬어 온 이제는 그의 몸이 일부가 되어버린 검이었다. 명장이 수십 년에 걸쳐 연마한 것으로 쇠를 무자르듯 했다. 보검지종(寶劍之宗)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명검인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벽라신검을 뽑아든 구자명은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애검 벽라검의 검신(檢身)이 이상했다. 의당 푸르다 못해 투명해야 할 검신이 온통 시뻘겋게 피로 젖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을 부릅떴다.
'누가......!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거늘......!‘
스스스......!
더 기이한 일은 핏물이 검신의 한 곳에 모이더니 놀랍게도 살(殺)이란 글씨가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으흐흐... 우후후... 흐하하하핫... 핫핫핫핫......!“
검신의 핏빛 글씨를 들여다보던 구자명은 돌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눈에서는 광기가 흘렀으며 검을 든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신색은 극독에 중독된 듯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으하하핫... 크으흐흐흐......!"
첫댓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