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포
제9차 정기 합평회
(2016.7.07)
1. 뺑뺑이 세대- 이지원
2. 주먹에는 주먹으로 맞서다 - 백금태
3. 반추 - 신성애
4.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된 잊어버린 것들 - 이혜경
5. 노모의 텃밭 - 백명철
6. 그 - 엄옥례
수필의 자존심 한국수필문학관부설
한국에포
뺑뺑이 세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중학교 무시험 제도가 생겨났다. 당시 내가 사는 소도시에서는 그 이듬해부터 실시되어 우리 학년이 첫 대상이 되었다. 한 해 전만 해도 선배들은 일류중학교에 가기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를 했다. 실력이 모자랐거나 운이 닿지 않아 낙방하면 재수를 하든가 육학년 후배들과 학교를 한 해 더 다녀야 했다. 우리는 일명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에 갔다. 복불복이었다.
그때 고향에는 중학교가 네 곳이 있었다. 남중이 두 개, 여중이 하나, 남녀공학이 하나였다. 제도가 바뀌면서 공학이던 곳은 여중이 되었다. 하지만 그 학교에는 다들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남중과 여중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가는 곳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추첨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아침밥을 먹을 때 엄마는 뺑뺑이를 잘 돌리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갈 학교를 내 손으로 뽑는 날이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른 봄이어서인지 시린 바람에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임시로 마련된 추첨장은 먼저 온 아이들로 웅성거렸다. 선생님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줄을 섰다. 복권 당첨번호를 뽑을 때처럼 손잡이를 돌리면 통에서 번호가 적힌 공이 나왔다. 여중이 두 군데여서 확률은 반반이었다. 1번은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여중이었고 2번은 공학에서 바뀐 서 여중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1번을 뽑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내 앞에는 친구 순자가 서 있었다. 순자의 차례가 되었고, 공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바로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순자의 공을 보았다. 1번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했다. 눈을 질끈 감고 손잡이에 힘을 실어 돌렸다. 운명의 여신은 나에게 2번 학교를 선물했다. 일류중학교에 갈 만큼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데 1점 차이로 떨어진 것 처럼 억울해서 한번만 더 돌리게 해 달라고 떼라도 쓰고 싶었다.
원치 않았지만 나는 서 여중 입학생이 되었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덕을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 왜 이런 제도가 생겼는지 왈가왈부 시끄러웠지만 늘 그렇듯 큰 물살을 거스르며 살 수 없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다.
남녀공학에서 여중으로 새롭게 바뀐 학교는 의욕이 넘쳤다. ’통통학교‘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신입생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선배들은 신입생의 군기를 잡기는커녕 귀여운 동생을 보듯 했다. 우리는 마치 이 학교를 어쩔 수 없이 다닌다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녔다. 반 배치고사를 치고 나자 특별반까지 만들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순자를 만났다. 초등 6년을 붙어다니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일부러 보지 않은 것도 있었다. 무용을 하는 순자는 그 사이 키가 부쩍 자라 있었는데 학교 가는 게 썩 즐겁지가 않다고 했다. 여중의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시험도 안 보고 들어왔다며 대놓고 구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데 왠지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대도시에서는 중학교 무시험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연합고사로 바뀌었지만 우리는 시험을 쳐서 진학을 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지나칠 만큼 열성적으로 공부를 시켰다. 특히 특별반에 속해 있는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성화에 코피가 날 지경이었다. 수학 시간이 되면 쉬는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소리 높여 외워야 했고 영어 시간에는 수십 개의 단어를 외워 매일매일 쪽지시험을 쳤다.
3년 간 줄곧 담임을 맡았던 선생님은 신념이 강한 분이었다. 공부는 잘 살기 위해서 해야 하며 현명한 사람은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조회와 종례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 시간마다 하신 말씀이라 입안에서 절로 중얼거리게 되었다. 공부는 정말 잘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일까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뺑뺑이 세대인 1958년생이다. 개띠들 중에서 유독 58년 개띠들이 유명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53년에 휴전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차츰 안정을 찾아가던 58년에 출산율이 정점을 이루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이 취학연령이 되면서부터 여러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실은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했고 일부 학교는 2부제 수업을 해야만 했다. 중학교는 무시험으로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로 진학을 했기에 일류학교와 ‘핫바지학교’의 차이를 희석시켰으며, 대학을 진학할 때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모두 가장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뺑뺑이 세대가 결혼할 시기가 되자, 신혼부부들의 주택난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 해결책으로 분당과 일산에 신도시가 생겨났다.
58년생 개띠들은 평등의식이 유난히 강하다. 이것은 소위 일류 중고교를 다니지 않은 까닭에 엘리트 의식, 나아가서 권위 의식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진학을 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대단하다.
그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전사하여 남은 사람끼리 경쟁했던 윗세대를 살짝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다. 80년대에 졸업정원제로 입학이 다소 수월해진 후배들이 우리보다 조금 쉽게 대학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상대적 자부심을 가지고도 있다. 사회 여러 방면에서 전 세대와도 차별화되고 후 세대와도 차별되어 튀다 보니 '58년 개띠'라는 용어까지 생기게 되었다, 선배들이나 후배들이 들으면 뇌꼴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77학번 58년 개띠들이 그래서 별나다는 말을 듣는다.
태어날 때부터 수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생애의 중요한 시기마다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세대로 살아왔다. 파란 많은 뺑뺑이 세대 58년 개띠들이 이제 은퇴기를 맞이했다. 공부는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현명한 사람은 위험 곳에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우리는 어느새 저무는 노을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주먹에는 주먹으로 맞서다/백금태
TV에서 어느 연예인의 삶을 조명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아이가 또래 얘들한테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툭하면 그를 때리고 짓밟았다. 왜소한 아이는 대적할 힘이 없어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였다. 얼굴은 성한 날이 없이 생채기로 얼룩져 있었다. 아버지가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들아, 그 얘들한테 복수하고 싶지? 그래도 주먹에 주먹으로 복수하면 안 된다.”
아버진들 자식이 맞고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어찌 속이 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도 맞은 만큼 때려라’ 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는 살아가면서 힘든 고비도 여러 번 겪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길이 없어 상대방을 죽이고도 싶었다. 배신감에 몇 며칠을 꼼짝할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견뎌냈다.
훌륭한 음악인으로 성장한 그는 “아버지께서 주먹에는 주먹으로 맞서라는 말씀을 하셨다면 지금의 나는 어떨까? 바로 거리의 폭력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그 모습을 보며 며칠 전의 일이 걱정으로 다가왔다.
손전화가 울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우르릉 꽝꽝 천둥이 치듯 남자의 거칠고 험악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화들짝 놀란 심장이 쿵쿵 방망이질을 했다.
“그 아이가 또 때리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내리치든지 아니면 돌로 머리를 내리 찍어라 고 아들한테 말했어요.”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 콧바람을 날리며 거친 말을 봇물 터진 듯 왈칵왈칵 쏟아냈다. 뒷일은 아버지가 모두 책임질 테니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까지 했단다. 그 는 학교 다니면서 남을 때리기만 했지 맞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사람을 때린 대가로 논 서너 마지기, 황소 몇 마리 값을 지불했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내 뱉었다. 그러기에 내 자식이 다른 사람한테 맞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다 보면 맞을 수도 있고 또 때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아직 어린 열 살짜리 아이들이 무슨 악의가 있겠는가. 기분 나쁘면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고, 또 금방 풀려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깔깔거리며 어울리는 게 아이들이다.
그는 성이 좀 체로 풀리지 않는지 그 얘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느니, 그 얘 아버지를 찾아가 끝장을 내겠다느니. 학교는 물론 상부기관에 까지 찾아가겠다며 협박성 말투로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상대방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자기 말만 되풀이 하며 끔찍한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바람에 더 이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직생활 수십 년 만에 그렇게 거칠고 험악한 말을 들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전화기를 든 내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렸다. 지도를 잘못한 탓이라고 사과하며 빌었다.
그가 말하기를 자기 아들은 산만하지만 다른 얘를 때리고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요즘 부모들 중에는 집에서 보는 아이의 단면만을 전부 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말이다. 자기의 잘못은 감추고 남의 잘못만 들추어내곤 한다. 자신의 잘못은 잘못이 아닌 양 합리화로 포장할 때도 있다.
아이는 모든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였다. 선생님의 말도 귓전으로 흘러버리고 못들은 척 능청을 떨었다. 두 번, 세 번... 여러 번 다그쳐야 마지못해 듣는 척 했다. 또 아이들의 심기를 긁어놓기 일쑤였다. 밀고, 잡아당기고, 집적거리며 귀찮게 했다. 심지어 아이들을 끌어안고 뽀뽀까지 하니 기겁을 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한 번은 가만히 있는 아이의 손목을 순식간에 잡아당기는 바람에 손목이 삐어 퉁퉁 부은 적도 있었다. 점심시간, 손을 씻으려는 아이들이 수돗가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는 물장난을 하듯 낭창하게 여유를 부리며 손을 씻었다. 기다리다 못한 얘들이 빨리 하라고 다그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는 남의 화를 돋우는 재미로 살아가는 듯 했다. 요즘 그런 행동을 참고만 있을 얘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교실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날도 아이가 공중전화를 하고 있는 애 옆으로 신발주머니를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깜짝 놀란 얘는 분풀이로 앞에 가는 아이의 등을 어깨로 쳤다. 분풀이도 한 몫 거들었지만 평소 쌓인 감정을 분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광경을 먼발치에서 아버지가 봤던 것이다. 가만히 있는데 이유 없이 때렸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손뼉도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한 손만 아무리 흔들어 봐도 미미한 바람결만 느껴질 뿐 소리는 없다. 물론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그렇지만 내 자식도 손뼉을 치는 두 손 중 한 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는 여유가 필요하리라.
아이들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어른들이 주는 대로 품는다. 부모와 교사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아이들이 자라는데 거름이 된다. 영양가 많고 차진 거름은 아이들을 반듯하게 쑥쑥 키울 것이다. 하지만 오염된 거름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어떨까? 우리는 사회에서 독버섯 같은 사람들을 더러 본다. 하지만 그 사람들만을 탓할 것인가. 부모가, 교사가, 사회가 한 번 되돌아봐야 되지 않겠는가.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홧김에 나한테만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앵무새 흉내 내듯 아버지의 험한 말을 한 마디도 빼지 않고 전하는 것이었다. 아이한테 말한 것이 사실이었다. 전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죄책감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내 머릿속이 하얘진 채 할 말을 잃었다.
속이 쓰리다. 그 사람이 쏟아내던 험한 말이 아직도 명치끝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다. 자식에 대한 과보호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으리라.
‘주먹에는 주먹으로 맞서지 말라’던 아버지와는 달리 주먹도 모자라 몽둥이로 맞서라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는 아이가 위태위태해 보이는 것은 기우(杞憂)일까?
반추- 신성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출발선상에 서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음은 지나온 삶에서 멀찌기 떨어져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데 자꾸만 발목을 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뚜렷하게 이루어 놓은 것도 그렇다고 후회되는 일도 없건만 마음이 심란해지는 걸 어쩌지 못하겠다. 새 식구 둘은 외국인이니 생일상 받기는 애초에 글렀고 손수 챙겨 먹어야 할까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언니 누나로서의 삶, 아내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나. 이제 새로히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연인으로서의 삶으로 한 발짝 내딛으려 한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핏줄이라는 단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밀고 당기는 승강이가 없고 주머니 끈 풀어놓아도 조금치도 불안하지 않는 곳. 피붇이가 모여사는 서울로 서둘러 길을 나선다.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저녁으로 이른 생일 턱을 내며 촛불을 켜고 자축의 노래를 부른다. 온전히 나를 내려 놓고 흉허물없는 식구들과 세월의 무상함을 가볍게 건드리며 스스로에게 칭찬의 말을 건넨다. 한세월 건너 오느라 때로는 절뚝 거렸지만 별탈없이 여기까지 잘 왔다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코 흘리개가 장년이 되어 웃을 수 있는 건 서로를 보듬은 끈끈한 정이 한몫을 했으리라.
‘엄마 내가 태어 날 때 어땠어요.?’ 나란히 베개를 배고 수면 아래 잠겨있는 어머니의 기억을 건져올린다. ‘빨간 볼의 핏덩이부터 너는 참 순했니라. 토실하게 살 오른 때도 손을 안 타 성가시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게 본 자식이라 어찌나 살가운지.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며 모두가 좋아했느니라.’
아버지의 군용 잠바 속에서 옹알이를 하고 몸집을 키우던 꼬맹이가 어느새 무서리를 머리에 맞았다. ‘둥개 둥개 우리 딸 시집갈 때 소 잡고 돼지잡고 동네잔치 벌려야지’ 어르고 다니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도는 고향은 멀어졌다. 조만간 내려와 보리라 뒤돌아보며 떠났던 서울길이 마지막이 될줄 아버지는 몰랐으리라. 흙벽돌 집의 아랫목은 장판이 탈 만큼 따끈 따끈 언 몸을 녹여 주었는데. 탱자나무로 둘러 싸인 과수원집은 아버지에겐 성채였다.
성을 나온 아버지는 산자락의 조그마한 집에 혼자 거처하신다. 한 손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집, 납골 당이다. 호국원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마중하듯 달려와 옷깃을 파고든다. 아버지의 영정을 바라보며 새해 인사를 여쭙는다. 술 한잔에 과일, 즐기시던 커피를 올려놓고 망중한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린다. 검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눌러쓴 아버지는 그윽한 눈길로 산 아래를 굽어보시고 있다. 살아생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수많은 영령들과 이웃하고 있으니 외롭지는 않으실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노환으로 병상에서 일 년여를 계실 때에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했는데 훠이훠이 길 떠나신 아버지, 애지중지 길러주셨음에도 따뜻한 말 많이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하기 그지없다. 늦기전에 해야한다는 사랑한다는 말이 왜 그리 하기 어려운지. 입안에 뱅뱅 돌 뿐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차마 올리지 못한 말 집에 내려와 전화로 말씀드렸다. 누구보다 사랑하고 고맙고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정말 감사하다고. 몸 추스려 배꼽마당에 놀러오시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얘기했었다. 전화기 속 아버지는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마지막 가시는 날,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싸늘히 식어버린 발을 어루만지며 이제 편히 쉬시라고 말씀 올려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자리는 더욱 커지고 부모라는 자리가 끝없이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자리임을 조금은 알아가는 요즈음이다. 생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점 하나를 에워 산 동심원이 만들어낸 잔 물결일까. 흩어졌다 모이고 다시 엉키는 수많은 인연속에 불쑥 튕겨져 나온 별똥별일까. 또 다른 길에 들어선 채 무심결에 지난 날를 자꾸 되새김질하고 있다.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된 잊어버린 것들/ 이혜경
한참을 거울 앞에 붙어 있었다. 꼼꼼한 손놀림으로 분칠을 하고 화장대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빨간 립스틱까지 바른 후에 마지막으로 손이 향한 곳은 귀였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반짝이며 작은 조명 효과를 주는 귀걸이는 변신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결혼기념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근사한 레스토랑을 일찌감치 예약해 두었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여러 번에 나누어 조신하게 썰었다. 평소보다 반 옥타브 높은 톤으로 웃고 사소한 이야기에도 크게 손뼉을 치다보니 내 기분도 창문 너머의 봄 바다만큼이나 화사하게 빛이 나는 듯했다.
식사가 끝나고 남편은 볼일을 보러 가느라 혼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평소 같으면 앞뒤 재지 않고 택시를 잡았을 텐데 갑자기 걷고 싶어졌다. 지갑을 홀쭉하게 만든 비싼 밥값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부품해진 기분을 조금 더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쾌하게 씻어 주어 한 시간을 걸어도 발이 아픈 줄 몰랐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습관적으로 거울에 먼저 눈이 갔다. 한참을 걸어오느라 살짝 분홍빛이 도는 낯빛에도 불구하고 얼굴 어딘가가 허전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때문도, 고기를 먹느라 색이 날아간 입술 때문도 아니었다. 퍼즐 한 조각이 빠진 듯 얼굴이 비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귀걸이였다. 분명히 식당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귀 밑에서 달랑거렸던 귀걸이 한 짝이 사라졌다. 혹시 근처에 떨어진 것은 아닐까 발밑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자취를 감춘 귀걸이 한 짝 때문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순간에 기분이 쭈글쭈글해졌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그것도 선물로 받아서 가장 아끼는 귀걸이를 잃어버리고 나니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가 없어 1층을 눌렀다. 보통의 귀걸이보다 길이가 길고 보석 장식이 화려해 눈에 잘 띄는 모양이라서 더 늦기 전에 되돌아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첫 번째 코스부터 녹록치 않았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묵묵히 고개를 꺾고 발밑을 하나하나 훑었다. 지금껏 살면서 아파트 복도에서부터 현관까지의 거리가 이렇게 먼 줄 미처 몰랐다. 게다가 얼룩덜룩한 대리석 무늬는 잠시만 보고 있어도 눈이 어지러워져 작은 귀걸이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현관을 나와서 두 번째 코스부터는 실내에서보다 두 배로 집중력이 필요했다. 범위도 넓고 바람마저 불고 있어 어려운 코스가 분명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폴더폰처럼 몸을 접고 발아래만 두리번거리는 나를 이상한 듯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반짝거리는 것이 있다 싶으면 눈이 번쩍 뜨여 달려갔지만 작은 쇳조각이거나 과자 봉지에서 귀퉁이에서 뜯겨 나온 조각이었다.
마침내 아파트의 경계를 벗어나 아까 지나온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길은 산책을 나온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로 여백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의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작은 귀걸이를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미션이었다. 계속 발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더니 목도 아프고 블라우스는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나중에는 쭈그리고 앉다시피 해서 사방을 살폈다.
길 위에는 각양각색의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난감 총알에서부터 철사 조각, 못, 동전, 열쇠, 망가진 자전거 부속품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쓰임새도 다양했다. 분명 똑같은 길인데 아까는 어째서 하나도 보지 못하고 지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복잡한 길 위에서는 도저히 귀걸이가 내 손으로 돌아오지 못하겠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귀걸이보다 길이 만들어 놓은 그림에 더 눈이 갔다. 사람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 자전거가 그려 놓은 직선과 곡선, 보도블럭 사이를 비집고 나온 이름 모를 잡초가 어우러진 길은 한 편의 추상화였다.
한 시간 걸려서 온 길을 되돌아가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길에 시간을 쏟고도 끝내 귀걸이 한 짝은 실종 상태로 남았다. 허탕을 치고 가는 돌아가면서도 오히려 처음 귀걸이를 찾으러 나왔을 때의 안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평정을 찾았다.
그동안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린 줄도 모른 채 까맣게 잊고 살았던가. 그저 발밑의 부스러기쯤으로 생각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은 얼마나 많을까. 어린 날의 천진함, 물질적인 계산보다 가슴의 신호를 먼저 따지던 순수한 마음, 앞만 보고 종종걸음을 치느라 옆과 아래는 보지 못했던 시간들. 그에 비하면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도 내가 오늘 잃어버린 것은 한낱 작은 금속 조각일 뿐이다. 비록 귀걸이 한 짝은 잃었지만 그동안 잊고 살았던, 혹은 놓치고 지나간 것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다가오는 특별한 오후였다.
노모의 텃밭/백명철
마늘을 캐기 위해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으로 갔다. 도착하니 정오경이다. “어이쿠, 이렇게 늦게 와서 무슨 일을 하누?” 팔순의 노모가 희롱하듯 핀잔을 준다. 가볍게 웃어넘기며 텃밭으로 나가려하자 볕이 너무 뜨거우니 그만 두라며 막무가내로 막는다. 그리고는 새벽에 캔 것이라며 헛간에 늘어놓은 두어 다발의 마늘을 가리킨다. 앞으로도 새벽마다 조금씩 캘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친다. 허풍스러운 노모의 모습에 저절로 히죽이 웃음이 나온다.
마흔 대 여섯 평 정도의 텃밭은 동네 모퉁이에 있다. 집에서 걸어 십 분이 채 안되는 곳이다. 옛날, 젊은 아낙인 어머니가 부엌살림을 도맡아할 때, 할머니는 새벽마다 그 밭에 나가서 하루 밥상에 오를 찬거리를 장만해 왔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오이나 가지 등을 따 먹다가 ‘어차피 네 입으로 들어갈 터인데 하루 이틀을 못 참느냐’라는 꾸중을 받곤 했다. 지금도 간혹 텃밭 둔덕에 쪼그리고 앉으면 나풀거리는 노랑나비 흰나비들 사이로 이십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모시적삼의 할머니가 어른거린다.
오래전 IMF사태로 실직한 동생은 새 직장을 찾아 수년간 도시를 헤매다가 고개를 늘어뜨린 풀죽은 모습으로 시골집으로 들어왔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적잖은 카드빚을 지고 제수씨와 중학교 일년생 딸을 데리고 막막히 귀향을 한 셈이었다. 의기가 소침해진 동생은 그 후에도 일 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빈둥거렸다. 어머니는 “네 동생을 어찌 좀 해봐라. 당최 가슴이 벌렁거려서 잠이 안 온다.”고 하소연했지만 생활비를 조금씩 보태는 것 외엔 내게 뾰죽한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매일새벽 텃밭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른 어둑한 시간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무슨 작용을 한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동생은 포도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다. 일 년 동안 이웃의 포도밭을 임대해서 재배법을 배우더니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것 같았다. 제수씨는 시내 대형마트의 점원이 되어 메말랐던 살림에 한 줄기씩 빗물을 뿌렸다. 어머니의 표정도 점차 편안해졌다.
별 걱정거리 없이 수년이 지난 어느 해 봄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각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두통이 예사롭지 않다며 걱정을 했다. 마침 노인 한분이 한낮 땡볕아래서 들일을 하다가 급사한 사건으로 온 마을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별 일 아니라는 어머니를 강권하여 대구의 한 영상전문병원에서 뇌 사진을 찍었다. 걱정했던 대로 문제가 있었다. 꼬불꼬불하게 뻗어나간 가느다란 핏줄 사진의 한 부분에 팥알만한 혈관종이 보였다. 영상전문의는 뇌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아 보도록 권고했다. 같이 설명을 듣는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학병원의 뇌센터 예약은 삼주후로 잡혔다.
사진을 찍은 날 밤 어머니가 잠든 사이에 병원에서 받은 CD를 컴퓨터에서 재생해 보았다. 혹시 의사가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기대를 갖고서. 하지만 미로처럼 엉켜 돌아간 흰 핏줄사진의 한쪽 구석에 그것은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바라볼수록 불안스러웠다. ‘저것이 터진다면 전신이나 반신불수가 되지 않을까. 망막변성으로 눈이 어두워 집안에서만 소일하는 아버지의 충격은 얼마나 클 것인가.’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사진을 찍은 다음날 어머니는 서둘러 시골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걱정스런 동생의 눈길을 뒤로하고 새벽마다 부지런히 텃밭에 나갔다. 나는 집안에 가만 계시라고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걱정마라’는 간단한 대꾸뿐이었다. 의사의 치료도 받기 전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아 조바심이 일었지만 무엇에 홀린 듯이 무작정 대문을 나서는 노인의 고집을 아무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침햇살이 퍼져 더워지기 전에 일찍 집으로 돌아온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뇌센터 예약일이 자꾸 멀게만 느껴졌다.
심장전문의는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였다. 잔뜩 긴장해서 앉아있는 동생과 나 그리고 어머니를 앞에 두고 찬찬히 뇌사진을 살피던 의사는 우리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크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가 크게 나왔다. 어머니의 혈관종은 크기가 작아 터질 확률이 십년에 십 퍼센트 정도라며 피의 흐름을 도와주는 아스피린을 처방해 주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지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바쳤다. 나도 두 손을 모았다.
홀가분히 시골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새벽마다 텃밭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어머니께 물었다. “풀 뽑고, 상추 잎 속아내고, 풋고추도 타고…그저 그랬지 뭐.”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한 가지를 터 보탰다. “하느님과 조상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지. 끝까지 영감치송을 해야 하니까.” 순간, 한시라도 어머니가 곁에 없으면 갑갑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시에 ‘마음 놓고 나들이 한번 못하게 당신을 묶어 놓고 있는 영감’이라며 때때로 불평을 늘어놓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쇠심줄보다 질긴 부부의 연 한쪽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늙은 여인도 떠올랐다.
어머니께 텃밭은 식구들에게 먹거리 채소를 대주는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당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기도하며 위로를 받는 특별한 곳이었다. 순례자가 길을 걸으며 기도하듯 풀을 뽑거나 호미질을 하며 중얼중얼 하소연하는 곳이었다. 수년전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원매자를 한마디로 거절한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그 때 어머니는 ‘조상이 물려준 땅을 팔수 없다’고 했다.
초여름의 한낮 햇살이 이글거린다. 그간 간간히 비가 왔었지만 텃밭의 땅은 예상보다 단단하다. 동생과 둘이서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마칠 것 같았던 마늘 캐기가 두 시간 가까이 걸려 끝났다. 시원한 수박조각을 나눠먹고 늦은 오후 대구의 집으로 향하는 창밖에 텃밭이 보인다. 땅심을 제대로 받은 상추, 쑥갓이 한껏 고개를 내젖고 고추나무에는 올망졸망 풋고추가 달려있다. 그것들 속에 어머니의 중얼거림을 들어주는 조상의 영혼이, 가깝게는 할머니의 숨길이 깃들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엄옥례
동네를 지나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 그를 보자 내 심장은 가열된 압력 솥이 김을 분출하려는 순간의 상태가 되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가까스로 누르고 고개를 돌린 체 지나쳤다.
그는 처음에 남편과 나에게 형님, 형수님하며 잔정을 부렸던 사람이다. 약간은 새치름한 성격이지만 양복광고의 배우처럼 늘씬한데다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아서 그가 가는 곳 마다 여인부대가 몰려다닐 정도였다. 실패는 했지만 선거에도 몇 번 출마 했었다. 남편은 그가 선거를 치를 때 마다 음, 양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사람살이에는 언제고 예상치 않은 일이 다가오는 법, 남편에게도 뜻밖의 일이 생겨났다. 선거였다. 주변의 권유에 밤잠을 설치기를 몇 날, 결국은 마음을 굳혔다. 제2금융기관의 기관장 자리를 두고 현직에 있는 사람과 한판 승부를 겨루는 일이었다.
남편의 출마 소식에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이 그였다. 남편은 선거의 경험이 많은 그가 자신의 일처럼 앞장 서 주기에 태산에 기댄 듯 했다. 그는 남편이 미처 살피지 못하는 소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경험으로 얻은 일머리로 척척 해결했다. 둘은 서로에게 간이라도 떼어 줄 사이가 돼서 아주 긴밀한 것까지도 의논 했다.
선거판은 전쟁과도 같다. 낙선은 곧, 벼랑 위에 서는 일이기에 후보자는 표를 얻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찾는다. 선거꾼들은 이런 후보자들의 심리를 훤히 꿰고 있다. 그들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후보자의 주위를 맴돈다. 그 중에는 심복 인듯 하다가도 경쟁 후보자에게 유혹당해 상대편으로 투항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그런 부류 중에 한 사람이었다.
선거일을 단 사흘 앞두고 그가 발길을 딱, 끊었다. 경쟁 후보의 빈틈을 공약할 정보와 남편과 둘이만 알고 있던 비밀을 손에 쥐고 상대편 쪽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동시에 그와 친분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수상쩍었다. D-데이는 코앞인데 속수무책인체로 시간만 보냈다. 결국 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하고 시간이 다 지나가고 말았다.
결전의 날이 왔다. 그도 다소 수척해진 모습으로 투표장에 나타났다. 옛정을 생각해 최소한의 사람 도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며 펄떡거리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술렁이던 사람들이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였다. 정해진 순서에 의해서 남편이 먼저 소신을 발표하자 상대 후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준 정보로 멋지게 포장을 해서 치고 나왔다. 회원들이 보기에 남편은 여당의 발목을 잡는 야당의 이미지로 보였다. 점심때를 지나 시작한 선거는 밖이 어둑해 질 때야 끝이 났다. 진이 다 빠지도록 치룬 선거의 결과가 나왔다. 남편과 상대 후보의 표는 다섯 손가락으로도 셀 수 있는 차이였다. 행운의 여신은 남편의 머리에 손을 얹어주지 않았다.
지옥에 떨어지면 이럴까. 누군가 말하기를 선거는 축제같이 하라고 했는데 패한 자의 마음에는 바늘 한 알 꽂을 여유가 없었다. 동네 사람끼리 편이 갈라지고 결과에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은 두 번 다시는 못할 일이었다. 창밖에 펑펑 내리는 눈은 이긴 자에게는 축복이었을 테지만 패한 자의 마음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그가 변심하지만 않았다면 결과가 달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원망을 넘어 화로 부글거렸다.
돌이켜 보니 남편은 너무나 순진했다. 상대후보에 비해 조금 나은 깜냥을 믿었다. 재임기간 동안 이윤을 내지 못해서 배당금을 한 번도 주지 않은 기관장에게 회원들은 고개를 돌릴 거라고 판단했다.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야 된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거기에 기관장이 바뀔 거라는 선거꾼들의 달콤한 말도 그대로 믿었다. 선거에 초보인 남편에 비해 상대 후보는 몇 번이나 선거를 치룬 고수였다. 불리한 상황을 감지하고 바람 앞에 꺼져가는 등불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승부수로 그를 빼내간 것이다.
선거 후, 한 동네에 살면서도 그를 본적이 없었다. 소문으로 그의 처지를 들었다. 기관장 그늘에서 호사를 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편을 도왔던 사람이라고 기관장의 눈 밖으로 점점 밀려나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말았단다. 세상은 참, 요지경 속이다. 기어가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있고 그 위에 날아가는 사람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악몽 같았던 그 일에서 벗어나려고 고된 일을 자청했다. 힘든 일을 하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지워지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기관장의 임기가 꼬리를 보이는데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화가 솟구친다.
선각자가 이르기를, 세상에 삼나무와 소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떠오를 때면 감정이 잘 조율되지 않는다. 가슴을 쳐도 진정되지 않으면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곤 한다. 그날도 마음을 식히려고 나선 길에 그를 만난 것이다. 그를 향해 돋은 마음의 가시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