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 세상을 향한 분노는 어떻게 화해하는가?
* 본문에는 ‘쓰리 빌보드’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안보신 분들은 나중에 읽어 주세요~~
귀가길에 딸이 강간당하고 불타죽어도 범인을 못잡은 한 어머니가 폐쇄된 도로 위 방치된 세 개의 광고판에 광고를 새로 시작합니다. 광고의 내용은 딱 세줄입니다.
“내 딸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월러비 서장?”
조용하던 동네는 발칵 뒤집힙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광고판은 이해해도 세 번째 경찰서장을 언급한 것에 대해서 동네주민들이 반발하고, 경찰 서장의 ‘자칭’ 심복이자 인종차별주의자에 마마보이로 불리는 경찰 딕슨은 거칠게 나옵니다. 분노한 어머니가 시작한 광고판, 미국 미주리주 에빙에서 일어난 ‘쓰리 빌보드’는 실화인 듯 실화 아니면서도 실화같은 영화입니다.
세상을 향한 엄마의 분노는 주변과의 대화와 교류속에 무뎌져 가는데...
딸을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의 분노는 하늘을 찌릅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말리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립니다. 사람좋은 경찰서장은 밀드레드를 달래면서 사건해결에 애쓰지만 진척은 없고 자신이 시한부인생임을 압니다. 서장을 존경하면서 흑인들을 구금하고 폭행한 사고뭉치 딕슨은 밀드레드에 대한 분풀이로 광고판 사용을 허가해준 광고업자를 두들겨 패고 밀드레드 주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영화는 어쩌면 분노조절이 안되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티격태격 속에 사람좋은 경찰서장 월러비가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선(정의)과 악(불의)의 대립 속 중재자의 노력속에 사건이 해결되고 해핀엔딩이 되는 구조, 가장 무난한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전혀 다른 길로 가면서,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무난한 중재자 역할을 잘할거라 믿었던 경찰서장은 췌장암 말기, 더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권총자살을 합니다. 밀드레드의 분노와 딕슨의 상실감과 일탈은 정면충돌, 더욱 꼬여만 갑니다.
딕슨 역의 샘 록웰(오른쪽),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영화
경찰서장의 자살 이후 어느날 광고판이 불타자 밀드레드는 딕슨(혹은 경찰)이 방화한 줄 알고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집니다. 경찰서장의 자살로 망연자실한 딕슨은 광고업자를 찾아가 두들겨패고 2층에서 집어던집니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신임 경찰서장이 보고, 또 하필이면 딕슨이 경멸하는 흑인 경찰서장이라 딕슨은 바로 정직에 처해집니다. 분노한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 밤, 딕슨은 정직중이라 밤에 경찰서에 찾아와 월러비 경찰서장이 남긴 편지를 읽다가 화상을 입습니다.
경찰서 방화 용의자로 몰리지만 밀드레드는 그녀에게 온정적인 키 작은 남자(보통 난쟁이로 불리는)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고 죽은 경찰서장의 편지를 읽습니다. “밀드레드의 심정과 분노를 이해한다, 참고 기다리면 범인이 잡힐 수 있으니 희망을 갖고 기다리라”고. 그러면서 돈없는 밀드레드 대신 광고판 사용료를 대신 지불한 것을 알려주면서 광고를 계속 하라고 합니다. 밀드레드 눈가에 눈물이 어립니다.
딕슨 역시 경찰서가 불타는 날 서장의 편지를 읽습니다.
“진짜 형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니? 그건 바로 참된 사랑이야. 사랑은 우릴 차분하게 하지. 차분해지면 우린 꼭 필요한 일이 뭔지를 생각하고 찾을 수 있어.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지만 차분함은 해결할 수 있어. 너 자신을 믿고 한 번 해보렴. 넌 참 괜찮은 녀석이니까 딕슨.”
딕슨이 경찰서장의 편지에 감동을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편지보다 경찰서가 불타고 빠져 나와야 하는 상황, 딕슨은 지금껏 이미지와는 다르게 ‘침착하자’를 외치면서 화염속에서도 밀드레드 딸 사건의 사건파일을 먼저 챙깁니다. 화상을 입은 딕슨이 전신에 붕대를 두르고 병원에 입원하자 자신이 폭행해 먼저 입원해 있던 광고업자가 따듯하게 맞아줍니다. 그 순간 딕슨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자, 딕슨임을 안 광고업자 웰비는 순간 분노와 당황이 교차하지만, 잠시 후 딕슨이 마시기 편하게 오렌지 쥬스를 건네줍니다.
경찰서 방화 이후, 광고판이 경찰 아닌 전 남편이 불지른 것을 안 밀드레드는 분노 대신 더 차분해지고, 딕슨은 정직중임도 밀드레드 딸 사건용의자에게 일부러 시비를 벌여 DNA를 채취하는 등 사건해결에 적극적입니다. 사건용의자는 사건 발생당시 해외근무라는 알리바이로 용의선상에서 빠졌지만 또 다른 강간사건이 있음을 알고 밀드레드와 딕슨은 용의자를 찾아 아이다호까지 같이 떠나면서 막을 내립니다. 아이다호로 떠나면서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불지른 사람이 자기임을 밝히자 딕슨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면서 개의치 않은 표정입니다. 이에 밀드레드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이 서로 화해를, 분노조절이 안된 두 사람이 세상을 향해 화해해 가는 여정을 암시합니다.
사실 영화는 딸 잃은 밀드레드, 중년의 나이에 하급경찰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마마보이 소리를 듣는 딕슨 등 분노조절장애증후군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엄마로 나오지만, 남편은 딸 나이 비슷한 19살짜리와 동거하고 딸은 엄마와 쌍욕을 해대면서 다투는 막장 집안의 이혼녀입니다. 세상에 절망한 밀드레드, 어쩌면 딸의 죽음은 그 분노에 기름을 끼엊은 거나 마찬가지이죠. 꼴통 소리를 듣는 딕슨, 인종차별주의는 그 분노의 배출구였을 것입니다. 그 분노는 주변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특히 경찰서장의 사랑과 진정성 속에서 조금씩 무뎌지고 변화하게 됩니다.
'쓰리 빌보드'는 분노가 아닌 화해의 과정을 보여준 영화
영화는 시작하면서 지나치기 쉽지만, 아주 상징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밀드레드가 광고업자를 찾아간 순간, 광고업자 웰비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 <착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라는 책입니다. 뜬금없이 저 책이 왜 소개되는가 했더니 첵 제목 마냥 웰비가 실천하고자 했던, 딕슨을 용서한 힘이 그 책에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냥 착한 것이 아닌, 착하게 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은 따로 있음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밀드레드의 사정을 안 광고업자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광고판 사용을 허가합니다. 광고계약이 끝나고 나오는 순간 밀드레드는 뒤집혀져서 바둥바둥 거리는 창문가의 장수하늘소를 살짝 뒤집어 줍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밀드레드 답지 않는 그녀의 손길, 영화는 밀드레드 역시 매우 온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화 속 재미난 장면 역시 많습니다. 밀드레드의 분노를 제일 많이 유발한 전 남편, 딸 나이 19살짜리 여자와 동거중인데 그 동거녀를 하찮게 여기는 밀드레드 앞에서 그녀는 조곤조곤 말합니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야기한다”고... 전 남편이 광고판에 불 낸 것을 알고 포도주 병으로 내리칠려다 그 말을 듣고 밀드레드는 조용히 병을 내려 놓습니다.
영화에서는 영국 출신 감독 마틴 맥도나 특유의 미국에 대한 조롱도 많이 집어 넣습니다. 딕슨의 이유없는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구타와 고문에 대해 흑인 경찰서장을 등장시킴으로서 자연스럽게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부각합니다.
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난쟁이 왕자에서 최고 전략가로 변신, 인기를 끌고 있는 피터 딘클리지. 영화에서 분량이 더 많앗으면 하는 아쉬움이...
영화에서 반가운 인물도 등장합니다. 미국드라마로 시즌7까지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왕좌의 게임’에서 전략가로 나오는 ‘난쟁이’ 역의 피터 딘클리지, 밀드레드에 대해 적극적이면서 썸을 타는데, 영화 속 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왕좌의 게임’ 최고 전략가답게 적시에 밀드레드의 곤란한 처지를 구해주곤 하는데 분량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배역입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2009년 봉준호 감독 김혜자와 원빈이 주연한 ‘마더’라는 영화가 오버랩됩니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로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 약재상을 하면서 28살 어리버리 아들을 살피는 어머니를 그린 영화. 어리버리한 아들이 강간범으로 구속되자 아들을 구하겠다며 괴기스러우면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 사건을 풀어나가는 영화인데 김혜자 혼자 고군분투, 개연성이 많이 떨어져 아쉬움을 남긴 영화입니다. 왜 ‘마더’의 김혜자는 혼자서만 사건을 해결하려 했는지, 철저히 혼자 고립된 어머니만 남겨놓은 영화라 아쉬움이 컸던 영화인데 밀드레드 식 사건해결을 보니 그런 점이 더욱 부각됩니다.
영화를 연출하고 각본을 쓴 마틴 맥도나는 21세기 연극계의 ‘포스트 셰익스피어’라고 평해질 만큼 재능 있는 극작가이자 영화 연출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난 감독입니다. 전작인 ‘세븐 싸이코패스’(2014)도 참신하고 독특한 이야기로 블랙코메디를 자연스럽게 펼쳐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영화입니다.
상처받고 분노한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해 가는 얘기를 보니 시나리오가 워낙 좋았던 제임스 L. 브룩스 감독 잭 니컬슨과 헬렌 헌트가 열연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가 생각납니다. 매사에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 강박증세가 있는 로맨스 작가 멜빈(잭 니컬슨), 따뜻한 웨이트리스 캐롤(헬렌 헌트), 그리고 게이 화가 사이먼이 서로 뒤엉키고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변한다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 만큼 시나리오가 좋았습니다. 모처럼 실화도 아닌, 실화같은 탄탄한 시나리오의 영화를 보니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각박한 세상, 분노조절이 잘 안되는 시절, 많은 위로를 받은 영화, 아직 안보신 분들에게 강하게 추천합니다.
강박증 걸린 괴팍스러운 로맨틱 소설작가와 애 딸린 돌싱녀, 그리고 게이 화가가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변해가는 '이보다 더 좋을순 없다'의 스틸컷.
*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밀드레드 역의 프란시스 맨도맨드가, 남우조연상은 샘 록웰이 수상했습니다. 프란시스 맨도맨드는 1996년 코엔 형제의 6번째 작품 ‘파고(Fargo)’에서는 만삭의 경찰 서장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번에는 경찰서장을 괴롭힌 역으로 나와 약간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샘 록웰은 마틴 맥도나 감독의 ‘세븐 싸이코패스’에도 나왔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이언맨2’에서 스타크의 라이벌 회사 사장으로 나와 깐쪽연기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고 ‘쓰리 빌보드’ 딕슨 역으로 영화제 상이란 상은 죄다 수상했습니다. ‘난쟁이’ 역의 피터 딘클리지가 분량이 적은 것이 가장 아쉽더군요~~
* 영화가 조금 무겁고 어두워서 그랬을까요? 이번에는 화정님 니키타님 리다님 자연과님이 함께 관람했습니다. 영화모임 고정멤버(?)들이라 사진은 따로 찍지 않았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다음 영화모임은 3월 28일 수요일 프랑스 영화 '더 미드와이프'를 보고자 합니다. 시간표가 나오는대로 공지합니다.
첫댓글 이렇게 자세히 후기를 써주시면 영화를 안보고는
궁금해서 못견딥니다.
2시간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풀지않고 본 영화는
드물겁니다. 낙화님의 예리한
눈으로 초반에 나온 광고업자가 읽고 있던 책
"착한사람은 찾기 어렵다"가
뜬금없이 나왔는데 서로 디스커션중에 새롭게 생각난,이해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요즘 시대가
분노조절이 잘 안되는 세상입니다. 요사이 보는 영화들로 마음이,생활이 풍성해지는
요즘입니다. 낙화님~감사드려요.~^^
멋진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기대이상의 영화, 지하철 통로에서 같이 관람한 분들과 오랫동안 영화이야기 나눈 것도 신기하네요~~ 영화의 여운이 오래 갈 것 같은 영화... 다음 영화는 프랑스 영화~ '더 미드와이프' 어떠신가요~~
중간중간 큭^큭^큭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도 이미 저들처럼 웃고 있더라구요.
간간이 빵터지게 날리는 터프한 멘트에 오랜만에 키득키득 웃어도 보고~ 바로 반전되어 우당탕거리는 분노에 찬 주인공들의 모습에 긴장하게도 되고...
2시간 지루하지 않게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더 이상은 분노할수 없는 접점에서 화해가 무르익는 대비도 인상적이었지만 암튼 저렇게 분노에 찬 엄마는 시러요 ㅎㅎ
밀드레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초침없는 시한폭탄... 그래도 세상은 선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낍니다~ 착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오랫 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부패한 공권력을 상대로 정의를 외치며 딸을 죽인 범인을 직접 찾아내는
무거운 단편적 내용일꺼라 생각했는데,,, 주된 인물들 외에도
어설픈 인형놀이 방법을 그대로 믿는 천진무구한 서장의 어린딸들,
학교에서 거칠게 친구들을 때리는 엄마를 챙피해하는 사춘기 아들,
말을 안들으면 그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라는 늙은이의 교활한 지혜?로움을 가진 딕슨의 노모 등,
세대별 남여노소, 착함과 나쁨, 장애인, 인종차별, 분노와 화해,
인간들의 천태만상을 담은 내용이더군요
"가면서 결정하자"...는 마무리 안된 엔딩멘트가 엄청시리 폼나 오래 기억될 영화!!
덕분에 재미있는 영화 봤습니다^^
주인공들만 있는 것이 아닌 주변인들과의 관계속에서 분노를 풀어가는 방식이 신선했죠. 어느 누구도 가볍지 않은 말과 행동이 귾임없이 나오게 한 감독의 역량이 대단...
'가면서 결정하자...'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 멋진 피날레 뿐만 아니라 속편이 나오지 않나 하는 기대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