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복파정(伏波亭)
어느 날 경기도 관찰사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야외 연회의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 때는 1월 이었다 - 그는 어떤 이유로든 도시 외곽의 장소를 정했다. 직권에 의해 그는 한강둑에 있는 별장의 임시 주인이 되었다. 언제 그 소유권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인지 아니면 잔치 장소로 독특할 정도로 적합했기 때문인지, 그는 이 별장을 그 장소로 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로 그가 관할하는 관청의 건물들을 보는 즐거움을 박탈당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도(道) 관청에서 처음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오 한 시간 전에 우리는 가마를 타고 집에서 출발하여 시내를 가로질러 서대문으로 나갔는데, 그 바로 바깥에는 경기도 감영이 있다. 이 건물은 기술적인 이유로 출입문이 없지만, 편의상,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문에 최대한 가깝게 배치되었다. 그 문에 있는 두루마리로 공공건물임을 알 수 있었고, 밖에서 빈등거리고 있던 병사들이 숫자를 보면 현재 공무중임을 알 수 있다.
눈에 띄는 건물의 관문을 마치 관리처럼 통과해 우리는 바깥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한쪽 구석에 우리가 머스킷총을 쌓아 놓는 것처럼 창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타르 무기는 극동 지역에서 우리보다 다소 더 오래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무용이라기보다 전시용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 가마가 내려앉았고, 우리는 안뜰을 지나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관찰사가 있는 방까지 걸어갔다.
안쪽 방에는 처음 보는 일종의 수집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차가 바로 나왔고, 나는 그 그릇들이 전에 보았던 어떤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거칠게 만들어졌지만, 그 위에 있는 나비들과 꽃들의 색깔은 정말 아름다웠다. 알고 보니 2년 전에 만든 조선제였다. 그 이전, 수 세기 동안, 조선 도자기는 유약을 칠하든 칠하지 않든, 담백한 녹색 색조를 띄었다. 과거에는 반도의 도자기가 매우 유명했는데, 이것은 모양 대신 지금은 사라진 색이라도 되살리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는 듯 했다.
우리의 평범한 찻잔은 일본 찻잔보다 큰데, 우리 것보다 훨씬 큰 뚜껑 덮인 사발로 중국식으로 차를 마신다. 뚜껑은 오목한 면이 아래로 향하고 잔보다 약간 작아 잔에 쏙 들어가서 잔 위에 항상 얹혀 있다가 전체를 들어 올려 마실 때 약간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액체가 흘러나오는 부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 차를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 이전과 같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무지에서든 의도적이든, 이 뚜껑의 오용이 접시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극동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순수한 유럽식 발명품이다. 십중팔구, 잔과 뚜껑은 원래 함께 유럽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들이 한 쌍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잔과 뚜껑인 줄은 몰랐고, 대신 잔과 접시의 한 쌍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우리가 극동의 방법을 우리 식으로 거꾸로 생각한 것에 대해, 이번에는 극동 사람들이 칭찬을 되돌려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소박한 사회적 친목은 건물 한쪽의 작은 방에서 치러졌는데, 이런 부류의 건물이 그렇듯이 중앙은 뒤쪽만 닫힌 복도가 차지하고 있다. 작은방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비록 접대하는 이와 접대 받는 이를 포함해 우리는 네 명 밖에 안 됐지만, 입구 근처 공간에는 서 있는 하인들로 붐볐다.
직급이 높을수록 수행원들의 행렬이 길어지는데, 수행원들의 의무는 끊임없이 눈에 띄는 데 있다. 그들은 진지한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재미있는 말이 나올 때마다 큰 반응으로 킥킥거리며 마치 합창하는 듯하다.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우리는 다시 강을 향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흩어져 출발했다. 감영에서 별장까지는 도성 외곽을 2-3마일 정도 지나야 하는데, 들판에 마을들이 널려 있었다. 들판은 고지대 작물용 밭으로 한겨울이라 아름다움이 거의 없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야 집들과 극도로 고르지 못한 길뿐이었다. 바퀴 달린 물건은 전혀 없었으며, 그 원인은 길이다. 적절한 표현으로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시골의 오솔길이다. 얼어붙지 않은 곳마다 진창이었다. 짐 실은 소가 사람을 제외하고 제일 자주 눈에 띄는데, 길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들이 밟고 지나가면 약간의 온도 상승으로 길은 진창이 되었다. 소가 지나가면 진창이 되고, 같은 이유로 계속 남아있다.
약 1 마일마다 가마꾼들은 가마를 길가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나르는 사람들보다는 실린 사람들에게 거의 더 큰 안도감을 주었다. 추위와 비좁은 위치 사이에서 나는 화날 정도의 비참함, 근육무력증, 그리고 쑤시는 신경통을 겪었다. 우리가 멈추자마자 구경꾼들이 나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을 받기 위해 굳이 멈추는 곳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가는 동안, 실제로 움직이는 동안,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나를 보기 위해 가마 속으로 머리를 어지간히 들이 밀었다.
보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묘지였다. 이것들은 울타리를 친 외벽이 아니라 산에 점점이 있는 산더미들의 집합체였다. 때때로 시든 풀밭에서 석판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그런 기념물은 예외였지 규칙이 아니었다. 보통 무덤들은 나무가 없는 경사면의 풀로 덮인 표면이 둥글게 부푼 것들뿐이었다. 계곡이 아닌 산꼭대기가 그들의 터전으로 선택되었다.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모든 존경심을 가지지만, 조선인들은 결국 땅이 죽은 자보다 산 자에게 더 유용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묘지, 또는 더 적절하게 공동묘지는 산비탈을 차지한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그 위치가 어떤 미신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단지, 묘지는 주민들의 요구를 덜 방해하기 때문이다. 계곡은 도로 논밭, 주택에 필요한 곳이고, 조선의 농업 체제에서 산비탈의 가치는 우리나라에서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러므로 산비탈은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서민이 어떻게 죽은 사람을 묻을 장소를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불가사의의 일종으로 그들에게는 그 목적을 위해 산을 탈취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산의 소유는 관리계급의 특권이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개인 무덤인 특정 산을 소유한다. 다른 사람은 이 땅에 들어갈 수 없고, 이 귀족은 자신의 가족을 다른 곳에 묻을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그가 그런 개인 묘지를 소유하지 않거나, 그의 조상들의 영혼이 상황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 그들의 거처에서 불만족스러워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아닌 어떤 산을 찾아 자기 것으로 한다. 평민들이 그 때 우연히 무단으로 점유할 권리가 없다. 산이 그의 소유물이 되면 그는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관습은 종종 여러 가지 폐해를 가져 온다. 그것은 저렴하고 효과적인 토지 취득방법이다. 불행히도, 다른 귀족들의 합의하에 그 반경이 제한되어 있다.
이 외곽의 묘지를 지나 - 망자는 도성 안에 묻힐 수 없다, - 우리는 바삐 걸어, 엉성한 오두막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지나, 마침내 이 지역 조선 풍경의 특징인 강둑에 도달했다. 이 강둑에는 우리가 찾던 별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잠자는 파도의 집”이라고 불렸다. 파도는 그날 분명히 잠에 떨어져 있었다. 강물이 꽁꽁 언데다 공기가 차가워서 칸막이 안으로 급히 피했다. 방 네 귀퉁이에 각각 하나씩의 화로와, 그리고 '진'과 다르지 않은 맛의 아주독한I술'이 우리를 되살아나게 했고, 마침내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우리 발 앞에 펼쳐진 전경을 바라보았다. 바로 아래에 강이 거대한 얼음 비단뱀처럼 땅을 휘감고 있었다. 그 너머로 우리가 서울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수고를 들여 건너온 광활한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눈에 싸인 산들이 강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대답했다. 얼음 위에 흩어져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은 전형적인 네덜란드풍이었고, 이런 모습 전체를 덮는 것은 파란 색을 배경으로 하얀 뭉게구름이 끊임없이 흘러가는 하늘이었다.
그 별장은 예전에 육군 총사령관의 소유였다. 지금은 국가의 소유이며, 경기관찰사는 특권으로 별장을 사용한다. 관찰사가 특이하게 시흥(詩興)을 느꼈는지, 난간에서 강을 바라보며 영감을 받아 시를 읊었다. 그러나 현 관찰사는 새로운 명성보다는 옛 명성을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 자신이 군직에 있었기 때문에, 소유권이 바뀐 결과로 인한 군인 부족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이 이급 관직의 휘장은 앞에 묶은 가죽 띠이며, 끝에는 이중 매듭과 함께 장식술이 달렸다.
너무 추워서 오래 경치를 볼 수 없었고, 실내와 실외가 서로 다른 세계라는 사실이 적어도 한 번쯤은 아쉬웠다. 유리 대신 창호지를 바른 문은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시킨다. 하는 수 없이 화로와 술로 돌아가야 했다.
일본의 "사케”처럼 "술”은 조선에서 발효주의 총칭이며, 두 이름은 같은 물질을 의미한다. 쌀로 만든 음료로 때로는 발효, 때로는 증류하여, 종류에 따라 맥주나 위스키와 유사하다. 맛으로 보면 백포도주를 살짝 연상시키지만 특유의 향이 난다. 마찬가지로 진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그것을 무엇에 비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더 이상의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 그것은 꽤 순하나, 지금 우리에게 제공되었던 것은, 추위 때문에, 유난히 독하다. 한 가지 면에서 그것은 일본 술과 다르다. 보통 불투명하고 탁한 반면, 사케는 투명하다. 조선에도 맑은 술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더 비싸기 때문에, 그것들은 보통 쓰이지 않는다. 옛날 일본에서는 불투명했고, 그 변화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일화로 전해진다.
옛날 옛적에, 한 시동을 부엌으로 보내어 술을 더 데우게 했는데, 맛이 있으려면, 토속적인 맛을 위해서는 뜨거워야 하고, 잔치가 진행되면서 술이 끊임없이 데워져 들여오고 있다. 숯불에 목이 긴 토기 항아리에 담아 적정 온도에 이를 때까지 데운 후 도자기 병에 담아 내놓는다. 그 시동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수로 불길에 휩싸인 숯 덩어리를 술 속으로 떨어뜨렸다. 이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시동은 숯이 내려가면서 쏴 하는 소리에 경외감에 휩싸여 서 있었다. 그는 토기 입이 작아 술을 볼 수 없었고, 그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용기가 되살아났다. 결국, 그것은 커다란 숯 조각이었다. 확실히 끔찍하게 더러운 물질이었지만, 아마도, 아주 조심스럽게 따르면 모든 숯을 항아리에 남겨두고, 술만 걸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그것을 따랐을 때, 정말로 더러운 사케가 아니라, 완전히 맑고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 것을 보고 오싹했다.
더 고약하게도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그 불상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사케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그는 그것을 들고 들어와 무릎 아래를 떨며 첫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을 두려운 불안감으로 지켜보았다. 거기엔, 확실히, 물처럼 맑은 액체가 있었다.
당황한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고백하고 체벌을 받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호기심으로 그 술을 맛보고는, 술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오히려 맛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를 지은 발명가는 놀랍게도 벌을 받는 대신 칭찬을 받았고, 그 후 일부러 숯을 술잔에 떨어뜨리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숯을 모두 걸러냈다.
앉아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사색에 잠겨 술이 내 몸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음미할 때, 갑자기 얇은 칸막이 때문에 건너다 볼 수 없는 옆방에서 악단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엄청 놀랐다. 악기가 아니라 마치 내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아무도 안 볼 때 그 악단이 숨어들어 와서 이렇게 뜻밖의 방법으로 우릴 공격했다.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에,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특이한 소리가 주위를 끌었고, 노여움은 멈추었다. 내 노여움을 자조하는 의미로 사과라도 할 판이었다. 조선 음악에는 유독 애처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무한의 흔들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반적으로 그것이 듣기 좋은 소리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심스러운 상태에 있다. 나는 조선 음악에 관대해졌다. 그러나한 번의 관대함이 민감한 양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음악소리를 들으면서 무려 15분 동안 스스로를 뉘우치고 있었다. 마침 내 악단이 지쳐서 멈췄을 때, 두 명의 군용 나팔수는 같은 방식으로 느닷없이 밖에서 이중주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15분 동안 조용하다가,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저녁 식사 동안,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작은 대화중에, 가장 유쾌하지 않은 문제가 수수께끼 식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연회 주관자 나이를 맞춰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지금 조선에서는 늙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 큰 칭찬이다. 나는 다행히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사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주관자는 나이에 비해 유난히 젊어 보였고, 그의 나이에 대해서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눈대중으로 보건대 그는 가장 가엾은 예외였다.
조선인은 거의 변함없이 나이 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실은 아첨이고, 아첨의 의미가 진실로 판명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즐거움을 주려고 진실을 희생할까? 아니면, 진실을 위해 즐거움을 주는 것을 희생할까? 나는 중도를 택했고, 알고 있는 그의 나이를 추측했다. 그 설명에 모두 웃었고, 내가 원한 양보를 덮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는 넓은 뜰로 나갔다. 얼음 위를 걸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강으로 내려갔다. 물줄기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우리는 조금도 어렵지 않게 그 위에 올라섰다. 얼음은 대부분 움직이는 어부들의 무리로 덮여 있었고, 각 어부들은 구멍을 내기 위한 기구로 무장했고, 썰매를 끌었다. 고기가 물릴 때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이것을 깔고 앉았다.
이 기구는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를 집으로 나르기 위해 고안되었다. 내가 그들을 보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고기잡이로 수도에서 매일 먹는 많은 양의 생선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불운이었다. 어부들의 수로보아, 한강의 이 둑을 가득 메운 마을들의 주된 직업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있었던 곳은 강에서 가장하류에 있는 두 나루의 중간쯤으로 우리가 서울로 올 때 건넜던 나루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면서, 바로 강 외곽 중심이었다.
물 낚시와 농업 모두 연중 이 계절에는 정지 상태에 있다. 두 달 동안,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있고, 땅도 얼어 3월 중순까지 벼농사를 위해 논을 갈수 없다. 강제 휴식이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은 땔감을 도시로 운반하고, 그리고 얼음 낚시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부들은 일본에서 "코이”라고 알려진 것을 낚아채고 있었다. 얼음 밑에는 망이 쳐져 있다. 그런 다음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고, 맨 낚시 바늘이 끝에 고정된 줄을 이 구멍으로 내린다. 그런 다음 어부들은 그 물이 걸려 있는 지점 뒤쪽으로 몇 개의 구멍을 사이에 두고 시작하여 얼음 표면에서 점점 그물에 가까워질 수 있는 만큼 엄청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겁에 질린 물고기는 최대한 빨리 달아나지만 그물 때문에 도망칠 수 없고, 당황한 상태로 무심코 달려가다가 낚시 바늘에 걸려버린다. 낚시 바늘은 서로 직각인 3개의 미늘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 맨 낚시 바늘은 겨울에만 쓰이고, 여름에는 낚시를 미끼로 한다. 거부감 다음에는 유혹이 온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없이, 두 가지 방법 중 맨 낚시가 겨울철에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낚시꾼들을 제외하고, 조선인들은 얼음 위에서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가려 했고, 내가 섣부름으로 인해 넘어질까 봐 많은 걱정을 했다. 관리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특히 미끄러운 표면을 걸을 때, 몸종이 양 옆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꼭 한 쌍의 사람 목발을 짚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곳에 그대로 머물 필요가 있었지만, 이런 관습은 실제로 위험을 불러 온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권위다.
관리들이 거들먹거리면서 걸으려 할 때마다, 예의상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붙잡는다. 내가보기에, 이런 행동의 결과는, 특히 그 움직임이 빨라져 드물지 않게 달리기 정도 되면, 지체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경계를 넘어선다. 이런 식으로 서둘러서 사람 목발을 짚으려거나 이미 짚은 몇몇 불쌍한 관리들을 보면서, 지위의 무게가 꽤 많이 나간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곳의 강은 물의 민물성에 영향을 줄 만큼 조수의 영향을 받아 빙점을 낮추기 때문에 얼음의 범위와 지속 시간이 추위에 비해 처음 보기와는 많이 다르다. 이런 경우에 스케이트를 타면 안 된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이 넘친 논은 얼음 지치 기를 위한 가장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케이트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스케이트 대신 어쩔 수 없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조차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리석은 외국인의 별난 짓으로 여겨졌다. 친구들과 수행원들뿐만 아니라 별로 관심이 없는 행인들과 구경꾼들까지도 얼음 밖으로 나오라고 경고하고자 애쓰는 열성은 고집스런 오리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암탉에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앞으로 밀면서, 나는 모든 곳에서 얼음이 완벽하게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고, 맞은편 강변을 따라 설치한 거마창에 어렵지 않게 닿았다.
내가 기어서 둑을 올라갔다. 일단 둑에 오르면 돌아오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별장이 서 있는 절벽은 대부분의 조선 교외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바라보기보다는 거기를 바라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 크기는 충분했지만, 이 거리에서는 표면이 무분별한 짓밟힘으로 인해 절개된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복파정으로 다시 올라와 조선에서 가장 최근의 새로운 유행인 '저녁 식사 후 커피’를 마셨다. 우리가 난간에 앉아 있을 때, 낚시꾼들이 얼음 위로 터벅터벅 걸어올 때,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죽은 듯한 겨울 풍경을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심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 텅 빈 굉음이다. 간단한 만찬이었기 때문에, 즉 기생도 없었고 특별히 머물 이유도 없었기에, 관찰사 수행원들이 나팔을 불고 머스킷총을 정렬한 가운데 우리는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