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한자용어 | 가창자 구성 | 후렴구 | 노랫말 구성 | 곡조 구성 | 사례 |
혼자 부르기 | 독창 | 1 | 없음 | 통절구조 |
자유로움 | 어사용, 유흥요 |
따라 부르기 |
반복창 |
1→1, 1→다 |
없음 |
뒷소리가 앞소리 반복 |
앞뒤 같음 |
구미 모심는소리(경북0315), 해녀노젓는소리(제주0204) |
1→다 |
없음 |
뒷소리가 앞소리 반복 |
앞뒤 약간 다름 |
포천 논매는소리-메나리(경기0803) | ||
이어받아 부르기 | 계승창? | 1→다 | 없음 | 앞소리 전체를 발전시킴 | 앞뒤 다름 | 신안 논매는소리(전남0811) |
1→다 | 없음 | 앞소리 뒷부분을 발전시킴 | 앞뒤 다름 | 신안 밤달애노래(전남1001) | ||
어울려 부르기 | 협(協)창? | 패+패 | 없음 | 가사 거의 없음 | 앞뒤 같으나 엇갈림 | 목도소리(강원0201) |
메기고 받기 | 선후창 | 1→1 | 있음 | 후렴구 추임새 정도 | 앞뒤 다름 | 나주 물푸는소리(전남0509) |
1→다 | 있음 | 일정한 후렴구 | 앞뒤 다름 | 상사소리 등 | ||
1→다 |
있음 |
앞소리에 비해 긴 후렴구 |
앞뒤 다름 |
고흥 논매고오는소리-질가락(전남0204) | ||
1→다 |
있음 |
메기는소리에 후렴이 짜여들어감 | 앞뒤 다름 |
황도 고기푸는소리(충남1109), 인천 줄꼬는소리(경기0421) | ||
1→다 |
있음 |
두가지 후렴구 |
높고 낮은 후렴 |
진도 모찌는소리(전남1808), 장성 나무등짐소리(전남1409) | ||
1(돌림)→다 | 있음 | 일정한 후렴구 | 앞뒤 다름 | 진도아리랑(전남1909) | ||
패→패 |
있음 |
일정한 후렴구 |
앞뒤 다름 |
곡성 논매는소리-방애타령(전남0304) | ||
주고 받기 | 대(對)창? | 1→1, 1→다 | 없음 | 댓구 | 동일 반복 | 등지소리(경남0401), 미나리 |
1→1, 1→다 |
없음 |
문답식 |
동일 반복 |
음성 동아따기노래(충북0335), 어디까지갔나(강원0716) | ||
번갈아 부르기 |
교(交)창 |
1:1 |
없음 |
독립적, 각자 연속 |
동일 반복 |
제주 맷돌질소리(제주0108), 해녀노젓는소리(일부) |
패:패 |
없음 |
독립적, 완결형 |
동일 반복 |
곡성 논매는소리-늦은방개1(전남0305) | ||
패:패 |
있음 |
독립적, 완결형 |
동일 반복 |
곡성 논매는소리-늦은방개2(전남0307), 논산 상여소리-짝소리(충남0304) | ||
돌아가며 부르기 | 환(環)창? | 1→1→1… | 있음 | 독립적, 완결형 | 동일 반복 | 어랑타령(강원0116) |
1→1→1… | 없음 | 독립적, 완결형 | 동일 반복 | 아라리(강원0922), 가거도산다이(전남0912) | ||
나눠 부르기 |
분(分)창? |
5패 |
없음 |
메기는+지르는+받는+매는+맺는소리 | 연결 |
포천 논매는소리-메나리(경기0805) |
3패(2패) |
있음 |
후렴구 나눠 부름 |
반복적 연결 |
해남 논매는소리-만벌소리(전남1814) | ||
뒷구절 함께 부르기 | 선입후제창 |
1+다 |
없음 |
합해서 완결 |
연결 |
양양 논매는소리-오독떼기(강원0517) |
오늘은 민요 중에서도 농사와 관계있는 농요(農謠)를 통해서 민요의 광범위한 배경을 이루던 농촌공동체(農村共同體)문화의 한자락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 모습을 유지하던 농촌공동체사회는 집단적인 공동노동의 필요성에 기반한 자연마을 단위의 사회조직으로서, 노동 뿐아니라 생활양식, 관습, 정서, 신앙의 모든 면에서 구성원의 삶을 좌우하는 틀이었다.
공동체사회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공동노동의 필요성이었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공동노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벼농사의 경우 모내기 전에 논을 갈고 고르는 일까지는 혼자 또는 가족의 힘으로 할 수 있었지만, 모내기나 논매기 때가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해 집단으로 공동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공동노동을 수행하는 조직이 보통 '두레'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농지규모가 클수록 본격적인 두레를 조직해 공동으로 농삿일을 했고, 규모가 적으면 '품앗이'라고 해서 이웃의 몇몇 집이 일손을 모아 돌아가며 일을 해주기도 했다. 마을에 따라서는 두레가 항시적인 조직으로서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수도 있었다. 두레패에는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고 규율도 엄해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벌을 가하곤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어른들의 두레패인 '대동패'와 소년들의 두레패인 '소동패'가 따로 구성되는 수도 있었는데, 이 경우 소동패에서는 서당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엔 전남 여천군의 '현천 소동패놀이'라는 민속놀이를 통해 이런 풍습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모내기는 짧은 시기에 많은 일손이 집중되는 일이었다. 모내기 하는 날이면 두레패는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쓴 커다란 농기(農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들로 나가, 논두렁에 도착한 다음에도 풍물을 한바탕 친 다음 깃발을 세워놓고 일을 시작했다. 조선후기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모내기(이앙법移秧法)는 모판에서 한뼘쯤 자란 모를 뽑아 무논에 옮겨 심는 과정으로, 아침나절에는 모판에서 모를 뽑고 오전 새참무렵부터는 모를 심었다. 일꾼들이 모판에서 모를 찌는 동안 논에서는 선일꾼이 소를 몰아 써레질을 한다. 이 때 일꾼들은 잠자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모판에서 모를 뽑아 묶어내면서 하는 노래가 <모찌는소리>, 모를 심으면서 하는 노래가 <모심는소리>다. 전남 영암군 서호면 태백리 백운동마을에서 부르던 모심는소리 한곡을 보자.
@ 에헤 에에여루 상사뒤요
1
에헤 에에여루 상사뒤요
2
여그도 숨그고 저그도 숨거서
방고르게 숨거를 보세
3
저건네 동산을 돌아를 보니
떴다 보아라 밥바구리가 떴네
얼른 빨리 숨거서 밥을 묵자구나
4
잘도 헌다 잘도 헌다
우리 농군들 잘도나 한다
5
어떻게 하여 이 농사가 잘 되아서
부귀 부귀로 잘 살거나
에헤 에에여루 상사뒤요
6
청사초롱에 불 밝혀 들고
잊었든 낭군을 다시 새로 보세
7
떴다 보아라 모폭이 떴네
손구락이 꾸부러지도록
손에 심을 줘서 쿡쿡 숨그세
모내기 현장의 모습과 일꾼들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노래다. 앞소리꾼의 사설 내용이 다양하다. 사설2는 일꾼들의 일손을 재촉하는 소리. '방고르게' 심으란 말은 가로 세로로 줄을 잘 맞춰서 심으라는 말이다. 앞소리꾼은 소리를 메길 뿐만 아니라 일을 지휘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래서 노련한 일꾼이라야 앞소리꾼 노릇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재촉만 한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먹을 때는 먹고 쉴 때는 쉬어야 한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일꾼들이 이제나 저제나 밥이 나오기를 기다릴 무렵, 앞소리꾼은 저 멀리 논두렁 끝을 주목하다가 쥔아줌마가 밥바구리를 이고 나오는 기색이 보이면 옳다꾸나 하고 일꾼들에게 소리를 통해 귀뜸을 해준다(사설3). 일하다 먹는 밥만큼 맛있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말하지 않아도 일꾼들은 일손을 재게 놀릴 터이다. 밥바구리가 도착하기까지 앞소리꾼이 몇마디를 더 메기는데, 일꾼들이 어찌나 모를 잘 심는지 칭찬이 절로 나오는가 하면(사설4), 과연 이리 해서 농사가 잘 돼 부자가 될 것인가- 하는 희망 섞인 전망을 해보기도 하고(사설5), 상투적이긴 하지만 남녀간의 애정 이야기를 슬쩍 비춰 주의를 딴 데로 돌려보기도 하다가(사설6), 마음 바쁜 일꾼들이 아무렇게나 꽂아 둥둥 떠버린 모포기를 발견하고는 얼른 지휘자의 위치로 돌아가 '손가락이 구부러지도록 꾹꾹 잘 심으라' 당부한다(사설7). 앞소리꾼이 '떴다 보아라'고 해서 밥바구리가 떴다는 얘기로만 여기던 일꾼들은 밥바구리가 아니라 모포기가 떴다는 말에(사설7) 이크! 하고 손에 힘을 주어 마지막 몇폭의 모를 심는다.
이처럼 노래를 통해서 옛날 모내기철의 정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앞소리꾼은 일을 하지 않고 소리만 메기면서 일을 지휘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위 마을에서는 앞소리꾼이 꽹가리를 치면서 소리를 메기고 또 한사람은 북을 쳐주었다고 하니 두명이나 일손을 놓았던 셈이다. 제대로 된 두레패에서는 이렇듯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오히려 능률이 올랐다는 얘기다. 경기,충청,호남의 평야지대에서는 흔히 이렇게 두레패가 형성되고 노래와 일의 역할 분담도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경상도지역에서는 모내기를 할 때 앞소리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어울려 모를 심으면서 소리를 했다. 그래서 가창방식도 메기고 받는 선후창(先後唱)방식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교창(交唱)방식이다. 영남지역에 평야지대가 적고 산지가 많은 것이 노래의 차이를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하다가 먹을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대목도 음미하고 넘어갈 것이 많다. 모내기 하는 날은 새참이다 술참이다 해서 하루에 대여섯번을 먹고 쉬었다. 아침, 점심, 저녁 사이에 각각 새참이 나오고 또 그 사이 사이에 술참과 담배참이 있다. 일꾼들만 못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일꾼들 집의 아이들이나 지나가던 길손까지도 새참을 얻어먹곤 했으니, 여자들은 여자들 대로 하루 종일 밥이다 술이다 해서 여 나르느라고 쉴 새가 없었다. 어찌 보면 일하자고 먹는 것이 아니라 먹자고 일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모내기날 일꾼들 먹이는 일은 중요했다.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먹을 수 있을 때 먹자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을 터이고, 그래서 모내는 날은 쌀을 꾸어서라도 밥을 해먹여야 했다.
모를 심은지 20일이면 논매기를 시작한다. 논에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는 일 - 논매기 역시 한꺼번에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초벌 논매기는 벼포기만 남기고 논바닥을 온통 파엎어야 하는 일이므로 무척 고되었다. 초벌논을 매고 15일만에 두벌, 또 15일만에 세벌, 이렇게 보통 일년에 세번쯤 논을 매게 되지만, 남쪽 평야지대에서는 너댓번이나 매는 곳도 있었다. 초벌은 대개 호미로 땅을 파 엎어 잡초를 묻어 버리고, 두벌은 손으로 흙덩이를 풀어주면서 풀을 뽑고, 세벌은 그냥 슬슬 돌아다니면서 풀을 뽑는다. 삼복더위에 논매기를 시작해 세벌 맬 때가 되면 이미 입추(立秋) 처서(處暑) 무렵이라 이른 곳은 벼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논매기야말로 집단의 힘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 지금은 제초제가 무더기로 나와 농약공해를 일으키고 있지만, 30년 전만 해도 제초제란 것을 몰랐으니 사람 손으로 할 수 밖에. 오뉴월 뙤악볕 아래서 무릎을 꿇다시피 엎드려 하루 종일 땅을 파엎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왔겠는가? 땀은 흘러 눈은 따갑고 날카로운 벼포기는 팔뚝과 정강이를 사정없이 할퀴고 찌르는데 웬수같은 잡초는 왜 이렇게도 무성한가? 이럴 때야말로 소리 한 자락이 필요하다.
1
오늘도여 허허이 어허이
오늘도여 심심하고 요요한데 노랫장이나 볼러보세
(오 그렇지요)
아에헤 허어이 허허허 허어도
자고 새면 날이 날마다 우리 농군들은 논두럭재만 넘는구나
/ 세코나 아하하 마뒤여
2
저 건네라 허허이 어허이
저 건네라 막덕할멈 자네딸 잘 뒀다고 자랑을 마소
(오 그렇지요)
아에허 이허어이 허허허 허어도
하루 저녁을 데라고 자보니 한가랭이다는 오줌을 싸고 한가랭이다는 똥만 벌벌 싸네
/ 세코나 아하하 마뒤여
3
영암이라 허허이 어허이
영암이라월출산은 걸고도 명산인데
(오 그렇지요)
아에허 이 허어이 허허허 허어도
삼년 묵은 다래넌출이 인자사 색만 나네
/세코나 아하하 마뒤여
(전남 함평군 엄다면 불암리 /앞소리: 박장길)
사설만 보아서는 도무지 노래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없겠지만, 위의 논매는소리를 들어보면 맨앞에 '오늘도여–' 또는 '저 건네라–'하고 길게 빼는 부분이 압권이다. 앞소리꾼은 그 주변은 물론이요 들녘 저 편에서 논을 매던 다른 동네 사람들이 다 들리도록 목청껏 소리를 뽑아댄다. 앞소리꾼의 멋드러진 소리에 일꾼들은 '오- 그렇지요' 하고 맞장구를 치다가, 이어 재미있는 사설(2)이나 서정어린 사설(3)이 흘러나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허리아픈 줄도 모르고 땅만 파다가 한나절을 후딱 넘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소리꾼이 아닌 보통 일꾼들이라고 해서 앞소리꾼의 노래를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후렴을 받아주는 일꾼들이 판을 유지해 나가는 존재들이라 할 수도 있다. 초보 일꾼들이 아니고서야 앞소리꾼이 메기는 노래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설이 나오더라도 일꾼들은 그 때마다 또 즐거워하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의 고통을 이길 방법이 달리 없는 데다, 그 즐거움은 누가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앞소리꾼과 더불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꾼들은 전통적인 집단연행(演行)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문화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모심기나 논매기 때 말고도 농민들이 어울려 일하며 놀 수 있는 기회는 농사와 관계된 것만 해도 꽤 많았다. 세벌논매기가 얼추 끝날 무렵인 백중(百中,음력 7월보름)날에는 '호미씻이' 또는 '써레씻침'이라 해서 일꾼들이 한판 걸지게 먹고 노는 잔치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두레패가 논매기를 홀가분하게 끝마치고 풍물을 치고 마을로 행진해 들어오면서 신명나게 부르는 노래가 <풍장소리> 또는 <장원질소리>라 하는 것이다. 가수 김상국씨가 '쾌지나칭칭'이라고 불러 유명해진 경상도지역의 '칭이나칭칭'도 그럴 때 부르던 노래였다. 그런가 하면 전라북도 일부지역에서는 가을걷이 때 볏가리를 논에서 집으로 져나를 때에도 주인집에서 닭을 잡아 술상을 차려내오지 않으면 품앗이꾼들이 볏가리를 마당에 내려놓지 않았다. 볏단을 져나르면서 하는 <볏단 나르는 소리>에는 이런 정황이 잘 나타나있다.
위에 말한 민요 말고도 집단 공동노동에 따르는 농업노동요는 종류가 많다. 가을걷이 노래에도 <벼베는 소리>, <벼떠는 소리>, <벼 드리는 소리> 등이 더 있고, 위에서 말하지 않은 밭농사 노래에도 <밭가는소리>, <밭밟는소리>, <밭매는소리>, <보리타작소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직접적인 경작은 아니지만 농삿일로 분류되는 일에 따른 노래도 있다. 논에 거름으로 넣으려고 봄에 갈참나무 햇순을 꺾으면서, 또는 갈짐을 지고 내려오면서 부르는 <갈꺾는소리>, 이듬해 거름으로 쓰려고 가을에 풀을 베어다 작두로 썰면서 하는 <풀써는소리> 등이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농사의 거의 모든 일이 공동노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일을 할만한 사람이면 봄부터 가을까지 잠자는 일만 빼고는 거의 한데 어울려 살다시피 했으니 자연히 공동체문화가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을 터이다.
외국에서 민족음악학이라든가 하는 민요 관련 학문을 접해 본 이들의 말을 따르면, 도대체 우리나라처럼 집단노동요가 많은 나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방송자료실 같은 곳에서 다른 나라의 민요를 좀 들어본 바로도, 우리처럼 동네사람들이 온통 어울려 노래를 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민요는 농요의 경우 독창이 대부분이다. 아프리카나 아랍민족의 민요는 별로 들어보지 못해서 결론 내리기 뭐하지만…) 여하튼, 집단으로 부르는 민요가 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 아닌 이상, 집단노동요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우리 민요의 분명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요에 집단성이 두드러진다는 얘기는 민요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조직, 문화, 심성에도 집단성 또는 공동체성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말이 된다. 강하고 풍부한 공동체문화가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사실, 이것은 오늘날 해체되어가는 듯한 세상을 위태로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음미해 볼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농요 말고도 공동체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민요 분야가 또 있다. 장례,세시의식요가 그것이다.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는 장례의식(葬禮儀式)은 공동체성을 잘 나타내는 풍습이다. 농업노동요가 전통사회의 노동공동체적 성격을 잘 나타내는 민요라 한다면 장례의식요는 전통사회의 문화공동체적 성격을 나타내는 민요라 할 것이다. 오늘은 장례의식과 관련된 민요들을 통해 전통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살펴본다.
장례의식은 오늘날까지 그 전통적인 풍습을 유지해 오고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이다. 강원도 산골이나 전라도 해안지역을 비롯해, 대도시화 된 곳을 제외한 시골에서는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때로 거리가 멀어 상여가 아닌 차량으로 운구를 한다 하더라도 무덤을 다질 때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하는 수가 많다. 심지어는 공동묘지에서도 무덤을 다지기 위해 인근 주민들을 불러다 소리에 맞추어 무덤을 다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집에 초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상을 하고 일손을 돕는 것이 기본이다. 빈소를 만들어 문상객을 맞이하고 장지를 정해 산역을 하는 일은 가족의 힘만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도 상여소리나 달구소리를 잘 메기는 소리꾼은 자기 마을의 장례 뿐 아니라 인근 마을의 장례에도 초청을 받을 경우 모든 일을 제치고 가 소리를 메겨주는 것이 도리로 돼 있다.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일은 관습이 엄격하기 마련이어서 장례의식은 오랜 세월 동안 심한 변화 없이 전통을 유지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시신을 장지로 모시는 날까지는 동네사람들이 초상집에 모여 밤을 새우게 되는데, 이와 관련해 전라남도 진도, 신안지역의 아주 특이한 밤샘 풍습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도 밤샘을 할 적에 상두꾼들이 초경 이경 삼경 등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빈 상여를 메고 집안을 돌면서 운상연습 겸 놀이를 벌이거나 동네를 한바퀴 돌면서 친척집들을 찾아다니며 돈이나 술담배 따위를 거두는 '대돋움'이란 풍습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진도나 신안 사람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소리꾼, 재담꾼, 북잽이들이 나와 판을 벌여 노래와 춤과 촌극으로 문상객들과 상주들을 웃기곤 했던 것이다. 진도에서는 이를 '다시래기'라 하고 신안 비금도에서는 '밤달애'라고 했다. '다시래기'란 '다시 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고 '밤달애'란 '밤을 샌다'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해석이 있다. 먼저, 진도의 다시래기노래의 일부분.
<개타령>
개개개 개개야 기개개 개개야
기개기개 기개 개개 개개
서방님 무그대 평안이 가리오
오냐 나는 간다 너는 잘 있거라
이제나 가시면 어느 시절에 오리오
언제 올 줄을 나는 모르겄네
아이고 답답 아이고 답답 서런 정아
차마 서러 못 살으겄네
요놈의 노릇을 어찌 어찌 살까
앞냇가 버드나무 백포장 둘러치고
뒷냇가 버드나무 청포장 둘러치고
양유청청 버들속에 홀로 앉어서 우는 새는
임이 죽은 넋인가 날만 보면은 설리설리 운다
노승 노승 일어를 나게 노승 노승 일어를 나게
시살봉창 해 비쳤네 잠든 노승 일어를 나소
<사당패노래>
이히야- 헤헤헤 헤-야 여리히- 어허허허로고나야
아무리야 허허어도 니가 내로고나
사당 마누라 미선을 들고
마느라 머리끝에다가 법단 댕기만 디레 부려라
허라뒤야 어리씨구나 저리씨구나 방헤가 네로고나
장칼을 쑥 빼 보니 할절에 없는 용천에 검이로고나
허라뒤야 어리씨구나 저리씨구나 방헤가 네로고나
진도에서도 노래 잘하기로 이름난 조공례할머니가 부르던 다시래기노래다. 다시래기패가 '봉사놀이'라 하는 연극적인 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 한다. 다시래기도 자꾸만 하다 보니 일정한 곡목이 정착된 것이다. 이런 노래들을 하면서 공연을 벌이면 무료하게 밤샘을 하던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고, 상주들마저도 잠시 슬픔을 잊고 구경을 하거나 아예 공연마당에 나서서 노래라도 한마디 하게 되었다
상주가 무슨 노래를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나, 진도의 장례풍습에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특이한 면이 있다. 진도사람들은 누가 죽었다고 해서 마냥 눈물만 흘리고 슬퍼하지는 않는다. 남보다 일찍 죽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만 아니라면 대개 호상(好喪)으로 분류되고, 이럴 경우 동네 사람들은 초상집에서 즐겁게 놀아 줌으로써 망인의 넋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밤샘할 때도 그렇거니와 상여가 나갈 때에도 이곳 사람들은 점잖게 요령만 흔들고 가는 게 아니라 풍물패가 앞장서서 풍물을 울리며 상여를 인도하는가 하면, 상여가 동네 마당을 떠나기 직전에는 상주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돈까지 질러주면서 풍물패의 디스코가락에 맞춰 한바탕 신명나는 춤판을 벌이려 애를 쓰는 것이다.
신안의 <밤달애노래>는 진도 다시래기노래보다 노랫말이 훨씬 더 사당패노래답다. 신안군 비금도 죽림리 상암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밤달애노래 일부분.
정월 대보름날 액맥이 연이 떴네 떠
이월 한식날 수조구 대가리 떴네 떠
삼월 삼질날 연자 새끼가 떴네 떠
사월 초파일날 관등불이 떴네 떠
오월 단오날 춘향이 추천이 떴네 떠
유월 유두날 개떡 바구리 떴네 떠
저렇게 둥덩실 높이만 떴고나 헤에야 헤에
높이만 떴네 높이만 떴네
저렇게 둥덩실 높이만 떴고나 헤에야 헤에
어따 저놈의 가스낙년아
머리만 긁적 말고 밥 차라라야
밥솥에 이가 떨어져서 굼실 감실 한고나 헤에야 헤에
굼실 감실 한다 굼실 감실 한다
밥솥에 이가 떨어져서 굼실 감실 한고나 헤에야 헤에
어드로 가자고 날 조르냐
어드로 가자고 날 조르냐야
서천에 개주 개주도로 술뱅 장사 갈고나 헤에야 헤에
술뱅 장사 가세 술뱅 장사 가세
서천에 개주 개주도로 술뱅 장사 갈고나 헤에야 헤에
<매화타령>
원수년에 감장시
오지나 말고서 갈것이제
참새같은 씨어마니
열쇠만 차고서 요분질 간다 아이고 매화로고나
에야라 디야라 나헤야 에이 열레
사랑도 매화로고나
아랫집 큰애기 거동 보소
아랫집 큰애기 거동 보소
물 또라 하믄 불 떠오고
불 또라 하믄 물 떠오고
그란다고 나무란께
정지 문턱에 썩 올라서서
아랫집 총각아 날 데려 가거라 아이고 매화로고나
에야라 디야라 나헤야 에이 열레
사랑도 매화로고나
실제로 들어보면 곡조도 대단히 화려하거니와, 노래 가사만 보아도 실제로 옛날 사당패들이 불렀음직 한 노래다. 그런데 사당패란 이조 후기에 생활이 궁핍해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유랑하며 연희를 팔던 집단이라 하지 않았던가!? 유랑연희패의 노래가 어떻게 초상집에서 밤샘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정착을 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오래 전에 사당패가 진도나 신안지방의 이런 섬으로 들어와 연희를 선보였던 것이 사람들에게 전수돼 이런 밤샘노래로 정착된 것일까? 아니면 사당패들이 나중에 그곳으로 들어와 눌러 살면서 노래를 주민들에게 전수시킨 것일까?
상식적으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점잖게 장례를 치루던 동네에 어느날 사당패가 들어와 화려한 춤과 노래를 보여주고 갔다 해서 장례풍습이 갑자기 경박스럽게 바뀔 수가 있을까? 남사당패가 이 동네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설사 이 노래 자체는 사당패로부터 배운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노래를 받아들여 장례 때 밤샘노래로 부르게 된 것은 원래부터 이 동네의 장례풍습이 그와 비슷했기 때문식이었다는 얘기다. 주목할 것은, 신안 비금도 주민들이 '남사당패'란 이름으로 초상집에서 밤샘 연희를 벌이던 사람들의 존재를 증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말하는 남사당패란 우리 생각처럼 떠돌이집단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다가 마을에 일이 생길 때마다 모여 연희를 벌이는 '상주공연패'였다고 하는 것이다. 70이 넘은 비금도 할머니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이 남사당패가 소고를 들고 떼지어 춤을 추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에 주목하는 것은, 유랑연희패로만 알려진 사당패 또는 남사당패가 이런 마을공연패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장례의식과 관련해서 길게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나 할 것이 많다. 장례식날 상여를 메고 나가 장지에 가서 무덤을 다지는 하루동안 동네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다른 일은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장례일에 매달린다. 동네 사람들은 이웃의 장례식에 참여함으로써 이웃간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는 기회를 갖는다. 민요를 통해서도 장례의식의 이러한 공동체적 측면을 엿볼 수 있거니와, 여기서는 흔한 상여소리나 달구소리 말고 봉분의 흙을 퍼올리면서 하는 흔치 않은 노래를 통해 그러한 측면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북제주군 애월음 납읍리 <진토굿 파는 소리>.
@이야호
이야호
잠깐 하면은 향원님네덜 어서어서덜 마치고 거들거령 나려가봅시다
매일 이런일이 잇는게 아니고 어서어서덜 하옵소서
월출동경에 달 솟아옵네다 어서덜 하옵소서
따비질하매 지치건 교대교대덜 하멍덜 향원님네 어서덜 하옵소서
일락서산에 해는도 일모가 뒙네다 어서덜 하옵소서
향원님네 부지런히 어서어서 마치면 갈때는 술한잔씩 더드리겟수다
히어 어서어서나 부지런히덜 하옵소서
향원님네 열몫이만도 진토를 나르면 어서어서 마치고 가옵시다
일심하면은 삼십분내에 마치고 거들거령 나려갑시다
수만석도 모다들면 가볍는 솔기웨다
'진토'란 봉분을 만들 흙이고 '진토굿'이란 진토를 파는 구덩이를 말한다. 한쪽에서 삽의 원시적인 형태인 따비로 흙을 일구면 그것을 가래로 퍼서 옮겨 분묘를 만든다. 그런데 이 노래 사설을 보면 죽은 이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 같은 것은 전혀 볼 수가 없고 다만 함께 일하는 동네 사람들에 대한 배려만이 눈에 뛴다. 해는 기울고 어두워 오는데 어서들 하고 내려가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말한다. 매일 이런 일이 있는게 아니고 어쩌다 생기는 일이니 괴로워 말고 힘을 모아 일을 하자고 타이른다. 이 노래는 손발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매우 느린 노래다. 따라서, 노래를 하는 것 자체가 노동요로서의 성격보다는 의식적 요소가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노랫말은 또 그와 관계없이 공동체의 울타리를 아우르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맨 끝의 '수만석도 모다들면 가볍는 솔기웨다'라는 노랫말이 장례식의 공동체적 성격을 잘 나타낸다. '수만석 되는 돌도 힘을 모아 들면 가벼운 법입니다'
(월간 '살림')(3)/최상일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세노야'에 관한 글과 반박문이 실렸다. 우리가 잘 아는 '세노야'가 실은 일본말이라는 미디어언어연구소 강재형의 글에 대해, '세노야'를 쓴 고은 시인이 일종의 반박문을 실은 것이다.
나는 강재형 소장에게 '세노야'가 일본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바 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의 반박문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반박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궤변에 가까운 반박문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은 시인의 글에 반박하는 글을 써서 한겨레에 보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그 글을 싣는다. 먼저 두 사람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람.
* 강재형 소장의 글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7528.html
* 고은 시인의 반박문: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5584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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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노야’는 일본말이 확실하다
2012년 11월 1일자 한겨레신문 ‘왜냐면’에 실린 고은 시인의 ‘‘세노야’에 대해서‘라는 글을 읽었다. 10월 26일자 ’말글살이‘에 실린 강재형 미디어언어연구소장의 글에 대한 답글이었다. 본인의 시에 우리말이 아닌 ’세노야‘라는 일본말이 들어있다는 지적에 대해 고은 시인은 “이것은 반박문이 아니다”라고 글을 시작했지만, 결론은 거의 반박문에 가깝다. 나는 강재형 소장에게 ’세노야‘라는 민요에 대한 고증을 해준 사람으로서, 고은 시인의 답글에 잘못된 점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세노야’는 일본의 멸치잡잇배에서 그물을 당길 때 뱃사람들이 부르던 민요 후렴구의 일부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MBC가 남해안 일대에서 취재한 한국민요대전 자료도 충분하거니와, 내가 경남 고성에서 취재한 어느 소리꾼의 증언으로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고성의 그 소리꾼 어르신은 농사꾼이었지만 품팔이를 위해 당시 해안에 진출했던 일본 멸치잡잇배를 탔고, 조업을 하면서 일본 어부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멸치잡이는 여럿이 합심해야 하는 일이기에 동작을 맞추기 위해 노래가 필요했다. ‘세노야’는 멸치가 잡힌 그물을 배 위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부르던 노래의 일부다.
일본의 멸치잡잇배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남해안에 대거 진출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멸치잡잇배보다 훨씬 크고 어로방식이 다른 어선이었다. 일본에 가까운 부산 앞바다에서부터 서쪽으로 남해, 여천, 완도에 이르기까지, 일본 멸치잡잇배가 남긴 흔적은 바닷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일본식 뱃노래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일본에 가까운 동쪽에는 일본식 뱃노래의 영향이 강한 반면, 서쪽으로 갈수록 그 영향이 줄어들고 우리 민요의 모습이 살아난다. 이는 곧 일제 강점기에 특정한 상황에서 일본의 민요가 우리 민요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 강점기가 36년이나 계속되었던 만큼, 우리 민요에 일본말이 삽입되는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요 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말에 어떤 외래어가 얼마나 섞여 들어가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될수록 외래어 대신 우리말을 쓰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일찍이 대중에게 익숙한 ‘세노야’라는 말이 일본말이라는 것을 뒤늦게라도 알았다면, 우리 모두의 무지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교훈으로 삼는 것이 옳다.
그런 면에서, 고은 시인이 ‘세노야’에 대해 내놓은 변명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는 '세노야'가 어쩌면 고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말일지도 모른다든가, 한일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고대 해상언어 또는 국제어일지도 모르니 '세노야'가 일본말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검증되기 어려운 고대 언어를 들먹이면서 눈 앞의 진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일본사람들이 어쩌면 모두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일지도 모르고, 일본말이 어쩌면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말일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세노야'가 고대 한국에서 건너간 말이라면 왜 일본에만 그 말이 남아있고 본토인 한국에는 남아있지 않는가? 우리말 갈래사전을 포함한 어떤 한글사전을 찾아봐도 '세노야'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고, 그 비슷한 말조차 올라 있지 않다.
고은 시인은 자신의 반박문에서도 ‘세노야’가 '일본 큐슈지방의 어부가'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이 남해에서 들었던 '세노야'라는 말이 실은 일본말이었다는 것을 오래 전에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여태까지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없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이 잘못 알고 쓴 시 한 편이 유명한 대중가요가 되고,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되고, 주점이나 미용실의 상호가 되고, 다른 시인의 시집 제목(곽재구 시인의 '서울 세노야')에도 쓰이고, 어느 신문사에서 펴낸 '민족의 노래'로 뽑히기도 하는데 말이다.
‘세노야’가 일본 뱃노래의 후렴구라는 것은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본과 한국은 인종이나 언어구조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비슷한 점이 많지만, 민요를 포함한 전통음악은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일본 민요의 음계와 리듬과 시김새는 우리 민요와는 매우 다른 반면, 동남아시아의 민요와 비슷한 점이 많다. 우리말이나 우리 민요에 일본말이 남아있는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근대사의 산물이지, 고대 문화 교류의 결과가 아니다. 잘못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지식과 문화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
(한겨레에 보냈던 글을 나중에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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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라디오 <최상일의 민속기행> 2007.10.21 방송 / 경남 고성 소리꾼 천의생 어르신의 '세노야' 관련 증언 부분
“살아나온 기 고생이라. 6남맨데 먹을게 있나. 요샌 우유도 있고... 그 땐 아-들 여섯을 키우다 보니 고생이라. 배도 탔고..”
“오구도리배. 걸망. 멜치가 걸리는 거는 걸망배. 오구도리는 그물로 놔가지고 싸가지고 땡기는 거고.. 방맹이로 돌려서 그물이 갱기 올라온다 아이가. 메루치. 그게 일본놈 배 아이가? "
“배가 여러 대야. 뗏마, 운반선, 배가 많아. 맘메(큰배), 사까메, 뗏마. 뗏마는 그물 논 데 대니면서 돌보는 일 하고. 잡으면 운반선(에 실어서) 팔러 간다.”
“뱃노래는? 세노야, 세노야 하면서, 그물 댕길 때는 세노야, 세노야, 세노야… 그물 댕길 때.”
“세노야는 그물을 손으로 땡기면서 한다고. 로꾸리로 감아 올리고 다 땡긴 다음에 들어서서 '세노야'를 하지. 그물을 졸이면서. '세노야' 그게 조선사람 소리가 아니지. 그게 일본놈 소리라. 배 탄 사람은 알지. 본인이 직접 했으니까네.”/최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