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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 제30권 / 춘명일사(春明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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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인으로서 중국 기록에 실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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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양(高颺)의 딸은 후위(後魏)의 문소황후(文昭皇后)가 되어 세종(世宗)을 낳았고, 낙랑 왕씨(樂浪王氏)는 후주(後周)의 문덕황후(文德皇后)가 되어 태조(太祖)를 낳았다. 발해의 대환(大奐)의 딸은 금(金)나라 폐제(廢帝)의 원비(元妃)가 되었고, 행주(幸州) 기철(奇轍)의 누이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었으며, 조선의 청주(淸州) 한확(韓確)의 누이는 명나라 태조의 비가 되었고, 안동(安東) 권영균(權永均)의 딸은 성조(成祖)의 비가 되었다. 낙랑 왕씨의 딸은 서성군공(西城郡公) 풍랑(馮朗)에게 시집가서 후위의 문명황후(文明皇后)를 낳았고, 설승충(薛承沖)의 딸 요(瑤)는 당나라 정승 곽원진(郭元振)의 첩이 되었다. 이는 모두 역사책에 보이는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안정 (역) | 2000
東媛載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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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高颺女。爲後魏文昭皇后。生世宗。樂浪王氏。爲後周文德皇后。生太祖。㴾海大夏女。爲金廢帝元妃。幸州奇轍妹。爲元順帝皇后。我國淸州韓確妹。爲皇明太祖妃。安東權永均女。爲成祖妃。樂浪王氏女。適西城郡公馮朗。生後魏
文明皇后。薛承冲女瑤。爲唐相郭元振妾。是皆見於史傳者也。
한확(韓確) (1403~1456)
조선 태종(太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로, 성종(成宗)의 외할아버지. 누이가 명(明) 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가 되어 명 나라의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임명되고, 1455년(세조 1) 좌의정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됨.
세종 6년(1424) 영락제가 죽자 명(明)나라 조정(朝廷)에서는 여비(麗妃) 한씨(인수대비의 고모)를 순장(殉葬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살아있는 신하나 종을 함께 묻던 일)했다. 경암(敬菴)은 그 참혹(慘酷)함을 크게 탓하며 “허수아비도 순장(殉葬) 당하면 후손(後孫)이 끊어진다는 걸 어린애도 다 아는데 궁녀(宮女) 15명과 생매장(生埋葬)하다니 따를 수가 없다. 대국(大國) 것이라도 배울 바가 못 된다”고 장탄식(長歎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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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제70권 / 인물고(人物考) 4 후비(后妃), 명원(名媛), 중관(中官)
명나라 태조(太祖)의 비(妃) 한씨(韓氏) [후비(后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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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한씨(韓氏)는 태조의 비로, 딸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았는데, 함산공주는 홍무(洪武) 27년(1394, 태조3)에 윤청(尹淸)에게 시집갔다. 《명사(明史)》
살펴보건대, 한씨의 딸이 중국으로 들어간 것을 국사(國史)나 가승(家乘)에서 상고해 보면 홍무 연간에 선발되어 들어간 자가 없는바, 태조의 비 한씨는 어느 때에 선발에 뽑혔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오직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두 딸이 모두 명나라 조정의 선발에 뽑혔는데, 한 딸은 영락(永樂) 15년(1417, 태종17) 정유에 역관(譯官) 원민생(元閔生)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선발하는 데 뽑혀 태종(太宗)의 여비(麗妃) -비(妃)의 호칭을 여비라고 한 것은 그 뜻이 확실하지가 않으나, 혹 고려 사람이므로 여비라고 칭한 것인 듯하다.- 가 되었으며, 또 한 딸은 선덕(宣德) 3년(1428, 세종10) 무신에 흠차(欽差) 창성(昌盛) 등이 와서 또다시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선발하는 데 뽑혀 선종의 공신부인(恭愼夫人)이 되었다.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여비의 오라비인 한확(韓確)은 19세 때 태종이 불러 경사(京師)에 갔는데, 태종이 특별히 총애하면서 우대해 광록 소경(光祿少卿)을 제수하였다. 우리 세종이 선위(禪位)를 받자, 한확이 책봉 정사(冊封正使)가 되어 왔는데, 황제의 칙지로 인해 마침내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않았으며, 부사(副使)로 왔던 유천(劉泉)이 복명(復命)하였다. 그 뒤에 다시 또 소명(召命)을 받고 경사로 갔는데, 인종(仁宗)의 딸에게 장가들이려 하자,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장가들지 않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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