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읍 낙산1리 나루터에 주둔 중이던 미군들이 강건너 노석1리를 향해 대포 등을 무차별 발사해 여동생 등 12명이 죽고 나도 부상했어"(박준기·70).
"폭격기 10여대가 소름 끼치는 굉음을 내며 날아와 폭탄 수백개를 폭우처럼 퍼부어 동네 전체가 불바다가 됐어. 집안에 있던 사람과 하천변에 천막 치고 있던 피난민들이 꼼짝없이 당했지"(이종록·78·구미 형곡동).
"그날(1951년 2월4일) 오전 9시쯤 정찰기 한대가 마을을 돌고 사라진 뒤 폭격기 4대가 30여분간 폭탄을 쏟아붓고 기관총을 쏘아대 집이 불타는 등 마을이 아수라장으로 변했지. 죽은 사람을 장례식도 없이 그냥 땅에 묻었다가 20년 전 일부 이장할 때 보니 유골 입 속에 포탄 파편이 그대로 들어 있었어"(김범상·73·의성 금성면 못동골).
양민 학살 사건이 다시 이슈가 되자 피해 주민들은 다시 그날의 악몽을 떠올렸다.의성 금성면 못동골 사람들은 설날이 다가오면 설을 이틀 앞두고 있던 1951년 2월4일에 있었던 일에 다시 몸서리친다.
온 마을이 차례 준비에 바쁠 즈음 오전 9시쯤 정찰기 한대가 저공으로 마을 상공을 몇차례 선회하고 간 20분쯤 뒤 폭격기 4대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 17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당하고 온 마을이 불바다가 됐다는 것.
집 마당에서 설에 쓸 두부를 만들려 콩을 찧다 변을 당할 뻔 했다는 정필순(71) 할머니는 "폭탄 구덩이에 시아버지와 함께 빠졌다가 빠져나왔으나 시아버지는 눈도 감지 못하고 숨져 있었다"고 했다. 유족 대표인 정진수(72)씨는 "그 사건으로 일대에서는 '못동골 몰살났다/ 운곡은 운좋다/ 만천은 만행(萬幸)이다'는 노래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못동골 사건은 우리 지형을 잘모르는 미군의 오폭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인근 마을에 인민군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폭격하려다가 지형이 비슷한 못동골을 오폭했다는 것.
1950년 8월16일 미군기에 폭격 당한 포항 흥해읍 북송리도 못동골과 비슷한 경우였다. 마을 사람들은 징집갔다 돌아온 젊은이를 축하하려 돼지를 잡던 중 20여대의 미군기 폭격을 당했다. 사람들이 도망가자 미군기는 기총사격까지 해 결국 32명이 숨졌다.
정운봉(72)씨는 "인민군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날 화장실에 있던 중 우리 집이 폭격 당했다"며, "팔을 잃은 형수가 그날 밤 숨지고 어머니도 사망했다"고 말했다. 이 폭격 역시 산너머 마을 인민군 정보에 따라 출격했던 미군이 지형이 비슷한 이곳을 오폭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같은 날 흥해읍 흥안리 일대도 무차별 폭격으로 19명이 사망했다.
영주 봉현면 노좌리, 예천 산성·진평리는 1951년 1월19일 하룻 동안 동시에 폭격 당해 20명 이상이 숨졌다. 당시 17살이었다는 황창호(68·노좌2리)씨는 "미군 전투기 4대가 봉현면 5개 마을을 폭격, 노좌 1동에서 4명, 노좌2동 3명, 노좌3동 3명, 대촌2동 6명, 유전1동 7명 등 23명이 숨졌다"고 말했다.
진영주(78)씨는 "두살난 맏딸을 업고 있던 모친이 포탄에 맞아 둘 다 곧 숨졌다"고 했고, 김대규(70·유전1동)씨는 "당숙 2명, 종숙모, 6촌 여동생 등 친척 4명이 목숨을 잃고 이웃 3명도 숨졌다"고 말했다. 또 권오걸(80·노좌1동)씨는 "폭격 일주일 뒤 미군 1개 소대가 마을에 와 인민군들을 잡아야 한다며 화염방사기로 6개 마을 집 500여 채를 불 태웠다"고 말했다.
권오성(77)씨는 "폭격 나흘 전 인민군 6지대 대원 일부가 봉현지서를 포위하는 등 인민군 활동이 있은 후 폭격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 폭격 후 미군기는 예천 보문면 산성리 및 감천면 진평리도 폭격했다. 안순모(77·산성리) 조규진(72)씨 등은 "미군기 6대가 마을에 휘발유를 뿌린 뒤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마구 쏴 산성리에서는 50여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8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진평리에서는 26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했다"고 말했다. 양민학살 진상규명회 일을 맡고 있는 안태기(55)씨는 "폭격으로 조부모·동생·숙모 등 일가 친척 11명이 학살됐다"고 했다.
이 산성리 폭격은 최근 미국 문서(본지 6일자 보도)에 의해 공식 확인되기도 했다얼마 전 영국 BBC방송이 보도한 포항 여남동 송골 사건은 함포사격을 당한 경우.
1950년 음력 7월19일 2km 길이의 송골계곡에 피난 중이던 1천여명에게 영일만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3척의 군함이 30~40분간 무차별 함포 사격을 한 것. 이때 100여명이 사망했다.
여남동 희생자 유가족대책위 안인석(58) 총무는 "내 동생은 숨지고 어머니도 부상했다"며, "여남·환여·학산동 일대 10여 가구는 매년 이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구미 형곡동의 옛 이름인 사창마을과 시무실마을에서는 1950년 8월16일 미군기 8, 9대의 폭격으로 30여 가구 130여명의 주민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김왕개(작고)씨는 일가족 12명을 잃었고 이종록(78)씨도 9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잃었다.
모친을 잃었다는 김교홍(68·전 구미문화원장)씨는 "당시 마을 앞 개천에는 김천·약목·북삼 등에서 피난민이 많이 몰려와 있어서 피해가 더 컸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포항 송라면 광천리 하천에 있던 천막 피난민 300여명에게 미군 전투기가 기총사격을 가해 40여명이 숨졌고 △포항 청하면 이가리 마을에 미군기가 사격해 50여명이 숨졌다.
△김천 감천면 무안1리에선 미군기 폭격으로 4명이 죽고 집 32채가 불타 나중에 미군측이 집 지을 목재를 제공한 바 있고 △안동 풍산읍 하리 제방 피난민 수백명도 미군기가 기관포 사격을 해 20여명이 숨졌다.
△선산~구미 도로변 피난 행렬도 미군기 폭격을 받아 5, 6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의성 춘산면 금천리도 폭격을 당해 3명을 잃었다.
△고령 우곡면 달오마을에 몰려 있던 피난민들은 미군 폭격으로 30명이 몰사했고 △울진 근남면 산포리는 함포사격을 당해 4명의 사망자를 냈다.
△경주 천북면 화산리 폐광지 피난민은 미군기 기총소사로 수십명이 사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전쟁 이전인 1948년 6월8일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어민 수백명에게 미군기 12대가 폭격한 사건도 신고돼 있다.
미군은 연습 사격 중 어선을 바위로 오인해 발포했다고 해명했지만 목격자들은 정조준 사격이었다고 증언했다.
고 공두업씨(울릉 사동3리·사망)는 비행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었지만 폭격이 계속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사망자는 경찰이 14명으로 발표했지만 피해자들은 150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첫댓글 미국놈들이 대한민국 양민을 상대로 사격연습을 무자게 했단다. 나타난 기록이 이것 말고도 수도없이 많으리라... 무지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민족은 역사를 반복할 뿐... 헷!
625때 강원도쪽에 세균전을 벌린 정황도 있다고 합니다. 이 자식들 작년애 경북 칠곡군 고엽제 매립지는 어디다 검사를 한건지 증인이 그쪽이 아니라고 해도 엄한데다 검사해놓고 오리발인지.. 개새키4들.. 그쪽에 암이랑 이상한 질병들이 많이 발생햇다는 것만 봐도 보통일이 아닌데.. 에이 개새끼들.
옛날 어른들 말씀으로는 사격연습이나 재미로 한 것 같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게자스들
1948년 6월8일 독도에서 미역을 채취하던 어민 수백명에게 미군기 12대가 폭격한 사건도 신고돼 있다.
1. 미군은 연습 사격 중 어선을 바위로 오인해 발포했다고 해명했지만 목격자들은 정조준 사격이었다고 증언했다.
2. 사망자는 경찰이 14명으로 발표했지만 피해자들은 150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사악한 백정과 그 하수인들은 사실과 정반대의 아주 판이한 거짓말을 잘함을 위의 1, 2 번 내용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